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두륜산 대흥사/頭輪山 大㒷寺

鄕香 2018. 12. 3. 17:41

두륜산은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있는 산으로 난대성 상록활엽수와 온대성 낙엽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억새밭이 무성하다.

 

두륜봉, 가련봉, 고계봉, 노승봉, 도솔봉, 연화봉 등 여덟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 졌고, 정상에서는 서해안과 남해안 곳곳의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집단시설지구에서 대흥사에 이르는 약 2km의 경내 좌우측 도로에는 울창한 숲이 이루어내는 가을 단풍과 푸르른 동백나무 숲으로 절경을 이루는 너부내 계곡이 이어 진다 두륜산은 산세도 수려하고 전망이 뛰어난 명산에 고찰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역사의 향기마저 유구한 세월에도 퇴색함 없이 은은하게 찾는 이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이래서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겠다.

 

 

완만하게 흘러내린 볼과 콧등, 惱殺的 입담을 머금은 입술, 끼 넘치는 웃음 담은 눈매의 얼굴은 여지없는 전형적인 전남의 여인이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동자는 질끈 감은 눈과 표정에서 흐트러지려는 불심을 모아보려는 듯 고뇌가 엿보이는 모습인데, 여인과 동자의 표정은 참으로 상반된 모습이라 하겠다. 또 달리 보면 여인 앞에 스님은 작아지는가 보다. 여인은 느긋하게 웃는데, 스님은 질끈 감은 눈가에 고뇌가 배어난다. 정염의 불길이 뿔처럼 솟아있고 유혹의 혀로 감아 드는데 구원의 손 모은 저 스님 어찌할고..  

   

 

  명산의 고찰로 오르는 길에 나무마저 고풍스럽다. 신선이나 머물 선계라 할만하다. 

 

 

  나는 얼마만한 세월에 마음을 더 비워내야 이만한 아름다움을 피워 낼 수 있을까!  

 

 

"너부내" 냇가에 고목들의 자태가 상상을 초월하도록 기교스럽다. 나뭇가지의 휘고 꺾임이 어찌 저리 아름다울까! 신선이 아니고서야 표현할 수 없는 극치일세.

  

 

遊仙館, 그 이름에 더함도 덜함도 없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이 집은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를 촬영한 집이라는, 짝지의 敷衍이다. 이 한옥은 한세기를 보낸 고색이 물씬 풍기는 전통한옥이다. 본디 대흥사를 찾는 신도나 객승들의 객사였단다. 짝지 덕분에 장작불에 뜨끈뜨끈한 온돌방의 유서 깊은 한옥에서 遊仙이 되는구나!

 

 

하룻밤 묵을 유선관에 들어서니 기둥마다 柱聯이 걸려 있다. 내가 묵을 방 옆 기둥의 주련을 내려 읽어보니 놀랍게도 西山大師 休靜의 제자이자 高僧으로서 우리에게는 僧兵將으로 더욱 각인된 四溟堂 惟政의 漢詩이다.

"十年端坐 擁心性 寬得深林 鳥不驚 作夜松潭 風雨惡 魚生一角 鶴三聲"

'십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을 다잡으니, 넓고 깊은 삼림이 되어 새들도 놀라지 않는다.

지난 밤 소나무 연못에 비바람 심하더니, 물고기는 뿔 하나 생기고 학은 세 번 울더라.'

 

존경하는 선각의 시귀에 젖으니 이 또한 인연이요 영광일진데 어찌 맨 정신으로 잠을 청하랴

주인께 전과 탁주를 請해서 취홍에 젖었었네. 

이 모든 일 어느새 추억이 된 것을 사진으로나마 다시 보니 "十年端坐 擁心性" 주련 걸린 기둥 튓마루 밑에 내 신발(履)이 보인다.

 

"仙景에 마음 이끌려 노닐다 날 저물어 仙舍에서 하룻밤을 留宿했었지,

이제 몸은 俗世에 머물고 있건만, 내 머물었던 房 툇마루 아래 吾 履는

어찌하여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느냐!"  

 

 

후원 나뭇가지에 深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겨우살이가 까치둥지 모양으로 주렁주렁, 가지런한 장독들 옛 정취가 폴폴- 이 모두가 鄕村의 情趣요 향기일세.

 

 

뒤뜰인가 싶어 돌계단을 내려서니 바로 아홉구비를 거쳐 흐르는 옥류천 너부내 일세.

 

 

내 속에 동심을 끌어내는 시냇가, 이끼 낀 돌담너머 아늑하고 고즈넉한 古家의 너른 지붕 기와골에 나의 옛 그리움이 맴돈다. 

