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역대왕사(百濟歷代王史)

百濟歷代王 25대 무녕왕(武寧王)~31대 의자왕(義慈王)

鄕香 2007. 6. 22. 17:08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 >생몰(462∼523).

백제 제25대왕으로,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라 했다. 동성왕의 둘째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는 이설이 있으나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의하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8척의 키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가(?加)가 보낸 자객의 손에 동성왕이 쓰러지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저항을 꾀하고 있던 백가를 토벌하였다. 그의 재위연간은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에 대비한 시기로, 그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국력회복에 힘썼다. 즉, 501년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였고, 503년 마수책(馬首柵)을 태우며 고목성(高木城)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그뒤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말갈과의 싸움은 그뒤 계속되어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합세하여 한성(漢城)을 치고자 횡악(橫岳)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 명하여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는데, 이때 이를 독려하기 위하여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관계를 강화하여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그리하여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한편, 512년 상차리(上?唎), 하차리(下?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유역의 어느 곳으로 짐작되고 있다. 513년과 516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왜국에 보내어 문화계발을 돕게 하였다. 또한, 그는 민생의 안정에도 노력하여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하였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국내의 유랑인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녕(武寧)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梁書, 南史, 日本書紀, 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文化財管理局, 1973),
百濟武寧王陵出土誌石에 대하여(李丙燾, 學術院論文集 人文社會科學 11, 1972; 韓國古代史硏究, 1976).
 

 

 

<26대 성왕(聖王) 재위523~554 >

무녕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明농)이다. 《양서 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하고 있어서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무녕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온 왕권강화정책을 계승하여 538년(성왕 16)에 사비(泗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고 하는 외부세력의 강요에 의하여 행해졌던 웅진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천도에는 사비지역의 토착 신진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천도 후 국호를 일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조(梁朝)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 공장(工匠), 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하여 백제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또한 성왕은 인도로부터 범어(梵語)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 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하여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성왕은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이와 더불어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웅진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체제의 정비와 통치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또 왕도의 통치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통치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魯制)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의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 군, 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같이 중앙관제와 지방의 통치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운영에 있어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왕은 국제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여 나갔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한편,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하여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지금의 서울)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여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 하류유역을 탈취하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하여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하여 옴으로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매 성왕은 554년에 비전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보복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같은 군사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양국의 싸움은 관산성(管山城)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초기에 우세를 보였던 백제는 성왕이 구천(狗川)지역에서 신라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하여 4인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인에 달하는 사졸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중심의 정치체제가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관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삼국의 역학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참도문헌)

三國史記, 日本書紀, 韓國史 - 古代篇(李丙燾, 乙酉文化社, 1959),
泗비時代 百濟支配勢力의 變遷(盧重國, 韓?劤博士停年紀念論叢, 1981).

 

 

 

<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 > 생몰 1525(성왕 3)∼598(위덕왕 45).

백제 제27대왕으로 554년부터 598년까지 백체를 통치했다. 성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창(昌)이라 한다. 태자 때 성왕을 도와 신라에 대한 정토(征討)에 앞장섰다. 당시 성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군을 중심으로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구성된 북진군을 일으켜 고구려공격에 나섰다. 그 결과 백제는 475년(문주왕 1)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하류의 6군(郡)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맹국인 신라가 백제를 배반하고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뒤 무력으로 한강하류 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성왕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꾀하였다. 이때 백제의 조정에서는 신라정토를 반대하는 귀족세력이 있었지만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정토군을 일으키는 데 적극적인 소임을 한 사람이 바로 태자 창이었다. 신라정토군의 선봉에 나선 창은 마침내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성왕과 4명의 좌평(佐平)을 비롯하여 3만명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하였다. 성왕의 전사로 태자 창은 왕위에 올라 위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관산성 패전에 대한 귀족들의 책임추궁으로 정치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반면에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대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정치체제는 이전의 왕권중심체제에서 점차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위 후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여 온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98년(위덕왕 45)에 수나라가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자진하여 군도(軍導)가 되기를 청하는 등 고구려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하여서도 관산성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빈번히 국경을 침범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남북조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적 고립을 면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북제(北齊)로부터 570년에는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使持節侍中 車騎大將軍 帶方郡公百濟王)에 책봉되고, 571년에는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使持節 都督 東靑州諸軍事 東靑州刺史)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냈고, 또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충동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日本書紀, 韓國史 - 古代篇(李丙燾, 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59),
 泗비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盧重國, 韓?劤博士停年紀念論叢, 1981).

 

 

 

< 28대 혜왕(惠王) 재위598~599 >?∼599(법왕 1).

백제 제28대 왕으로 598년부터 599년까지 재위했다. 이름은 계(季)이고 헌왕(獻王)이라고도 한다. 성명왕, 즉 성왕의 둘째 아들로서 형인 위덕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삼국유사》 왕력에는 혜왕은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위덕왕의 이름을 명으로 잘못 정리한 데 따른 착오로 보인다. 혜왕의 맏아들은 제29대 법왕이다. 혜왕의 치세는 국세가 극도로 약화되고 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던 때로 보인다. 전 시대에 귀족들의 활동무대이자 경제적인 원천을 이루었던 황해 연안의 무역기지들은 고구려의 진출로 일차적인 큰 타격을 받았고, 그뒤 진흥왕 당시의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황해로 진출하게 되면서부터는 해상활동은 신라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는 중국대륙이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되자 중국본토에 남아 있던 기지들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한편 남쪽 일본열도 역시 왜(倭)의 국가체제 성립으로 백제의 영향권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밖의 활동무대를 상실한 귀족들은 백제 내부의 한정된 경제적 원천을 차지하려고 심한 내분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혜왕의 재위기간이 1년에 불과하고, 다음 왕인 법왕의 재위기간도 1년에 불과하다. 이처럼 왕의 단명한 상태가 거듭되는 것은 당시 백제의 정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29대 법왕(法王) 재위 599~600 >?∼600(법왕 2).

