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우리가 남한산성이라 하면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한 조선시대의 산성으로만 생각하기 싶지만,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입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인해서 가장 기억되는 산성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선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인조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연유가 있는 까닭이겠지만,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입니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 당하지 않고 47일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항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하나의 閉曲線으로 이루어진 城이 아니라 남한산성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신지옹성, 연주봉옹성과 제1,2,3남옹성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로서 인조 4년(1626년)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성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완만하게 늘어선 가지능선을 타고 본성을 쉽게 공격할 수 있을 적군을 용이하게 방어하기 위해 능선에는 城壁을 가파른 곳에 내쌓아 치를 두고 골은 들여쌓아 삼태기 형태를 구현하여 敵들이 접근성이 좋은 골짜기로 접근할 때 3면에서 입체적으로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취약한 곳을 보강했고 본성 동쪽 앞 산줄기에는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동문 좌익문/東門 左翼門》
남한산성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지화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9년)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각 성문마다 이름이 붙여 졌는데 동문은 좌익문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左翼門(동문)은 도로로 인하여 우측이 단절되어 머리가 되고 좌측으로 뻗은 성곽은 몸통이 되어 능선을 가로질러 너울 치듯 성축을 이어가다가 끝머리는 돌아가는 산세 따라 감춰져 있어 마치 한 마리의 용의 형상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다.

(쓴 소리 한마디)
左翼門(동문) 우측 앞 단절된 주변에 미관상 안 좋은 설치물이나 폐품들을 방치한 것들이 많은데 이것들을 제외하고 온전히 성채만 담으려니 여의치 않아 이리저리 담은 사진만 10여장이 넘는다. 그 중 괜찮다 싶은 석장을 올려서 본다. 안내판도 좋고 게시판도 좋고 현수막도 좋지만, 꼭 미관이 수려한 곳이나 문화재 주변에 세우거나 설치해야만 하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이런 표시판이나 시설물을 세우거나 둘 때에는 주변 경관이나 문화재 관광에 반하지는 않는지 深思熟考했으면 좋겠다. 동문 바로 앞에는 방치된 컨테이너 건물도 하나 있는데 참으로 흉물스러워 아름답고 멋진 문화재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관광차원에서 이런 건 좀 규제해야 마땅하다. 관광객이 더구나 외국관광객이 이러한 문화재나 아름다운 관광지를 촬영해 가는 영상들은 알게 모르게 홍보역할도 하기 마련인데, 그 아름다운 경관에 너절하게 표시판이나 설치물이 있다면 그 景觀의 이미지가 좋을 리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아름다운 경관에 반하여 렌즈를 들이 대다가도 주변경관이나 문화재에 조합되지 않는 인위적이거나 설치물이나 존치물이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사진 찍기를 포기할 때가 많다. 산사에 풍치와 건축미를 보러 갔는데 초파일이 지나간 지 오래건만 시도 때도 없이 연등이 사찰건물을 뒤덮고 있어 의지를 접고 실망만 안고 올 때가 적지 않았다. 외국관광객이라고 다르겠는가!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外侵에 대비하여 동서남북으로 보필하고 있는 지킴이가 있다. 동쪽의 광주, 서쪽에 강화, 남쪽 수원 그리고 북쪽 개성이었다. 그 중 서울에서 동남쪽 24km 위치에 본성 (9km) 외성 (3km) 신남산성 (0.2km) 등으로 다양성을 구비한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그 후 여러 차례 고쳐 활용하다가 조선조 광해군 13년(1621년)에 대대적으로 축성하였다. 남한산성은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대문과 문루와 장대가 있고 本城에11개, 봉암성4개, 신남성1개 등 모두 16개의 암문을 내었고 수어청을 두었으며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은 궐 227칸, 좌전26칸 총253칸에 우물80개,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부의 행정처도 산성 안에 옮겼다고 한다. 이처럼 남한산성에 중요성을 두었으며, 인조17년(1639년)에 처음으로 실시한 훈련에 동원된 병력이 무려 12,700명이었다고 한다.

《동문 좌익문/東門 左翼門》
이 동문은 낮은 곳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옆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左翼門) 안쪽 모습


동문 좌측 城廓을 따라 오르다가 뒤돌아서서 내려다본 동문(左翼門)樓閣의 모습.

산세와 지형을 보며 그에 따른 성벽의 흐름을 본다.

이 구간은 여장이 말끔하게 보수되었다.

동문에서 좌측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름이다. 좌측 뿐만 아니라 우측 남쪽 방향도 가파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만큼 동문이 위치한 곳은 兩 산줄기의 골짜기에 해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이러한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동문을 설치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처럼 가파르게 경사진 곳은 지면의 각도와 상관없이 전돌을 계단식 수평으로 쌓아 벽 하중을 배분하고 아래로 쏠림을 방지하여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축성되었다.

가파른 곳을 올라와서는 다시 돌아서서 보는 것은, 아마도 오르면서 느끼지 못한 어떤 것을 찾아보고자는 심정일 것이다.

가파른 언덕에 올라서서 잠시 뒤돌아 바라본 동문 우측 제3남옹성치로 뻗은 성곽의 정경이다.

동문(左翼門), 서문(右翼門), 남문(至化門), 북문(全勝門), 행궁(行宮), 연무관(鍊武館), 봉암성(蜂巖城), 한봉(漢峰) , 벌봉(蜂峰),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 제1남옹성(第1南甕城), 제2남옹성(第2南甕城). 제3남옹성(第3南甕城), 장경사(長慶寺), 신지옹성(新地甕城), 수어장대(守御將臺), 동장대지(東將臺址), 외동장대지(外東將臺址), 남장대지(南將臺址), 제1암문~제11암문(第1暗門~第11暗門), 한봉암문(漢峰暗門)

《송암정터/松岩亭址》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여 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있는 古死木'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벼슬을 내려 '大夫松'이라고 부르던 소나무이다. 지금 보니 바위는 잡목에 뒤덮이고 대부송은 죽은 가지 일부만 보인다.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란 뜻이다.

성벽 바깥 바로 죽은 소나무 있는 바위지대가 송암정 터이다.

지나온 송암정 터를 뒤돌아본 정경이다.

뒤돌아보니 동문과 그 언저리와 그 너머로 행궁이 있는 삼거리주변이 목격된다.

앞 능선의 성벽처럼 별도로 雉를 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을 때 골은 들이쌓고 능선은 내어쌓아 돌출시켜 자연스럽게 치의 역할을 주었다. 敵兵들이 마치 그물이나 항아리 모양으로 쌓은 근접이 쉬운 골 쪽 성벽으로 접근할 때 성곽의 3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능선은 성벽을 반원형으로 높게 내어쌓아 雉의 효과를 주었고 좌우편 적의 공격에 취약한 양 옆 골짜기는 안으로 들여쌓아 골을 이용해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앞서 雉 형태의 성벽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능선에 제차 치 형태로 쌓은 성벽의 모습이다. 이곳은 일반적인 성벽과 다르게 아래에 中砲 2문을 설치할 수 있게 하였고 그 위에 遠거리와 近거리 모두 射程거리에 두고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1개의 近銃眼 형태를 둔 女墻이 설치되었다.

위의 細部이다. 1개의 近銃眼을 둔 女墻 아래 2문의 砲臺가 마련되어 앞 봉우리(漢峰城)와 마주하고 있다.

1개의 近銃眼만 있는 여장에는 銘文이 새겨진 방형의 전돌이 있는데, 누군가 의도적으로 글을 정으로 쪼아내어 알아볼 수 없게 하였다. 글 내용에 문제가 있는가보다.

2문의 포대가 있는 여장 바깥 정면을 바라보니 골짜기를 사이에 둔 앞 봉우리인 漢峰城과 마주하고 있다. 한봉성은 봉우리를 중점으로 타원을 이루는 閉曲城으로 축성한 다른 外城이나 甕城과 다르게 본성(남한산성)동장대 성벽 바깥 능선에 쌓은 봉암성 남쪽 성벽 바깥에 붙여서 능선을 따라 한봉까지 쌓은 外城으로 하남시와 광주시로 이어지는 구간을 방어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본성의 1차적 방어임무를 가진 외줄기 성곽의 한봉성 안쪽은 본성과 사이에 골짜기를 두고 있으며 별도의 방벽이 없다 그런 까닭에 골짜기를 타고 한봉성을 공격하는 적을 본성과 신지옹성에서 지원하도록 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흥인지문의 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 앞에 덧쌓은 옹성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 성이다. 그러므로 유사시 한봉성을 지원하기 위해 1개의 골짜기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본성 동남편에 이처럼 치를 두었고 동북쪽은 별도의 신지옹성을 축성하여 한봉성을 지원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여장 / 女墻 》
성곽 위에 담장을 '여장' 또는 '성가퀴'라고 부른다.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아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군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총격전이 잦아지면서 많이 축조되었다. 한 개의 女墻을 1타(垜)라 부르며 1타에는 3개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다. 가까운 곳의 표적을 쏘는 근총안(近銃眼) 한 개가 한가운데 있고, 그 양옆에 먼 표적을 쏠 수 있는 원총안(遠銃眼)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원총안은 대개 구멍을 수평으로 뚫은 반면 근총안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女墻은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물로서 여담, 여첩(女堞), 타(垜), 성가퀴 등으로도 불린다.)

계곡을 안고 있는 장경사 앞 마당과 제1암문이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무너진 여장 보수공사 중이다.

제1암문으로 내려서기 전에 바라본 좌측 동장대에서 능선을 타고 우측 벌봉과 한봉으로 이어져 있는 봉암성의 남측 능선의 성벽이다.

《제1암문(장경사 暗門)》
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다른 암문들은 좌우측의 성벽을 돌출시켜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는데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을 돌출시키지 않았다. 전체적인 모양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넓어지는형상을 하고 있다. 이 암문을 나가 제16암문(한봉성 암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한봉성의 16암문에서 동문(좌익문)으로 오솔길이 있고 장경사1암문으로는 가까운 직선거리로 심하게 가파르거나 험한 편도 아니다.

《제1암문 내측》

문의 전체적인 모양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넓어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암문을 나가 제16암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1암문 외측》
內面의 직사각형과 다르게 外面은 무지개모양이다. 보수는 주로 성벽의 여장을 하고 있는데 성 밖에 나와서보니 암문 문턱주춧돌이 무너져 있고 좌측 성벽의 돌들이 홍예문 쪽으로 쏠려있어 홍예문이 필요이상의 힘을 받고 있어서 무너질 우려도 있다 실제로 홍예문 우측문틀 石이 밀려 있다. 이곳부터 보수를 해야 순서가 아닌지?