  

 

   피안의 길로 들어선다는 저 彼岸橋에 광명의 빛발 부처의 두광처럼 눈부시다.

   

 

   九曲流水 아홉 구비를 휘돌아 나간다는 계곡에 한 해의 낙엽이 물길 따라 남실남실 세월을 넘는다. 

   

 

  한자리에서 백년을 저리 머물면 나도 저만큼 감동을 뿜어낼 수 있을까?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頭輪山 大興寺》

사찰로 들어서는 첫 문으로서 좌우로 한 개의 기둥 만으로 세운 문을 일컬어 일주문이라 한다.  일주문은 속계와 진계의 경계선상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오로지 한 마음에 귀의한다는 마음의 자세로 촉진시키고자는데 의미를 가진다. 본질적으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밤과 낮이 둘이 아니듯 기쁨과 슬픔이 둘이 아니며 깨침과 번뇌가 둘이 아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 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세운 문이다 

 

 

   受詔大將!  我吾, 업보 많은 줄 어찌 알고 선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내게 조서라도 받으려 하시는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우측을 보니 禁鬼大將! 악귀를 가려내려는 의지가 두 눈에 번득인다.

 

 

대흥사 창건과 관련하여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진정국사 천책(天頙1206~?)스님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스님의 衣鉢이 전해지고,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13 大宗師와 13 大講師가 배출되면서 禪과 敎를 겸비한 팔도의 宗院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1789년에 정조대왕으로부터 "表忠詞" 편액을 하사받아 서산대사의 忠義를 기리게 되었다.

사찰 경내를 남북으로 가르고 흐르는 금당천을 중심으로 北院, 南院, 別院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원에는 大雄寶殿, 應眞堂, 그리고 보물 제320호 三層石塔 등이 있고, 남원에는 千佛을 모신 千佛殿과 용화당, 등이 있으며, 별원에는 表忠詞, 大廣明殿,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또한 국보 제308호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보물제301호 三層石塔, 보물제1347호 서산대사 사리탑(浮屠) 등이 있다. 

   

 

《대흥사/大興寺》

대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2교구 본사로 창건과 관련 '만일암고기'에는 백제 구이신왕 7년(426년)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그후 백제 무령왕 8년(508년)에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죽미기'에는신라 법흥왕1년(514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기록이 있다.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있는 두륜산은 대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 대듬- 대둔산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한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둔산이 두륜산으로 변하게 된 것에는 중국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따서 두륜산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따라서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근대에 와서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부도전/浮屠殿》

부도탑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일종의 무덤이다. 형태에 있어서 팔각원당형, 종형 등으로, 사찰 경내 불탑의 부처님의 사리나 불상, 경전 등을 보관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탑비는 비문을 돌에 새겨 부도탑 근처에 세운다. 그래서 흔히 부도전에는 부도와 탑비가 함께 건립되어 있다. 이곳 부도전에는 부도56기와 탑비 17기가 모셔져 있는데 생몰년이 확인되는 것은 모두 조선후기 스님의 부도와 탑비이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역대 종사와 강사들의 부도와 탑비가 봉안되어 있다. 돌담장을 둘렀고 문은 잠겨 있어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기에 이런 한모움으로 넘어간다. 

 

 

  일주문을 지나 반야교에 이르기 전 우측 산자락 끝에 위치한 舍利塔(浮屠塔)과 塔碑 群

 

 

(반야교에서 般若波羅密多心經을 듣다)

아홉 구비를 흘르는 물이 옥구슬 구르듯 흐르는 반야교를 건너가노라, 그 浪浪한 물소리가 그대로 반야경일세, 

졸졸 또르르~~, 그 반야경 물소리 다함없이 들리건만, 나 어찌 해탈에 들지 못할까! 차라리 저 물에 귀를 담궈 보리라. -鄕香- 

 

"觀自在菩薩 行深般若 波羅密多時 照見五蘊 皆空度 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졸졸 또르르~~, 목탁이 따로 없네 "

 

 

반야교를 건너 일주문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산자락에 붉은 글씨의 비석이 보인다. 올라가 볼 수도 시간적 여유도 없어 사진으로 담았던 것을 읽어 보려니 일부 나뭇가지에 가려 여의치가 않다. 대강 적어본다.

"宇宙는 愈久한데 人生은 限이 있○ 한번 난 이 몸숨을 다시 고쳐 못 얻거늘 平生에 救卋濟度를 다해 봄이 어떠리"

 

 

몇 걸음 옮기는데 또 바위 위에 세운 가늘고 긴 (높이에 비해서) 석비가 보인다. 그냥은 못 지나친다. 사진을 통해 확인 된 것은 "十三大宗師○塔" 이다. 애석하게도 1글자는 나뭇잎에 가려 읽을 수가 없다. 아무튼 서산대사 이래 대사의 법문을 이어온 13분의 대종사가 배출된 사찰임을 자부한 碑이겠다.

