《염하강철책길》
요즘 급진적으로 나가는 열화 같은 대북정책에 없어질 수도 있겠다 싶은 분단의 아픔 철조망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며, 지난날의 통한을 되돌아보고자 철책선 따라 길나섭니다. 분단의 상징이며 민족의 아픔이 얼기고 설긴 마땅히 없었어야할 철책이었지만, 휴전 이후에도 끝없이 도발해온 침략적인 북한 권력들의 변화 없는 지금으로서는 필요한 설치물이며 설사 평화적인 통일이 되더라도 존치시켜 교훈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전철5호선 송정역1번 출구 밖 중앙차선 버스정류장에서 "신세계백화점~김포 대명항" 60-3 버스로 환승 51개 정류장을 거쳐 1시간30분만에 대명항(종점)에서 하차. 여기서 좌측으로 다시 우측으로 600m거리에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 철책길' 안내판과 출발점 아취문이 있습니다. 제1코스 염화강철책길은 염화강을 끼고 철책선을 따라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집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제671함정을 민간에서 불하받아 유료전시하고 있다.
평화누리길 제1코스 들머리 앞 풍경.
평화누리길 1코스 (鹽河江 鐵柵길)
김포와 강화 사이를 가르는 염하강을 잇는 초자대교 김포 쪽 대곶항(대명港)에서 평화누리길 제1구간(염하강철책길)은 시작됩니다. 철책을 따라 오른편의 김포 강변의 평화로운 풍경과 왼편 철조망 너머 염하강과 그 건너 강화도 강변 풍경과 마니산과 봄이면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드는 고려산을 바라보며 '대명항~문수산성 남문'까지 약 15km 거리의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평화누리길 제1구간 들머리 모습입니다. 저 파고라를 들어서면서부터 내 발길은 제1코스 '염하강철책길'에서 제13코스 철원 '쇠둘레길' 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엽海峽 이다 마치 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20km이다. 밀물 때의 유속은 약 3.5m/sec이며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출지 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초소인 돈대墩臺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사적 제 225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 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 227호), 갑곶돈대(甲串墩臺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다. 염화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파고라 들머리에 들어서서 바라본 철책선과 군정찰길 풍경. 이 군사시설이 김대중 정권에 의해 모두 개방 되었다).
철조망 구멍에 사진기 렌즈를 밀어넣고 담은 염하강과 생명이 태동하는 갯벌과 강화도 강안의 풍경이다.
왼쪽은 철책 너머로 바닷물 염하강이 흐르고 오른쪽 둔덕에 빛깔도 예쁜 파랑 하늘빛 꽃을 피워낸 달개비 군락지입니다.
희망의 파란빛깔을 담아 낸 달개비 꽃잎 보기만 했을 뿐인데 가슴이 파랗게 희망으로 물이 든다.
이정표는 잘 되어 있는데 거리표시가 실제와 차이가 난다. 그래서였을까 이후로는 이정표氏는 뵐 수 있어도 거리표시는 볼 수 없다.
여기에 올린 사진들은 작품성은 없다 기록적 성격으로 담은 사진들이다.
덕포진 마을 앞 갈림길이다. 자전거코스도 있는데, 좌측 철책을 끼고 가는 길은 트레킹코스, 오른쪽 아스팔트길은 자전거통행길이다.
코스는 걷기 좋은 흙길이다. 철조망을 통해 강화도 풍경과 강물을 보다가 눈이 부시면 우측을 보면 싱그런 수림의 녹색에 바로 치유가 된다.
그늘 없는 길에 아치형하우스 모양의 터널 같은 길을 마련해 놓았다.
쉼터표시판을 보니 간단히 짧게 돌아보고 갈 수 있는 6.8km거리의 원점 회귀할 수 있는 덕포진 둘레길이 있단다.
무더운 여름 잠시나마 일사병 예방에 뜻을 담은 길이라 하겠다.
