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대가야(大伽耶)

「대가야 / 大加耶」

鄕香 2024. 11. 10. 23:35

대가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 고령군조(地理 高靈郡條)에 기록되기를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무려 16대, 520년에 이르렀다.(大加耶國自治祖伊珍阿豉王至道設智王凡十六世五百二十年)"고 한다. 三韓때까지 半路國으로 불린 고령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 기반 위에 있었다. 고령 盤雲里遺蹟의 瓦質土器가 영남지방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점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4세기대에 접어들면서, 고령의 세력은 冶爐面 일대의 鐵鑛을 개발하고 힘을 키워 가야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서기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廣開土王의 군대가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세력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에 낙동강 중류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고령세력이 가야의 여러 세력들을 규합하여 새로이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 때부터의 역사를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前期加耶와 구별하여 後期加耶라고 한다. 

대가야는 이웃의 陜川지역을 통합한 이후, 全盛期에는 남해안 일부와 아라가야의 역역을 제외한 함양, 남원, 임실, 섬진강 유역에까지 영향력을 넓혀 당당히 후기가야의 맹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대가야 영향 아래 들어간 지역은 문화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어 이를 大加耶文化圈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합천 苧浦里 E-4호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下部"라는 글씨를 통해 대가야가 통합한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임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기 479년 대가야의 王 荷知가 중국 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서기 522년에는 대가야와 신라의 왕족 사이에 결혼도 이루어졌다. "大王"이라는 글씨를 새긴 토기라든가 盟主國 王의 상징인 金冠도 이 즈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통해 대가야가 후기가야의 맹주로서 다른 가야들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集權國家로 다가서는 기틀을 다진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와 백제의 전쟁 틈바구니에 낀 대가야는 낙동강유역을 장악한 신라의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기 562년에 멸망하였다. 고령에는 대가야의 王城 및 왕궁터와 통치자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고령의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主山에는 王城인 주산성이 있고, 그 아래 편평한 곳에 왕궁터가 남아 있다. 왕궁터에서는 전돌과 기와가 출토되어 화려한 궁궐을 짓고 생활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大王」새김 토기〉

 

(주산성과 지산동 고분군 / 主山城 池山洞 古墳群) 

 

池山洞古墳群은 왕성과 왕궁 사이에 길게 뻗어내린 능선에 위치하는 중심고분군으로 대가야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며, 구덩식(竪穴式)의 돌덧널과 돌방무덤이 주된 묘제이다. 

무덤은 가운데에 주인공이 묻힌 구덩식돌방을 두고, 그 가장자리에 여러 개의 돌덧널을 만들어 殉葬者를 함께 묻은 다음, 하나의 거대한 봉분을 쌓은 형태이다. 하나의 봉토 속에 무덤 주인공과 순장자를 구분하여 묻은 것은 대가야 장례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깬돌로 너비에 비해 길이를 5배 이상 길게 쌓은 구덩식돌방도 대가야 무덤이 지닌 특징의 하나이다. 

 

고령 지산동 32호 무덤(古靈 池山洞 32號墳)

 

(陜川 玉田 M3號墳 全景)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봉토의 규모가 가장 큰 것은 44호 · 45호 무덤으로, 44호 무덤에서는 32기나 되는 순장돌덧널이 배치되어 있으며 45호 무덤에서도 주인공이 묻힐 돌방을 비롯해 11기의 순장돌덧널이 있고 출토유물도 화려하면서 풍부하여 대가야의 왕릉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古衙洞古墳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불교의 상징인 연꽃을 그린 벽화가 있어 백제와의 교류뿐만 아니라 당시의 미술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고령 주변의 산지에는 이 밖에 많은 무덤이 있는데 快賓洞 고분군과 本館洞고분군이 대표적이다.

