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역대왕사(百濟歷代王史) 5

百濟歷代王 25대 무녕왕(武寧王)~31대 의자왕(義慈王)

생몰(462∼523). 백제 제25대왕으로,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라 했다. 동성왕의 둘째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는 이설이 있으나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의하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8척의 키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가(?加)가 보낸 자객의 손에 동성왕이 쓰러지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저항을 꾀하고 있던 백가를 토벌하였다. 그의 재위연간은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에 대비한 시기로, 그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국력회복에 힘썼다. 즉..

百濟歷代王 17대 아신왕(阿莘王)~24대 동성왕(東城王)

(생몰 ?∼405). 백제의 제17대왕으로 재위기간은 392년부터 405년까지이다. 백제 15대 침류왕의 맏아들로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花王)이라고도 한다.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는데, 신비한 빛이 밤을 밝혀주었다는 출생설화가 전한다.아들로는 제18대 전지왕과 훈해(訓解), 설례(설禮)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의 사망 당시(385)에 그가 어렸기 때문에 16대왕에는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나, 불과 9년 뒤인 394년 전지의 태자책봉과 405년경 전지, 설례 등의 왕위다툼을 보면, 385년경에는 이미 아들까지 있었을 것이니 그때 아신왕이 어렸다 함은 의문이다. 진사왕의 즉위는 다른 어떤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아신왕 치세의..

百濟歷代王 9代 책계왕(責稽王) ~16代 진사왕(辰斯王)

?∼298(분서왕 1) 백제 제9대 왕으로서 서기286년부터 29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일명 청계(靑稽) 또는 책체(責替)라고도 한다.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지금의 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蛇城: 지금의 서울 풍납동 토성)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漢軍: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참고문헌) 三..

百濟歷代王 제1代 온조왕(溫祚王)~제8代 고이왕(古爾王)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먼저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에 정착한 집단이 먼저 큰 세력으로 대두하였고, 그에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부근 또는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沸流)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 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삼국사기》 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東明)이라 하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