그늘을 제공해줄 넝쿨나무들이 어서 자라야 제구실을 할 수 있겠다.
德浦鎭의 砲口들이 침투해올 왜적을 대비하여 염하강안을 주시하고 있고 그 앞 쉼터에서는 순박한 아이들이 말 타기 놀이에 여념이 없는데 저편에 세 녀석 엉덩이 내놓고 응가를 한다.
보기만 해도 황홀한 빛이여 .. 알찬 곡식이 저리 아름답듯이 사람의 인품도 그러하리라~~,
《덕포진/德浦鎭》
덕진포 파수대 둔덕에서 지나온 길을 바라본 풍경.
물 건너 강화섬이니 분명 이곳은 바다가 아닌가! 이곳을 염하강이라 했던가! 물가를 보니 서해안의 갯벌이 분명하다 물길이 강을 보는 듯하여 鹽河에 江을 붙였나 보다.
《덕포진'가'포대/德浦鎭'가'砲臺》
파수대터에서 대곶항(대명港) 방면으로 본 약물터 '가'포대 전경.
약물터 가포대는 총7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다. 방향은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마주하고 있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中砲 2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 1문은 고정식 포가(砲架:포 받침대)에 걸려있는 채로 발굴되었다. 각 포에는 銘文이 음각되어 있는데 포의 무게, 화약의 용량, '同治13년(고종11년1874년)5월' 운현궁에서 제작된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발굴당시 모습
'가'포대 포진지 모습.
'가'포대 뒤에서 바라본 전경.
조선시대에 침투하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대포를 배치한 砲臺이다.
'가'포대 좌측에서 바라본 염하강가 파수대터와 '가'포대 전경.
파수대가 있던 자리의 모습이다.
파수대터에서 바라본 염하강 풍경.
파수대와 '가'포대 풍경.
《덕포진 '나'포대/德浦鎭'나'砲臺》
원둘터 '나'포대는 총5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5번째 포대에서 고종11년(1874년)에 만들어진 小砲 문과 中砲 1문이 함께 묻혀있는 채로 출토 되었다.
'나'포대에서 바라본 전방의 풍경이다.
(좌로부터 발굴 전 모습, 1980년 8월 발굴 모습, 발굴된 小砲)
砲臺의 모습, 서까래 위로 이엉이 얌전하게 얹어져 있다.
이렇게 보면 움막집 같기도 하다.
포진지가 마치 움집 형태이다.
염하강변을 따라 토성처럼 진지(砲臺)가 둘려져 있다. '나' 포대 5문이 보인다.
'나 포대 후방의 아늑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이곳에서 살고지고 싶다.
기와를 올린 3문의 砲臺도 보인다.
아까 본 움막 같은 포대와 다르게 번듯한 기와지붕의 포진지를 보는데 어찌하여 당집이 떠오를까!
서까래 위로 정연하고 산뜻하게 기와를 올렸다 작고 앙증스럽지만 마치 맞배지붕의 사당지붕을 보는 느낌도 든다.
'가'.'나'포대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다본 모습이다.
파수청터으로 가던 도중에 뒤돌아본 砲鎭地의 모습이다.
포대를 배치한 방어진 둑은 동쪽 해안 절벽의 파수대까지 이어진다.
포대 방어진 둑은 절벽 끝머리에 있는 파수대址까지 이어져 있고 파수대터와 손돌목을 지켜보듯이 그 뒤 위쪽에 손돌묘가 있다.
파수청 좌측 위로 돈대와 손돌公의 묘가 보인다. 그 너머는 절벽이고 물발이 빠르게 돌아나가는 손돌목이다.
<전체 모습>
<화덕 모습>
<석벽 유구>
손돌묘 둔덕에서 내려다본 파수청 일대 풍경.
(墩臺址와 孫乭墓)
김포에서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파천한 시기인 고종19년(1232년)음력10월20일을 손돌공의 週忌로 삼아 매년 손돌공의 묘에서 舟師 孫乭公 鎭魂祭를봉행한다.