암문 바깥에서 바라본 장경사 정경이다, 이와 같은 골(谷)은 적이 근접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따라서 골 지형에는 성벽을 안쪽으로 깊이 들여쌓아 적이 접근할 때 외반되게 바깥쪽으로 돌출된 좌우능선으로 부터 효과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하였다.

《장경사/長慶寺》

《장경사/長慶寺》
안내게시판에 의하면 장경사는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라고 한다.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谷地部의 완만하게 경사진 곳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여 자리하고 있다.

'광주군지'에는 장경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찰은 인조2년(1624년) 남한산성 수축시 僧軍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사찰이다. 병자호란 당시인 인조 15년(1637년)1월19일 적이 동쪽 성을 침범하여 성이 함몰위기에 빠지자 어영대장 이기축이 장경사에 있다가 죽을 힘을 다하여 몸소 군사를 독전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왕이 친히 납시어 위로하고, 嘉善의 품계를 내리고 완개군에 봉하였다고 한다. 1907년 8월1일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의해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할 때 다른 사찰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그중 장경사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고한다

《장경사 동종/長慶寺 銅鐘》
이 동종은 17세기의 대표적인 僧匠 思印이 제작한 통도사 종루 종의 시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크기와 하대문양만 다를 뿐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및 표현수법 등이 거의 같은 모양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종의 형태는 한 마리의 용이 그 꼬리로 音筒을 휘감고 올라가는 모양의 鐘紐 아래에 풍만감이 있는 종신이 연결된 모양인데 鐘身의 외형 선은 肩部로부터 벌어지며 내려오다 鐘腹부터는 구연부를 향해 살짝 오므라든 선형을 그리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종뉴인데 음통의 상단에는 가장 바깥 부분의 꽃잎은 활짝 벌어져 있고 내부의 꽃잎은 안으로 오므라든 만개한 연화가 장식되어 있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僧匠係 匠人이 제작한 동종에서 나타난다.
'思印比丘'의 작품으로는 浦項寶鏡寺瑞雲庵銅鐘(1667년), 聞慶金龍寺銅鐘, 洪川壽陀寺鐘(1670년), 安城靑龍寺銅鐘(1674년), 서울華溪寺銅鐘(1683년), 梁山通度寺銅鐘(1688년), 의왕淸溪寺銅鐘(1701), 江華銅鐘(1711년), 등 8구의 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종들 중 강화동종이 1963년1월21일 보물제11호로 지정되었고, 이어 2000년 2월15일 나머지 7구를 함께 묶어 보물 제 11호로 주조년대 순으로 1~8호로 지정하였다.

장경사 경내.

2018년11월11일 현재 남한산성 성곽을 전체적으로 보수 중이었다. 뒤돌아서서 바라본 장경사 앞 마당과 그 언저리 지형에 따른 성곽의 형태이다. 좌측 끝면에 한봉과 마주보고 있는 2문의 포대가 설치된 본성의 치가 있는 곳이다.

신지옹성으로 가는 도중에 뒤돌아본 성벽의 모습이다 한봉과 본성 사이 근접하기 유리한 골짜기로 인하여 성벽을 높이고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섬멸하기 위하여 지대가 낮은 곳은 성 안쪽으로 들여쌓은 모습이다.

信地甕城을 향해 가는 중이다. 짧은 능선과 능선 사이 골진 곳은 지형에 맞춰 築城하였다

좌측 모퉁이의 신지옹성은 건너편 한봉성이 적으로부터 공격 당할 때 지원사격 하기 위하여 항시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며, 바라보이는 능선에 쌓은 한봉성 역시 외부 광주지역 능선을 이용해서 적들이 본성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충실히 했을 것이다.

골짜기에는 성벽을 안쪽으로 물려쌓고 능선은 내쌓아 돌출시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신지옹성으로 나가는 제2암문 앞 이정표이다. 동문으로부터 1.1km, 동장대와 봉암성으로 나가는 제3암문까지는 400m거리이다.

신지옹성으로 나가는 제2 암문 앞에서 좌측 성곽을 바라본 모습으로 보이는 성벽 끝머리 마루턱에 군포지(경계초소)가 있고 1단 올라서면 동장대가 있고 동장대터 좌측 15m거리 낮은 곳에 봉암성으로 가는 제3암문이 있다.

제2암문을 통해 신지옹성으로 나가기 전에 남한산성 本城 女牆 遠銃眼을 통해서 내다본 신지옹성의 모습이다.

본성에서 신지옹성으로 통하는 제2암문 출입구 주변 풍경이다.

남한산성 전체를 보수 중이어서 성곽을 따라 전돌, 강회 등 자재나 공구를 운반하는 화물용모노레일이 설치되어있다. 신지옹성으로 나가는 제2암문을 통과해서 이어진 화물용모노레일

《제2암문/長慶寺信地暗門》
남한산성은 본성에 11개, 외성인 봉암성에4개, 한봉성에1개, 모두16개의 암문이 있다. 적의 관측이 어려운 위치에 설치한 비밀통로이므로 通門과 견고함 이외의 어떤 시설이나 장식없는 작은 문이다.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던 곳이다. 본성과 연결부에 설치된 이 암문은 폭1.3m높이1.42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또한 본성에 설치된 11개의 암문이 대부분이 문밖에서 보면 무지개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지만, 제6암문과 이 암문은 윗부분이 "━"자로 만든 평거식 문이다. 또한 다른 암문은 본성 축조시 함께 만들어져 사전에 계획된 것인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으면서 건축한 암문으로 보인다. 암문 밖에 신지옹성 성벽이 햇살을 받아 분을 바른 듯 뽀얗다.

《신지옹성/信地甕城》
甕城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 좋은 보기로는 한양도성의 흥인지문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본성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략적 방어 및 공격적 시설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장경사 신지옹성은 동장대에서 뻗어 내려간 건너편 산줄기의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옹성 끝머리에는 2개소의 砲坮가 설치되었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확인된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시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골짜기 사이로 마주보이는 능선이 한봉성이다 성은 외줄로 쌓은 성벽으로 되어 있다 외부로 이어진 한봉 능선을 타고 본성을 접근하는 적을 방어와 공격을 하기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안쪽 골짜기로 공격하는 적으로부터 한봉을 지원하고 섬멸하기 위하여 신지옹성을 축성한 것이다.

보수공사 중이어서 옹성 안은 어수선하다.

신지옹성 끝머리에 위치해 있는 포대의 내부 모습이다. 좌측 옆에 '이방'이라 불리는 포탄이나 병기 화약 등을 예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일부 내려앉아 붕괴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바깥 위 여장은 보기에 말끔하게 보수를 마쳤다. 속은 곪았는데 겉만 붕대를 감은 격이다.

砲穴로 통해 내다본 전방의 봉우리 한봉성이다. 포혈 아래쪽은 잡목이 무성하여 지형을 볼 수 없지만 계곡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이다.

信地甕城 중간지점에서 본성(東將臺 터)을 바라본 정경이다. 좌측은 신지옹성 성벽이 본성 성벽에 붙여져 있고 우측은 제3암문 바깥쪽이 보인다.

信地甕城을 本城 성벽에 붙여 축조한 모습이다.

본성의 제2암문 바깥 모양이다. 좌측 능선은 동장대 아래에서 뻗어진 능선으로 봉암성과 한봉성으로 이어가는 줄기로서 신지옹성처럼 동장대 앞 성벽에 붙여 성벽을 쌓아 봉암성과 한봉성으로 이어지는 울타리이다.

신지옹성을 거쳐 다시 본성(남한산성)은 東將臺址가 있는 곳이자 봉암성과 한봉성으로 이어지는 제3암문을 향해 오른다. 좌측 능선은 동장대지에서 뻗어내린 봉암성 능선이다.

동장대터에 도달 직전에 돌아서서 바라본 풍경이다 신지옹성과 한봉성, 그 너머 露積山이 목격된다.

가파른 곳은 무너지지 않도록 계단식공법으로 잘도 쌓았다.

오름에서 잠시 멈춰 주변을 바라본 풍경이다. 도착할 동장대에서는 주변과 적정을 둘러보기가 더욱 탁월할 것이다.

《남한산성 군포지/南漢山城 軍舖址》사적 제57호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번지 일원
가파른 곳을 올라선 능선에 건물지가 있다 이름하여 군포, 軍舖는 성을 지키기 위한 軍哨所 건물이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1848년)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사결과 이 軍舖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한 내지 위에 정면3칸, 측면1칸으로 보이는 礎石과 壁體, 그리고 다수의 기와조각과 鳥銃彈丸이 나왔다. 이를 통해 군포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벽체는 土石壁을 둘린 건물로 보인다. 또한 군포는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고 내부에 온돌시설은보이지 않았다. 발굴 당시의 건물유구는 잘 보존하기 위하여 유구 위를 흙으로 덮고 그 위에 기존 유구와 같은 형태의 모조초석을 설치한 것이다. 이 군포지는 동장대 바로 옆에 위치한다.

지나온 곳을 내려다보니 저만치 돌출된 작은 봉우리에 신지옹성이 보인다.

군포지에서 東將臺터로 올라가는 길목의 정경이다. 동장대를 건축하기 위하여 좁은 능선을 넓게 터를 잡기위해 축대를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장대터/東將臺址》

《동장대터/東將臺址》
장대는 군사적 목적으로 장수가 적정을 살피고 지휘하기위해 지은 누각 건물이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將臺가 있었다. 이 자리는 城內 동쪽에 있는 장대로서 동장대라 부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營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2년(1624년)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대신 봉암성을 수축하고 외동장대를 건립하였다.


《남한산성 여장/ 南漢山城 女墻》
동장대터 앞 여장의 모습이다.
여장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塼乭로 축조한 平女墻이다.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을 1타라 부르고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위한 타구가 마련되어 있다 남한산성 여장규모는 길이 대략 4.2m, 높이1.3m, 폭0.8m내외가 일반적이다.

하얀 안내판 있는 지점 아래에 봉암성으로 나가는 암문이 있다.

