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역대왕사(百濟歷代王史)

百濟歷代王 제1代 온조왕(溫祚王)~제8代 고이왕(古爾王)

鄕香 2006. 3. 2. 00:25

 

 

< 百濟 始祖 온조왕(溫祚王) 재위 서기전 18-서기28 >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먼저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에 정착한 집단이 먼저 큰 세력으로 대두하였고, 그에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부근 또는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沸流)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 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삼국사기》 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東明)이라 하는 한편, 동명을 백제의 시조라고도 하였다. 현존 문헌들에 의하면, 북부여(北扶餘), 고구려(卒本扶餘라고도 함), 백제(南扶餘라고도 함) 등 부여족 사회들은 모두 동명을 시조라 하고, 그를 숭배하는 제전(祭典)을 각기 가지고 있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라 하는 것도 그러한 부여족 일반의 상황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두 집단의 연맹관계를 형제의 관계로 강조하기 위하여 만든 연맹설화의 구성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등에 온조왕 치세(治世)의 일이라고 한 것들의 상당부분은 실제로는 백제의 발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소급해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온조왕대에 마한지역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한 영토의 개척은 실제로는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일이다. 또한, 백제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왕족으로부터 위례성 왕족에게 넘어간 것이 온조왕대였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연맹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는 것도 온조왕대에서 훨씬 후대인 고이왕대에나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韓國史―古代篇―(李丙燾, 震檀學會, 1959).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盧明鎬, 歷史學硏究 Ⅹ, 1981).  

 

 

 

< 2대 다루왕(古爾王)재위 28-77년 >

?∼77(기루왕 1). 백제의 제2대왕으로 28년부터 77년까지 49년 재위했다. 온조왕의 맏아들이며 제3대 기루왕의 아버지이다. 온조왕 28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온조왕이 죽자 즉위하였는데 성격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위망(威望)이 있었다고 한다. 다루왕의 다스릴 당시에 대하여,《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말갈(靺鞨)과의 전투가 자주 나타난다. (이 부분은 대륙 백제 시대로 보는 학설도 있음.) 이 말갈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백제를 건국한 부여족이나 백제에 복속된 마한과도 다른 부류로 생각된다. 이들 말갈은 이전부터 낙랑(樂浪) 등 한군현(漢郡縣)의 사주를 받아 백제를 침공하고 있었다. 이는 아직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작은 세력에 불과하였던 백제가 외세와의 대결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기 33년 남부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청동기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벼농사가 어떠한 계기로 이때 크게 장려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63년 낭자곡성(娘子谷城: 청주)까지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다고 하나, 당시의 백제 상태로 볼 때 믿기 어렵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3대 기루왕(己婁王) 재위 77-128년 >

?∼128. 백제의 제3대왕으로서 77년부터 128년까지 재위했다. 제2대 다루왕의 맏아들로서 33년(다루왕 6)에 태자로 책봉되어, 77년에 다루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루왕 치세에 대한 내용에는 천문이변, 지진, 큰 가뭄, 태풍, 기상이변 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기록의 내용에 흉년, 재난 또는 흉조를 뜻하는 것들이 많은 것은 기루왕이 다스린 시대의 백제가 큰 시련기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百濟本紀의 分析(申瀅植, 韓?劤博士停年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1).

 

 

 

< 4대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5 >

?∼165. 백제의 제4대 왕으로서 서기128년부터 165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아버지는 제3대 기루왕이다. 132년(개루왕 5)에는 북한산성을 쌓았다. 155년에는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하다가 탄로가 나 도망왔는데, 신라왕이 글을 보내어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이에 신라왕이 노하여 침공해왔으나 잘 막았다. 《삼국사기》에는 개루왕의 아들로 제5대 초고왕과 둘째 아들로 제8대 고이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이왕이 개루왕의 아들이라 함에는 문제가 있다. 재위기간만 38년이므로 죽을 때의 개루왕은 노령이라 하겠는데, 고이왕의 즉위는 개루왕의 죽은 해에서 69년 뒤이며, 그 뒤에도 고이왕은 52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이 아니라 개루왕의 방계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이왕의 선대계보를 개루왕에게 연결시킨 것은 당시 백제왕실의 여러 혈족들 중에서 개루왕을 기점으로 하는 지파가 존재했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제21대 개로왕은 일명 근개루왕(近蓋婁王)이다. 이렇게 후대의 왕이 개루왕의 이름을 따고 있음도 그러한 지파 의식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 . 百濟建國考(金哲埈, 百濟硏究, 忠南大百濟硏究所, 1982),
百濟王室交代論에 대하여(李基東, 百濟硏究, 忠南大百濟硏究所, 1982).

 

 

 

<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214 > 

?∼214(구수왕 1). 백제 제5대왕으로 서기166년부터 214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개루왕의 맏아들로 소고왕(素古王) 또는 속고왕(速古王)이라고도 불렸다. 개루왕 말년에 신라에서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해온 아찬(阿飡) 길선(吉宣)의 송환문제로 양국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초고왕의 즉위 후 신라와의 공방전이 되풀이되었다. 188년(초고왕 23)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고, 189년 7월 신라군과 구양(狗壤: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였다. 190년 신라의 서쪽 국경지대의 원산향(圓山鄕: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을 공격한 뒤,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와산(蛙山: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에서 크게 격파하였고, 204년에는 신라의 요차성(腰車城: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양국 사이의 주된 전장은 예천, 옥천, 보은을 잇는 소백산맥 일대였다.한편,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赤峴), 사도(沙道) 두 성을 쌓아 동부의 민호를 옮겨 충실하게 하였다. 214년 북부출신 진과(眞果)로 하여금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여 탈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갈은 날랜 기병으로 술천(述川: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지역까지 침범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韓의 國家形成 上·下(千寬宇, 韓國學報 2·3, 1976).