碑銘은 다음과 같다.《舟師孫乭公之墓》
강화 광성보 용두돈대쪽을 줌으로 당겨본 풍경이다 좌측 산자락은 손돌묘 앞 파수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손돌묘 앞은 손돌목이다.
손돌목과 손돌묘를 내려서면 바로 보이는 곳은 거쳐온 덕포진 즉 들머리 대명항 방향이고, 파수청터 前 좌측 그늘진 숲으로 들어가면 문수산성 방향이다.
덕포진 순환코스와 문수산성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로 가다가 순환코스는 우측으로 갈린다.
이제까지 걸어온 뙤약볕 길과 다르게 시원한 숲길이다.
호젓하고 고요하니 저절로 몸도 마음도 여유롭고 가볍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강화도와 염하강 물결이 춤을 춘다. 가슴이 트이도록 시원하다.
철책을 따라 걸어가는 내내 답답함 보다 포근함과 친근감을 느낀다. 왜 그랬을까?
철조망 구멍으로 바라본 풍경, 넉넉한 파란 하늘에 구름 한가롭게 노닐고 강물에 배 한 척 그림에 운치를 더 하고 강가에 갈대, 더벅머리처럼 엉기고 설긴 모습 정겹고 살갑다.
철책과 나무수풀 사이로 끼어든 나, 융합되어 하나가 된다.
다만 배를 담았다. 바다 같은 강에서 그리움 같은 느낌에..
철조망을 통해서 보는 저 세상은 어떤 곳일까?
《덕포/德浦》
묘처럼 위장된 벙커이다. 사용하거나 손 본지 오래되었다.
산자락을 돌아 내려가는 중에 왕릉처럼 생긴 둥그런 섬 하나 섬 이름이 궁금하다.
비탈진 진흙길이다. 어제 내린 비로 미끄럽다.
섬 우측은 예전에는 큰 포구였을 것 같은 지형이다. 실제로 그곳에는 해병○사단 예하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비탈을 내려서보니 지형이 완연히 포구의 모습니다. 안내판에 표기되어 있던 덕포가 바로 여기인 것 같다,
덕포 마을
덕포 앞 섬 '부래섬'
《김포의 포구들》
1.섶골나루(薪洞津), 2.소평포(小坪浦, 3.읍전포(邑前浦), 4.감안포(甘岩浦), 5,운양포(雲陽浦), 6.봉성포(峯城浦), 7.전류포(顚流浦),
8.석탄포(石灘浦), 9,후평포(後坪浦), 10.가작포(柯作浦), 11.동시포(東枾浦), 12.서시포(西枾浦), 13.불지포(佛只浦), 14.마조포(麻造浦), 15.마근포(麻近浦), 16.김포포(金浦浦), 17.조강포(祖江浦), 18.교항포(橋項浦),19.돌내포(乭內浦), 20강령포(康寧浦), 21싸렴나루(米嶋津), 22.동막포(東幕浦), 23.산성나루(山城津/갑곶나루), 24.포내포(浦內浦), 25.원우포/고양포/원모루나루(遠隅浦/高陽浦), 26.쇄암포/바삭바위나루(碎岩浦), 27.덕포/신덕포/상신포(德浦/新德浦/上新浦), 28.하적암포(下赤岩浦), 29.전막/대명나루(全幕), 30어모포/어모노리포(漁毛浦/漁毛老里浦), 31.향모포(香毛浦), 32.안동포(安東浦).
