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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토기(銘文土器) 2

2. 분류의 내용 글자가 새겨진 토기의 종류는 고배, 장경호, 단경호, 병, 완, 기대 등으로 다양하며 삼국시대에는 주로 무덤에 부장된 고배 등에 새겼고 통일기에는 실생활 용기인 왕\ㄴ이나 자배기 등에 새기거나 썼다고 보인다. 새겨진 위치도 다양하여 토기의 안과 바깥, 그리고 뚜껑, 몸통, 바닥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글씨도 토기의 형태를 기준으로 바로 쓴 것(正位), 옆으로 뉘인 것(橫位), 꺼꾸로 쓴 것(倒位) 등 다양하다. 이를 다시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官 司 : 北舍 2. 官 職 : 大王, 大干, 上撰干, 3. 人 名 : 丁次 4. 地 名 : 下部 ···縣器村 5. 吉祥句 : ㅁ吉 6. 信 仰 : 辛番龍王, 龍王辛番 7. 숫자 : 七 또한 토기 명문은 글자를 쓴 재료..

명문토기(銘文土器) 1

⌜문자가 있는 토기는 다른 유물에 비해 문자의 내용이 간단하지만 그 종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내용이 표현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토기명문의 변천과정 우리나라에서 나온 최초의 명문토기로는 청동기시대에 고유문자가 새겨진 굽다리접시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으로는 낙랑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평양 석암리 212號墳의 토기에는 옻칠로 '大王'이라는 글씨를 썼고 그외 李(채협총), 吉(은률군 관산면 1호분), 茂丁 · 張 · 重(평양 낭랑토성터) 등이 쓰여진 토기가 출토되었다. 한편 당시 남부지방에서는 명문토기가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문자를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는 필기도구로 추정되는 붓과 삭도(削刀)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일부에서는 문자..

2. 신라 · 가야토기의 문양(新羅 · 伽倻土器의 文樣)

삼국시대 토기의 문양은 신라와 가야토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하고 세련된 각종 침선문을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영남지방에서는 도질토기가 발생하고 나서 한동안 무문양으로 정면된 토기들이 만들어지는 경향을 보이다가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신라토기와 가야토기의 성립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투껑과 몸통에 각가지 문양이 장식되게 된다. 날카로운 대칼로 器臺 · 長頸壺의 목과 어깨, 몸둘레 등 모든 토기에 기하학적 선문을 시문하게 되었다. 또 장경호의 목이나 고배의 다리를 몇 줄기 돌대상 횡선을 돌려 등분하고 그 안에 여러가지 문양을 시문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횡선만으로 장식을 삼기도 하였다. 기하학적 문양에는 직선적인 것으로 삼각집선문, 사각집선문, 침엽문 등이 있고, 곡선적인 문양으로는 원권문 또는 ..

1. 고구려 · 백제 토기의 문양(高句麗·百濟 土器의 文樣)

고구려의 토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가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여 토기의 器種과 文樣을 토기의함께 살펴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토기는 손잡이가 두 개 혹은 네 개 달린 단지나 바리, 병, 시루 등 대부분 납작 바닥의 토기가 많고 소성온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다. 문양에 있어서도 어깨나 몸통 부위에 간단한 횡선이 돌려지거나 단순한 파상문과 능형문 · 승문 등이 시문 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무문인 경우가 많고 흑색이나 회색 · 갈색 등으로 마연된 토기가 있다. 그리고 단지나 병 등에 시문된 파상문은 신라나 가야의 그것과 달리 대부분 반원을 연접시킨 형태인데, 이는 부분적이기도 하지만 백제토기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또 중국의 영향으로 황갈색의 유약을 바른 토기가 제작되기도 ..

문양(文樣)

토기에 문양을 넣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토기를 제작 해 온 역사와 같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일이다. 토기에 나타나는 문양은 토기를 제작하는 방법과 과정에 따른 흔적으로 남겨지는 경우와 장식이나 실용적 기능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있다. 문양을 시문하는 방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주로 점토를 덧붙이거나 도구를 이용한 새기기, 깍기, 문지르기, 두드리거나 눌러찍기 등이 있다. 이 밖에도 토기의 표면에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서 채색된 문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토기제작 기술이 도입되면서 등장하는 원삼국시대의 와질토기에는 이전의 무문토기보다 태토의 밀도를 치밀하게 하기 위해 토기벽을 두들겨 생긴 승문(繩文), 격자문, 평행문 등의 이른바 타날문이 가장 일반적인 문양으로..