 

〈傳 고령출토 금관 (호암미술관 所藏)〉

 

 

〈금동관 (金銅冠 : 고령 지산동 32號墳 출토)〉

 

 

고령을 벗어난 대가야문화권 안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는 多羅國이 위치한 합천의 玉田古墳群과 磻溪堤古墳群, 함양 白川里古墳群, 남원 月山里古墳群 등을 꼽을 수 있다. 대가야문화의 동질성은 무덤양식과 더불어 유물에도 잘 나타나 있다. 얕은 접시에 작은 네모투창을 뚫은 굽다리접시와 잘록한 목과 뚜컹받이턱이 있는 목항아리, 몸통에 긴 띠를 장식한 원통형그릇받침筒形器臺, 드림장식을 사슬로 엮어 늘어뜨린 귀걸이 등이 대가야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 가운데 원통형그릇받침은 장례와 나라의 큰 행사 때 제사를 끝내고 깨뜨린 다음 묻거나 주변에 뿌리기도 한다. 대가야의 영향력 아래 들어온 지역에서도 지역의 지배자들이 下賜받은 그릇받침을 무덤에 껴묻거나 제사를 지낸 흔적이 보인다. 대가야 계통의 무덤과 유물들은 합천 · 함양 ·  남원 · 임실 · 장수 · 진주 · 고성 등지에 퍼져 있어 대가야의 영향력이 미친 범위를 엿볼 수 있다. 

 

〈그릇받침 / 筒形器臺〉 

합천 반계제 가B무덤(陜川 磻溪堤가B號墳) 5世紀 

높이(高)68.5cm 입지름(口徑)26.8cm 

 

 

〈그릇받침 / 筒形器臺〉 

합천 옥전 26호무덤(陜川 玉田 26號墳) 5世紀 

높이(高)57.1cm 입지름(口徑)21.9cm 

 

 

〈그릇받침 / 筒形器臺〉 

고령 지산동 32호무덤(高靈 地山洞 32號墳) 5世紀 

높이(高)64.8.cm

 

 

〈그릇받침 / 筒形器臺〉 

진주 옥봉리 수정봉 (晋州 玉峰里 水晶峰) 6世紀 

높이(高)58.0cm 입지름(口徑)23.8cm 

 

    

〈그릇받침과 뚜껑항아리 / 器臺-有蓋壺〉

고령 지산동 44 · 45호무덤(高靈 地山洞 44號 45號墳)5~6세기 (5~6世紀) 

기대(器臺) : 높이(高) 34.0cm 입지름(口徑)42.0cm 오른쪽(右)

항아리(壺) : 높이(高)35.0cm 입지름(口徑) 12.8cm오른쪽(右)

 

 

〈합 / 母子盒〉

고령 지산동 32호무덤(高靈 地山洞 32號墳) 5~6世紀 

모합(母盒) : 높이(高)11.5cm, 입지름(口徑) 33.5cm 

자함(子盒) : 높이(高)6.9cm 입지름(口徑)11.5cm

 

 

〈굽다리접시 / 高杯〉

고령 지산동 45 · 33호무덤(高靈 地山洞 45號 33號墳)5~6세기 (5~6世紀)

높이(高)18.0cm 입지름(口徑)12.0cm 오른쪽(右)

 

 

〈제사토기 / 祭祀土器〉

합천 저포리 D1-1호 무덤(陜川 苧浦里 D 1-1號墳) 5世紀 

높이(高)44.3cm 항아리(壺) 

 

 

〈목항아리 / 長頸壺〉

고령 지산동 44호무덤(高靈 地山洞 44號墳) 5세기 (5世紀)

높이(高) 20.4cm 입지름(口徑)17.6cm 왼쪽(左)

 

 

〈여러 가지 토기 / 土器各種〉

고령 지산동 44호무덤(高靈 地山洞 44號墳) 5세기 (5世紀)

높이(高) 14.1cm 입지름(口徑)13.7cm 오른쪽 위(右上) 

 

〈목항아리 · 그릇받침 / 長頸壺 · 鉢形器臺〉

남원 월산리 M1-E호무덤(南原 月山里 M1-E 號墳) 5세기(5世紀) 

그릇받침(器臺) :높이(高)36.0cm 입지름(口徑)48.5cm 

항아리(壺) :높이(高)43.0cm 입지름(口徑)15.0cm

 

