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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산강 유역의 대형 독무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영산강유역에서는 독무덤이 토착지배층의 중심묘제로서 왕릉에 버금갈 만큼 큰 대형 고분으로까지 발전한 점에서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소형 독무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지역에서만 독널을 매장시설로 하는 대형의 봉토고분이 유행했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일찍부터 이곳에 독무덤이 유행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높은 수준의 토기제작기술이 한몫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봉토의 크기는 지름 또는 밑변이 30-40m, 높이 5m이상되는 대형고분이 적지 않으며 나주와 영암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봉토의 형태도 원형을 비롯하여 방대형, 타원형, 장고형 등 배우 다양한데 이러한 다양성은 영산강 유역 고분의 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봉토 둘레에는 대부분 도랑이 돌려져 있으며 매장시설은 독널로만 이루어진 것..

葬送儀禮用 土器(甕棺)

옹관(甕棺) 1.삼국시대의 독무덤. 삼국시대의 독무덤(甕棺墓)은 토기를 널로 사용한 무덤을 일컫는 것으로 토기를 직접 매장의 용기로 사용한 예로, 청동기시대에는 일상의 민무늬토기를 세워 묻는 형식이었으나 초기 철기시대 이후에는 대체로 두 개의 항아리를 맞붙인 이음식으로 바뀐다. 이때의 토기는 독널로 불려진다. 독널(甕棺)이란, 사람의 주검이나 뼈를 담는 토기를 말하는데 흙으로 빗어구운 형태를 갖춘 모듬 용기에 주검을 안치한 것을 독무덤으로 통칭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는 독(甕)이나 항아리(壺)를 쓴 것을 말한다.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독무덤은 대체로 소형이며 돌방무덤이나 돌덧널무덤 또는 돌무지덧널무덤에 딸려서 을 나타나거나 돌덧널 안에 독널이 안치되기도 하였다. 독널 안에서 幼小兒의 유골이 조사된 예도 ..

명문토기(銘文土器) 3

3. 중요한 토기명문의 역사적인 의미 가야지역에서 나온 합천 저포리 E지구 4-1 號墳의 단경호에 새겨진 "下部思利利"와 忠南大學校 所藏의 有蓋長頸壺의 뚜껑과 몸통에 새겨진 '大王'이라는 銘文은 주목되는 것으로 이들 명문은 당시 대가야의 정치 · 사회적인 모습을 상당부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다. "下部思利利"라는 명문은 당시 남부지방의 정치발전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기초로 6세기 중엽 당시 합천지역의 정치세력인 多羅國이 대가야연맹의 주요 핵심세력으로 부상하여 대가야의 하부로 편제되었다는 견해나, 540년 이후 가야지역의 여러나라들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에서 파견된 관료나 기술자였던 것으로 파악한 견해로 나뉘어져 있지만 당시 남부지방..

명문토기(銘文土器) 2

2. 분류의 내용 글자가 새겨진 토기의 종류는 고배, 장경호, 단경호, 병, 완, 기대 등으로 다양하며 삼국시대에는 주로 무덤에 부장된 고배 등에 새겼고 통일기에는 실생활 용기인 왕\ㄴ이나 자배기 등에 새기거나 썼다고 보인다. 새겨진 위치도 다양하여 토기의 안과 바깥, 그리고 뚜껑, 몸통, 바닥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글씨도 토기의 형태를 기준으로 바로 쓴 것(正位), 옆으로 뉘인 것(橫位), 꺼꾸로 쓴 것(倒位) 등 다양하다. 이를 다시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官 司 : 北舍 2. 官 職 : 大王, 大干, 上撰干, 3. 人 名 : 丁次 4. 地 名 : 下部 ···縣器村 5. 吉祥句 : ㅁ吉 6. 信 仰 : 辛番龍王, 龍王辛番 7. 숫자 : 七 또한 토기 명문은 글자를 쓴 재료..

명문토기(銘文土器) 1

⌜문자가 있는 토기는 다른 유물에 비해 문자의 내용이 간단하지만 그 종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내용이 표현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토기명문의 변천과정 우리나라에서 나온 최초의 명문토기로는 청동기시대에 고유문자가 새겨진 굽다리접시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으로는 낙랑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평양 석암리 212號墳의 토기에는 옻칠로 '大王'이라는 글씨를 썼고 그외 李(채협총), 吉(은률군 관산면 1호분), 茂丁 · 張 · 重(평양 낭랑토성터) 등이 쓰여진 토기가 출토되었다. 한편 당시 남부지방에서는 명문토기가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문자를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는 필기도구로 추정되는 붓과 삭도(削刀)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일부에서는 문자..

