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 2120

의친왕묘(義親王)

고종황제와 귀인 장씨의 사이에서 태어나신 의친왕(義親王, 李堈1877-1955)과 의친왕비 김씨(義親王妃 金氏1878-1964)의 합장 능이다. 의친왕께서는 고종28년(1891)에 의화군에 봉해지셨고, 고종황제4년(1900)에 의친왕에 책봉되셨다. 보빙대사와 특파대사의 임무를 수행하셨으며 미국에 유학을 하시기도 하였다. 고종황제10년(1906)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셨고, 1919년에는 의병 활동을 지원하고, 비밀 결사 단체인 대동단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셨다. 1955년에 세상을 떠나시자 처음에는 화양리에 모셨다가 1965년에 서삼릉 경내로 천장하였고 1995년 다시 이곳으로 모셔왔다. 의친왕비 김씨는 김사준(金思濬)의 따님으로 1893년에 의친왕과 혼인하여 고종황제로부터 ..

덕혜옹주 묘(德惠翁主 墓)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는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의 따님으로 덕수궁에서 태어나셨다. 고종은 고명따님 덕혜옹주가 5세 되던 1916년 교육을 위해 덕수궁(경운궁) 즉조당에 처음으로 유치원을 설립할 정도로 아끼셨고, 즉조당 유치원에 다니며 9세가 될 때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리며 사랑을 받으셨다. 1919년 아버지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1921년 德惠라는 칭호를 받으셨다. 1922년 일출심상소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1925년 일제가 유학이란 명분을 내세워 일본으로 데려갔다. 일본에서는 영친왕 숙소에 기거하면서 학습원과 중등과정을 수료하셨다. 1929년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조현병이 나타나게 되셨고 1931년 19세에 일본 대마도 번왕의 아들 소 다케유끼(宗武志) 와 정략혼인..

「회인원(懷仁園)」

이구(李玖1931-2005) 황세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비(마사코/方子)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일본에서 생활하셨다. 광복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내 귀국이 무산되어 일본에 체류하시다가 1953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전공하셨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1963년 국적이 회복되시어 귀국 후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며 서울대와 연세대 등에 출강하기도 하셨고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명예 총재를 지내기도 하셨다. 2005년 7월16일 일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나 英園 경내에 園을 조성하였다. 회인원은 그동안 봉분만 있었는데 새롭게 석물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황세손이셨기에 그 시대 격식에 맞춰..

대한제국 의민황태자(영친왕)의민황태자비(영친왕비)

의민황태자 (영친왕) 이은〈懿愍皇太子(英親王) 李垠1897-1970〉은 고종황제(高宗皇帝1852-1919)와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1854-1911)의 아드님으로 덕수궁 숙옹재에서 탄생하셨다. 1900년 영친왕에 봉해지셨고,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셨지만 그 해 12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에서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다. 1920년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 노미야 마사코'와 정략혼인을 한 후 두 아들, 이진 · 이구를 낳았으나 첫 아들 이진은 1922년 덕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6년 순종황제의 승하 후 명목상 李 王이 되었으며, 일본의 책략에 의해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 육군 중장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을 원했으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산되었다. ..

조선 역대 왕릉

1대,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 태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동구릉 내 제릉〈齊陵,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서울시 성북구 정릉2동 산87-16번지 2대, 정종(定宗)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황후 김씨〉 개성시 3대, 태종(太宗)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 헌인릉 내 4대, 세종(世宗)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5대, 문종(文宗)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동구릉 내 6대, 단종(端宗) 장릉〈莊陵 단종〉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 12-1 사릉〈思陵,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 경기도 남양주시 ..

「한글을 쓴 차 사발(茶碗)」

임진왜란 당시 일본 하기 지방으로 끌려간 한 도공(沙器匠)이 사발을 빗어 그 겉면에 먹(墨) 으로 한글로 시를 쓰고 유약을 발라 구워낸 그릇이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모두 도둑인가? 조목지 호고려 님이 계신 곳에 다녀올 것이다. 그 개도 호고려의 개로다. 듣고 잠잠 하는구나." *ㅈ목지 : 인명 또는 지명으로 사료됨. 호고려(胡高麗) :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을 현지 일본인이 부르던 호칭. "되 고려사람· 오랑캐 고려사람"의 뜻이었으나 어느 사이에 이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었음.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모두 도둑인가?) (조목지 호고려 님이 계신 곳에 다녀올 것이다. 그 ) ( 개도 호고려의 개로다. 듣고 잠잠 하는구나) 일본(17~18世紀) 萩(はき)地方 / (후지이 ..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의 승려 장인" 특별전이 있었습니다. 匠人 스님들의 작품인 예천 용문사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조각僧 단응(端應17세기 중반~18세기 초반)과 탁밀(卓密) 등 조각승 9명이 예천 용문사 대장전에서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를 나무로 조각하여 구현한 것입니다. 아미타여래삼존상과 목각설법상 속 부처가겹겹이 배치되어 괴로움 없는 지극히 안락한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가 환영처럼 펼쳐지는 듯합니다. 나무틀 위쪽에는 인도의 고대문자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梵자와 거꾸로된 卍자를, 아래쪽에는 明자와 心자를 그리고 사이에 중국 고전인 '周易'의 64 卦 중 아홉개를 배치하여 불교와 유교 등이 혼합된 모습을 보입니다. 이 불사에서는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소영 신경(昭影神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