덕포는 나루이기도 하였지만 강화 교동도에 있던 京畿水營 관할 군사시설인 德浦鎭이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경기수영은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다스리던 곳이며 헌종8년(1842년) 당시 덕포진은 첨사 僉使(正三品 또는 從三品)1명, 군관3명, 水軍316명, 그리고 38명의 병졸에 兵船6척이 주둔하던 상당히 큰 포구였던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현재 해병②사단 隸下 부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덕포/德浦》김포시 대곶면 신안리48번지 일원(김포시 대곶면 덕포진로 130번길 253)
덕포는 염하 부래도 안쪽에 있던 浦口이다. '地德이 좋아 선박과 사람이 모여든다.' 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가파른 언덕이 있는 포구'라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上新里 마을 이름을 따서 상신포라고도 했고 新德浦로도 불렸답니다. 예로부터 몇몇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하는 작은 포구마을로, 일제강점기에는 5가구 15명 정도의 어민이 두 척의
배로 고기잡이를 하였고 주로 숭어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잡은 숭어는 오라니장에 내다 팔았는데 오라니장은 당시김포군의 3대 시장 중 하나이자 가장 큰 시장이었다고합니다.
마을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40여년 전 경작지로 간척하기 전까지는 마을 안쪽까지 배가 들어왔었다고 합니다. 약 7가구 10여명의 어민이 7척의 꽃배로 까나리, 새우, 웅어 등을 잡았던 것이 마을 어르신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현재에는 원래의 덕포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200여 m 올라간 지;점의 군사지역 안에서 제한적으로 어로활동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덕포에서 북쪽 해안을 따라 약 1km 지점에는 바삭바위나루(쇄암포/碎岩浦)라 불리는 작은 나루가 있습니다.
덕포 앞 풍경
물위에 浮標처럼 微動도 없이 떠 있는 파란 고기잡이 배, 그냥 보고만 있는데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사무친다.
<부래도>
「신증동국여지승람」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며 '해동지도' 에서는 통진현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섬으로 표기되었다. '항무이도'라고 불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통진읍지' 기록에 의하면 縣의 남쪽 23리 지점에 위치한 項無耳島는 둘레가 4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부래도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강화와 통진의 사이를 흐르는 鹽河를 따라 한강으로 흘러들어 왔다고 하여 부래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 안의 산에는 성터도 남아 있으며 부락산, 부럼, 부럼산, 부럼섬 등이 부래도의 다른 이름이다. 병인양요(1866년)에 양현수 장군이 덕지포에서 염하를 도하할 때 강화의 관성진에서 상륙하는 전초 기지로 사용했으며, 성터가 남아 있다. 덕포는 지역이 좋아 선박과 사람들이 모여 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물길따라 침투할 수 있을 敵軍을 경계하고 막아내기 위한 철책으로 지금은 포구로서의 기능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덕포
덕포 포구와 부래도
덕포 좌측 포구
덕포 주변 철책로의 모습이다. 이 철책로를 따라가는 동안 부래도를 ⊃자 형으로 싸고 돌아 부래도의 면면을 한 바퀴돌아보는 느낌이다.
지하터널로 내려가는 느낌으로 산자락에 설치된 계단으로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다 나뭇가지 사이로 철책을 끼고 가야할 길은 내려다보니 햇볕에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나를 마주본다. 좌측으로 海兵隊 哨所가 보인다. 조망되는 도로와 軍部隊가 덕포이다.
쭉 뻗은 이 길은 250m 정도 거리이다 중간에 오두막 같은 쉼터가 있고 강가로 이어지는 철조망을 따라가면 산자락을 끼고 좌측으로 꺾인다.
《부래도 쉼터》
파란하늘아래 아직은 풋내 나는 녹색빛깔의 수수알갱이가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향해 어서 가시라고 채근한다.
콘크리트길을 외면하고 철책을 따라 흙길로 간다.
덕포 우측 포구와 부래도
가족보다는 연인과 오면 주옥같은 대화가 밀알처럼 영글지 않을까 싶다.
앞에 보이는 낮은 산자락 아래 철책 길은 좀 전에 거쳐 온 곳이다. 좌측 덕포 마을과 우측에 둥근 섬이 있고 가운데는 갈대가 무성한 모래톱섬이다.
구름도 흘러가고 강물도 흘러가고 세월도 흘러가니 나도 따라 흘러간다. 구름은 흘러가다 물이되고 강물은 바다로 가는데 내 가는 곳은 어디인가? 흙인가! 물인가 ! 하늘인가!
