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역대왕사(百濟歷代王史)

百濟歷代王 9代 책계왕(責稽王) ~16代 진사왕(辰斯王)

鄕香 2007. 6. 16. 17:47

< 9대 책계왕(責稽王) 재위 286-298 >

?∼298(분서왕 1) 백제 제9대 왕으로서 서기286년부터 29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일명 청계(靑稽) 또는 책체(責替)라고도 한다.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지금의 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蛇城: 지금의 서울 풍납동 토성)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漢軍: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 10대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4 >

?∼304(분서왕 7). 백제의 제10대 왕으로서 재위기간은 298년부터 304년까지이다. 제9대 책계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표(儀表)가 뛰어나 부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한군현(漢郡縣)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분서왕도 부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304년(분서왕 7)에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공격하여 차지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그해에 분서왕은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됨으로써 고이왕의 손자인 분서왕이 피살된 뒤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다시 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제11대 비류왕 다음에 분서왕의 아들 제12대 계왕이 잠시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11대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34 >

?∼344. 백제의 제11대왕으로, 《삼국사기》에는 제6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제7대 사반왕의 아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혈족관계는 비류왕의 재위시기와 모순되는 면이 있어 의문점이 있다. 구수왕은 234년까지 재위하였으며, 비류왕은 그보다 70년 뒤에 즉위하여 40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에 무리가 나타난다. 비류왕의 즉위는 그무렵 백제왕실 지파(枝派)들 사이의 세력교체와 함께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혈족관계와 재위년 사이의 모순도 그같은 왕실 지파간의 세력교체에 대한 역사서술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백제왕실은 개루왕에서 갈라진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두 지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을 계승한 사반왕은 즉위하자 곧 폐위되었으며, 방계인 고이왕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뒤 왕위는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책계왕과 분서왕 모두가 한군현(漢郡縣) 세력과의 분쟁에서 연달아 피살되는 사태를 당하여, 고이왕계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의 즉위는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비류왕의 즉위는 초고왕계의 재집권을 뜻한다.비류왕 다음에 고이왕계인 분서왕의 아들 계왕이 즉위하였지만 그 재위는 2년 만에 끝나고, 다시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이 즉위하여 그뒤 초고왕계 내에서 왕위계승이 계속되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왕명은 ‘초고왕’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왕명이라 할 것이다. 초고왕계인 비류왕은 고이왕계의 3대가 집권한 뒤에 즉위하였으므로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 또는 보다 먼 후손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12대 계왕(契王) 재위 344~346 >

?∼346. 백제 제12대왕으로 344년부터 346년까지 재위했다.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그런데 분서왕의 뒤를 이어 제11대왕이 된 사람은 왕실 내의 다른 파벌 출신인 비류왕이며, 그 이유를 《삼국사기》에는 당시에 그가 어렸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그것만이 전부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서왕과 계왕은 고이왕의 후손으로서, 초고왕의 후손인 비류왕과는 왕실 내에서 서로 다른 계파였다. 그리고 비류왕의 즉위는 분서왕이 낙랑의 자객에게 피살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뒤에는 고이왕계가 몰락하고, 초고왕계가 집권하는 왕실 계파간의 세력교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재위한 계왕의 통치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쟁 세력들과의 관계에서 계왕의 즉위나 집권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참고문헌)

三國史記,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盧重國, 韓國史論 4, 서울大學校國史學科, 1978).

 

 

 

<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 >

즉위한 뒤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近仇須王)의 왕명이 초고왕과 구수왕에 ‘근(近)’자를 가하여 이루어진 데서 알 수 있다.또, 진씨가문(眞氏家門)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分定)하여 지방 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활동을 살펴보면,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附庸)하게 함으로써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 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平壤城)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정예 기병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東晉)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遼西地方)으로 진출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온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져 왜왕(倭王)에게 하사됐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가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상업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漢代)이래 중국 황해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또, 문화의 진흥과 일본으로의 전수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제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하여주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지배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 書記》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晉書, . 宋書, . 日本書紀, . 韓國古代史의 硏究(李弘稙, 新丘文化社, 1971) . 韓國古代史硏究(李丙燾, 博英社, 1976),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 . 百濟의 遼西經略(金庠基, 白山學報 3, 1967),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方善柱, 白山學報 11, 1971), 百濟社會와 그 文化(金哲埈, 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 1973),
復元加耶史 上·中·下(千寬宇, 文學과 知性, 1977·1978),
漢城時代百濟의 地方統治體制 - 담로체제를 중심으로(魯重國, 邊太燮博士華甲紀念論叢, 1985).

 

 

 

< 14대 근수구왕(近仇首王) 재위 375~384 >

?∼384. 백제 제14대왕으로 375년부터 384년까지 재위했다. 근초고왕의 맏아들이며, 비(妃)는 아이부인으로 침류왕을 낳았다.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귀수(貴須)’ 또는 ‘귀수(貴首)’로, 《신찬성씨록》에는 ‘근귀수(近貴首)’로 표기되어 있다. 태자 때부터 부왕을 도와 적극적으로 정복활동을 하여 369년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천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특히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는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 온 사기(斯紀)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인 적기부대(赤旗部隊)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때 더 북진하려 하자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 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명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확립된 초고왕계의 왕위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으며, 장인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남하해 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日本書紀, 新撰姓氏錄, 韓國史 - 古代篇(李丙燾, 乙酉文化社, 1959).

 

 

 

< 15대 침류왕(枕流王) 재위384~385 >

?∼385(침류왕 2). 백제 제15대 왕으로 서기 384년부터 385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근구수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씨(眞氏)로 추정되는 아이부인이다. 아신왕은 그의 맏아들이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침류왕 1) 9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대접하니 백제에서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다음해 2월 한산(漢山)에 불교사원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었다.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뿌리깊은 토속신앙에 젖어 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흥왕대의 신라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토속신앙의 처지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그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반발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추정은 침류왕의 신변의 변화와도 연결될지 모른다. 한산에 불교사원을 세운 지 9개월 후에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왕위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진사왕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海東高僧傳

 

 

 

 

 

< 16대 진사왕(辰斯王) 재위385~392 >

?∼392. 백제 제16대왕으로서, 385년부터 392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으로, 용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즉위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즉위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일본서기》에는 진사가 태자 아신(阿莘)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위 후 남진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386년(진사왕 2) 15세 이상의 백성을 동원하여 청목령(靑木嶺: 지금의 개성)에서 북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관방(關防)을 쌓았다. 390년 달솔 진가모(眞嘉謨)로 하여금 고구려의 도곤성(都坤城)을 공격하게 하여 200여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뛰어난 용병술에는 당하지 못하여, 392년 석현성(石峴城: 지금의 개풍군 청석동?) 등 10여성과 한수(漢水: 지금의 한강) 이북의 여러 부락이 고구려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또 천연의 요새지인 관미성(關彌城: 지금의 경기도 교동도)도 함락되었다. 이렇듯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군사적 압박으로 시종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고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죽음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구원(狗原)의 행궁에서 사냥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침류왕의 태자 아신의 세력에 의하여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日本書紀 . 百濟政治史硏究(盧重國, 一潮閣, 1988) .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