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 93

盟主國 大伽耶 王族의 墓域

高靈은 後期 伽耶聯盟의 盟主國이였던 大伽耶 本據地로 삼았던 곳이다. 大伽耶는 伽耶諸國중 유력한 국가를 칭한 용어로 한때는 前期 伽耶의 맹주국이었던 金冠國을 大伽耶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금관국이 세력을 상실한 뒤인 5세기 後半代이후 멸망시까지는 낙동강 西岸을 거점으로 하여 이 고령의 가야세력이 대가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大伽耶聯盟의 세력판도는 高靈系土器가 출토되는 陜川 · 咸陽 · 南原  등 智異山주변은 물론 晋州 · 泗川 · 固城 등 蟾津江流域에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부 경남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이나 연맹의 각 소국들은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막강한 대가야도 백제가 榮山江以南地域에 대한에 대한 영토확장을 꾀함에 따라 도..

大伽耶聯盟의 强者 多羅國의 首長墓

「陜川 玉田遺蹟」5세기 후반대에는 金冠伽耶를 비롯한 洛東江河流地域의 가야세력들이 신라의 진출에 의해 그 힘이 약화되고, 신라양식의 토기가 낙동강 동안지역에 확산된다. 반면 낙동강 以西地域에 있던 伽耶群勢力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高靈의 大伽耶를 盟主國으로 하는 聯盟體 형태로 세력을 규합하여 신라의 세력 팽창에 맞서는 한편, 百濟와 유대관계를 가지면서도 백제의 漢城陷落과 熊津遷都라는 힘의 공백을 틈타 한동안 급성장을 보인다.이들 대가야연맹국의 하나였던 多羅國은 《日本書記》 에 전하는 바와 같이 백제가 중재하여 541, 544년 두차례에 걸쳐 열린 伽耶復興會議의 參席者 현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맹주국인 고령의 加羅, 咸安의 安羅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나라였다. 慶南 陜川郡 雙冊面 城山里에 소재하는 玉田..

洛東江河口의 有力集團

「釜山 福泉洞遺蹟」 낙동강 하구의 동쪽에는 金冠國에 버금가는 유력한 勢力集團이 存在했던 사실이 부산 복천동유적 조사로 밝혀졌다. 《三國史記》에 傳하는 居柒山國, 또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의 瀆盧國의 實體가 그것이다. 복천동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의 首長級들의 墓域으로서 무덤이 營造된 中心年代는 4~5世紀代 이다. 이들 수장급의 무덤으로서는 일직선상日字形의 副槨(무덤에 딸린 구덩이)을 갖춘 大形木槨墓가 주류를 이룬다. 무덤내에서는 鐵錠(쇳덩이)등 풍부한 鐵器類와 토기 등이 대량 埋納되어 있고, 殉葬된 人骨도 출토되어 당시 그들의 경제적 富의 축적뿐 아니라 정치적 권력집중도 잘 보여준다. 복천동유적을 영조한 勢力의 성장기반으로는 철생산의 장악과 함께 馬具나 甲胄 등에 보이는 새로운 北方文物의 수용을 들..

아라가야 / 阿羅伽耶

아라가야(阿羅伽耶)는 지금의 咸安이요, 고령가야(古寧伽耶)는 지금의 咸寧이고, 대가야(大伽耶)는 지금의 高靈이며, 성산가야는 지금의 경산이니, 소가야는 지금의 高城이다.   「아라가야(阿羅伽耶)」아라가야는 《삼국지》 魏書의 東夷傳에 의하면 弁韓 안야국(安耶國)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하고 발전한 가야이다. 아나가야(阿那加耶) ·안라국(安羅國) · 아시라국(阿尸良國)으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던 세력이다.바다와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함안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아라가야는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었으며,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 힘을 갖추고 있던 ..

「대가야 / 大加耶」

대가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 고령군조(地理 高靈郡條)에 기록되기를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무려 16대, 520년에 이르렀다.(大加耶國自治祖伊珍阿豉王至道設智王凡十六世五百二十年)"고 한다. 三韓때까지 半路國으로 불린 고령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 기반 위에 있었다. 고령 盤雲里遺蹟의 瓦質土器가 영남지방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점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4세기대에 접어들면서, 고령의 세력은 冶爐面 일대의 鐵鑛을 개발하고 힘을 키워 가야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서기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廣開土王의 군대가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세력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에 낙동강 중류의 내륙 ..

「금관가야 왕의 무덤 / 金冠伽耶의 王陵」

〈김해 대성동유적 / 金海 大成洞遺蹟〉洛東江 河口에 위치한 金海는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 전하는 金官國(《三國志》魏書 韓傳의狗耶韓國)의 古地로 알려져 왔다. 前期伽耶諸國의 盟主國이기도 하였던 이 금관가야국의 실체가 김해 대성동유적의 발굴조사로 그 수수께끼의 베일을 벗게 되었다. 대성동유적은 가야국의 시조인 首露가 降臨하였다고 傳하는 龜旨峯과 그가 묻혔다고 傳하는 首露王陵 사이의 평지에 형성된 나즈막한 구릉위에 위치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39기의 무덤중 당시 금관가야의 영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은 3세기후반부터 5세기전엽에 걸쳐 만들어진 大形의 木槨墓들이다.  이들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통해 보면 당시의 금관국은 바다를 이용하여 중국과 일본 등과의 交易을 주도하면서 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3세기 후반..

「함안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유적/咸安末伊山阿羅伽耶古墳遺蹟」

현재의 말이산 고분군의 全景寫眞를 찍고자 서울역에서 19시25분發 진주행 itx 열차를 타고 함안역에 내리니 子正 07분이다. 함안역 인근에 여관이라도 있겠지 생각했는데 咸安驛舍 바깥을 나와보니 허허벌판 가운데 역사만 덩그러니 있고 저 멀리 작은 마을에 전열등 같은 불빛 몇만 어둠을 이겨 내려고 깜박이고 있다. 조그만 저 마을에 여관이 있을까? 있다한들 이 한밤중에 어떻게 찾아간단 말인가? 발바닥은 아픈데 할 수 없이 역사로 되들어가 냉기만 감도는 플랫폼 대기실 걸상에서 새벽 6시가 되도록 6시간동안 어둠속에서 냉기와 친숙하기를 애쓴 밤, - 07시가 되어 함안읍내를 찾아갈 양으로 역사를 나서니 오 하느님의 은혜로움인가! 마침 택시 1대가 客을 기다리고 있어 구름 흐르듯 말이산에 이르렀다.    〔아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