동장대터 앞 여장너머 봉암성 정경이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산등성이와 그 등성이 따라 평행으로 축성된 두 줄기의 성벽은 삼거리(외동장대 뒤쪽)에서 남북으로 갈라지는 능선 따라 좌우로 갈라져 우측으로 뻗은 능선 따라 가던 성벽은 우측으로 뻗다가 가파르게 비탈진 능선 앞에 砲臺 2문을 설치한 雉로 능선을 막고 치 좌측에 암문을 설치한 후 되돌아 삼거리(외동장대 앞쪽)에 이르기 전에 다시 암문 1개를 세우고 외동장대 앞을 거쳐 뻗어나가 벌봉을 감싸고 벌봉 옆에 하남시 고골로 통하는 1개의 암문을 세우고 다시 삼거리 뒤 좌측을 거쳐 본성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봉암성이다. 한봉성은 1.4km 거리에 이르는 능선 따라 외줄기 성벽으로 봉암성에 屬한 외성이다. 봉암성 남쪽 포대를 갖춘 雉 옆 암문 밖 봉암성 성벽에서 시작하여 광주시 방면을 대응해 쌓은 성으로 중간 고개능선에 1개의 암문을 세우고 능선을 타고 한봉에 이르러 봉우리를 감싸고 소멸된다. 그리고 벌봉에도 하남시 방면으로 뻗은 능선 따라 고골에서 이어져 올라오는 골짜기 방향을 대응한 외성을 한봉성처럼 쌓았다.
동장대터에서 바라볼 때 봉암성은 마치 凸자를 거꾸로 세운 T자 형상이다. 적이 접근 하기 수월한 좌우능선에 포곡식 형태로 성을 축성하여 좌우 골짜기로부터 침입할 적을 차단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사진에서는 능선의 우측 성곽만 보이고 좌측 성곽은 여장이 모두 무너졌고 잡초에 덮여 성밖에서 확인하기 전에는 분별이 어렵다.

봉암성으로 통하는 본성의 제3암문을 바라본 풍경이다.

옆 좌측 이정표이다. 全勝門(북문)은 앞쪽으로 1.4km , 左翼門(동문)은 1.5km거리에 있는 중간지점이다.

《제 3암문(蜂岩城 暗門)》內面
암문은 적으로부터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은밀한 성격을 가진 비밀통로이다. 이 암문은 동장대 옆 성벽아래 설치되어 있으며 本城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폭2.36m 높이2.65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안팍 모두 홍예문이고 매우 크다. 이 암문은 문루만 없을뿐 그 크기로 보아 유사시 봉암성이 적으로 부터 공격 당할 때 본성의 병력지원에 있어서 원할한 이동과 물자수송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제3암문 밖 좌측에 위례둘레길 이정표가 서있다.

本城에서 제3암문을 나와 성벽을 끼고 50m 정도 걸어 봉암성으로 가는 길목 풍경이다.

『봉암성/蜂巖城』外面
남한산성 동장대 터 아래 성벽에 붙여 쌓은 外城인 봉암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도 다른 암문에 비해 크다. 이 문도 적의 관측으로부터 숨긴 암문격이지만, 봉암성의 정문 格인 성문이겠다.

동장대 바깥 바로 앞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는 동쪽으로 200m 뻗어가다가 두 줄기로 갈라지며 한 줄기는 하남시 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광주시 방향으로 흘러 내리는데 한봉성은 바로 이 산줄기에 축성한 외성이다. 적이 접근하기에 원만한 兩 산줄기 능선을 타고 쉽게 본성(남한산성)을 공략할 수 있는 취약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겠다.

현 위치는 한봉성에 중심에 해당하는 초입이다. 비록 여장은 다 무너져 내렸지만, 두 줄의 성벽이 확인된다. 우측성벽은 본성 성벽에서 시작하여 삼거리를 거쳐 동남쪽 한봉을 감싸고 다시 좌측으로 뻗어와서 외동장대앞을 거쳐 동북쪽 산줄기의 벌봉을 감싸고 다시 삼거리를 지나 본성 좌측 성벽에 붙여 세운 암문격의 성문에 이른다. 바라보이는 봉우리가 외동장대터이자 삼거리이다.

본성 성벽으로부터 나란히 뻗어 내려온 두 줄기 봉암성벽은 이곳에서 좌측 벌봉(蜂峰)과 우측 한봉(漢峰)으로 각각 갈라져 능선 우측으로 성벽을 쌓고 가다가 봉우리를 휘감고 돌아서 능선 좌측으로 성벽을 쌓아 이 삼거리 안쪽 외장동대 앞에서 같은 방식으로 벌봉을 휘감고 온 좌측 성벽과 합친다.

한봉으로 향하는 우측 성벽의 모습이다 속히 복원되기를 바란다.

《외동장대터/外東將臺址》
장대란 적정을 살피고 지휘를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이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 자리는 본성 바깥 봉암성 중앙 봉우리 삼거리지대로 벌봉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외동장대는 조선 숙종12년(1626년)윤지선이 수어청 군사를 동원하여 봉암성을 축성할 때 함께 축성한 것으로 추측되며 군사들이 진을 치고 훈련하던 곳으로 보인다. 고지도를 보면 다른 장대와 달리 외동장대는 누각에 관한 기록이나 표시가 없어 처음부터 누각 없이 축대만 설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봉암성과 외동장대를 축성함으로써 本城의 동장대는 그 기능적 의미를 상실하여 재축성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외동장대터/外東將臺址》

《봉암성여장 (외성)/蜂巖城女墻(外城)》
다 무너져 내린 상태에서 애잔함과 동시에 묘한 美的 느낌을 준다.

한봉을 향해 뻗어간 봉암성 성벽이 확인된다.


漢峰쪽으로 뻗어가는 봉암성은 앞 봉우리에서 2문의 포대를 지닌 雉에서 좌측으로 ∩자처럼 돌아서 다시 外東將臺址 앞으로 향한다.

《봉암성 제2암문/蜂巖城 暗門》(성 안쪽 모습)
봉암성 암문 위 성벽과 여장이 무너져 있고 암문은 무너져 내린 흙과 돌로 메워져 있다. 이 암문은 봉암성 좌측 2개의 포대가 설치된 치 옆 암문에서 외동장대로 향하는 성벽 중간에 있다.

성 바깥쪽 모습

암문 바깥쪽에서 외동장대터(키 큰 나목들이 서있는 곳)를 바라본 모습이다.

암문으로 다시 들어와 한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한봉성으로 향한 무너진 봉암성성벽과 하남에서 광주로 가는 국도가 목격된다.

한봉에서 바라본 은고개와 노적산 줄기

봉암성 중간 지대 성벽에서 바라본 좌측 능선 위에 바깥쪽으로 돌출된 봉암성벽과 외동장대터가 보인다.

봉암성은 능선 좌우로 성벽이 둘려진 것을 한눈으로 볼 수 있다.

봉암성 남쪽 끝 雉가 설치된 곳이다 잠목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우측으로 확인된다.

방금 내려온 무너진 봉암성 남쪽 끝머리에 있는 砲臺 뒤에 자리하고 있는 雉의 모습을 돌아서서 바라본 모습이다.

다시 진행방향으로 돌아서서 앞을 보니 2개의 포대가 보인다. 봉암성 최후의 堡壘인 셈이다.

포대 안쪽 모습이다.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좌측에 확인된다.

또 다른 포대 안쪽 모습이다. 앞서와 같은 모습이다.

성벽 좌측 모습이다. 봉암성 남쪽 끝머리는 가파른 비탈 전에 ∩형으로 성벽을 쌓고 끝머리에 2개 포대를 설치하고 좌측에 한봉성으로 출입하는 암문을 설치하였다

능선을 가로지른 포대성벽 좌측에 귀퉁이에 설치된 봉암성 제2암문 안쪽의 모습이다. 이 암문 좌측성벽에서 부터 이어 쌓은 한봉성 성벽이 약1.2km거리를 뻗어서 한봉까지 쌓았다.


봉암성제2암문 바깥 모습이다.

소나무가 주종으로 자라고 있는 앞 ┬자형 능선이 한봉성이다. 한봉성은 봉암성과 달리 외성으로 쌓았다.

줌으로 당겨본 한봉성의 위치이다 성벽은 좌측 봉우리를 감싸 돌아 우측 봉우리로 향해서 우측 한봉을 감고 다시 봉암성으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고 한봉에서 소멸된다. 한봉성 성벽은 광주시 엄미리 방향을 對峙하고 안쪽은 남한산성 본성을 마주하고 있다.


한봉성과 남한산성 본성 사이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삼거리이다. 골짜기에서 동문과 그 옆 제11암문 밖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또한 제1암문인 장경사암문으로도 이어질 것으로도 추측된다.

이 지점(삼거리이자 한봉성암문이 있는 장소)에서 한봉까지0.6km, 벌봉까지는 1km이다.

《한봉성암문/漢蜂城暗門》안쪽 모습이다. 이 암문은 은고개 방면을 향하고 있다. 암문 밖 우측으로는 노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고 그 능선을 차단하는 한봉성 雉가 있다.

암문 바깥 모양이다.


노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차단하고 이 능선으로 접근하는 적을 대적하는 雉 형태의 한봉성 성벽이다.

치 바깥쪽 우측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성벽은 한봉으로 이어져 있다.

옆에서 바라본 한봉성 치 전면과 노적산으로 이어가는 능선의 모습.

측면으로 바라본 한봉성 정상 모습

이곳 한봉에서 동장대 1.7km, 벌봉 1.6km 거리이다.

《한봉성/漢蜂城》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과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그리고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이 중에서 한성봉은 봉암성의 동쪽에서 한봉의 정상부까지 쌓은 외성이다. 이곳은 선조 2년(1624년) 본성 축조시에는 축성구간에서 빠진 곳으로 병자호란 이후 숙종19년(1698년)수어사 오시복이 신축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한봉을 장악하고 화포를 쏘아 인조가 머물던 행궁에까지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화포가 중심이 되는 전쟁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빼앗겨 곤란을 격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본성의 보강 차원에서 축조된 것으로 본성이나 봉암성과 달리 폐곡선을 이루지 않게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성의 길이는 약 1.1km이다.

한봉에서 바라본 좌측의 신지옹성과 그 위 본성 성곽과 동장대터 그리고 봉암성 성벽이 능선따라 외동장대 앞 삼거리까지 가로 놓여 있다.


