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 >(생몰 ?∼405).
백제의 제17대왕으로 재위기간은 392년부터 405년까지이다. 백제 15대 침류왕의 맏아들로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花王)이라고도 한다.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는데, 신비한 빛이 밤을 밝혀주었다는 출생설화가 전한다.아들로는 제18대 전지왕과 훈해(訓解), 설례(설禮)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의 사망 당시(385)에 그가 어렸기 때문에 16대왕에는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나, 불과 9년 뒤인 394년 전지의 태자책봉과 405년경 전지, 설례 등의 왕위다툼을 보면, 385년경에는 이미 아들까지 있었을 것이니 그때 아신왕이 어렸다 함은 의문이다. 진사왕의 즉위는 다른 어떤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아신왕 치세의 가장 큰 문제는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의 남침이었다. 아신왕의 즉위 직전인 392년과 396년(아신왕 5)에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았다. 이에 아신왕은 거듭 반격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왜와 동맹을 맺게 된 것도 이같은 고구려 세력에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廣開土王陵碑, 日本書紀.
〈18대 전지왕(腆支王)재위 405~420〉(?∼420).
백제 제18대왕으로 405년부터 420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직지(直支) 또는 진지(眞支)라고도 하며 《송서 宋書》에는 여영(餘映)으로 표기되었다. 아신왕의 맏아들이고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으로서 해씨(解氏)집안 출신이다.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아신왕에 의하여 397년(아신왕 6)에 왜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는 아신왕이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와의 우호를 도모하고 그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인질로 있을 때인 405년에 아신왕이 죽었다. 이때 아신왕의 동생 훈해(訓解)가 섭정을 하면서 그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동생 설례(설禮)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한성인(漢城人) 해충(解忠)으로부터 국내정세 변화와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海島)에 머물렀다. 그뒤 백성들이 설례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하여 즉위 후 해충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의 조(租) 1, 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해씨집안에서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진씨 왕비족 시대는 퇴조를 걷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서제(庶弟)인 여신(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가 408년(전지왕 4)에 상좌평(上佐平)으로 임명하면서 군국정사를 위임하였다. 이는 백제에 있어서 상좌평제의 시초가 되었다.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 동진(東晉)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416년에 진동장군 백제왕(鎭東將軍百濟王)의 작호를 받았으며, 왜와의 우호관계도 계속 유지하였는데,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온 왜의 사자를 우대하고 또 왜에 비단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宋書,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 百濟의 佐平(李鍾旭, 震檀學報 45, 1978),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盧重國, 韓國史論 4, 서울대국사학과, 1978),
百濟 腆支王代의 政治的 變革(梁起錫, 湖西史學 10, 1982).
〈19대 구이신왕(久尔辛王)재위 420~427〉(?∼427).
백제의 제19대왕으로서 420년부터 427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제18대 전지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팔수부인이다. 제20대 비유왕은 그의 아들이다(일설에는 비유왕이 전지왕의 서자라 한다.). 구이신왕은 중국대륙의 세력과 연결하여 백제가 장악한 황해연안의 해상무역권을 유지하고, 또한 팽창하는 고구려세력에 대처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전부터 형성된 백제와 남조(南朝)의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구이신왕은 423년과 425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송나라로부터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425년 이후는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는데, 이는 송나라와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졌음을 뜻한다. 이같은 백제와 송나라와의 결속은 북조(北朝)와 고구려가 연합한 세력권과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었던 결과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宋書,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盧重國, 韓國史論 4, 서울대국사학과, 1978).
< 20대 비유왕(毗有王) 재위 427~455 >(?∼455).
백제 제20대왕으로서,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며 (일설에는 제18대 전지왕의 서자라 한다) 제21대 개로왕은 그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의 높임을 받았다 한다. 429년(비유왕 3)에 중국 남조(南朝)의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다음해에는 송나라으로부터 선왕(先王)이 받았던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백제왕(使侍節都督 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작호(爵號)를 다시 받았다. 이는 송과의 동맹정책이 비유왕대에도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왜와의 동맹관계도 그대로 유지되어 사신이 오가고 있었다. 한편 새로운 변화도 있었는데, 433년에 이르러 신라에 화친 사절을 파견하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 상태에 놓여 있어 백제와 적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당시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신라의 호응을 얻어 고구려에 대항하는 나제동맹이 형성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宋書.
< 21대 개로왕(蓋鹵王) 재위455~475 >(?~475).
백제의 제21대 왕으로서 455년부터 475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고, 22대왕인 문주왕은 그의 아들이다.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되었다. 475년의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의 간첩으로 파견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는 한편,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면도 있지만, 도림의 계략에만 연결시킨 단순화된 설명은 보충이 필요하다.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는 한편, 고구려와의 사이에 요충지인 청목령(靑木嶺: 현재의 개성부근으로 추정됨)에 방벽을 설치하여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北魏)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 가능성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고구려와 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제라동맹(濟羅同盟)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 때문이었다.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위협에 고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도성이 공격을 받아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강화를 시도하여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을 보면,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뒤의 文周王)와 여곤(餘昆: 文周王의 아우이자 東城王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위시한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인 반면, 당시 백제의 큰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개로왕이 왕궁을 거대하게 짓는 등의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속에서 그들을 배제시킨 왕족중심의 집권체제는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개로왕은 백제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하여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高爾萬年)에게 잡혀 아차성(阿且城)에 끌려와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63년(475년)의 친국 후 아차산에서 살해되었다.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귀족인 해구(解仇)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중심 정권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만들었고, 그로 인한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건축 등의 강행은 하층민을 위시하여 널리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져왔을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전(都彌傳)에 나타나는 개루왕은 고구려 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적인 내용에서 왕은 잔인한 방법으로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 함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묻힌 곳은 알려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魏書, 宋書, 日本書紀,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盧重國, 韓國史論 4, 서울대國史學科, 1978).
