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5435

가야 토기(伽倻 土器)

가야 토기들의 이모저모 굽다리접시(外反口緣高杯) 가야 4세기 김해 예안리11호, 높이 11.0cm, 부산대학교 . 두귀항아리(兩耳附壺) 가야 4세기김해 대성동 10호, 높이 29.0cm, 慶星大學校 굽다리접시(高杯) 가야 4세기 함안 황사리 30 · 29호 높이(오른쪽) 15.5cm , 慶尙大學校 굽다리접시(高杯) 가야 4세기 함안 황사리 26 · 24호 높이(오른쪽) 14.0cm , 昌原大學校 그릇받침(器臺) 가야 4세기 부산 복천동 60호 높이 40.2cm , 釜山大學校 두귀항아리(兩耳附長頸壺) 가야 4세기 부산 복천동 60호 높이 19.1cm , 釜山大學校 이형토기(異形土器) 가야 4-5세기 합천 저포B-6 · 출토지모름, 높이(왼쪽) 13.4cm , 昌原大學校 ·慶..

▣ 가야(伽耶) 2026.08.23

가야 토기(伽倻土器)2.

고령은 大伽倻의 故址로 이 지역의 토기는 有蓋長頸壺와 高杯形器臺, 上下一列2段透窓高杯, 蓋杯 등이 주요 기종이다. 고령식 토기는 대가야 首長層의 집단묘역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여 후기에는 합천, 함양, 거창, 산청, 진주 등 영남지방 서북부지역과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지방까지 분포하며 대가야의 멸망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신라후기 양식토기로 대체된다. 이와 같은 고령식 토기의 상대순서와 종말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으나 절대연대 비정에는 다소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현재까지 출토된 고령식 토기의 상한 연대를 비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이유로는 목곽묘에 대한 조사 예가 부족한 것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령 쾌빈동유적의..

▣ 가야(伽耶) 2026.08.22

가야 토기 (伽倻土器) 1.

가야 토기는 古式陶質土器의 양식을 계승 · 발전하지만, 각 지역별 특색이 뚜렷하다. 이것은 가야의 정치적 배경과 관련된 것으로, 현 단계에서 가야 토기를 지역별로 분류하여 대체로 아라가야의 故址였던 함안, 대가야의 고령 등 가야 소국의 중심지에 따라 여러 지역 양식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크게는 이른 시기부터 신라의 정치적 영향을 받거나 예속된 지역인 김해, 창녕, 대구 등 낙동강 동안 지역과 함안, 고령 등의 낙동강 서안 지역의 토기가 양식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낙동강 서안 양식이 전형적인 가야 토기라고 할 수 있으며, 대표적인 특징은 굽다리접시의 경우 투창이 직렬로 배치된 나팔형 굽다리와 목단 지는 목과 어깨 부분이 둥글게 연결되고 목에만 밀집파상문이 시문 된 점 등이다...

▣ 가야(伽耶) 2026.08.17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

2.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古式陶質土器의 기형에는 兩耳附短頸壺를 비록 하여 小形短頸壺, 高杯, 直口壺 , 爐形土器, 筒形器臺, 把手附盌, 臺附小壺, 把手附臺附小壺, 廣口小壺 등이 있고 年代的으로는 고식도질토기의 발생시점인 3세기말 4세기초부터 신라 토기와 가야 토기로 분화되기까지의 약 100년 동안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소위 고식도질토기의 발생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현재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중국 越州窯나 전국시대 토기 또는 灰釉陶器 등 외부영향에 의한 발생설과 자체 발생설이 있다. 입큰단지와 그릇받침(廣口小壺 · 器臺) 신라 4세기 경주 월성로 가6호 높이 21.0cm 경주박물관 항아리(短頸壺) 신라 4세기 경주 월성로 가12호 높이(오른쪽) 12.4cm 경주..

신라 토기(新羅土器)

3. 신라 토기(新羅 土器) 신라 토기는 그 상대적인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의견의 접근을 보고 있으나 그 절대 연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약 100년 가까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신라토기 발전과정의 특징을 단계적으로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⒈ 제1기 신라식 토기의 특징인 상하 투창이 엇갈리게 뚫린 굽다리접시가 출현한 단계로 월성로 가-13호분에서 이러한 신라식 고배와 긴목단지 등이 출토된다. 긴목단지는 목이 직선상으로 벌어지고 돌대에 의해 2-3단으로 구분되며, 어깨에도 돌선이 돌아가는 등 신라식의 특징이 나타나지만 이후 단계에서 보이는 밀집된 파상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긴목단지) 2. 제2기 이 단계가 되면 고배의 배신은 얕아지고 기형이 직선적으로 ..