다시 한봉성 암문과 삼거리를 거쳐 봉암성 벌봉으로 가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한봉성 암문모습

봉암성으로 이어진 한봉성 성벽 따라 봉암성 제2암문으로 오른다.

다시 봉암성 제2암문을 들어서고 있다.

城內 幅이 좁아 그게 그거겠지만, 올 때는 여장이 모두 무너져 내린데다가 잡목에 덮여 확인도 잘 안 되는 우측 성벽을 끼고 왔지만, 벌봉으로 갈 때는 좌측성벽을 끼고 가야겠다.

견고했을 성벽은 포탄과 무심한 세월 속 비바람에 무너져 무슨 조각품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외장대 앞을 거쳐 벌봉으로 다가가는 길목이다. 나뭇가지 너머로 봉우리가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벌봉/蜂峰》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고 한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린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은 갈라진 여러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로 우측에 성벽 옆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공간을 막고 있는 동남쪽 바위의 모습이다. 이 바위면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는데, 軟질의 퇴적사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재질로 인해 비바람에 삭아 내렸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다음은 게시된 글을 옮긴다.
《봉암신성신축비/蜂岩新城新築碑》
"이 바위 표면에는 정사각형의 해서체를 음각으로 새긴 비문이 있는데 판독 가능한 49자 외에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려운 몇 글자가 더 있다 비문을 통해 당시 광주유수 겸 수어사인 윤지선의 감독아래 숙종12년(1686년)윤 4월1일부터 봉암을 쌓기 시작하여 같은 5월9일 마우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바위의 입자는 굵은 모래와 석영조각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중에 특이한 부분이 있어 접사한 사진이다.

벌봉은 5개의 크고 높은 바위가 하나로 모여이루어진 봉우리이다 이 자리는 평지상의 모습이 아니고 바위 옆으로 20여m 올라온 큰 바위 중간 쯤 뒤 공간이다. 앞에 ┌자 모양으로 바위가 솟아있다.

앞서 위 사진의 봉우리의 모습으로 벌봉의 정상부이다.

정상부에서 다시 중간 공간으로 내려오다 도중에 정상을 담은 사진이다.

올라온 길로 다시 벌봉을 내려간다.

벌봉 앞 이정표.

벌봉에서 옆 능선으로 성벽이 뻗어 있고 벌봉 아래 하남시 고골로 통하는 암문이 있다.

봉암성 제4암문 안쪽 모습이다.

《고골》
옛 광주군 중부면 에 속하던 마을이다.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암동, 상사창동, 교산동을 아우르던 마을인데 광주관아가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古邑으로 불리다가 '고고을'을 거쳐 '고골로 변천된 것으로 추정된다.

암문 밖 이 길로 내려가면 고골이다.
암문 밖에서 성벽을 보니 벌봉에서 좌측 능선 따라 이어가고 있다.

제4암문 밖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봉암성제4암문 안 모습이다. 다시 봉암성 정문격인 봉암성 제1암문으로 발길을 옮긴다.

외동장대 전 삼거리이다. 좌측으로 외동장대, 우측으로 남한산성 본성이 있다.

다시 봉암성 제1암문과 남한산성 본성 제 3암문으로 가는 길목이다.

남한산성 동장대터 앞 성벽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봉우리로 오르는 좁은 능선 따라 좌우 성벽의 거리폭도 좁아진 모습이 보인다. 작은 봉우리 위 우측에 봉암성 제1암문이 있다.

봉암성을 성벽 따라 벌봉과 한봉을 둘러보니 女墻은 모두 무너져 내리고 성벽은 대체로 남아있다. 남한산 지형에 맞춰 본성을 지키기 위한 옛 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蜂巖城의 성곽은 바라보이는 본성 성곽 좌측에서 뻗어 산줄기능선을 타고 한봉과 벌봉을 감싸 돌아서 다시 본성 성곽 우측 성벽에 붙다시피 서 있는 봉암성 성문에 이어진다.

봉암성문 앞 낮은 봉우리에서 뒤돌아서서 봉암성 내 외동장대방향을 바라본 정경이다. 봉우리(남한산성 동장대 성벽 아래)능선의 좌우로부터 시작해서 능선 따라 뻗어가던 두개의 성벽이 남북으로 가로 뻗은 능선을 만나면서 각각 남북으로 갈라져서 각기 적당한 높이에서 회전하여 하나로 합친다. 봉암성은 동장대에서 바라볼 때 凸자를 180도 돌려놓은 형국이다.

『봉암성/蜂巖城』內面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이 중에서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성벽아래에서부터 북동쪽 능선을 따라 벌봉. 한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이 점령하여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12년(1686년)에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숙종31년(1705년)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암성은 본성(남한산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新城'이라고도 하였고, 동쪽의 성이므로 '東城'이라고도 하였다. 성의 길이는2,120m이다.

《제 3암문(外面)》
봉암성을 둘러보고 암문이라기에는 무척 큰 제3암문을 통해 다시 동장대터 옆으로 간다.

《제 3암문(外面)》

제 3암문으로 남한산성 본성으로 들어와 성벽너머로 바라본 하남시 일대 풍경.

남한산줄기너머 강동구와 구리시 그리고 아차산이 조망된다.

성벽아래 보이는 마을은 고골이다. 성벽은 골짜기를 향해 곤두박질하듯 내리 꽂는다.

성벽이 골짜기에서는 안으로 굽고 다시 능선을 향해 갈지자를 그리고 있다.

골짜기 正點에 暗門(비밀문)과 軍鋪址(哨兵所)가 보인다. 이 정도 양 능선에서 암문이 저리 잘 보이니 적이 암문으로 접근했다가는 정면과 양 옆에서 쏘아대는 화살에 고슴도치 되기 十常이겠다.

《제4암문/ 北暗門》성가퀴너머로 바라본 제4암문 바깥쪽 입구모습이다.

《제2 군포터/軍舖址》(성 안쪽 방향으로 본 모습)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1848년)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근처의 수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나타난 이 군포는 시기가 서로 다른 2동의 건물이 겹쳐 나타났다. 고증을 통해서 지금과 같이 정비하였다.

《제2 군포터/軍舖址》
이 군포는 제4암문 바로 옆에 있고, 군포 앞에는 우천시 물을 성밖으로 배출시키는 水口가 있다.

군포와 성곽 사이에 있는 수구의 모습. 들여다보니 내리경사각도가 급하고 길다.

《제4암문/ 北暗門》출구 앞에 지면 높이로 축대를 쌓아 ㄴ자 형태로 꺾어 들어가게 되어 있다.

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은밀히 외부로 통할 수 있는 비밀 통로이다. 따라서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은 배제하였다. 이 암문은 北門(全勝門)의 보조 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1km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장사창동에 도달한다.
이 문은 바깥쪽 외형은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 형식이나 안쪽 입구와 통로는 사각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암문은 적정을 살피기 위한 첩병의 통행이나 필요한 물자 조달과 옹성과의 내왕을 위한 비밀문이다. 문이 닫혀 있어 문의 바깥모양은 앞서 계단 위에서 담은 것으로 갈음한다.

全勝門(북문)을 향해 가다가 돌아서서 바라본 제4암문 방향 풍경이다.

능선 따라 시선도 따라가 보니 소나무 울창한 봉우리에 수어장대가 보이는듯하다.

이정표를 보니 동장대 암문으로부터 600m지점이요, 700m 앞은 全勝門(북문)이 있는 곳이요, 500m거리에 있는 顯節寺로 갈리는 곳이기도 하다.

앞 능선 타고 오르는 저 성벽은 全勝門(북문) 문루에서 잠시 쉬고 수어장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중이렷다.

나는 잠시 쉰다는 이유로 돌아서서 저 멀리 구름 노니는 그 아래 운길산 적갑산 예봉산과 한강을 어림하다가 검단산을 넘어와 동장대 앞 늘어진 산줄기를 중심으로 타고 오른 오랑캐들이 벌봉을 점령했을 것이라는 상념에 젖어본다.

女墻너머로 내다본 하남시 전경.

저만치 앞에 무슨 건물터인가 보다 보나마나 초대소이겠다.

《제 1 군포터/軍舖址》
이 군포지는 주변보다 약간 높고 평탄한 위치에 정면3칸, 측면1칸의 주춧돌이 발굴되고, 다수의 기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다. 군포는 목조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건물로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온돌이나 난방용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 겨울에 추워서 어찌 성을 지키나..

활엽수 물들고 낙엽되니 솔가지는 더욱 청청하네

동장대 터에서 어느 사이에 1.4km를 걸어왔나 보다 저 앞에 全勝門(북문) 門樓가 마중을 나왔다.

《북문 전승문/北門 全勝門》(內面)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全勝門이라고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년)에 신축된 것으로 보아진다.

《북문 전승문/北門 全勝門》(外面)
적의 계략에 빠져 처참한 죽임을 당했으니 얼마나 참혹했을까! 그 넋에 全勝이란 임금의 말이 얼마만큼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현 시점에서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를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하건만.. 고귀한 자국의 젊은 피를 수없이 희생시켜 가며 도움을 준 진정한 동맹을 외면하고 동족을 침략하고 잔인하게 죽이고 지금까지 적대하고 침략과 테러를 서슴없이 恣行하던 북괴들이 이제 우리를 분열시키고 내란을 책동하여 자유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자 그 폭력성을 감추고 위협적으로 손 내미는 결코 그들의 변화 없이는 함께 나갈 수 없는 붉은 정권을 떠받들고 있는 현권력의 실세들! 그들은 매국을 하는가 위국을 하는가 그 정체는 무엇인가?!

전승문 밖 성벽

위례도시로 내려가는 길


다시 全勝門(북문) 누각을 뒤로 하고 右翼門(서문)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문루는 嶺마루에 있으니 좌우 성곽은 오름이다.

양지바른 남문쪽과 달리 북문쪽은 싱싱하게 푸르고 힘찬 소나무가 주를 이룬 것으로 볼 때 소나무는 선선하고 추운 날씨가 좋은가 보다.

접근하기 쉽고 방어하기에 취약한 성벽이나 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기 좋게 성벽의 전면을 >형으로 돌출시켜 雉를 설치한 모습이다. 이 사진을 담은 장소 아래에 암문이 있다.

정면이 대략 90도로 각진 모서리 모양으로 각진 부분이 정면으로 돌출된 치의 내부이다. 모서리에서 이동하지 않고 한자리에서 좌우측 성벽을 살펴볼 수 있다.