4. 장식토우(裝飾土偶)

장식토우는 신라토기에서 가장 많이 보이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복속되거나 영향 아래에 있던 낙동강 東岸에서 약간의 예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토기에 장식적인 토우를 붙이는 전통은 신라에서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뿔잔이나 상형토기가 같은 분포권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한편 신라토기에서도 장식토우가 붙은 토기는 대체로 6세기경의 토기에서 많이 보이는 데, 이러한 현상은 三國史記에 지증왕(智證王)이 즉위 3년(502년)에 달려묻기(殉葬)를 금지한 기록이나 이 후에 보다 활발해진 영토의 확장과 같은 시대적 배경에 연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신라의 장식토우는 그 형태가 매우 간략하고 소박하지만, 필요한 경우 性器와 같이 기원하고자 하는 목적과 관련한 부분은 과..

3. 우리나라의 토우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토우가 만들어졌지만 수량은 많지 않으며, 양양 오산리유적((襄陽郡 巽陽面 鰲山里遺跡)에서 출토된 사람얼굴모양과 울산 신암리유적의 말, 욕지도 조개더미유적의 돼지가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의미의 유물로는 뼈나 뿔 그리고 조개껍질과 같은 재료로 만든 사람모양이나 사람얼굴모양 등의 것이 있는데 웅기 서포항유적과 부산 동삼동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토우를 말할 때는 수량도 많고 형태도 다양하며, 가장 활발하게 제작된 삼국시대 특히 가야와 신라의 유물을 일컷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시대의 토우로 전하는 것은 거의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로 조그맣게 만든 인물과 동물이 무덤에 넣어졌는데 이것을 흔히 명기(明器)라 부른다.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의 토용)

장식토기(裝飾土器)

1. 장식토기와 토우(裝飾土器와 土偶) 삼국시대의 토기는 나라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각종 기하학적 무늬나 인물이나 동물의 구체적 모습을 새기거나 만들어 붙여서 표면을 장식한 것이 많다. 이러한 경향은 삼국시대의 토기 중에서도 특히 신라와 가야의 토기애서 많이 보이며, 이외에 동물이나 인물의 형태를 작게 만들어 붙이거나 손잡이 등을 동물의 모습으로 만든 토기도 있다. 이와 같이 토기의 표면에 작은 모습의 인물이나 동물을 만들어 붙인 것들을 토우장식토기라 부르며, 손잡이 등을 동물 모습으로 만든 것도 그 아류에 속하므로 이들을 모두 합해 장식토기로 분류할 수도 있다. 토우는 문자 그대로 흙으로 만든 人形을 뜻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는 사람의 모습 뿐 아니라 여러 가지의 동물이나 생활용기, 집 등의 형태를..

3. 가야 토기(伽倻 土器)

가야 토기들의 이모저모 굽다리접시(外反口緣高杯) 가야 4세기 김해 예안리11호, 높이 11.0cm, 부산대학교 . 두귀항아리(兩耳附壺) 가야 4세기김해 대성동 10호, 높이 29.0cm, 慶星大學校 굽다리접시(高杯) 가야 4세기 함안 황사리 30 · 29호 높이(오른쪽) 15.5cm , 慶尙大學校 굽다리접시(高杯) 가야 4세기 함안 황사리 26 · 24호 높이(오른쪽) 14.0cm , 昌原大學校 그릇받침(器臺) 가야 4세기 부산 복천동 60호 높이 40.2cm , 釜山大學校 두귀항아리(兩耳附長頸壺) 가야 4세기 부산 복천동 60호 높이 19.1cm , 釜山大學校 이형토기(異形土器) 가야 4-5세기 합천 저포B-6 · 출토지모름, 높이(왼쪽) 13.4cm , 昌原大學校 ·慶..

▣ 가야(伽耶) 2026.08.23

2. 가야 토기(伽倻土器)

고령은 大伽倻의 故址로 이 지역의 토기는 有蓋長頸壺와 高杯形器臺, 上下一列2段透窓高杯, 蓋杯 등이 주요 기종이다. 고령식 토기는 대가야 首長層의 집단묘역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여 후기에는 합천, 함양, 거창, 산청, 진주 등 영남지방 서북부지역과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지방까지 분포하며 대가야의 멸망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신라후기 양식토기로 대체된다. 이와 같은 고령식 토기의 상대순서와 종말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으나 절대연대 비정에는 다소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현재까지 출토된 고령식 토기의 상한 연대를 비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이유로는 목곽묘에 대한 조사 예가 부족한 것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령 쾌빈동유적의..

▣ 가야(伽耶) 2026.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