〈목항아리 · 그릇받침 / 長頸壺 · 器臺〉

남원 월산리 M1-A호무덤(南原 月山里 M1-A號墳) 5세기(5世紀) 

그릇받침(器臺) :높이(高)14.6cm 입지름(口徑)15.7cm 오른쪽(右)

항아리(壺) :높이(高)17.5cm 입지름(口徑)15.2cm 오른쪽(右)

 

 

〈본뜬철기 / 模製鐵器〉 

남원 월산리 M1-A호무덤(南原 月山里 M1-A號墳) 5세기(5世紀) 

길이(長) 6.7cm 오른쪽(右)

 

 

〈본뜬철기 / 模製鐵器〉 

고령 본관동 36호무덤(高靈 本館洞 36號墳) 5세기(5世紀) 

길이(長)605cm, 오른쪽 아래 (右下)

 

아래 ( 鳳凰文環頭大刀 ) 세부(細部)

〈봉황무늬고리자루칼 / 鳳凰文環頭大刀〉 5世紀 

길이(長)113.1cm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용·봉황무늬고리자루칼 / 龍·鳳凰文環頭大刀〉 세부(細部)

〈용·봉황무늬고리자루칼 / 龍·鳳凰文環頭大刀〉 5世紀

길이(長)83.0cm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투구 / 胄〉 5世紀  

높이(高) 20.0cm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말머리가리개 / 馬面胄〉 5世紀

길이(長)49.5cm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안장가리개 / 鞍輪〉6세기(6世紀) 

앞가리개(前輪)높이(高)30.3cm 너비(幅)44.5cm 

고령 지산동 45호무덤(高靈 地山洞 45號墳) 

 

〈여러 가지 `말갖춤 / 馬具 各種〉 5~6세기(世紀)

지름(徑)18.5cm, 오른쪽 아래(右下)

고령 지산동 44 · 45호무덤(高靈 地山洞 44號 45號墳)5~6세기(世紀) 

 

 

〈화살통 부속구와 화살촉 / 金銅盛矢具·鐵鏃〉 5세기(世紀) 

화살통 부속구(金銅盛矢具):길이(長)27.0cm, 너비(幅)14.0cm,   

화살촉(鐵鏃):길이(長)19.0cm, 

고령 지산동 34호무덤(高靈 地山洞 34號墳)

 

〈안장가리개 / 鞍輪〉5세기(世紀)

높이(高)26.0cm, 너비(幅) 42.0cm,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안장가리개 / 鞍輪〉 5세기(世紀)

높이(高)27.4cm, 너비(幅) 57.2cm,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말띠 드리개 / 馬葉〉 5~6세기(世紀)  

길이(長)13.5cm, 오른쪽(右)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말방울 / 馬鈴〉 5세기(世紀)

지름(徑) 5.7cm,오른쪽(右)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사람얼굴무늬말방울 / 人面文馬鈴〉 5세기(世紀)

지름(徑) 6.0cm, 오른쪽(右)

합천 반계제 가A호무덤(陜川 磻溪堤가A號墳) 

〈기꽂이 / 蛇行狀鐵器〉 5세기(世紀)

길이(長) 60.5cm,오른쪽(右)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발걸이 / 鐙子〉5세기(世紀) 

길이(長) 25.0cm,   24.5cm,

합천 반계제 가A호무덤(陜川 磻溪堤가A號墳) 

 

〈청동합 / 靑銅盒〉 5세기(世紀) 

높이(高) 8.1cm, 입지름(口徑) 15.9cm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목걸이 / 頸飾〉5세기(世紀)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가는고리귀걸이 / 金製細環耳飾〉 5세기(世紀)

길이(長) 7.8cm, 오른쪽 아래(右下)

합천 옥전 M3호무덤(陜川 玉田 M3 號墳)

 

〈금동관 / 金銅冠〉 5~6세기(世紀)

높이(高)8.0cm, 지름(徑)17.5cm

성주 가암동(星州 伽岩洞) 

 

《國立金海博物館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