좌측에도 똑같은 형태의 돌출된 치가 있어 치와 치 사이 취약한 곳이나 문을 공격해 올 경우 적을 독안에 든 쥐처럼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삼각모서리형으로 돌출된 치 끝부분에서 정면으로 이어진 능선이 보이고 좌측과 우측은 골짜기이다.

우측 치에서 좌측 치에 와서 우측 치를 바라본 정경이다. 오목하게 들어온 성 밑에 암문이 있다. 성벽은 자연지형에 맞춰서 계곡은 성벽을 안쪽으로 들여쌓고 능선에는 성벽을 내쌓아 돌출시켜 雉 역할을 주어 유사시 3면에서 입체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어장대1.4km, 우익문(서문)0.8km, ☜현위치 ☜ 전승문(북문)0.3km, 동장대 터1.6km


《북장대터/北將臺址》
이곳은 북장대가 있던 자리이다. 성의 북쪽 위치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조2년(1624년) 남한산성 수축시 단층 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 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었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북장대터 앞 여장너머로 바라보이는 능선이다. 북장대가 있던 자리 앞 성 밖에 하남시로 뻗어 내린 산줄기는 타고 오르기에 원만한 능선이다. 이에 북장대를 대신하여 더욱 효과적인 옹성을 성 밖에 수축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장대 위치는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산줄기 능선 위에 성곽을 앞으로 돌출시켜 좌우 성벽을 살펴보기 용이하도록 하였다. 북장대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에서 산줄기(가지능선)가 내려 뻗은 곳은 높게 ∧삼각진 형태로 돌출시켜 전방뿐만 아니라 좌우 성벽 일대를 살펴 볼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골짜기를 중심으로 양 능선에는 높게 날개를 활짝 편 듯이 치오른 추녀 끝처럼 치를 두고 성벽을 활대처럼 쌓아 적의 공격으로 부터 취약한 골짜기를 한 눈에 내려다 보며 정면과 좌우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 5암문(연주봉 옹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일체의 시설도 없다.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 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開口部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직사각)이다. 통로의 길이는 5m 정도이고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인 구조이다.

제 5암문(連珠峰 甕城 暗門) 內面

암문을 통과해서 바로 우측 돌계단을 내려가면 연주봉 옹성으로 이어진다.

《연주봉옹성/連珠峰 甕城》
甕城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켭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보호성 성벽으로 좋은 예로 흥인지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웅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조사 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 연주봉 웅성의 둘레는 315m이고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 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연주봉옹성의 전경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조사 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 연주봉 웅성의 둘레는 315m이고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 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포를 설치했던 포대를 복원한 모습이다. 砲사격을 위한 砲口窓을 통해 내다본 前方은 바로 이어진 능선이다.

연주봉포대 위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하남시 강동구 천호동 일대와 아차산이 보인다. 연주봉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정면으로 펼쳐져 있다 저 산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적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옹성이겠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 즉 고골이 바로 아래이다.

봉암성 벌봉과 한봉 그리고 그 너머 우측으로 검단산이 목격된다.

좌측으로 춘궁동과 하남시 그 너머 한강 그리고 남양주 덕소가 조망되고, 우측으로 봉암봉 줄기 너머 검단산 그리고 운길산, 적갑산, 예봉산이 목격된다.

다시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서문(右翼門) 그 너머 수어장대가 목격된다.

줌으로 당겨본 수어장대.

다시 본성 제5암문 앞으로 돌아왔다.

제 5암문(連珠峰 甕城 暗門) 外面
연주봉옹성에서 본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연주봉옹성을 내려다 보고 있는 本城 雉 바깥 모습.

제5암문 바깥 좌측

5암문 바깥 좌측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석촌동, 잠실, 롯데월드, 매봉산, 아차산 등이 목격된다.

《매탄처/埋炭處》
서문에서 북동쪽 능선 방향에 있는 이곳은 埋炭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중간 부분에는 지름5m, 깊이 1m정도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아마도 이곳에 매장되어 있던 목탄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숯도 산성에서 필수로 하는 물품 중 하나 였는데 「남한지」에 숯을 묻은 곳이 94곳에 24,192석이라 하였고, 천추사 별관에서부터 북장대까지 묻은 위치와 양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험준한 산세에 의지해 축조된 농성용 방어 산성이었다. 농성이란 적군이 물러날 때까지 성안에서 버티는 전술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 왕과 군대 그리고 산성 주위의 백성들은 모두 성 안쪽으로 이주하고 성 바깥의 논과 밭의 작물들이 적에게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웁니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수.당 전쟁에서 사람을 모두 소개하고 외부의 물자를 모두 불태우는 청야전술을 사용했다고 한다. 남한산성에는 농성전에 사용할 연료를 항상 성 내부에 비축해 두었는데 보관이 용이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숯은 최적의 연료이었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의 주둔군 막사 주위에는 숯을 대량으로 비축해 두었던 매탄처가 남아있다.

숯을 저장했던 장소이다

서문(右翼門樓) 문루가 맞아준다.


《서문 우익문/西門 右翼門》內面

서문 안쪽 細部

2018년11월11일 아침 강동역에서 5호선 전철을 타고 마천역에서 내려서 등산객을 따라가다 보니 가게들이 늘어선 시장 통 같은 곳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여기서부터 하남시입니다" 강동구와 하남시의 경계가 왠지 낯설다. 이곳은 예전에는 모두 경기도 광주군이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하남시가 되고 한편은 서울시에 편입되었으니 그 세월이 흐르도록 이 주변을 와본지도 수십 년이 흘렀으니 여기서도 거침없는 세월을 본다. 누군가 내 생각을 들여다 봤다면 그럴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수?" 그렇게 남한산성 탐방은 시작됐다. 그러나 사진은 동문(左翼門)에서부터 올렸다.

얼마 쯤 산자락동네를 올라가니 사찰 성불사.

仰蓮臺坐에 釋迦如來, 毘盧遮那如來, 阿彌陀如來,藥師如來, 彌勒佛 다섯 부처가 모셔져 있다.
十二支神에서 "巳" 9시~11시 방향을 주시하고 있네.

十二支神에서 "酉" 17시~19시 방향을 주시하고 있네.

곱게 물이 든 단풍이 지난 비에 모두 져서 수북이 쌓인 낙엽이 온 산을 덮어 붉게 물들이고 있다.


낙엽 쌓인 골짜기에 맑은 물이 아름다운 리듬으로 흐르고 있다.

짙은 안개에 가랑잎도 촉촉이 젖어 그 빛깔이 더욱 짙다.

초행길이라 그런가! 제법 가파른 생각이 든다.

들머리에서 2km 정도 올라왔을까! 저만치 성곽이 보인다.

능선에 올라서서 보니 능선 위 성벽이 양편 계곡의 성벽보다 돌출되어 치를 이루고 있다. 양계곡을 타고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하기 좋을 뿐만 아니라 적정을 살펴보기에도 좋은 구성이겠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 능선상 성벽을 모두 앞으로 돌출시켜 치 형태로 축성하였다.

낯모르는 일단의 등산객을 따라 성벽외곽탐방로를 이용하여 서문(우익문)으로 가는 중이다.

저만치 서문이 보인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 서문을 나서서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을 올리고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또한 부녀자 60만명을 인질로 주고 조공을 받던 위치에서 조공을 바치는 屬國이 되었다.


서문(우익문) 좌측 성벽.

《서문 우익문/西門(右翼門)》
남한산성의 동,서,남,북 4개의 대문이 있다. 그 중 서문(右翼門)은 그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정조3년(1799년)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년)1월30일 인조는 패전국 왕으로서 죄인이 되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의 정문인 남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가야만 했다.

서문 우측 성벽.

서문은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4대문/四大門》
남한산성에는 東門(左翼門), 西門(右翼門), 南門(至和門), 北門(全勝門)이 있다. 그 중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이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되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된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지름길이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행궁을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중요한 길목 남한산성 옛길 봉화로》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모두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다. 광주유수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적요충지라는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선대 왕들의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행성묘사를 능행이라 불렀으며 후대의 왕들이 영녕릉(세종대왕과 효종)에 참배를 하러 가려면 일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 했다. 또한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내륙의 필요한 물품들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 많은 보부상들이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 축을 소화시켜으며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에 이름을 따서 통칭 '봉화로'라 불리었다.

《오영청/五營廳》
여기에서 5영청이란, "수도방위와 국왕호위 그리고 직업군인 양성을 주 업무로 하는 '訓鍊都監', 1624년 정월 이괄의 난을 겪은 후 수도방위와 북벌을 전담으로 설치된 '御營廳', 북한산성 수비를 주 업무로 1624년 설치된 '摠戎廳', 1624년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1626년 남한산성 수비를 주 업무로 설치된 '守御廳', 한성수비를 목적으로1682년 설치된 '禁衛營'이다." 이것은 예비고사나 대기업 입사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문젭니다

수어장대 와 청량당

《수어장대/守御將臺》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을 두고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하려하고 웅장하다. 인조2년(1624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27년(1751년)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수어청/守御將臺 守御廳》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정 감시시설입니다. 특히 남한산성 방위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수어사는 조선시대 군사제도인 5군영 제도 중 하나인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전쟁 중에 '훈련도감'을 설립하였습니다. 훈련도감은 전쟁에 꼭 필요한 상비군(직업군인 )을 훈련하고 유지하는 기관입니다. 이 훈련도감과 함께 4개의 지방 상비군이 설치되는데, 그 중 남한산성에 설치된 군영이 바로 수어청입니다. 조선은 훈련도감 설치 이후 수도 한양을 방위할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먼저 화기를 사용하는 총포군을 양성할 수 있는 어영청을 설치합니다. 다음으로 한양의 북쪽을 방어할 총융청을 설치합니다. 총융청의 본부는 북한산성이었고, 한양에 적군이 진입하기 전 북한산에서 격퇴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설치된 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수어청입니다.
마지막으로 설치된 왕의 직할부대 개념의 금위영까지, 5군영 체제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는 핵심 군사제도 였습니다.