혼자여도 외롭지 않고 심심하지 않은 것은, 강물과 철책, 그리고 산자락이 끊임 없이 내게 조근조근 살갑기 때문이겠다.
《쇄암리/碎岩里》
〈김포군지〉지명유래편에 쇄암리에 관하여 기술한 내용은 '이 마을 서쪽 염하수로와 접한 해안은 암벽인데 잘 부스러지는
돌로 되어 있어서 그 뜻을 쇄암리(碎岩里)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고유지명은 바삭바위, 바석바위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원래 전해오는 지명 '우마니'는 이 마을의 산 모양이 '소와 말이 누운 모양'이라서 그런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마니'가 '움안 마을'의 뜻이 아닐까 싶다. 필자의 고모가 사셨던 옛 과천, 그러니까 지금의 전철4호선 선바위역 인근 산자락에 폭 싸인 마을이 있는데 마을이름을 '우마니'라고 불렀듯이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어 움 안에 사는 형국이라서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옛 쇄암리 포구, 지금은 그냥 쉼터,
비가 내리면 골짜기여서 물이 흐르거나 잠겨 보기에도 앙증맞고 재밌는 출렁다리를 놓았나보다.
덕포에서 약 1km 지점인 이곳은 바삭바위나루(쇄암포/碎岩浦)라 불리는 작은 나루였습니다. 1919년의 지도를 보면 이곳은 강화의 강성나루를 오가기 위한 나루였습니다. 이곳에는 바위에서 약수가 나오는 샘물이 있는데 만조 때는 바다에 잠겼다가 간조 때 드러나는 신기한 우물로 물이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쉬어가지 좋은 조금쯤 넓은 터다. 시간을 보니 1시 42분이다 허기가 돈다. 계획 없이 아침 맑은 하늘에 이끌려오는 바람에 아침식사도 거르고 어제 먹다 남긴 작은 군고구마 3개에 물 700㎖ 한 병 두유 두 팩이 전부다. 마련되어 있는 걸상에 앉아 고구마 2개와 두유 한 팩으로 요기를 했다 나머지는 비상식량으로 다시 베냥속에 넣고 다시 철책을 따라 길 나섭니다.
잠시 철책과 떨어져 산자락에 설치된 파고라를 통과하여 바닷가 산자락으로 오른다.
문수산성 남문까지 9.5km라고 한다. 산자락 길은 다시 철책 곁으로 다가가고 있다.
흙길이 파이는 것과 미끄러짐을 방지하고자 마포를 깔아 그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에 발바닥이 즐겁다.
산자락 길을 400m 정도 돌아 다시 철책과 만났다. 산자락 아래 논에는 벼가 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 풍경이다.
길 옆 바위들의 표면에 저승꽃이 피었다. 이끼는 바위에 있어서 피부암 같은 존재이다. 바위를 삭혀서 부서져 내리게 한다.
바위 표면이 기괴해서 다시 되돌아서서 헤아릴 수 없을 세월도 본다.
평화를 누려라 이 말씀인데, 지금 평화를 누리기 위해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일까..!?
거리표시를 보니 문수산성 남문까지 8.7km이다 시각은 12시 40분이다. 2시간이면 남문까지 갈 수 있겠지만, 3시간30분 거리라는 2코스 8km구간까지 오늘 중 마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철책 따라가는 갈대밭 길에 가을을 몰고 온 뭉게구름이 탐스럽고 아름답다.
제1코스 염하강철책길에서 가장 오밀조밀하고 재밌는 구간이 아닌가 싶다.
지난 일을 버리고 살 수 없듯이 여행에서 지나온 길 뒤돌아보는 풍경은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여행의 묘미이며 즐거움이 배가 된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다보는 풍경은 왠지 더욱 멋스럽다.