楓潭스님에서 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 大宗師가 배출되었고, 萬化스님으로부터 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 大講師가 이곳 대흥사에서 배출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또한 산사로서의 면면을 살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유명한 사찰로써 조선시대 억불정책에서도 선문을 일으키고 조선조 후기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국가의 위기를 호국정신으로 지켜낸 공로로 한국불교의 오늘을 있게한 데는 서산대사의 호국정신에 그 기초를 두고 발원지로서의 역활을 다한 중심 도량이라 하겠다. 13분의 대종사들은 모두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門度요 法孫들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다음은 13분 大宗師이다.

"풍담 의심(楓潭 義諶1592~1665), 취여 삼우(醉如 三愚 1622~1684), 화악 문신(和岳 文信1629~1707), 월저 도안(月渚 道安 1638~1715), 설암 추붕(雪岩 秋棚1651~1706), 환성 지안(喚惺 志安 1664~1729), 벽하 대우(碧霞 大愚 1676~1763), 설봉 회정 (雪峰 懷靜1678~1738), 호암 체정(虎岩 體靜 1687~1748), 상월 세봉(霜月 璽封 1687~1767), 함월 해원(涵月 海源1691~1770),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초의 의순(초의 의순1786~1866)" 이다. 서산대사의 제자로서 송운 유정계, 편양 언기계, 소요 태능계, 정관 일선계 모두 4개 파로 나뉘며 이 중에 대흥사에 유숙한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는 법손이 가장 번성했던 편양 언기계와 소요 태능계 스님들이다.  

 

 

일반적으로 사악함을 걸러내는 사천왕문이 있을 자리에 '解脫門'이 대신하고 있다. 敎에 앞서 禪을 강조한 것일까? 아님 모든 속세의 연은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깨끗이 떨어내라는 것이겠다.

 

 

두억시니를 타고 있는 동자처럼 귀염성 풍기는 동자가 연꽃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 해탈에 이르면 동자처럼 해맑은 부처의 얼굴만큼 마음이 맑아진다는 의미를 은연 중 내비치는 것만 같다.   

 

 

6개의 상아가 돋아난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해말간 동자는 석가모니를 나타낸 것이겠다. 석가모니 모친 마야부인이 태몽으로 6개 상아가 달린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하였기에 ...  뒤 벽화에는 보현보살이 두 손으로 연꽃과 줄기를 받들고 있다.

 

 

산사의 마당에 곡선이 멋진 이 나무가 나에게는 마치 羅漢으로 비치네.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릉으로 알려진 경주 쾌릉에 이처럼 온몸의 곡선이 멋진 서역의 力士를 조각한 나한처럼 생긴 武人石像이 있어 떠오른 생각이다.

 

 

《범종루/梵鐘樓》

삼라만상을 깨우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佛殿四物의 하나이다. 아침과 저녁 예불 때 치는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음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부처의 말씀을 글로 옮기면 불경이요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 하면 불상이요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만다라가 된다 그러하매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해를 안고 담은 연리근의 자태이다. 어린 가지의 折枝의 미세한 형태와 배분된 모습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繡 놓은 듯이 나무의 검은 색깔이 어우러져 정갈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溪流를 가로질러 진리로 이어주는 尋眞橋를 건너서니 흐르는 金塘川를 벗 삼아 오수를 즐기라 하는 枕溪樓이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无量壽閣, 白雪堂, 應眞堂, 三神閣, 冥府殿, 枕溪樓에 삼층석탑이 둘려져 있는 곳, 바로 北院이라 부른다네. 

휘돌아보니 한 시대를 風味했던 명필들이 주렴처럼 걸려 있다.  

 

 

 

 

 

북원구역/北院區域》

안내문에 의하면 금당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원이라고 한다. 신라 말에 조성된 응진당 삼층석탑이 있으며 대흥사 경내에서 가장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18세기에 圓嶠 李匡師(1705~1777)가 쓴 '大雄寶殿' 편액이 걸려있고 백설당에는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쓴 '无量壽閣'편액과 海士 金聲根(1835~1919)이 쓴 '白雪堂'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대부분  대한제국 광무(고종年號) 3년(189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었다. 

 

《침계루/枕溪樓》 

 

 

침계루는 북원의 출입문으로 금당천을 가로지르는 심진교와 이어지는 2층 누각건물이다. 누각의 앞뒤에 圓嶠 李匡師가 쓴 '枕溪樓'편액과 '圓宗大伽藍'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이층 누각 안에는 법고, 운판, 목어 등 불전사물과 함께 대흥사의 史跡과 格을 알 수 있는 수십개의 현판이 사면에 걸려 있다.