左側面

右側面

이 사진은 1892년 4월 조선 주재 제2대 프랑스 영사 및 전권 공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이폴리트 프랑뎅' 이 1892~1893 사이에 찍은 수어장대 사진이다. 그는 1894년 2월 프랑스로 돌아갈 때까지 외교관으로서 조선사람들을 만나고 서울과 주변의 산하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다. 이 사진은 1900년 4월 14일부터 11월12일까지 열린 만국박람회의 공식 엽서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어장대 앞 좌측 바위에 印刻된 '守御將臺'


《무망루/無忘樓》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편액은 1989년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기념식수비/ 初代 李承晩 大統領 記念植樹碑》

단기 4286년(1953년) 9월6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께서 무망루 우측에 기념으로 심은 나무입니다.

《대한제국 삼각점/三角點》
수어장대와 청량당 사이에 점하고 있는 이 삼각점은 대한제국 (1908-1910년초) 탁지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건국 이래 최초로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일부 지역에 지적세부측량地籍細部測量의 기준이 되는 三角點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일제히 삼각점을 설치하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을 舊小三角點이라고 하였다.
이곳 수어장대에 설치되어 있는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은 各 모를 죽인 정사각형 석주로서 '將坮'라고 불리며 머리부분에 "┼"자가 새겨져 있고, 두 면에는 "度支部"."三角點"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소재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815-1 (지목:사적지)
위도 : 37˚ 20′ 37″ 445
경도 : 127˚ 10′ 32″ 180
해발고도 : 495.34m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설치한 구소삼각점은 현재 전국에 10여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地籍史 的 측면에서 볼 때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광주시에서는 삼각점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삼각점 좌측으로는 수어장대가 있고, 우측으로는 한 단 아래 청량당이 있다.

《청량당/淸凉堂》
청량당에는 장군 이회와 그의 처첩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李晦는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築城할 때 동남쪽 부분을 맡았는데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게 되어 처형당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을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는데 그 후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이 사진은 청량당에서 1960년대 굿을 하고 있는 광경을 담은 것이다. 도당굿은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고자 청량당에서 거행되는 굿으로 남한산성의 축성, 역사, 무교를 바탕으로 한 신당, 민중들의 염원 등의 성격을 아우르고 있다. (사진 함순금 제공)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 책임자였던 이희(李晦)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사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 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측면에서 바라본 수어장대와 청량당.

수어장대를 나와서 좌측 남문(지화문)방향으로 길 나섭니다.

저만치 앞 소나무 숲이 수상적습니다.

四方圍에 방형의 돌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고 돌기둥(石柱)마다 원형의 홈이 같은 모양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철봉이나 목봉을 끼워 방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설치했던 禁柵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그 가운데 자연 암반위에 각면마다 한송이 5엽꽃을 중심으로 이파리를 새긴 문양이 있는 8각의 평평한 받침대를 올리고 그 위에 두개의 원형의 받침돌을 올린 그 위에 큰 원반을 올린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 법식이 아닌 異形의 탑 받침돌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설치한 신앙적 시설물이 아닐까 싶다.


《 제6암문(西暗門)》
적의 관측을 피할 수 있는 어려운 곳에 설치한 이 성문은 일종의 비밀통로이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原城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開口部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平据式이다. 인조 15년(1637년)1월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제6암문(서암문) 城 안쪽


제6암문(서암문) 바깥쪽



붉은 단풍물이 연지인양 두 볼에 살짝 물들었네.

성곽의 선도 길도 예쁜데 단풍 빛깔이 참으로 고와 다시 돌아보고 있다


서문(右翼門1km),과 남문(至和門0.7km) 중간에 있는 육각정이다.

남문을 향해 가는 중이다.



건너 앞 봉우리가 마치 雉의 형태를 하고 있다.



남문은 왕이 들고나는 문이어서 정문에 해당되는 성문으로 4개의 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이 문은 정조3년(1779년)에 기존의 성문 자리에 새로이 문루를 마련하면서 성문 이름을 至和門이라 명명하였다. 1892~1893년 사이 조선 주재 제2대 프랑스 영사 및 전권공사 이폴리트 프랑댕이 찍은 남한산성의 모습이다 그는 외교관의 신분으로 1892년 4월부터 1894년 2월프랑스로 돌아갈 때까지 조선사람들을 만나고 서울과 주변의 산하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다.

《남문 지화문/南門 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각 방위에 모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그 중 남문은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는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년)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을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문 지하문/南門 至和門》
성문 밖 우측 성벽 모습이다.

남문(至和門) 문루의 모습

남문을 지나 제1남옹성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제1남옹성으로 통하는 암문이 보인다. 전방에 대치한 적으로 부터 관찰되지 않도록 기존성벽과 내어쌓은 성벽 사이 틈새막이 식으로 측면에 문을 내었다. 그 너머 본성 밖으로 제2옹성이 보인다.

제7암문으로 가기 전 본성 稚 아래 바깥에 있는 제1남옹성을 바라본 정경이다. 옹성 끝 부분에 축대가 있는데 마주 보이는 신남성을 살펴 볼 수 있고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향에 따라 아래에 축대에 있는 포대에 작전을 지시하는 곳이겠다.

《제7암문 제1남옹성암문/第7暗門 第1南甕城暗門》
暗門은 적의 관측을 피하기 위하여 은폐된 문이다. 즉 비밀문과 같은 것으로 적의 관측을 피해 은밀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위치를 고려해서 낸 문이다. 이 암문은 동-서 방향으로 가던 성벽이 남-북 방향으로 바뀌는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처럼 성벽의 방향을 바꾸어 암문을 설치한 것은 이 지점의 지형이 굴곡이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성벽이적대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외부에서 암문이 관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암문은 제1남옹성과 신남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남쪽 성벽에 설치된 암문 중에서는 가장 이용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활짝 열린 제7암문 밖으로 본성의 稚가 목격된다. 보이는 성벽 밑 길 따라 보이는 本城 稚 아래 제1옹성이 있다. 이제 그 제1옹성을 둘러보고 다시 이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갑니다.

《제1남옹성/第1南甕城》
甕城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인지문 앞 바깥쪽에 성벽을 한 겹 더 둘러쌓은 방호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기 좋은 능선의 목좋은 본성벽 밖 요지에 쌓은 성으로 골따라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양 측면에서 둘러싸고 공격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에 甕城이라한다. 즉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중 3개의 옹성이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신남성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제1남옹성은 이 3개의 옹성 중 서쪽의 첫번 째 옹성이다.
제1남옹성 끝에는 전방으로 4문, 좌우로 각 2문씩, 모두8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고 바로 뒤에 장수의 지휘를 위한 다소 높은 돌로 쌓은築臺가 설치되어 있고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약 50m 거리에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옹성의 둘레는 426m이다.

제1남옹성 우측 성벽의 모습이다.

포대 바로 뒤에 높게 쌓은 돈대가 있다 마주 하고 있는 봉우리를 관망하고 주변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방향에 따라 접근하는 적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포를 쏠 수 있도록 지휘할 수 있겠다.

적과 마주하는 제1남옹성 전면부이다. 바로 뒤에는 장수가 올라가 정정을 관망하고 지휘하는 축대가 있다. 포대는 전면에 4문, 좌우 양측에 2문씩 모두 8문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면 거리가 짧아 4문 중 광각렌즈 없이 3문만 표준렌즈에 잡힌다.

우측(서쪽) 砲臺 모습이다.

전면 좌측 모습이다.

포대 안의 모습이다 좌측에 포탄이나 화약 병기 등을 보관하는 암실이 있다.

축대 우측 포대 배치 모습이다.

장수가 올라가 적을 살펴보고 포대를 지휘했을 축대 전면의 모습이다.

우측 포대에서는 신남성과 그 옆 골짜기가 마주 보인다.

축대 위에서 바라본 우측 포대와 그 전방 골짜기 아래로 성남시가 관측된다.

축대위에서 좌측 포대를 바라본 전경으로 전면의 포대 2문과 좌측의 포대 1문은 유사시 적들이 전방의 신남성을 점령했을 경우, 이어지는 능선과 정상부 신남성을 겨누어 응징할 수 있겠다.

축대위에서 바라본 좌측 포대와 전방의 모습이다.

제1남옹성 축대 옆에서 바라본 본성의 모습이다. 제1남옹성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남한산성 本城의 雉 .

제1남옹성 내 약30m 거리에서 올려다본 본성의 稚 모습이다. 제1남옹성은 本城벽에 붙여 축조 되어 있으나 좌측 끝에 출입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좌측 약 50m 거리에 제7암문이 있기 때문이다.

제7암문과 주변 성곽 바깥 모습, 이 문을 나서 직선(필자 앞)으로 약 50m정도 성벽을 끼고 가면 제1남옹성이다.

제7암문으로 들어서서 다시 성벽을 끼고 左翼門(동문) 방향의 남장대址와 제2남옹성으로 향해 발길을 옮긴다.

제1남옹성과 제2남옹성과의 거리는 불과 200여m 이다. 저만치 큰 稚가 보인다. 남한산성에서 치가 있는 곳은 그 성벽 아래 옹성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생각대로 크고 넓은 치와 남장대 터가 약간 비켜 같이 있다. 우선 제2남옹성을 둘러보기 전에 본성의 남장대 터와 제2남옹성치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제2남옹성치/第2南雍城稚》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의 하나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중 본성에 4개 봉암성에 1개가 있다. 제2남옹성치는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남한산성에 설치된 치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남한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지형에 따라 굴곡이 심하여 치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나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의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제2남옹성치 끝 女墻의 垜口 사이로 내려다본 제2남옹성과 건너편 산봉우리의 신남성의 모습.