강가의 바위와 모습도 궁금하다. 멀리서 보기에 거무죽죽하니 현무암 비슷하다.
검은 바위도 벌흙도 계곡의 물이 河海로 흘러들어가며 파인 부분도 참 보기에 좋다. 갯벌 흙을 보니 염하강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그냥 염하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반대편 산자락의 풍경은 또 어떤가! 파란하늘에 구름 노닐고 그 아래 낮고 녹음 짙은 산자락이 품은 갈대 늪지에 삼태기라도 들고 들어가 물고기라도 잡아보고 싶지 않은가!
좀 높은 곳에 오르니 망원경을 설치해 놓은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강화도 어딘가에 짝지라도 있다면 찾아볼까 이도저도 아닌 계절에 고려산도 마니산도 보기에 심드렁할 것 같아 그냥 지나친다.
파란 화선지에 어찌 저리도 아름답게 구름문양을 수놓았을까? 마치 구름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둣하여 고구려 무용총의 무덤벽화를 보는 느낌도 준다. 이렇게 강안따라 굽이진 철책선 따라 아름답게 곡선이어진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에 즐거움이 넘칩니다.
춤추는 구름아래 海岸線 따라 길게 드려진 염하강철책길을 바라보는 심경은 만감이 오고간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하에 어쩌다 이런 가슴 아픈 시설을 해야만 했을까 자유민주주의와 허울뿐인 공산주의 이념이 서로 대치한 비극의 경계선 철조망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
갈색 물결을 보는데 불쑥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홍하의 골짜기' 'Red River'
1. From this valley they say you are going
We will miss your bright eyes and sweet smile
For they say you are taking the sunshine
That has brightened our path for a while.
이제 그대는 이 계곡을 떠날거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그대의 빛나는 눈동자와 환한 미소를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떠나는건 오랫동안 작은 마을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던 햇빛이 사라지는 거라고 합니다.
좌측을 보면 홍해 같은 강이요 우측을 보면 지난날에는 강가마을이라도 있었을 아늑한 갈대밭이다.
다시 구름 흘러가는 곳 철책따라 길따라 갑니다. 이 길은 마대를 깔아 놓아 걷기에 좋습니다.
문수산성까지 7.5km 이제 절반은 온 셈입니다.
경계나 철책보수를 위한 군용차량이 다니기도 하는 길인가 봅니다.
아름다운 풍경이죠? 앞에 검은 바위 하나가 구성에 一助를 하는군요.
우측으로는 바야흐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허기지고 풍경에 취하고 그렇게 비몽사몽 할 때 불쑥 나타나듯이 눈에 들어온 '쇄암리전망대쉼터' 남은 고구마 하나에 두유 하나로 채근하는 腹를 달래봅니다.
화장실건물옥상에 망원경을 설치한 전망대 생각이 나쁘지 않습니다.
쉼터 앞 풍경입니다.
산자락 숲에 외래종 넝쿨식물이 토종식물을 뒤덮고 양분을 빨아 먹고 햇빛을 차단하여 모조리 고사시키고 있습니다. 잎이 칡덩굴 잎 비슷한데 번식력이 아주 무섭습니다. 시급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좌측에 문수산이 보이건만, 문수산성 남문까지 6.2km랍니다.
하늘에선 구름이 수를 놓고 갯벌에는 물결이 뱀 같은 형태의 흔적을 남겼네
뙤약볕이 따갑게 피부를 콕콕 찔러 눈물 같은 땀을 흘리는데 딱딱하고 불쾌한 콘크리트 포장길에 발바닥은 지루하도록 길다며 연신 투정을 부린다. 구름은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가는데 이 발길은 어찌 이리 느리더냐!
옛 원머루나루에는 폐선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 사진은 쌓여 있는 쓰레기를 피해서 담은 사진입니다.
《한국수산지(1908-1911)》와 〈조선지지자료(1911)〉에 등장하는 20세기 초 김포의 포구들.