 

 

《圓嶠 李匡師의 글씨 大雄寶殿》

나는 서예의 서字도 모른다 그저, 세속에서 글로 말씀으로 명필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북원의 중심 법당으로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전각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이며 부처님 뒷면에 있는 탱화는 1901년에 봉안되었다. '大雄寶殿'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썼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을 하는 것을 형상화한 전각이다. 이 건물은 조선 현종8년(1667년)에 중건된 적이 있지만, 대한제국 광무3년(1899년)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 다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버여주고 있으며 정면의 용두 장식이 검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계단 난간석(소맷돌) 양끝에 조각된 사자머리 한 쌍은 전각 수호의 의미를 가진다.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썼다.

조선 헌종6년(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를 만난 김정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친 이광사의 글을 걸었다며 화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광사가 쓴 현판을 떼어내고 김정희가 써주는 글씨로 새로 현판을 걸었다. 그후 헌종14년(1848년)12월 귀양살이 9년만에 풀려나 귀경 중 다시 막역한 사이인 초의선사를 찾아 대흥사에 들려 회포를 풀며 '그 때는 내가 잘못 보았다며 자신이 쓴 현판을 떼어내게 하고 원교 이광사가 쓴 현판을 다시 걸게 하였다.

"하 - 그 겸손할 줄 모르던 氣勢가 9년 귀양살이에서 秋史體란 一家를 이루웠고 겸손을 배웠구료."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난간석 양 끝 대웅전 지킴이 頭像이다. 이 조각상에서 통일신라의 현란한 향기를 느낀다. 

 

 

   《명부전/冥府殿》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 모셔진 법당으로서 대웅보전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지장후불탱화는 1901년에 조성되었다는데 당시 지장보살과 侍王, 명부권속들도 함께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冥府殿 편액은 海士 金聲根의 글씨이다.

 

 

지장보살의 옥색 두발이 눈길을 끈다, 그 좌우로 명부의 크고 작은 형상의 권속들이 신분에 따라 규모의 크기를 달리하여 나열되어 있다.  

 

  塼과 泥土로 쌓은 굴뚝이 사찰건물에 걸맞게 조형미가 멋스럽다 

 

 

《응진당-산신각/應眞堂-山神閣》

대웅보전에서 왼편에 있는 이 건물은 응진당-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應眞은 번뇌를 끊고 불법의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聖者를 뜻하며, 山神은 전통신앙의 대상 중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신으로, 불교에 습합되어 가람과 산을 수호하고 평온을 지켜주는 外護神 역할을 한다. '應眞堂' 편액은 해사 김성근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山神閣' 편액은 초의선사의 글씨라고 한다.

 

 

대흥사 응진당에는 목조에 금물을 입힌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16나한 등이 모셔져 있다.

 

 

  

산신각에는 1901년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통일신라 삼층석탑/統一新羅 三層石塔》

보물 제 320호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율사께서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1967년 1월에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12cm 높이의 여래좌상 1구가 발견되었다. 보물 제 301호 북미륵암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양식이 이 지역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例다. 

  

 

 

   

3개의 장대석으로 짜 맞춘 지대석 위에 기단하대저석과 하대갑석 사이에 2개의 撑柱(버팀기둥)와 두 모퉁이에 隅柱(모퉁이기둥)가 표현된 일층 면석을 둔 1층기단을 마련하고 1층기단갑석에 표현된 2단 괴임에 1개의 탱주(버팀기둥)와 양 가에 우주(모퉁이기둥)가 표현된 2단면석을 올리고 2단의 옥신괴임(탑신을 올리는 자리)이 표현된 상대갑석(덮개돌)을 올렸다. 다시 그 위에 兩 모서리에 우주가 표현된 1층탑신을 올리고 4개의 옥계받침이 표현된 옥개석을 올렸다 1층과 같은 방식으로 2-3층을 올리고 상륜부에 노반, 복발, 앙화, 보개, 보주를 두었다. 2-3층 면석의 높이는 1층면석 높이의 3분1 정도로 낮다. 옥개석 면은 수평으로 뻗어가던 선은 추녀 끝머리에서 위로 솟아 반전하는 전각을 이루고 옥개면과 隅棟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간결하고 날렵한 이미지를 풍긴다. 

  

 

  모서리에서 바라본 보물 제 320호 통일신라 삼층석탑

 

 

    《대향각/大香閣》

  스님들의 생활관인 요사가 아닌가 싶다.