《남장대터/南將臺址》
將臺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남장대가 있던 곳으로 城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장대라고 불린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營 중 전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제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장대로 주변 지형을 보더라도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8년 부윤 이태영이 수어장대와 같이 이층으로 고치고 '타운루'라고 편액을 걸었으나 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주춧돌만 남아 있다. 남장대가 있는 이 지역은 제2남옹성치를 설치하여 장대 앞 면적을 넓힘과 동시에 3기의 남옹성을 설치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대임을 알 수 있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정조 때부터는 수도방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유수부의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어 '개성 관리영’, '강화 진무영’, '광주 수어청’, '수원, 장용영’ 등이 설치되었다. 유수는 민사행정은 물론 관내의 營과 廳의 지휘권까지 장악했다. 정원은 2員이나 1명은 경기관찰사가 겸직하고 유수관 마다 전임관 1員을 두었다. 광주와 수원유수는 정2품, 나머지는 종2품직이었다. 留守는 군사적 위치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부내의 포괄된 많은 병선, 병기, 米와 병기제조 등과 관련된 막대한 예산을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의 外東將臺를 포함하여 총 5개의 장대가 있었다. 남한산성 본성은 수어청의 5營이 소속되어 수비하였다. 수어청 5영이 진을 친 4개의 장대 중 유형문화재 제1호인 '수어장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장대는 현재 터만 남아있다. 제2남옹성치 안쪽에 있는 남장대는 "중정남한지"에 따르면 남장대 위에는 '唾雲樓'라는 문루가 있는데, 정조12년(1788년)에 부윤 이태영이 세웠고 순조12년(1802년)에 유수 김관주가 고쳐 지었다고 한다. 남장대의 형태는 17세기에 제작된 "남한산성도"에는 단층 누각으로, 19세기에 제작된'광주전도'.'광주부지도'에는 중층누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2015년 10월~2016년6월30일간 남장대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남장대는 정면5칸, 측면5칸의 정방형 평면 형태의 건물로 확인 되었다. 건물의 초석은 중고주 외진초석 20개, 미고주 내진초석16개 총 36개로 이루어 졌다.

이제 다시 제2남옹성으로 나가는 암문을 찾아서 옹성 중에 제일 크다는 제2남옹성을 둘러 봐야겠다.

병자호란 때 한 번도 점령당하지 않은 難攻不落의 要塞,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가랑잎을 밟으며 만감이 오간다. 현재 나의 본적은 서울이지만, 예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 210번지 지금의 현대아파트 자리였다. 다시 말해서 조선 500년 동안 조상대대로 압구정에 뿌리내린 세종대왕의 후손이다. 그런데 나의 고향은 압구정이지만, 출생은 외가인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에서 태어났으니 지금의 성남시이다. 언주 땅도 좋고 돌마 땅도 좋다 엎어 치나 메어치나 내 고향은 廣州라네. 그래서 인가 이 광주 땅에 있는 남한산성이 살갑고 애착이 간다. 자부심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이것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나의 근성이다. 이제 제8암문이 나오겠지,

암문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남옹성으로는 제일 크다는 제2남옹성도 근처에 있겠다. 그런데 이 암문은 몇 번째 암문일까 8번째 일까!

제8암문을 나서자 바로 좌측 성벽에서 직각으로 꺾어 뻗은 좀 전에 남장대址와 함께 둘러봤던 제2남옹성치의 위압적인 모습이다.

이제까지의 형식적인 雉가 아니라 치다운 규모의 치를 본다.

《제2남옹성/第2南甕城》
甕城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그 중 3개의 옹성이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신남성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제2남옹성은 이 3개의 옹성 중 중앙에 있는 두 번째 옹성이다.
제2남옹성은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는 포대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으며, 포대는 동,서,남 3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둘레가318m로 남한산성에 설치된 옹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제2남옹성에서 특징적인 홍예식 문이 흥미롭다. 넓지 않은 옹성에서 앞 포대부분을 자르듯 구분한 까닭은 무엇일까? 홍예문 위로도 여장이 있었든 듯 쌓았던 전돌이 남아있다.

홍예문을 중심으로 前室 과 後室로 나뉜 중 앞쪽 포대가 있는 □형에서 전면에는 3개의 포대와 그 사이에 돌계단을 두었다

□형에서 좌측 면에는 3개의 포대만 설치되어 있다.

□형에서 우측 면에도 3개의 포대만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제2남옹성의 포대는 前面 3개, 左側面 3개,右側面3개 모두 9개의 포대가 있다. 前室은 포사격만을 위한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포대 안에는 별다른 장치나 시설이 없다.

전면 가운데 砲臺 砲穴을 통해 내다본 전경이다. 포혈은 정면의 신남성을 겨누고 있다.

전면 포대에 설치된 돌계단에 올라서서 제2남옹성치를 바라본 정경이다.

砲臺室 중간에서 本城의 제2남옹성雉를 바라본 모습이다.

이 홍예식 문은 성문만큼이나 견고하게 잘 쌓았다. 홍예문을 통해 전면의 포대를 바라본 정경이다.

虹霓式 문을 통해 本城의 雉를 바라본 정경이다.

치는 부분적으로 수축한 것이다.

서쪽 방향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제1남옹성치가 보인다. 대강 200m 거리밖에 안되겠다. 그 만큼 이 남쪽이 신남성으로 이어진 산줄기들이 오르기에 완만하여 적이 접근하기가 쉬운 지형적으로 취약성 때문에 이곳에 3개의 옹성을 구축하여 보완한 것이겠다.

제 8암문으로 가기 전에 올려다본 제2남옹성치의 모습이다. 치 안쪽으로 남장대터가 있다.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제8암문의 위치이다 제2남옹성치 바로 옆이다.

제8암문 바깥 모습이다.

제8암문 세부모습.

이제 동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제3남옹성이 있겠다.

2남옹성과 제3남옹성중간지대에 둥그스럼한 치 형태를 갖춘 곳이다.

마포를 깔아놓은 가파르게 내려가는 중간에 제 9암문이 있다.

취약지역을 보완하기 위해 약식으로 구축한 雉이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된다. 여장을 끼고 내려가는 길과 우측 마포를 깔아 놓은 길이 있는데 여장을 끼고 내려가면 암문 위로 지나가게 되므로 암문을 발결할 수 없다. 우측 마대를 깐 길로 내려와 보니 바로 아래 제9암문이 있다.

제9암문을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암문 바깥입구에서 동편 성곽을 바라보니 제3남옹성치가 보인다.

다시 본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할 암문을 바라본 모습이다. 이 암문으로 밖에서 제2남옹성이나 제3남옹성으로 병력 이동도 했을 것으로 보아진다.

다시 제9암문으로 본성에 들어와 암문 앞에서 진행방향을 바라보니 100여m 앞에 제3남옹성치가 보인다.

다시 성가퀴 옆 돌계단으로 암문 위로 올라가서 지형에 따른 성곽의 線을 본다.
남한산성 雉는 높은 마루턱이나 능선에 설치하여 좌우 골짜기의 취약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위해 설치한 전략적 시설물이다. 따라서 골짜기와 능선이 교차적으로 번갈아 이루진 지형에서는 성곽을 지그재그로 즉 다시 말해서 골은 성벽을 들여쌓고 능선은 내어쌓는 식이다. WWW 이런 방식으로..

돌계단을 내려와서 계단식으로 쌓은 여장들의 배열된 모습과 위의 사진을 담은 곳을 담아 본다.

거쳐온 치를 돌아서서 바라보니 지형에 맞춰 雉형식을 갖춘 성곽 여장을 보수한 것 같은데, 무엇이 잘못되었나보다 미관도 안 좋게 파란 비닐포를 쉬웠다.

제 3남옹성 쪽을 바라본 모습으로 본성의 치가 성 바깥쪽으로 돌출된 모습이 보인다. 남한산성에는 취약한 곳은 능선에서 별도의 치를 설치하지 않고 본성의 성곽을 약간 돌출시키고 그 바깥에 옹성을 설치하였다.

거쳐 온 제2남옹성과 남장대址 방향이다. 여장을 파란 비닐로 덮어 놓은 곳은 약식 雉가 있는 곳으로 옆 골짜기에 안으로 들이 쌓은 성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하기 위하여 능선의 성벽을 바깥쪽으로 내어쌓은 것이겠다.

本城의 雉와 그 아래 성밖에 제3남옹성의 모습이 보인다.

치는 적정을 살피기 좋은 위치에 살피기 좋은 여건으로 설치한다 적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조망권을 갖기 위함이겠다.

제3남옹성치를 지나 바로 제3남옹성으로 통하는 제10암문 안쪽 모습이 보인다.

제3남옹성을 둘러보기 위해 남한산성 본성에서 나와 성곽을 끼고 돌아나가다 돌아서서 제10암문 바깥 모습을 담았다.

제10암문을 나와 우측 성곽을 끼고 바라보니 나뭇가지에 가린 제3남옹성 치가 보인다. 거리는 약 30여m정도 될까 싶다.

《제3남옹성/第3南甕城》
남한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신남성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제3남옹성은 3개의 남옹성 중 동쪽에 있는 세 번째 옹성이다. 옹성 끝 부분에 5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砲穴의 형태가 'ㅁ'자가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설치된 것이 특징이며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없다는 것 또한 다른 옹성과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제3옹성 포대 배치 모습

砲穴의 형태가 'ㅁ'자가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설치된 모습이 보인다. 다른 포대의 砲穴 'ㅁ'모양과 달리 제1남옹성만 유일하게 凸자 형이다.

포대 바깥 앞 전경

제3남옹성 뒤 本城 雉 모습

포대 뒤쪽 돌계단 모습

제3남옹성 포대진지 밖에서 바라본 제3남옹성과 본성 치의 모습.

제3남옹성 포대 밖에서 포혈로 안을 들여다본 모습으로 안쪽 포진지 뒤 본성 치 우측 하단이 보인다.

제3남옹성 뒤 본성 치가 높이 솟아 위치해 있고 본성에서 3남옹성으로 통하는 제10암문은 성벽우측을 끼고 돌아 50m거리에 있다.

제3남성 뒤 본성치의 측면 모습이다.

제3남옹성에서 남한산성 본성으로 들어가는 제10암문 바깥쪽 모습이다.

본성 안에서 바라본 제10암문 통로 모습.

제3남옹성에서 남한산성 본성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제10암문 모습이다.

본성 담(女牆)옆 길의 형태 제3남옹성치에서 내려온 길의 모습.

제10암문에서 제11암문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다. 성곽길 옆에 새로 낸 길에 마대를 깔았다.

제11암문과 수구문 근처의 가파른 길을 겨울철 미끄러움을 예방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무서리 내릴 지음 마음은 단풍들고 발길은 바람에 낙엽처럼 딍군다.

남문 방향에서 동문을 향해 비탈진 성벽길을 내려오다가 건너편 송암정址를 줌으로 당겨본 모습이다.

청량사의 모습을 줌으로 당겨본 풍경이다.

동문 좌우측 성곽의 선을 담은 모습이다.

右翼門(동문)을 줌으로 당겨본 풍경이다.

제 3 남옹성을 지나 가파르게 비탈진 성벽을 따라 제11암문으로 가는 길에 우익문과 주변 풍경을 담았다.