新羅 · 伽耶

[신라와 가야토기의 발생 및 변화과정] 1. 정의(定義)신라와 가야에서 제작 사용한 토기를 일컫는 것으로, 赤褐色 軟質土器와 灰靑色 硬質土器로 나눌 수 있으며, 좁은 의미로는 회청색 경질토기만을 일컫는다. 소형토기를 제외한 대부분은 기벽을 단단하게 두드린 후 물레로 모형을 잡았으며, 1200℃ 넘는 고온의 굴가마에서 구워졌다. 이러한 제작과정은 점토채취와 빠른 속도의 물레 사용, 그리고 온도를 높일 수 있는 가마의 구조 등으로 보아 토기제작이 전문화, 집단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토기의 분포권을 조사하면, 일상적인 교역이 가능한 지역의 범위와 원격지간의 교류 등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신라의 토기는 원삼국시대의 토기제작기술에 새로운 제작기법이 가미되어 발생한 고식도질토기라는 공통된 조..

百濟 土器의 特徵과 變遷

백제토기는 製作技術的인 측면에서 볼 때에 그릇의 表面을 두드려 그릇벽을 만드는 打捺文手法으로 만든 후 還元燒成으로 제작한 것으로 이는 신라 · 가야 등의 삼한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남한지역 역사시대 토기제작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타날문토기는 중국의 戰國時代 製陶術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러한 제도술이 한강유역의 백제나 그 이남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시점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로 드러나고 있어 직접적으로는 漢代의 토기제작기술과 연관이 된다. 백제토기는 처음 항아리와 같이 쓰임새가 다양한 器種을 중심으로 高火度 還元燒成의 석기질(stoneware)이 나타나지만 점차 새로운 기종들이 추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 시점은 대략 기원후 3세기 중엽 경이다. '와기질에서 석기질'로의 변화는 대량생산 체제의..

백제 토기의 정의

백제는 기록상에 기원전후부터 3세기중엽까지 한강유역에서 십제(十濟) 또는 백제(伯濟)라는 마한(馬韓)의 한 작은 나라(小國)로 나오고 있으나 3세기중후엽 이후에는 백제(百濟)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한편 고고학상으로도 한강유역에서는 3세기중후엽에 큰 돌무지무덤이나 몽촌토성과 같은 대규모 성곽이 만들어지고 그 유적에서는 서진(西晉)에서 들어온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는 당시에 고대국가로 성장하던 백제의 중심세력들이 대외교섭을 활발히 하던 모습을 보여주던 유물들이다. 이러한 고고학자료 및 문헌자료를 살펴보면, 백제는 기원후 3세기 중후반경인 고이왕(古爾王)대에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하였고, 이때부터 등장하는 대형무덤과 성곽 등의 유적에서는 한강유역에서 보이던 앞선 시기의 토기와는 다른 세로운 종류의 토기..

高句麗 土器의 特徵과 變遷

고구려 토기는 제작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백제 · 신라 · 가야 지역의 토기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구워져 경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토기의 표면색은 황갈색, 회색. 회흑색 등을 띠고 있어 산화소성과 환원소성이 혼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토기의 표면은 잘 문질러 약간의 광택을 띠고 있다. 또한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연유(鉛釉)계통의 저화도 釉藥을 바른 黃釉陶器가 제작되고 있는 점도 한 특징이다. 한편 고구려 토기의 형태를 보면 대체적으로 띠고리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것이 많고 모두 편평한 바닥으로 되어 있어 백제 · 신라 · 가야의 경우 편평한 바닥이 盌등의 일상용기에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드물다는 사실과는 비교된다. 이제까지 밝혀진 고구려 토기의 종류는 시기에 따라 다소 변화가 있..

고구려 토기의 정의

고구려 토기는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영역 내에서 고유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토기를 뜻하며, 정선된 태토 · 마연된 표면 · 흑회색 또는 황갈색의 색조 ·넓적한 띠모양의 손잡이가 특징이다. 고구려 초기의 토기는 대표적인 유적의 이름을 따서 노남리형토기(魯南里形土器)라고 하는데, 그 출현시기는 압록강 중류의 환인지방에 인접한 요녕성 청원현(淸源縣) 대남구유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기원전 3세기 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돌무지무덤(積石塚)의 출현시기와도 일치한다. 이로 보아 고구려 토기는 시간적으로는 고구려가 국가로 태 유역에 한정되었다가 고구려의 영역확대에 따라 보다 넓혀진 영역에서 사용된 토기양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475년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부터 고구려 토기의 분포는 한강유역까지 미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