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백암산 백양사./白巖山 白羊寺

鄕香 2018. 11. 2. 20:56

 

암산은 해발 741.2m의 상왕봉을 최고봉으로 내장산 입안산 줄기와 맞닿아 있다. 백암산은 백학봉, 상왕봉, 사자봉 등 기암괴석이 곳곳에 있고 험준한 산세에 사시사철 그 아름다움이 작은 금강산이라고 할만 하겠다. 특히 백학봉 회백색 바위와 백양사 계곡 맑은 물과 쌍계루와 울긋불긋 물든 귀엽고 그 빛깔 다채로운 애기단풍이 어우러진 풍광은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작년 가을 내장산 대가리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신선봉-까치봉-순창세재-상왕봉-사자봉-백양사코스를 탐방산행하였기에 오늘은 (대가리-1.5km-구암사입구-1.1km-구암사-0.7km-구암사갈림길-06km-백학봉-1.4km-약사암입구-0.5km-백양사-1.5km-제2주차장.) 7.3km거리를 탐방하였다. 백양사 경내 고적으로는 소요대사부도, 대웅전, 극락보전, 청류암의 관음전, 그리고 사천왕문이 있다.

 

아래 약도는 작년에 내장산과 함께 백암산 탐방할 때 상왕봉과 사자봉사이 능선사거리에 게시된 약도이다.

 

산악회에서 제공한 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걸어서 만난 구암사입구 표지석이다. 다시 1.1km 정도 걸어서 보이는 산중턱으로 들어가야 구암사가 있다. 내가 내릴 때 세 분이 내가 가는 길로 따라가겠다고 해서 낯선 길에 의지가 되어 고마웠다.  

 

 

《영구산 구암사/靈龜山 龜巖寺》

 

 

구암사 안내판을 옮겨 보면, "백제 무왕 37년(636년) 숭제선사에 의해 창건, 1392년(조선 태조 원년) 각운선사가 중창하였다. '구암사'라 함은 사찰 동편 지점에 숫거북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밑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했으며  주산은 신령스러운 거북을 닮아 영구산이라 명명하였다"고한다. 

 

 

 

구암사에서 2000년 5월 국가보물 제745-10호 월인석보 권 제15의 1권1책이 발견된바 있다.

 "月印釋譜"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조가 1459년에 釋譜詳節과 月印千江之曲을 토대로 하여 만든 책이다.   

'월인석보'는 세종 때 (1446년)수양대군(세조)이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의 冥福을 빌기 위해 만든 것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만든 책이며, '月印千江之曲'은 석보상절을 읽은 세종대왕께서 석가가 태어나 중생을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이다. 월인석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불교와 관련한 최초의 諺解書라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문헌이다. 그러나 현재는 전체의 분량 중 20여 권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구암사는 예로부터 유명한 대종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영조 때에는 화엄종주인 설파대사가 주석했다. 이로부터 100여 년 간 화엄종맥의 법손이 계승된 전통적인 사찰이다. 당시 구암사는 전국 굴지의 사찰로 각처에서 운집한 승려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한다. 그 후 講院, 禪院 등으로 존속해 오다가 임진왜란 때에 전소되었다. 그후 전라관찰사 '이경상'이 백파선사의 선교강설에 감동하여 대웅전을 중창하고 정조 350석을 보시하여 사찰 전답으로 매입 관리토록 하였다. 이곳 구암사에 주석하던 백파스님의 설법으로 입산수도한 승려가 각처에서 운집하였기에 스님을 선문중흥조라 일컬었고 그 법맥을 고창 선운사와 정읍 내장사, 장성 백양사, 해남 대흥사 등에 전법하였으며 현종 때는 蘆沙 奇正鎭 선생과 친교 정진하였다. 그후 6.25전쟁으로 전소되고, 1957년 신도 대표 정기동 거사가 복원하였으나 2년 뒤 1959년 다시 전소, 1973년 대웅전과 요사만 세웠으나 붕괴되어 2002년 지공화상께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 비문은 제자들에 의해 대대로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대사의 출가 본사인 선운사에 비를 세웠다. 당시 추사 김정희는 백파 대종사를 높이 추앙하여 많은 찬사의 글을 남긴바 있다. 백파 대종사의 在家 제자로 이광수, 신석정, 서정주, 조지훈 등이 있고 在寺 제자로는 청담, 청우, 서경보, 운허 운기, 윤성, 남곡, 만암대종사 등을 길러낸 사찰이다. 본 사찰 200m 앞에 설파대종사, 백파대종사 부도가 있고 경내에 1392년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와 문필봉이 있어 근대에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구암사 좌측 '아치파고라'를 통과하여 백양사 가는 길로 들어선다.

