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대가야(大伽耶) 3

盟主國 大伽耶 王族의 墓域

高靈은 後期 伽耶聯盟의 盟主國이였던 大伽耶 本據地로 삼았던 곳이다. 大伽耶는 伽耶諸國중 유력한 국가를 칭한 용어로 한때는 前期 伽耶의 맹주국이었던 金冠國을 大伽耶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금관국이 세력을 상실한 뒤인 5세기 後半代이후 멸망시까지는 낙동강 西岸을 거점으로 하여 이 고령의 가야세력이 대가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大伽耶聯盟의 세력판도는 高靈系土器가 출토되는 陜川 · 咸陽 · 南原  등 智異山주변은 물론 晋州 · 泗川 · 固城 등 蟾津江流域에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부 경남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이나 연맹의 각 소국들은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막강한 대가야도 백제가 榮山江以南地域에 대한에 대한 영토확장을 꾀함에 따라 도..

大伽耶聯盟의 强者 多羅國의 首長墓

「陜川 玉田遺蹟」5세기 후반대에는 金冠伽耶를 비롯한 洛東江河流地域의 가야세력들이 신라의 진출에 의해 그 힘이 약화되고, 신라양식의 토기가 낙동강 동안지역에 확산된다. 반면 낙동강 以西地域에 있던 伽耶群勢力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高靈의 大伽耶를 盟主國으로 하는 聯盟體 형태로 세력을 규합하여 신라의 세력 팽창에 맞서는 한편, 百濟와 유대관계를 가지면서도 백제의 漢城陷落과 熊津遷都라는 힘의 공백을 틈타 한동안 급성장을 보인다.이들 대가야연맹국의 하나였던 多羅國은 《日本書記》 에 전하는 바와 같이 백제가 중재하여 541, 544년 두차례에 걸쳐 열린 伽耶復興會議의 參席者 현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맹주국인 고령의 加羅, 咸安의 安羅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나라였다. 慶南 陜川郡 雙冊面 城山里에 소재하는 玉田..

「대가야 / 大加耶」

대가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 고령군조(地理 高靈郡條)에 기록되기를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무려 16대, 520년에 이르렀다.(大加耶國自治祖伊珍阿豉王至道設智王凡十六世五百二十年)"고 한다. 三韓때까지 半路國으로 불린 고령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 기반 위에 있었다. 고령 盤雲里遺蹟의 瓦質土器가 영남지방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점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4세기대에 접어들면서, 고령의 세력은 冶爐面 일대의 鐵鑛을 개발하고 힘을 키워 가야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서기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廣開土王의 군대가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세력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에 낙동강 중류의 내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