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先史) 373

原三國時代後期文化

원삼국시대 前期가 중국 漢文化의 수용과 移傳 初期鐵器文化를 발전시킨 과정이었다면, 원삼국시대 後期는 前期의 문화적 전통 아래 정치 문화적으로 점차 중국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시켰던 시기이다.이러한 영남지방의 원삼국시대 後期문화는 墳墓規模 규모의 확대와 부장유물의 전반적 數的 증가에서 알 수 있듯이 전기와는 다른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철기유물의 양적증가와 보수적인 묘제의 변화 및 부장품과 무덤 규모의 차이는 지배계급의 성장문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에 보이는 三韓이 漢郡縣과 전쟁을 치르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3세기대의 기록은 원삼국시대 후기의 내용으로 보인다. 이 시기 영남지방의 주요유적으로는 경주 조양동, 김해 양동, 부산 노포..

「가야의 태동 (원삼국시대) /伽耶의 胎動(原三國時代)」

《伽耶의 胎動》 (원삼국시대)紀元前 1세기 後半부터 西紀 300년경까지 약 3세기간을 우리나라 考古學에서는 原三國時代로 부르고 있다. 이 시기는 文獻에 보이는 三韓 중 弁韓이 소위 部族聯盟體의 성격을 띠고 지금의 洛東江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考古學的 資料에 의하면 이때는 靑銅器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드는 반면 鐵器 製作은 크게 성행하여 武器는 물론 일반 農工具類까지 철기로 대체되었다. 또한, 발달한 철제 농기구를 토대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철과 철기 따위를 멀리 樂浪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여 交易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보수적 성격이 강한 墓制에 있어서도 새로이 木棺墓 木槨墓가 채용되어 널리 유행하였다. 원삼국시대 초기에는 목관묘가 주로 축조되었으나 후기에는 목곽..

영산강유역 석실분 유물(銅鏡. )

영산강유역에서 조사된 銅鏡은 담양 제월리와 광주 쌍암동고분에서 출토된 3면이 있습니다. 이 시기의 동경은 중국의 초기 동경과漢鏡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고 있는데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되거나 모방되었습니다. 또 한경이외에 그것을 모방해서 다시 부어 낸 倣製鏡도 만들어 집니다. 대체로 1개의..

영산강유역 석실분 유물 (鐵製武器 鉾 . 劍)

영산강유역 石室墳에서의 武器類는 철제대도(鐵製大刀), 철모(鐵 矛=鉾)), 철촉(鐵鏃)등의 무기가 있으며 화살통 관련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석실분에서 출토된 쇠칼(鐵刀)은 신덕 출토의 길이 110.5cm의 대형에서부터 복암리 3호분의 96석실에서 출토된 길이 38cm의 작은고리자루칼(..

영산강유역 석실분 부장풍습(副葬風習)

『 副葬風習 』 石室墳의 유물 埋納에는 玄室內部와 入口部, 그리고 墳丘의 일부 및 周溝 등에서 각기 상이한 내용과 기법이 발견됩니다. 우선 석실내부에는 副葬品가운데 被葬者의 신분과 관계된 威勢品이 추가되며, 현실의 입구에는 부장된 석실을 폐쇄한 뒤 행해지는 埋葬儀禮로서 祭儀와 관계된 ..

영산강유역 석실분 형태와 구조(石室墳 形態와 構造)

『석실분 형태와 구조』 영산강유역 석실분의 墳形은 옹관고분의 巨大墳丘에서와 같이 평면 원형, 방형이 많고, 前方後圓形의 조사 예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형태는 원형이며 咸平 金山里 . 羅州 伏岩里 등에서 예외적으로 方形墳丘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전방후원형은 靈岩 태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