 

 

부부와 1형제 분 그리고 나 4사람이 초행길을 간다.

 

 

'길'

어차피 인생은 길이건만, 나는 오늘도 그 인생길의 수많은 지선을 찾아 길 나선다. 이 길이 새로운 길이든 한번 쯤 다녀간 길이든 새롭기는 매한가지이다. 늘 보는 나무와 풀이건만 늘 다른 모습으로 기쁨과 서글픔을 제시한다. 그래서 인생이다. 이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초목은 정갈하게 단장하고 숙연한 모습으로 한 해를 보낼 의식을 치르고 있다. 나 또한 다시 이 길을 밟을 수 있더라도 오늘의 이 길이 내일의 모습은 아니기에 숨 다하는 그날까지 걸음걸음마다 구도자의 심경으로 간다.

 

 

 

 

 

구암사에서 600m 올라온 가지능선 첫 봉우리

 

 

구암사 0.6km, 백학봉0.7km, 상왕봉1.8km

 

 

구암사에서 오른 길이 상왕봉에서 백학봉으로 이어진 주능선 중간지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구암사에서 올라온 길이 백학봉이나 상왕봉으로 가는 주능선과 만나는 삼거리이다. 여기서 부부는 상왕봉으로 떠나고 한 분은 식사를 하고 가겠다고 해서 나만 백학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대가리들머리에서 내장산 신선봉과 순창세재를 거쳐 상왕봉에 이른 주능선으로서 다시 백학봉으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으로 백양계곡으로 내려가는 삼거리이다.  

 

 

 

백양사 뒤 회백색 암벽을 이루고 있는 백학봉 정상 모습이다.

 

 

  《백학봉》

 

 

울퉁불퉁 바윗길 나는 네가 좋다.

 

 

백학봉에서 바라본 풍경

 

 

장성댐

 

 

 

 

약사암으로 가는 하산길, 내장산에서부터 걸어온 산악회원들 일까 이제까지 호젓하던 내 가던 길이 혼잡스럽다.  

 

 

학바위

 

 

백양사 계곡

 

 

 

 

학봉 전면.

 

 

 

 

 

 

 

 

 

 

백학봉 절벽

 

 

백학봉의 측면 모습

 

 

 

 

 

 

 

 

 

 

 

영천굴 옆 기암

 

 

영천굴과 기암

 

 

 

 

《영천굴 영천수/靈泉窟 靈泉水》

1층에는 암굴 속에 약수가 풍족하고 2층은 관세음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다.

 

 

《영천수/靈泉水》

조선 후기에 큰 전염병이 돌아서 전라감사 洪樂仁이 영조(1724-1776)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靈地를찾아 크게 기도를 올리도록하라."고 명하자 백양사 바위에 國際基라 새기고, 영천굴 바위굴에서 솟아나는 영천수를 제단에 올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약수를 마시게 하니 신기하게도 병이이 나았다고 합니다. 이에 전라감사 홍낙인이 보은의 의미로 그곳에 암자를 짓고 靈泉庵이라 하였는데,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영천수를 마시고 고질병을 낫는 의지처가 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2013년에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약사암- 

 

 

《영천굴/靈泉窟》

 2층에는 왼손에 靜甁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다.

 

 

 

 

《영천굴 영천수/靈泉窟 靈泉水》

암굴은 상층과 하층 2로 이루어져 있고 하층 암굴 속에 약수가 풍족하고 상층 암굴에는 왼손에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다.

 

 

 

약사암

 

 

 

 

(대가리-1.5km-구암사입구-1.1km-구암사-0.7km-구암사갈림길-06km-백학봉-1.4km-약사암입구-0.5km-백양사-1.5km-제2주차장.) 총 7.3km 탐방.