< 22대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 >(생몰 ?∼477).
백제 제22대왕으로 재위기간은 475년부터 477년까지이다. (三國史記 年表에는 3년간, 本紀에는 4년간으로 되어 있다.). 문주(文洲) 또는 문주(文州)로 쓰기도 한다.
제21대 개로왕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의 아버지이다. 한강유역 일대를 빼앗긴 직후에 즉위하여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것이 바로 문주왕이다. 왕자로 있을 때는 부왕(父王)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역임하였다.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에게 서울 한성(漢城)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아, 동맹국인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그러나 구원병 1만인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문주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 뒤의 수습에 임하였다. 건국 이래의 중심지를 상실한 백제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한강유역에서 온 난민들을 정착시켜야 하였고,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扶餘氏)나 해씨(解氏), 진씨(眞氏) 등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의 지배권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沙宅氏), 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로왕 때의 왕권강화 및 왕족 위주의 집권체제에 억눌렸던 구귀족들의 반발로, 부여족계통 구귀족들 내부에 갈등이 있었다. 참담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난립된 귀족파벌들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품이 우유부단하였다고 하는 그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귀족들의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23대 삼근왕(三斤王)재위 477~479> (?∼479)
백제 제23대왕으로 477년부터 479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삼걸왕(三乞王) 또는 임걸왕(壬乞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문주왕의 맏아들로서 477년 9월 문주왕이 피살된 상태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게 쫓겨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문주왕 1)이래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귀족들이 발호하여 통제하기 어려웠다. 또한, 마한계 세력들이 새로운 집권층으로 등장하며, 구래의 부여계 귀족들이 주도하던 권력체계를 무너뜨림에 따라 정국은 더욱 어지러웠다. 이러한 와중에서 문주왕은 권력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에 의하여 살해되고, 삼근왕이 즉위하였다. 해구의 권력은 이미 문주왕으로서도 제어하지 못하였으니, 어린 나이로 즉위한 삼근왕도 모든 정사를 그에게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해구는 그뒤 삼근왕 2년 신흥세력인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더불어 대두성(大豆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당시 해구의 반란을 토벌한 것은 한성시대(漢城時代) 이래의 또 다른 귀족세력 출신인 진씨(眞氏)세력이었는데, 해구의 반란이 평정된 다음해 삼근왕이 죽은 것을 진씨세력의 정치적 변란의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熊津遷都와 新進勢力의 登場(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1988).
<24대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 > (생몰 ? ~501.무령왕1)
백제 제23대왕으로서 재위기간은 479년부터 501년까지이다. 이름은 모대(牟大) 또는 마제(麻帝), 여대(餘大)라고도 한다. 21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쏘는 솜씨가 빼어났다. 삼근왕 때에 일어난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한 뒤 실권을 장악한 진씨(眞氏) 세력에 의하여 옹립된 것으로 보인다. 삼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첫째로, 금강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하여 한성에서 이동하여 온 귀족과의 세력균형을 꾀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신진세력으로는 사씨(沙氏), 연씨(燕氏), 백씨(백氏)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신진세력들은 점차 세력기반을 확대하여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解氏), 진씨 등 한강유역에서 내려온 옛 귀족을 대신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지배세력의 구성상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둘째로, 동성왕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동성왕은 신라가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하였고, 또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하였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셋째로, 동성왕은 웅진천도 이후 고구려 수군에 의하여 서해의 해상 교통로가 차단당하여 국제적 고립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넷째로,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하고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또 우두성(牛頭城), 사현성(沙峴城), 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하여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정성(沙井城), 가림성(加林城) 등을 축조하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밖에 동성왕은 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진주(武珍州)까지 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진귀한 짐승을 기르는 것에 대한 신하의 간언을 물리쳐버리는 전제군주적인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동성왕은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등의 장군을 중국 요서지역에 파견하여 북위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의 근거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또 여기에 보이는 왕, 후, 태수, 장군 등의 관명은 백제의 해외경영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자료이다. 이처럼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신구귀족 사이에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또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여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힘이 점차 증대하여 왕권에 압력요소로 작용하게 되자 동성왕은 신진세력에 대한 견제조처를 취하게 되었고, 그러한 조처 중의 하나가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백加)를 가림성 성주로 강제로 내보낸 것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같은 견제는 백가를 위시한 신진세력의 불만을 초래하여 마침내 백가세력은 동성왕이 사비서원(泗沘西原)에서 사냥하는 틈을 타서 왕을 암살하였다. 동성왕의 피살에 대하여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이 포학무도하므로 국인(國人)이 제거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의 국인은 백가를 비롯한 반왕파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가세력에 의한 동성왕의 암살은 전제적 왕권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성왕대에 추구된 일련의 정책은 한성함락 이후 축소된 백제왕실의 지배기반을 확대시켜주었고 나아가 무령왕, 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의 토대를 놓아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南齊書韓國古代史硏究(李丙燾, 1976),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牟都에 대하여(李基東, 歷史學報 62, 1974), 百濟의 佐平(李鍾旭, 震檀學報 45, 1978),
泗沘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盧重國, 韓?劤博土停年紀念論叢, 1981).漢城末熊津時代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李道學, 韓國史硏究 50·51합집, 1985).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坂元義種, 1978), 百濟史の硏究(坂元義種,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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