1.섶골나루(薪洞津), 2.소평포(小坪浦, 3.읍전포(邑前浦), 4.감안포(甘岩浦), 5,운양포(雲陽浦), 6.봉성포(峯城浦), 7.전류포(顚流浦),
8.석탄포(石灘浦), 9,후평포(後坪浦), 10.가작포(柯作浦), 11.동시포(東枾浦), 12.서시포(西枾浦), 13.불지포(佛只浦), 14.마조포(麻造浦), 15.마근포(麻近浦), 16.김포포(金浦浦), 17.조강포(祖江浦), 18.교항포(橋項浦),19.돌내포(乭內浦), 20강령포(康寧浦), 21싸렴나루(米嶋津), 22.동막포(東幕浦), 23.산성나루(山城津/갑곶나루), 24.포내포(浦內浦), 25.원우포/고양포/원모루나루(遠隅浦/高陽浦), 26.쇄암포/바삭바위나루(碎岩浦), 27.덕포/신덕포/상신포(德浦/新德浦/上新浦), 28.하적암포(下赤岩浦), 29.전막/대명나루(全幕), 30어모포/어모노리포(漁毛浦/漁毛老里浦), 31.향모포(香毛浦), 32.안동포(安東浦).
원머루나루에서 몇 백m 거리에 고양리 쉼터에 이릅니다.
자전거와 자동차도 다니는 아스팔트길이 얼마간 이어집니다. 그러나 어쩌다 자동차 한 두어 대가 지나 갈 뿐 한적하고 마음 지치는 길입니다.
아스팔트길에서 떨어져 다시 철책길로 들어섭니다.
무료하고 힘든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벗어나 철책을 따라가는 길은 이렇게 즐거움을 주는 예쁜 토종식물들이 반기고 친구가 되니 다시 힘이 솟습니다.
철조망 담을 끼고 걸어가건만 어떤 압박감이나 위축됨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또 한쪽으로 꾸밈없는 자연이 곁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우뚝 솟아 있는 마니산
좌측 마니산, 우측 고려산.
하얀 콘크리트 포장도로의 등장으로 철책과 호젓한 시간도 여기서 끝나고..
2.4km 거리의 콘크리트 길 무료하고 긴 여정입니다.
구름도 쉬어가는 문수산 정상과 문수산성 將臺를 줌으로 당겨본다.
좌측에는 철조망, 우측에는 익어가는 벼와 문수산이 양립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로의 끝은 문수산이지만, 이제까지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아름다운 풍경과 조곤조곤 정을 주고 힘 듬에 다독여 준 철책과 염하강을 저버릴 수는 없지요. 갯벌도 황색 물결도 파란하늘에 저 구름도 잊어서는 안 되지요.
염하강 건너편 줄서 있는 그림 같은 나무들 그 너머 마니산, 그 풍경 또한 그림 같습니다.
꿈결 같은 상념들을 거두고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부쩍 자란 듯이 다가온 문수산이 웅대해 보입니다.
┬ 자형 길에서 좌측으로 갑니다.
좌측으로 들어서니 철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책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앞을 보니 쉼터와 화장실이 보입니다. 화장실 옆으로 들어서라는 친절한 희망의 빛 파란색 표시판이 보입니다.
좌측으로 들어서 강화대교 밑을 지나 밭을 정면으로 두고 다시 갈림길, 밭 안에 이정표가 우측으로 안내합니다.
우측으로 들어서니 강화대교 표지가 보이고 정면으로 문수산성 남문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문수산성/文殊山城 (사적 제 139호)
조선 숙종 20년(1694년)에 축성된 문수산성은 강화 甲串鎭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켜온 요새입니다.