《제11암문/ 暗門》
이 암문은 동문(우익문)이 지대가 낮은 곳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높이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옆 남쪽에 위치한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1암문은 다른 암문에 비해 규모도 크고 우마차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제11암문 안쪽 모습이다.

제11암문 바깥쪽 모습이다.

제11암문 밖 좌측에 辛酉 · 己亥 · 丙寅迫害 때 순교한 천주교인 300명을 기리는 아래와 같이 비문이 있다.
"흐르는 물처럼 낮은 자리를 애써 찾았던 사람들, 빛을 맞이하는 동쪽을 향해 평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끝내 이곳 남한산성의 동쪽 시구문을 지나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박해시기 남한산성에는 순교한 천주교인 300여명이 시구문을 통해 이 계곡에 버려졌습니다. 버려진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되고 짐승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동문 좌익문과 제11암문 그리고 수구문》
남한산성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지화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9년)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하나씩 붙여 졌는데 동문은 좌익문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곳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옆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문/水門》
해발370~400m의 산능선을 따라 축성된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의 물이 이 수문을 통해 흘러나가고 있다. 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수구문 바닥과 천장에는 홈이 파여 있는데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문.좌익문/東門 左翼門》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行宮》
남한산성행궁은 다른 행궁과는 달리 宗廟와 사직을 갖추고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가 있는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유일하다. 남한산성행궁은 인조2년(1636년)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 등이 여주이천 등지로 조상들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머물렀다. 남한산성행궁은1909년까지 잘 보존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다. 1919년 행궁에 있던 좌승당을 京案里로 옮겨 경찰서로 사용하였다. 그 이후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지속적인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02년에 상궐에 해당하는 내행전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2004년 좌전 등을 중건하였으며 2007년 6월8일 남한산성행궁을 사적제480호로 지정하였다.

① 한남루/漢南樓 ② 북행각(전시실)/北行閣 ③ 외행전/外行殿 ④ 통일신라건물지/統一新羅建物址 ⑤ 일장각/日長閣 ⑥ 좌승당/坐勝堂 ⑦ 이위정/以威亭 ⑧ 재덕당/在德堂 ⑨ 내행전/內行殿 ⑩ 통일신라 기와유구지 ⑪ 좌전/左殿
《행궁/行宮》
행궁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많은 행궁이 건립되었다. 몇몇 행궁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지어졌다. 강화행궁 · 광주행궁 · 양주행궁 · 전주행궁이 그 例로 이들은 왕이 전란을 피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선대 임금들의 영정과 왕실 일가를 보호하며 왕실의 귀중한 물건과 문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다. 남한산성의 광주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금의 이동은 질병치료와 휴양을 위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온천이 있는 온양 · 이천 · 고성과 초수가 난다는 청주 · 목천 · 전의에 왕의 휴양을 위한 행궁이 건립되었다.
(椒水 냄새가 후추와 같고 씻으면 안질이 낫는다고 알려진 물)

《통일신라건물지/統一新羅建物址》
신라가 주장성을 쌓은 시기는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672년)은 당나라 병력 5만명이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범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 주장성은 당나라와 전투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한강유역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행궁내에 위치한 이 건물 안의 모습은 교육차원에서 신라건물지 발굴현장을 일부 드러내 보인 것이다.

창공에서 내려다본 하궐 발굴현장
1~5차(1998~2003)남한산성 행궁지조사 행궁지와 주변에 대한 조사를 통해 행궁 · 좌전 영역을 확인하였고 복원을 위한 다양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게 된다.

6차(2003~2004) 하궐 외행전 발굴조사
하궐 외행전 앞 마당에서 통일신라 시대 기와 · 초석이 확인되었는데, 삼국사기의 통일신라 주장성과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下闕御道

하궐 외행전 앞마당에서 발굴된 대형기와

7차(2005~2008) 통일신라건물지 발굴조사
통일신라 건물지는 길이53.5m(16칸), 폭 17.5m(6칸)이다. 지금까지 산성에서 발견된 건물지 중 최대이다.
(통일신라건물지 바깥기둥 위치)


발굴조사 당시 건물지 담벽의 모습

발굴당시 건물지모서리 초석 사진

《행궁터 복원공사 중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저장소/瓦貯藏所》
이 신라기와 저장소는 남한산성 행궁 서편 담장 아래에 있다. 발굴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한 것이다.

기와저장소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대형기와

통일신라 대형기와와 조선시대기와의 비교


통일신라건물지 1


《남한산성 행궁 앞 종각의 천흥사 동종 모조품/ 天興寺銅鐘 模造品》
현재 남한산성 행궁 앞 종각에 걸어놓은 종은 원형(천흥사 동종)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였으나 크기에서 원종보다 약 3배 정도 크게 제작되었다.
본래의 '천흥사 동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상시 전시되어 있는 국보 제280호이다
이곳 남한산성에 걸려 있는 이 동종은 비록 국보 천흥사 동종을 본따서 근래에 주조된 종이지만 그래도 왠지 친근감에 올려본다.
본래의 천흥사 동종이 언제 어느 때 남한산성으로 옮겨졌는지 그 연유는 모른다. 다만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격하시키는 一環으로 설립한 '李王家博物館 '으로 옮겨졌다. 해방 이후 덕수궁 내 국립박물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상시 전시되고 있다. 천흥사 동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에 따르면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鑄造된 것으로 원래는 고려 태조4년(921년)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모조품/ 天興寺銅鐘 模造品》
(銘門이 새겨진 부분)

(撞座가 새겨진 부분)

《천흥사 명문 동종/天興寺 銘 銅鐘》국보280호
높이174.2cm, 입지름 96.4cm 크기의 이 동종은 신라동종 양식을 충실히 이어 가면서도 새로운 양식으로 한층 더 발전한 고려 때의 동종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는 한마리의 용으로 만들어 龍紐라고 부르며 그 옆에 筒은 음향효과를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하여 音筒이라고 부른다. 용뉴는 신라 동종의 용뉴를 닮았으나 입에 여의주를 물고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는 형태는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형식이다. 음통 표면 역시 신라 종처럼 5단으로 나누어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 윗단과 아랫단에는 連珠文帶(연속된 구슬무늬 띠)를 두르고 그 안에 寶相唐草文(보상당초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 둘레를 四分하여 두 개의 撞座(종을 치는 자리)와 飛天像을 번갈아 배치하였다. 또한 비천과 당좌 사이 한곳에 位牌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는 글을 새겼다. 새겨진 글을 통해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鑄造(쇠를 녹여 틀에 부어 만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종 윗면 四方에 당초무늬띠로 사각형의 창을 마련하고 그 안에 돌출된 乳頭 모양의 도드라진 꼭지를 9개씩 배치하였는데 이는 음폭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꼭지는 용뉴의 위치로 볼 때 용의 머릿쪽 과 꼬리쪽에 각각 1개, 용뉴 우측에3개가 유실되었고 좌측은 온전히 9개이다 주조 당시 유실된 것인지 아니면 音幅과 音色의 조절 측면에서 떼어 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용뉴와 음통/龍紐 音筒》

《종유/鐘꼭지》

《구연부의 연주문띠와 보상당초무늬/口然部 連珠文帶 寶相唐草文》

《명문/銘文》"聖居山天興寺 鐘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성거산천흥사 종명 통화이십팔년경술이월일)

《비천상/飛天像》

《당좌/撞座》

(이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원판사진이다.)

《演武館》
연무관은 군사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건물로 인조2년(1624년)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演武堂으로 부르던 것을 숙종(재위1674-1720)때 수어사 김좌명으로 하여금 다시짓게 하고 鍊兵館이라 쓴 현판을 하사였다. 정조 때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당 규모는 약 330㎡로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 내무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前後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演武館》유리원판 옛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조선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演武堂으로 부르던 것을 숙종(재위1674-1720)때 鍊兵館이라 쓴 현판을 하사하여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은 문무과 시험을 보는 공개적인 시험 장소였으며 특히 무기 시연은 물론 晝操 夜操 등의 군사훈련을 거행했던 장소이다.

도로가에서 바라본 연무관 모습.

《서흔남 묘비/徐欣男墓碑》
관어정터 호숫가에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온전하고 하나는 상부가 절실되고 훼손이 심하다.
이 비들은 병자호란 당시 수어청 병사의 私奴의 신분으로 수훈을 세워 일약 당상관에 이른 인물 서흔남의 碑이다. 서흔남은 노비의 신분으로 무당, 瓦匠 등의 일을 하다가 인조15년(1637년)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외부와 연락이 단절되자 연락업무를 자원하였다. 그는 병자, 불구자, 거렁뱅이 등으로 변장하고, 때로는 청군병사를 살해하면서 청군 진영을 세 번이나 왕복하며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단절된 성밖 조선군과 연락업무를 이행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고 당상관이 되었다. 효종2년(1651년)에는 남한산성 성벽과 4대문 문루 동북창사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해서 목재조달 업무를 관장했다. 後에 정2품 가의대부로 책봉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 묘비는 현종8년(1667년)3월13일에 건립되었다. 이 비는 손상이 심해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한씨를 왼쪽에 묻었다"는 문구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에 다시 세운 것 같다. 이 비들은 광주시 병풍산에 있던 것을 광주시청과 광주문화원에서 발견하여 1998년에 이 위치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관어정터/觀魚亭址》
순조4년(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은 3개의 못 중에서 서편 작은 섬에 있는 정자로 池水堂과 마주하고 있으며 작은 배를 두어 왕래하였었다. 제갈량이 못에 臨하여 方策을 결정하며 敵을 헤아렸다는 데서 그 이름(觀魚亭)을 取하였다고 한다. 우측 송림 사이로 지수당이 보인다.


《지수당/地水堂》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이다.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과 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의 연못만 남아 있다. "중정남한지"에 南鶴鳴이 쓴 '地水堂記'에 의하면 "대개 地水堂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처음 당을 세울 때였으니, 대개 周易大傳의 '백성을 포용하고 기른다'는 뜻을 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觀魚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복사본은 1958년에 촬영된 것으로 떠온 것이다.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제3 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정자의 남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매몰된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하여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 후면 모습

지수당 좌측 앞에 세워진 비이다. 세워진 위치로 보아 '공덕비'나 '기념비'이겠지만, 풍화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 비석의 다듬었던 표면이 풍화로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가 그 본래의 멋진 표면을 아름다운 문양인양 들어내 보이고 있다. 지수당을 건립한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아닐까 싶다.


2018년11월11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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