  

 

     3층석탑 위치에서 바라본 빗질자국이 정갈한 대웅전 앞마당 풍경이다.

 

 

 

  秋史 金正喜의 글씨 '무량수각 / 无量壽閣' 김정희는 조선 헌종6년(1840년)에 정변에 휩싸여 사형을 받으나 그의 朋友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雲石 趙寅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해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친분이 두터운 대흥사 초의선사를 만나고 가는 길에 쓴 글씨이다. 

김정희와 조인형은 북한산진흥왕순수비문를 탐독 차 2차례 함께 올라가기도 했는데 그 순수비 귀퉁이에 자신의 이름과 조인형의 이름 그리고 답사 년월일을 새겨 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씨를 쓴 인물 海士  金聲根(1835~1919)은 안동 김씨로 과거 급제 후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6판서, 도승지, 예문관, 홍문관,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 등 요직이란 요직은 다 거친 인물로 文臣, 정치가, 철학자, 유학자, 작가로서 대한제국 융희4년(1910년) 10월 일제에 의한 한일병합(국권 피탈) 때 일제로부터 조선자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으며 살다 간 풍운아 같은 인물로서 현재는 한일병합 조약 관련자로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있다.   

 

 

 

  《백설당/白雪堂》

대흥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며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가는 길에 들린 추사 김정희가 쓴 '无量壽閣'이라 쓴 편액과 구한말 명필로 유명했던 해사 김성근이 쓴 '白雪堂'이라는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침계류 안쪽에 걸려 있는 현판에 써 있는 글씨이다.

 

 

    北院을 둘러보고 南院으로 가기 위해 금당천에 가로 놓인 심진교를 건너간다. 

 

 

  금당천 상류 계곡 모습.

 

 

    두 그루의 나무뿌리가 합쳐 연리목으로 불리는 고목의 모습.

 

 

  《남원구역/南院區域》

 두륜산의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 잡은 대흥사는 절을 가로질러 흐르는 금당천을 두고 남북으로 구획하여 전각들을 배치하고 남원과 북원이라 부른다. 일반적인 사찰의 정형화된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전각들을 자유롭게 배치한 특이한 공간구성이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오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 두륜산 정상의 와불을 친견할 수 있다. 정면에 전각들이 모여 있는 곳이 금당천의 남쪽에 해당하는 남원 구역이다. 천불전을 중심 법당으로 용화당과 적묵당 등이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는 점도 특이한 남원이다. 

 

《가허루/駕虛樓》

南院의 출입문이다. 건물 중앙은 통로이고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으며 뒷면에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駕虛樓' 편액은 당대의 명필 蒼巖 李三晩(1770~1845)이 썼다. 드나듬이 편하도록 휜 나무를 써서 문지방 중간을 낮춘 지혜가 미소짓게 한다.   

 

 

《천불전/千佛殿》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란다.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경쾌하며 정면 3칸의 분합문 전체가 꽃창살로 꾸며져 있다. 천불상 조성과 관련된 일본표류 일화가 1821년에 풍계 현정스님이 저술한 "일본표해록"에 전해져 온다고 한다.

이 건물은 조선 순조11년(1811년)에 화재로 소실 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하며 편액의 글씨 '千佛殿' 은 圓嶠 李匡師(1706~1777)의 글씨이다.

 

 

  

《천불전 내전/千佛殿 內殿》

천불전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전각이겠다. 조선 후기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지붕에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법당 가운데는 목조 석가모니불과 문수 · 보현 보살이 묘셔져 있고, 그 주위에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의 천불은 경주 佛石山 옥돌로 조성한 것으로 1817년 배로 실고 오던 도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큐슈(九州)로 표류해 갔다가 다음 해인 1818년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된 것이다. 그래서 천불 가운데는 어깨에 '日'자가 적힌 불상이 있다. 4년에 한 번씩 천불의 가사를 바꾸어 드리는 불사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수하셨던 가사를 개인이 소장하게 되면 마음속에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용화당/ 龍華堂》 

 이 편액의 글씨는 구한말에 유명한 서예가 惺堂 金敦熙(1871~1936)가 썼다.

 

 

 

駕虛樓를 지나면서 마당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용화당은 지형을 그대로 유지 하면서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건축한 자연 친화적인 건물이다. 건물 남쪽부분은'ㄱ'자로 꺾어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 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조선 순조11년(18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조선 순조13년(1813년)에 초의선사 스승인 완호대사가 스님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 겸 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해 중건한 것이다. 정면 9개의 기둥 가운데 왼쪽에서 여섯 번째 기둥만 네모난 기둥이고 나머지는 두리기둥으로 약간의 배흘림을 두었다.