문수라는 이름은 신라 혜공왕(재위765-780)때 산 정상에 창건된 文殊寺 라는 절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과 일대 격전을 벌이면서 해안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기도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해안쪽 성벽은 없어지고 마을이 들어섰습니다 현재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았으며 남문과 북문이 복원되었고 총 6km에 이르는 산성 중 4km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문수산 산림욕장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 홍예문을 거쳐 정상에 오르면 신라 혜공왕 때 창건된 문수사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풍담대사 부도 및 비를 볼 수 있습니다. 문수산성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 중흥의 사명과 문화 창달을 위한 정책에 의해 사적 제 13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수산성 남문 서쪽 우측》
조선 숙종20년(1694년)에 쌓은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 산줄기를 따라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감싸 안고 해안지대로 이어지는 둘레 2,400m, 성가퀴 2,173곳, 성문 3개가 있던 산성입니다.
이후 순조 12년(1812년)에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성벽은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단단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낮은 담인 성가퀴를 둘렀습니다.
성문은 控海樓, 喜雨樓 등 문루 셋과 작은 출입문인 東門, 亞門이 셋 있었는데 공해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어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습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하게 격전을 치른 곳으로, 이 싸움에서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전체길이 6,123m인 성곽의 남은 구간은 4,640m이고 없어진 구간은 1,483m입니다.
《 南門 喜雨樓》
《조선왕조실록》12책 12권(太白山書庫本)에 의하면 숙종8년(1682년) 강화유수 조사석이 문수산성 쌓기를 청하였다.이에 숙종 임금이 "강화도의 성과 문수산의 성은 같이 쌓도록 하라 그리고 삼군부(訓練院, 御營廳, 禁衛營)에서 힘을 합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하여 숙종20년(1694년)축성이 시작되었으나 흉년이 들어 축조공사가 중단 되었다. 기약 없이 그대로 방치되면서 쌓았던 성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숙종 38년(1712년) 문수산성을 보전하기 위해 통진읍을 문수산성 내로 옮기자는 결정이 내려졌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다시 숙종44년(1718년)에 김포를 통진읍에 이속시켜 문수산성 수비에 협력하게 하였다. 축성된 둘레가 5,529보, 여장이2,173첩에다가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1명,군관161명, 사병56명, 돈군6명, 수첩군80명, 모입군 72명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에 의해 결정된 문수산성 수축은 순조12년(1812년) 강화유수 홍의호가 성의 북문인 취예루, 서문 공혜루, 남문 희우루 등 3곳에 성문을 수축하였다. 문수산성은 정상부를 기점으로 동측 정상부에서 서측방향으로 뻗어 내려가는 능선을 따라 축성하여 성내에는 문수골, 산성포 계곡과 1개의 능선을 감싸는 포곡식산성의 형태를 보인다. 정상부에서 남북방향으로 형성된 동측의 능선과 이 동측 능선의 북쪽과 남측에서 서측 염하 방향으로 동서방향으로 뻗은 북측과 남측 2개의 능선을 따라서 각각 북문과 남문에 이른다. 성문에 이어진 성벽은 서측 해안선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으나 해안선을 따라 축조된 서측의 성벽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산성 남측 능선에서 산성 내부를 가로질러 서측 염하 해안까지 뻗은 1개의 능선이 산성 내부 문수골과 산성포로 양분하고 있는데, 문수골에는 정상부에서 발원한 수계가 모여 이루어진 저수지 마담(옛 이름)이 있다. 능선부 바깥 성벽은 수직으로 쌓은 편축성이고 안쪽은 흙으로 채운 내탁식으로 축조되었다. 유실된 서쪽 평지구간은 안팎으로 성벽을 쌓은 협축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문수산성 남문 동쪽 좌측》
문수산성 남문 門樓 동쪽에서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도로 이어진 강화대교 그리고 마니산 과 고려산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 평화누리길 제2코스 조강철책길 들머리》
평화누리길 제1코스 '염하강철책길'이 끝나고 제2코스 '조강철책길'의 시발점입니다. 조강철책길은 남문에서 문수산 정상으로 오르는 숨가픈 오름으로 시작됩니다. 특히 토질은 차진 황토에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매우 미끄러운 길입니다.
2018년 9월4일(火)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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