2. 신라 · 가야토기의 문양(新羅 · 伽倻土器의 文樣)

삼국시대 토기의 문양은 신라와 가야토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하고 세련된 각종 침선문을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영남지방에서는 도질토기가 발생하고 나서 한동안 무문양으로 정면된 토기들이 만들어지는 경향을 보이다가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신라토기와 가야토기의 성립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투껑과 몸통에 각가지 문양이 장식되게 된다. 날카로운 대칼로 器臺 · 長頸壺의 목과 어깨, 몸둘레 등 모든 토기에 기하학적 선문을 시문하게 되었다. 또 장경호의 목이나 고배의 다리를 몇 줄기 돌대상 횡선을 돌려 등분하고 그 안에 여러가지 문양을 시문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횡선만으로 장식을 삼기도 하였다. 기하학적 문양에는 직선적인 것으로 삼각집선문, 사각집선문, 침엽문 등이 있고, 곡선적인 문양으로는 원권문 또는 ..

1. 고구려 · 백제 토기의 문양(高句麗·百濟 土器의 文樣)

고구려의 토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가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여 토기의 器種과 文樣을 토기의함께 살펴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토기는 손잡이가 두 개 혹은 네 개 달린 단지나 바리, 병, 시루 등 대부분 납작 바닥의 토기가 많고 소성온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다. 문양에 있어서도 어깨나 몸통 부위에 간단한 횡선이 돌려지거나 단순한 파상문과 능형문 · 승문 등이 시문 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무문인 경우가 많고 흑색이나 회색 · 갈색 등으로 마연된 토기가 있다. 그리고 단지나 병 등에 시문된 파상문은 신라나 가야의 그것과 달리 대부분 반원을 연접시킨 형태인데, 이는 부분적이기도 하지만 백제토기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또 중국의 영향으로 황갈색의 유약을 바른 토기가 제작되기도 ..

문양(文樣)

토기에 문양을 넣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토기를 제작 해 온 역사와 같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일이다. 토기에 나타나는 문양은 토기를 제작하는 방법과 과정에 따른 흔적으로 남겨지는 경우와 장식이나 실용적 기능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있다. 문양을 시문하는 방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주로 점토를 덧붙이거나 도구를 이용한 새기기, 깍기, 문지르기, 두드리거나 눌러찍기 등이 있다. 이 밖에도 토기의 표면에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서 채색된 문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토기제작 기술이 도입되면서 등장하는 원삼국시대의 와질토기에는 이전의 무문토기보다 태토의 밀도를 치밀하게 하기 위해 토기벽을 두들겨 생긴 승문(繩文), 격자문, 평행문 등의 이른바 타날문이 가장 일반적인 문양으로..

4. 장식토우(裝飾土偶)

장식토우는 신라토기에서 가장 많이 보이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복속되거나 영향 아래에 있던 낙동강 東岸에서 약간의 예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토기에 장식적인 토우를 붙이는 전통은 신라에서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뿔잔이나 상형토기가 같은 분포권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한편 신라토기에서도 장식토우가 붙은 토기는 대체로 6세기경의 토기에서 많이 보이는 데, 이러한 현상은 三國史記에 지증왕(智證王)이 즉위 3년(502년)에 달려묻기(殉葬)를 금지한 기록이나 이 후에 보다 활발해진 영토의 확장과 같은 시대적 배경에 연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신라의 장식토우는 그 형태가 매우 간략하고 소박하지만, 필요한 경우 性器와 같이 기원하고자 하는 목적과 관련한 부분은 과..

3. 우리나라의 토우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토우가 만들어졌지만 수량은 많지 않으며, 양양 오산리유적((襄陽郡 巽陽面 鰲山里遺跡)에서 출토된 사람얼굴모양과 울산 신암리유적의 말, 욕지도 조개더미유적의 돼지가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의미의 유물로는 뼈나 뿔 그리고 조개껍질과 같은 재료로 만든 사람모양이나 사람얼굴모양 등의 것이 있는데 웅기 서포항유적과 부산 동삼동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토우를 말할 때는 수량도 많고 형태도 다양하며, 가장 활발하게 제작된 삼국시대 특히 가야와 신라의 유물을 일컷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시대의 토우로 전하는 것은 거의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로 조그맣게 만든 인물과 동물이 무덤에 넣어졌는데 이것을 흔히 명기(明器)라 부른다.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의 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