   

 

봉향각/奉香閣》

 

가허루를 지나면서 마당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로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체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기둥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아 용화당보다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단층 주심포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5칸이며 단아한 글씨체의 편액이 걸려 있다.  

 

 

  《가허루/駕虛樓》천불전 돌계단 앞에서 바라본 가허루 안쪽 모습이다.

 

 

이 지역(적묵당, 세심당, 정진당, 일로향실 )은 스님들의 요사체로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어 아쉽게도 발길을 돌렸다.

 

 《적묵당/寂默堂》

동다실과 용화당 사이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적묵당을 중심으로 정진당과 세심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적묵당은 본래 서산대사 의 유물을 보관했던 곳이었다. 단층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2칸의 건물이라고 한다.

 

 

 

문지방에서서 담은 정경으로, 세심당, 정진당, 일로향실로 들어서는 돌계단 위 맞배지붕의 건물들이 세심당과 정진당 이겠고 좌측 안쪽에 일로향실이 있겠다. 돌계단 위에도 여행자 출입금지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안내판 옆 돌계단에서 먼발치로 바라보기만 했다 봄이 오면 두륜산 산행 후 세세히 둘러볼 생각이다.  

 

《세심당/洗心堂》

사찰을 찾아온 재가자들의 숙소로 쓰고 있는 곳이다. 정진당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5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편액의 의미처럼 툇마루에 걸터앉아 속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내기에 좋은 곳이겠다.  

 

《정진당/精進堂》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다. 세심당 맞은편에 있으며 정면 5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툇마루가 있다. 출가 수행자에게는 쉬는 공간과 수행공간이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먹고 자는 그 자리가 바로 수행처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精進堂이라고 했겠다.

 

《일로향실/一爐香室》

천불전 뒤쪽 축대 위에 자리한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ㄷ'자형으로서 정면7칸 측면6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좌측에 걸려 있는 '一爐香室'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이 건물은 초의선사께서 주석하셨으며 추사 김정희도 유숙했던 곳이라고 한다. 

  

 

 

   

앞에 자연석을 파서 만든 水槽가 마음에 든다. 아담한 기와집 앞 뜰에 놓고 수련을 키우면 그 운치, 엄청 좋겠다. 넓은 경내로 인해서 멋진 수조의 품격이 묻혔네. 

  

 

《관음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

들여다 보지도 않아 모르겠다 하지만,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것만은 분명하고 관세음보살이 중생에 깨우침을 주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을 형상화 한 법전이 아닌가 싶다.     

 

 

륜산(703m)은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줄기가 동으로는 중국 崑崙산에 이르고 남으로는백두대간을 타고 흐르다가 한반도 땅끝에서 홀연히 일어나 쌍봉을 이루고 솟아 있다. 이러하여 두륜산의 산 이름을 백두산의 '頭'字와 곤륜의 '崙'자를 따서 두륜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두륜산은 옛부터 큰 언덕이라는 뜻의 '대듬' 또는 '한듬'으로 불리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대흥사도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두륜산은 계곡이 깊어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위에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九曲九橋) 아홉 구비에 아홉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또한 가련봉, 두륜봉, 고계봉, 노승봉, 도솔봉, 혈망봉, 향로봉, 연화봉 등 여덟 봉우리가 있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초입에서 대흥사로 이르는 골짜기에 아람드리 나무들이 울창한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두륜산과 한라산이 자생지로 알려진 왕벚나무를 비롯해 동백, 비자, 후박, 차나무 등 무려 천여 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어 식물분포학 상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산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이라 여겨 자신의 의발을 대흥사에 모시도록 한 명당 터이다.

 

 

《별원구역/別院 區域》

 表忠詞, 大廣明殿,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초의선사/草衣禪師》

 

 

 

 

 

 

  《호국문/護國門》

표충사 외삼문이다.

 

내삼문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우측은 寶蓮閣 좌측은 제물을 차리던 義重堂이다.

 

 

《예제문/禮齊門》

 표충사 내삼문이다. 문을 들어서기 전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禮를 갖추라는 뜻이겠다. 또 한편으로는 '禮齊'는 논어의 '德으로서 인도하고 禮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된다."는 의미도 있다.

 

 

《표충사/表忠祠》

표충사는 1788년에 건립되어 정조대왕께서 직접 쓴 '表忠祠'편액이 下賜되었다. '御書閣'이라는 扁額은 '임금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편액이 정조대왕의 글씨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功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표충각 안 중앙 위치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크게 공적을 세운 사명당 유정스님과 뇌묵당 처영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상량문은 초의선사가 썼다. 조선후기에 불교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으로는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대흥사의 표충사와 정조18년(1794년)에 편액이 하사된 '묘향산 보현사의 "酬忠祠"가 있고,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조선 영조19년(1743년)에 편액이 하사된 밀양 "表忠祠"가 있다.

