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문 4

문수산성(김포)/文殊山城(金浦)

《조선왕조실록》12책 12권(太白山書庫本)에 의하면 숙종8년(1682년) 강화유수(江華留守) 조사석(趙師錫)이 문수산성 쌓기를 청하니, 이에 숙종 임금이 "강화도의 성과 문수산의 성은 같이 쌓도록 하라 그리고 삼군부(訓練院, 御營廳, 禁衛營)에서 힘을 합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하여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숙종20년(1694년)흉년이 들어 축조공사가 중단 되었다. 기약 없이 그대로 방치되면서 쌓았던 성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숙종 38년(1712년) 문수산성을 보전하기 위해 통진읍을 문수산성 내로 옮기자는 결정이 내려졌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다시 숙종44년(1718년)에 김포를 통진읍에 이속시켜 문수산성 수비에 협력하게 하였다. 축성된 둘레가 5,529보, 여장이 2,173첩에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한양도성(숭례문-소의문-돈의문-창의문)/漢陽都城 (崇禮門~昭義門~敦義門~彰義門) 』

『한양도성(漢陽都城)』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城입니다. 북악산(白岳)을 주산으로 우측에 인왕산(仁王), 좌측에 낙산(駱駝), 정면 남쪽에 木覓山(남산)이 옹성처럼 둘린 盆地 수도 한양을 품고 있는 4개의 산 정상과 능..

『한양도성 (흥인지문~광희문~남소문터~숭례문)/漢陽都城 (興仁之門~光煕門~崇禮門) 』

『朝鮮의 首都 漢陽』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하고 옛 전통과 풍수지리,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한양을 건설하였습니다. 궁궐은 백악 기슭에 건립하고 '周禮' . '考工記'에 따라 좌측에는 왕실 조상신을 모시는 宗廟를, 우측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社稷을 두었다. 궁궐 앞 대로에는 六曹를 비롯하여 중요 관청을, 興仁之問과 敦義問을 그리고 崇禮門을 丁字로 연결하는 중심 대로에는 상업시설인 市廛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의 경계가 되는 도성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白岳(北岳山), 駱山(駱駝), 木覓山(南山), 仁王山의 內四山능선을 따라 山勢에 의지하여 쌓으면서 4대문 4소문을 세우고 낙산에서 남산에 이르는 평지부분까지 연결하여 완성하였습니다..

남한산성 . 봉암성 . 옹성/南漢山城·蜂巖城·甕城

일반적으로 우리가 남한산성이라 하면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한 조선시대의 산성으로만 생각하기 싶지만,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입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인해서 가장 기억되는 산성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선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인조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