 

 

 

 

 

 

백양사 경내

백양사는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가을이면 백양사 일대를 물들이는 애기단풍은 백양사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겠다. 애기 손처럼 작고 귀여운 이파리가 색색으로 어찌나 투명하고 곱게 물이 드는지.. 하늘 높이 솟아있는 백암산 학봉의 회백색 기암괴석은 보는 이의 마음에 한껏 힘찬 웅지를 돋아주고 있다.

 

 

백암산 정기 머금은 맑은 물 흐르고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백양사는 정신수양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고불총림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백암사, 고려시대 정토사로 불렸는데,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단다. 법회가 3일째 되는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소멸하여 다시 천상으로 환생하여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이튼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양이 죽어 환생하였다'하여 그 이후 절 이름을 白羊寺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암산과 백양사는 나에게 있어 진한 인연이 있다. 푸르디푸른 젊은 날에 난생처음으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라남도 광주 땅을 찾아 상무대 내 육군기갑학교에서 ATMC 8주간 교육을 받고 자충되어 장성군 남면 비아리 제8561부대 (11TANK)에 보충되어 1968년 7월부터 1971년 6월27일 만기전역 특명 받을 때까지 외출을 통하여 자주 찾던 곳이었다. 당시 아담하고 고색 창연하던 백양사 대웅전 뒤뜰에 태어나 처음으로 본 수피가 표범의 무늬처럼 반점으로 이루어진 모과나무, 서울촌뜨기로서 난생처음으로 본 모과나무가 신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앞 아담한 연못과 백암산의 하얀 바위봉우리에 매료되어 봄가을 주일이면 찾아와 군 내무생활로 경직된 몸과 마음을 아름다운 풍경에 치유와 위안 받고 추스르던 곳이었다. 작년가을에는 내장산 산행을 겸해서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쳤기에 오늘은 백양사 옛 모습을 찾아보고 옛 추억에 젖어 보고자 짧게 코스를 잡고 찾아보니 그 대웅전 뒤 틀에 싱싱하고 푸르던 모과나무 48년 세월에 이제는 고목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열매를 맺고 의젓하게 서 있으나 아담하고 정겹던 연못은 매워지고 없구나! 나 또한 무쇠 같던 몸 시들고 백발이 성성하니 반세기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

 

 

心思가 고단할 때 가끔 떠오르던 이 모과나무 아래 앉아 상념에 젖어보니 인생 70여 년이 바람에 부대끼다 떨어지는 마른 모과나무이파리와 다를 바 없네.

 

 

 

 八正道를 상징하는 이 八層塔은 석가모니의 眞身舍利 3과가 안치되어 있다.

 

 

 

백암산 학바위 아래 운치 있게 자리 잡은 쌍계루는 계곡의 맑은 수경에 백학봉과 어우러져 몸을 담근 채 그 맵씨를 뽐내고 있다.

고려의 충절 정몽주가 단풍 빛깔에 취해 님을 그리는 애틋한 시를 읊던 곳이기도 하다.  

 

 

 

《雙溪樓》

두 계류가 합수되는 계곡에 지반을 돋아 둑을 쌓고 길을 내고 그 길 가운데에 쌍계루를 짓고 그 우측에 虹霓橋를 부설하여 물길을 내어 흘러내리게 하고 쌍계루 앞 넓은 하천 평평하고 고른 바닥을 적절한 경사를 주고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높이로 자연석으로 높지 않은 둑을 만들어 깊지 않은 못을 만들었으니 물이 고이지 않고 고루 퍼져 흐르며 넓은 수면이 잔잔하기가 호수 같아 水鏡으로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백학봉과 쌍계루가 어우러져 잠길 수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뤄낸 조경 솜씨가 돋보인다.

 

 

 

 

 

붉은 애기단풍이 예쁘게 액자를 꾸미고 의젓한 백학봉을 오롯이 담았네.

 

 

또한 쌍계루 앞 호수에서 100여m 정도 되는 이곳에 둑을 쌓고 호수를 만들어 주변경관에 일조를 더하고 유사시 消防用水로도 활용할 수 있겠다.

 

 

제2 호수, 하늘과 백학봉을 그림으로 담았네.

 

 

잎이 앙증맞게 작고 예쁜 애기단풍..

 

  

2018년11월3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