백제 제2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599년부터 600년까지이다.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으로 제28대 혜왕의 맏아들이며, 제30대 무왕의 아버지이다. 한편 《수서 隋書》에는 창왕(昌王: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599년에 즉위하여 살생을 금하는 영(令)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사냥하는 매는 놓아 보내고 어로나 사냥의 도구는 거두어서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600년(법왕 2)에는 왕흥사(王興寺)라는 대규모 사찰을 지었다. 이러한 조처는 불력(佛力)을 빌려 왕국의 번영을 기구한 것이었다. 그 당시 백제는 이미 한강유역 전부와 지금의 남양만일대의 대중국 무역기지를 신라에게 빼앗겨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안으로는 귀족의 내분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불교 계율을 민간에까지 강행하는 등 구복적(求福的)인 신앙에 의존하려는 법왕의 정치가 그러한 문제의 실제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 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 ?∼641.

백제 제30대 왕. 600년부터 641년까지 41년간 백제를 통치했다.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하였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은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기간동안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 같은 왕권의 안정은 무왕이 재위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무왕의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빈번한 침공은 백제군의 낙동강 방면으로의 진출을 가져와,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는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적인 유착을 강화시켜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나,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대의 백제는 국제문제에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지킬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양대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 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왕은 강화된 왕권의 표징이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비宮)을 중수하였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성되었는데, 그 모습은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방불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하였다는 왕흥사(王興寺)도 완성을 보았다. 왕흥사는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그 이름에서도 암시되지만, 왕이 건립을 주도하였고 몸소 불공을 드리는 곳이어서,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귀족내부의 분쟁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大王浦: 충청남도 부여 백마강에 지금도 그 지명이 전한다)라는 지명과 함께, 무왕과 그 신하들이 그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태평한 백제지배층의 상황을 보여준다.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무왕은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나아가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이곳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또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동방 최대규모의 미륵사를 같은 익산에 창건하기도 하였다. 무왕은 익산천도를 통하여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한 것이다. 비록, 익산천도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옥천회전(沃川會戰)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왕권은 무왕 때에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개혁을 통하여 전제왕권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와 미륵사의 창건과 같은 대규모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과 흔히들 관련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설화와 무왕대의 미륵사창건 연기설화 외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지역의 담로장(?魯長)으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동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 이미 도굴된 바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의 능산리고분의 묘제와 일치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大東地志, 觀世音應驗記, 日本書紀,  王宮坪城에 대한 硏究(宋祥圭, 百濟硏究 7, 1976),  薯童說話에 관한 新考察(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泗비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盧重國, 韓?劤博士停年紀念論叢, 1981), 扶餘陵山里傳百濟王陵·益山雙陵(有光敎一, ?原考古學硏究所論集 4, 1979).

 

 

 

< 31대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 >생몰년 미상.

백제 제31대 마지막 왕으로 641년부터 660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무왕의 맏아들로서 태자 때부터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 (海東曾子)’로까지 칭송되었고, 또 아들의 이름을 효(孝: 뒤에 태자가 됨)로 지을 정도로 효도의 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교사상은 당나라의 국학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는 등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부왕인 무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한 뒤에는 관산성(管山城) 패전 이후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즉 642년(의자왕 2)에 제왕자(弟王子: 손아래의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를 비롯하여 모매여자(母妹女子: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의 딸)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인사(高名人士)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한 것이 그것이다. 그 결과 귀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이 보다 강화되었다.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나지성(奈祗城)으로 은퇴한 것도 이때의 정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변경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집권과 연개소문의 대중국 강경노선정책 및 신라와 당나라의 밀착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고구려와 연계성을 확립한 뒤 의자왕은 신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는데, 642년에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또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게 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품석(品釋: 金春秋의 사위)과 그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를 큰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을 공격하여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려고도 하였으며,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군을 동원한 틈을 타서 신라의 서쪽방면의 7성을 공취(攻取)하기도 하였다. 또,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당나라의 위협적인 권고에도 불구하고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경계의 30여 성을 공파(攻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욕적인 활동도 만년에 이르러 사치와 방종, 귀족들의 내부 분열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더구나 궁중 안에서는 군대부인(郡大夫人)이 권세를 장악하고 어진 사람을 마구 죽이는 바람에 국가의 통치질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하여 빈번한 신라와의 전쟁은, 거둔 승리 못지않게 국력을 피폐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공격을 개시하여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수로로 백강(白江: 지금의 금강)을 건너오고,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린 신라군은 탄현(炭峴: 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어 왕도(王都)로 육박해왔다. 계백(階伯)이 거느린 5천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금강하구에서 당군을 막던 군사도 패배함에 따라 수도 사비성(泗 泌城: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은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사세가 다급하여지자 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피하였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마침내 당나라 군대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고 말았으며, 왕은 태자 효, 왕자 융(隆) 및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등 대신(大臣),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2천여명과 더불어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으며 거기서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舊唐書, 新唐書, 日本書紀, 朝鮮金石總覽, 韓國史 - 古代篇(李丙燾, 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59),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  泗泌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韓?劤停年紀念論叢, 1981)
義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과 百濟滅亡(金周成, 百濟硏究 19,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