 

 

 

< 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234 > 

?∼234. 백제의 제6대왕으로 귀수왕(貴須王)이라고도 한다. 214년부터 234년까지 재위했다. 그런데 이 무렵은 백제가 아직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그 연대가 정확하다 해도 국가체제 성립 후의 재위와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제5대 초고왕의 맏아들이며, 제7대 사반왕은 그의 맏아들이고 제11대 비류왕은 둘째 아들이라 전하는데, 그렇다면 연대상의 문제가 있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구수왕은 키가 7척에 풍채가 빼어나 비범했다고 하며, 온조계(溫祚系) 왕족 출신으로, 구수왕대를 경과하는 동안 온조계 왕족에 큰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구수왕이 죽은 뒤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함은 연대상으로 모순된다. 고이왕은 구수왕과는 온조계 왕실 내의 서로 다른 지파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수왕의 사망 뒤 고이왕의 즉위와 사반왕의 폐위는 곧 초고왕에서 구수왕으로 계승된 지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구수왕대의 기록은 말갈, 신라 등과의 전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한 전투들은 대부분이 백제의 참패로 끝나고 있고, 구수왕대말에는 혹심한 가뭄이나 기근 등의 재난까지도 겹치고 있다. 연맹체제하에서 이러한 사실들은 구수왕이 속한 초고왕계 세력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고이왕의 즉위는 백제의 국가체제 형성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구수왕대말의 왕실교체가 당시의 광범위한 정치, 사회적 변동과도 관련됨을 뜻한다. 초고왕계의 재등장은 그뒤 비류왕의 즉위로 이루어지는데, 그의 후손으로는 근구수왕이 있다. ‘근구수’는 ‘구수’와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왕명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 7대 사반왕(沙伴王) 재위?~ 234 >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다. 다만 백제의 제7대왕이라는 것만 알려진다. 아버지는 구수왕으로 234년에 즉위하였지만, 곧 폐위된 것으로 전한다. 사반(沙泮)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구수왕이다. 《삼국사기》 고이왕 즉위조에는 구수왕이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폐위되고, 고이왕이 즉위하였다 한다. 사반왕과 그 선대로 이어지는 기존 왕통(王統)에 대해 고이왕은 먼 방계출신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사반왕의 폐위와 고이왕의 즉위는 정치적 세력의 교체로 이해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王室支配權의 强化와 五部體制(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1988).
  

 

 

 < 8대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 >

백제의 제8대 왕으로 서기 234년부터 286년까지 재위했다. 초고왕의 동생으로서, 제6대 구수왕이 죽은 뒤 장자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니 곧 고이왕이다. 고이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주서 周書》 및 《수서 隋書》의 백제전에 보이는 “백제시조구태(百濟始祖仇台)”의 ‘구태’를 ‘구이’로 읽고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질적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 - 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밖에 《신찬성씨록》에는 고이는 ‘구이(久爾)’ 또는 ‘고모(古慕)’로 표기되어 있다.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에 주력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기반을 다져놓은 인물이었다. 집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좌장(左將)을 설치하여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그리고 지배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중앙관등제를 마련하였다. 고이왕 때의 중앙관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이른바 ‘6좌평 16관등제’가 고이왕 27∼28년에 완비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하여 백제 16관등제의 완성시기를 고이왕 때로 보는 학자의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고도의 정비된 관등제는 《주서》 및 《구당서 舊唐書》와 비교해 볼 때 고이왕 때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이때는 좌평급(佐平級), 솔급(率級) 등의 관등이 설치되어 뒷날 16관등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중 좌평은 솔급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귀족회의의 의장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있어서 이와같은 관등제의 설치는 백제의 지배층 내에 편입된 대소 족장세력들을 체계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만큼 집권적인 지배체제와 권력장치가 마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이왕은 또 관리들의 뇌물수수를 금지하는 범장지법(犯贓之法)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3배를 배상하게 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禁錮)케 함으로써 관리들의 규율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나라의 남쪽 평야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장려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있어서 백제의 대외관계는 두 방면에서 커다란 전환을 보게 되었다. 하나는 마한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중국군현과의 관계이다. 마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직산(稷山)에 자리잡은 목지국(目支國)의 세력을 압도하여 이전의 부용관계(附庸關係)를 청산하고 한강유역의 실질적인 영도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낙랑군, 대방군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전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바꾸었다. 백제와 중국군현과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예로서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관丘儉)이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고이왕은 그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경을 공격한 일이 있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이왕 때는 안으로는 지배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집권력의 강화를 보게 되었고, 밖으로는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중국군현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적인 기미책(羈미策)에서 벗어나 중국군현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고이왕은 고대의 정청(政廳)으로서 왕위와 신위(臣位)가 뚜렷하게 구분된 남당(南堂)을 설치하여 국정을 이끌어 감으로써 그 지배력과 권위를 더욱 과시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周書, 隋書, 舊唐書, 新撰姓氏錄, . 韓國史 -古代篇(李丙燾, 乙酉文化社, 1959).
三韓의 國家形成 下(千寬宇, 韓國學報 3, 1976). 百濟王國의 成長(李鍾旭, 大丘史學 12, 13, 1977).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盧重國, 韓國史論 4, 서울대國史學科,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