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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 阿且山(峨嵯山)」

광진구 아차산자락 아늑한 곳에 아리수를 마주보고 있는 마을 廣場洞에서 살 때(15年) 정년 후 조석으로 산책하던 아차산, 청소년 시절부터 아차산 구석구석 헤집고 다녀 나만의 산책길이 있다. 아차산 동쪽 8부 능선상에 광장동에서 구리시 망우리까지 숨은 듯이 이어진 오솔길이다 이 길은 인근 토박이나 알까 싶게 한적하고 호젓하여 뒷짐 지고 사색하며 돌과 풀과 나무들과 속삭이듯 소통하며 담소 나눈 수십 년 지기 동무 같은 길이기에 숨은 오솔길이라 이름을 주었다. 아차산 동편 자락 아래 아홉 마을이던 九里面이 구리시가 된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와서도 늘 산책하던 이 길을 역방향(구리시 ~ 광장동)으로 다니다가 足底根膜炎이 발병하여 수삼 년을 못 다니다가 오늘 발바닥 통증을 무릅쓰고 광장동 인근 우미촌 마을에서..

「동심초 / 同心草」

구리시에서 자전거로 강변북로를 타고 덕소 한강변에 도착하여 언제나처럼 강가 풀밭에 자전거를 눕히고 그 옆 벤치에 앉아 머리를 비우고 멍 때리다가 바람의 소리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노래 '[동심초' 아마도 중학 때 배웠던 가곡歌曲이지 싶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 는고 - 이 가곡 동심초는 본시 唐나라 여류시인 설도薛濤가 지은 5언 절구 춘망사春望詞에서 제3수를 현대 시인 김억이 번역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원이 엄마의 편지」

박물관재직당시 살뜰하고 뭉클한 사랑의 감동을 안겨주던 친필의 이 편지를 직접 접하고 전시한 적이 있어 그때의 감성으로 이에 올려본다. 조선 중엽(1586년 음력 6월1일) 어느 부부의 애틋한 사랑의 편지가 오랜 세월동안 남편의 품에 고이 안겨 땅속에 묻혔다가 약 400여년이란 지난한 세월이 지나서 다시 후대의 仁愛에 심금을 울렸다. 이러한 사랑을 지금의 세태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선비 이응태 부인의 순애보적 그리움이 절절한 편지의 내용을 이에 실어본다. 또한 병으로 자리보전한 남편이 쾌차하길 염원하는 지극정성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손수 남편의 미투리(신발)를 엮었다. 특히 조선시대 양반가 여인들은 머리카락을 貞操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는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병으로 누워 있는 남편의 미투리..

「歲月」

수 시절 지나는 동안 세월 모르고 살았건만 이제는 한시각 흐름도 눈에 보이네 진달래 피니 솔바람에 흰 구름 흘러가고 들국화 피더니 흰 눈이 내리누나돌아보니 걸어온 길 가물가물 아득하고 세월 따라가는 끝머리 보이는 듯하네. 한 시절 한 때의 푸른 하늘 개울가 하얗게 쌓인 눈 구름처럼 아름답다 그 물가 둔덕길 걷는 이 어찌 기쁨 없으랴 하얗게 눈 덮인 인척 없는 산책길가 벤치에 흰 눈이 머물고 있네 - 창밖을 내다보니 눈 덮힌 시베리아 산림을 보는 듯한 느낌 없지 않다. 2025 / 2 / 25. - 鄕 -

盟主國 大伽耶 王族의 墓域

高靈은 後期 伽耶聯盟의 盟主國이였던 大伽耶 本據地로 삼았던 곳이다. 大伽耶는 伽耶諸國중 유력한 국가를 칭한 용어로 한때는 前期 伽耶의 맹주국이었던 金冠國을 大伽耶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금관국이 세력을 상실한 뒤인 5세기 後半代이후 멸망시까지는 낙동강 西岸을 거점으로 하여 이 고령의 가야세력이 대가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大伽耶聯盟의 세력판도는 高靈系土器가 출토되는 陜川 · 咸陽 · 南原  등 智異山주변은 물론 晋州 · 泗川 · 固城 등 蟾津江流域에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부 경남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이나 연맹의 각 소국들은 독자적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막강한 대가야도 백제가 榮山江以南地域에 대한에 대한 영토확장을 꾀함에 따라 도..