 

 

《표충사/表忠祠》

정면 3칸 측면 3칸에 주심포계 맞배지붕의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과 그의 두 제자 사명대사 유정과 뇌묵당 처영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賜額祠宇이다.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현종10년(1669년)에 건립되었다. 외삼문(호국문)을 거쳐 내삼문(풍제문) 정면에 위치하며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해 있다. 단조로운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춘 정면은 같은 크기의 3개의 門 중 가운데 문틀 위에 정조13년(1789년)에 정조대왕께서 하사한 친필 '表忠祠'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옆 좌측 문틀 위에 '御書閣'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1788년 天默 · 戒洪 두 스님이 서산대사와 대사의 두 제자 유정과 처영의 영정을 모실 祠宇를 건립을 모색하면서 비롯되어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1738-1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당건립의 정당성을 임금께 주청하여 건립허가와 함께 '表忠祠' 라는 賜額을 받게 되었다.  

 

〈뇌묵당 처영대사 -  西山大師(休靜1520~1604) - 四溟大師(惟政1544~1610)〉 

 

 

 "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銘"은 서산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문이다. 저명한 漢文學子 故 任昌淳 先生이 譯解한 全文이다.

 

 

 

《표충비각/表忠碑閣》

 표충비각에는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1738~1802)이 조선 정조15년(1791년)에 지은 "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銘"과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스님이 조선 정조16년(1792년)에 지은 "建祠事蹟碑銘"이 있다 현재의 비각건물은 1860년에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이다.

 

 

 

 

 

 《조사각/祖師閣》

표충사 좌측 편에 縱으로 세운 건물로서 모두 16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祖師殿 중앙에 모셔진 6분 진영이다.

上右 초우당(逍遇堂), 上中 초건주 아도조사(初建主 阿度祖師), 上左 편양당(鞭羊堂).

下右 원응당(圎應堂), 下中 풍담당(楓潭堂),  下左 목암당(牧菴堂).  

 

 

正中 설봉당(雪峯堂), 上左 설암당(雪巖堂), 上右 월저당(月渚黨),下左 선음당(仙隱堂), 下右 만화당(萬化堂)대강사.  

 

 

正中 우하당(愚河堂), 上左 사봉당(獅峯堂), 上右 봉악당(鳳嶽堂) 下左 서악당(瑞嶽堂) 下右 춘계당(春溪堂) 

   

    

《보연각/寶蓮閣》

경사진 지면에 맞춰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건축한 영정을 모신 건물이다. 초의선사가 조선 철종3년(1852년)에 역대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처음 건립하였다. 1920년 이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태능 (太能1562-1649) 스님과 편양언기(鞭羊彦機1581-1644)스님의 법손들이 두 문파의 先師 22위의 진영을 보연각에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 후 건물이 퇴락하여 1944년에 중수하였다. 본래는 대광명전 뒤에 위치하였던 건물인데 2009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의중당/義重堂》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인근 6개 郡의 郡守들이 봄 가을로 표충사에서 제향을 올릴 때 마련해온 제물을 차리던 곳이다.  

  

 

   

표충사를 나와 북미륵암으로 향한다.

 

 

  국보 제 308호 마애여래좌상(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이 있는 북미륵암으로 가는 길은 단풍이 곱게 물든 오솔길이 예쁘다.  

 

 

     

북미륵암과 천년수와 일지암으로 갈리는 삼거리이다.

 

 

   이정표를 보니 북미륵암까지는 300m 거리이다. 두륜봉까지는 1.1km이다.

 

 

5부능선 정도 오르니 조릿대가 보인다.

 

 

    

뒤이어 청죽이 터널을 이룬다.  이정표의 거리로 볼 때 북미륵암 근처가 아닐까 싶다.

 

 

청죽터널을 벗어나니 앞이 확트이며 계단과 건물이 반긴다. 바로 북미륵암이 있는 곳이겠다. 보이는 건물은 요사체 같다.

 

 

  북미륵암 주변은 큰 바위들이 무리지어 있는 암반지대이다.

 

  

《용화전/龍華殿》

요사체 건물 바로 위에 우뚝 솟은 용화전 건물만 보일 뿐 마애여래좌상은 묘연하다.

 

 

  《북미륵암 삼층석탑/北彌勒庵三層石塔》

보물 제 301호인 이 탑은  2단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에서 신라시대 삼층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1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판에 의하면 1970년 보수과정에서 3구의 금동불상이 발견되어 현재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대흥사 응진당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양식이 백제의 옛 땅 전라도 땅끝까지 전해진 걸 알수 있다.