大伽耶聯盟의 强者 多羅國의 首長墓

「陜川 玉田遺蹟」5세기 후반대에는 金冠伽耶를 비롯한 洛東江河流地域의 가야세력들이 신라의 진출에 의해 그 힘이 약화되고, 신라양식의 토기가 낙동강 동안지역에 확산된다. 반면 낙동강 以西地域에 있던 伽耶群勢力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高靈의 大伽耶를 盟主國으로 하는 聯盟體 형태로 세력을 규합하여 신라의 세력 팽창에 맞서는 한편, 百濟와 유대관계를 가지면서도 백제의 漢城陷落과 熊津遷都라는 힘의 공백을 틈타 한동안 급성장을 보인다.이들 대가야연맹국의 하나였던 多羅國은 《日本書記》 에 전하는 바와 같이 백제가 중재하여 541, 544년 두차례에 걸쳐 열린 伽耶復興會議의 參席者 현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맹주국인 고령의 加羅, 咸安의 安羅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던 나라였다. 慶南 陜川郡 雙冊面 城山里에 소재하는 玉田..

洛東江河口의 有力集團

「釜山 福泉洞遺蹟」 낙동강 하구의 동쪽에는 金冠國에 버금가는 유력한 勢力集團이 存在했던 사실이 부산 복천동유적 조사로 밝혀졌다. 《三國史記》에 傳하는 居柒山國, 또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의 瀆盧國의 實體가 그것이다. 복천동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의 首長級들의 墓域으로서 무덤이 營造된 中心年代는 4~5世紀代 이다. 이들 수장급의 무덤으로서는 일직선상日字形의 副槨(무덤에 딸린 구덩이)을 갖춘 大形木槨墓가 주류를 이룬다. 무덤내에서는 鐵錠(쇳덩이)등 풍부한 鐵器類와 토기 등이 대량 埋納되어 있고, 殉葬된 人骨도 출토되어 당시 그들의 경제적 富의 축적뿐 아니라 정치적 권력집중도 잘 보여준다. 복천동유적을 영조한 勢力의 성장기반으로는 철생산의 장악과 함께 馬具나 甲胄 등에 보이는 새로운 北方文物의 수용을 들..

아라가야 / 阿羅伽耶

아라가야(阿羅伽耶)는 지금의 咸安이요, 고령가야(古寧伽耶)는 지금의 咸寧이고, 대가야(大伽耶)는 지금의 高靈이며, 성산가야는 지금의 경산이니, 소가야는 지금의 高城이다.   「아라가야(阿羅伽耶)」아라가야는 《삼국지》 魏書의 東夷傳에 의하면 弁韓 안야국(安耶國)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하고 발전한 가야이다. 아나가야(阿那加耶) ·안라국(安羅國) · 아시라국(阿尸良國)으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던 세력이다.바다와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함안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아라가야는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었으며,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 힘을 갖추고 있던 ..

「대가야 / 大加耶」

대가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 고령군조(地理 高靈郡條)에 기록되기를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무려 16대, 520년에 이르렀다.(大加耶國自治祖伊珍阿豉王至道設智王凡十六世五百二十年)"고 한다. 三韓때까지 半路國으로 불린 고령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 기반 위에 있었다. 고령 盤雲里遺蹟의 瓦質土器가 영남지방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점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4세기대에 접어들면서, 고령의 세력은 冶爐面 일대의 鐵鑛을 개발하고 힘을 키워 가야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서기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廣開土王의 군대가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세력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에 낙동강 중류의 내륙 ..

「금관가야 왕의 무덤 / 金冠伽耶의 王陵」

〈김해 대성동유적 / 金海 大成洞遺蹟〉洛東江 河口에 위치한 金海는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 전하는 金官國(《三國志》魏書 韓傳의狗耶韓國)의 古地로 알려져 왔다. 前期伽耶諸國의 盟主國이기도 하였던 이 금관가야국의 실체가 김해 대성동유적의 발굴조사로 그 수수께끼의 베일을 벗게 되었다. 대성동유적은 가야국의 시조인 首露가 降臨하였다고 傳하는 龜旨峯과 그가 묻혔다고 傳하는 首露王陵 사이의 평지에 형성된 나즈막한 구릉위에 위치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39기의 무덤중 당시 금관가야의 영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은 3세기후반부터 5세기전엽에 걸쳐 만들어진 大形의 木槨墓들이다.  이들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통해 보면 당시의 금관국은 바다를 이용하여 중국과 일본 등과의 交易을 주도하면서 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3세기 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