   

 

 

 짧은 1단 기단부의 상대갑석을 3개의 긴 판돌로 짜 맞추고 그 위에 2단 기단부를 올린 이 3층 석탑은 전체 높이 4.35m로 신라시대의 삼층탑 형식에 따라 만들어진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외형적인 모습으로 볼 때 탑의 각 부분이 간략하게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북 미륵암 앞에 건립된 용화전이다 용화전으로 들어서면 북쪽 벽이 트여 있어 바로 北 磨崖如來坐像을 정면으로 맞이하게 된다.

 

 

 

용화전 안에서 목탁과 불경소리가 들려 머뭇거리다 용화전 우측에 달린 문을 살며시 열고 본 정경이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2004년 까지는 보물 제48호이었습니다. 그해 보호각을 수리하면서 마애불 상부와 좌우측의 비천상들이 드러나면서 전체적 규모가 화려하고 웅장한 것을 알게되어 이듬해인 2005년에 국보 제308호로 승격되었습니다.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국보 제 308호 북 미륵암마애여래좌상은 설명문에 의하면 新羅 下代(850~932)무렵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마애여래좌상은 圖像과 조각수법은 한국불교조각의 최성기인 8세기 양식을 계승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오랫동안 미륵으로 불러온 이 마애불의 입지는 서남해안을 마주하고 있다. 조성 당시 신라는 중앙귀족의 분열과 호족의 발호로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런 시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마애여래좌상의 주체는 알 수 없으나 그 계기는 아마도 이 같은 상황에서 야기 되는 外侵을 견제하려는 護佛性이 작용한 듯하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 상하 사방에 供養飛天像이 배치되어 있다. 본존의 존상은 후덕하고 원만한 體貌로 형형한 눈매는 근엄하고 威儀가 넘치며 두툼한 입술과 살이 오른 양 뺨은 자애로움이 가득하다.   

특히 마애불 상하좌우의 공양천 인상은 자세와 紙物이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도상이며 뛰어난 양감과 자연스런 신체 조형은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양식에 비견할 만 하다. 

 

 

 

北彌勒庵은 북암이라고도 부르는데 언제 창건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大屯寺誌에 고려시대 진정국사 천책(天頙1204~?)스님이 머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1754년)에는 溫谷永鐸 스님이 중수했고, 그후 蓮潭有一 선사, 碧潭杏仁 스님, 兒庵惠藏 스님 등 고승들이 이곳에서 강학을 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한 용화전과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 그리고 2기의 3층석탑 등이 있다. 용화전은 1985년 4월에, 요사는1995년에 중수하였다. 마애여래좌상은 암벽에 조각한 4.2m 높이의 마애불이다.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학자마다 보는 견해에 차이가 있다. 통일신라 말기로 보는 이도 있고 1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북미륵암을 모신 용화전 맞은 편의 이 오솔길은 東3층석탑으로 오르는 길이다.

 

 

 《대흥사 북미륵암 동3층석탑/大興寺 北彌勒庵 東三層石塔》

 

 

용화전 정면으로 50m 능선에서 가련봉을 마주하고 있는 이 석탑은 자연 암반 위에 1단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조성한 신라양식의 3층석탑이다. 

자연 암반은 뒤면에서 보면 평평하지만 앞에서 보면 90cm 정도 높이로 돋아 있어 자연적으로 지대석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과 기단석 틈새로 빗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5cm가량의 홈을 파놓았다. 기단부 옆 홈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 탑은 단층 기단이나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우아하고 안정감이 있다. 조성 연대는 미륵암(龍華殿) 옆 보물301호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로 보아진다. 3층 옥개석은 훼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동3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가련봉의 모습이다.

  

 

북미륵암을 뒤로하고 남미륵암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좌측은 진불암과 우측은 남미륵암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진불암이다. 확인만하고 가까이 있는 남미륵암을 찾아나섰다.

   

 

  《 남여래입상/南如來立像》 

南如來立像이 암각된 바위이다. 斷崖를 이룬 커다란 바위 앞면에 음각 선으로 여래입상을 새겨 놓았다. 오랜 세월 풍우와 이끼에 부식되어 얼굴과 상체만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머리 부분에는 頭光이 표현되어 있고 螺髮에 肉髻와 이마에 白毫, 근엄한 눈동자에 코와 입은 이끼로 선명치 않고 목에는 三道의 흔적이 있다 어깨의 線과 通肩衣가 확인 된다. 하체부분은 부식으로 剝離되어 나로서는 線刻을 꿰볼 수가 없다. 

 

 

 

  다음 기회에는 두륜산 봉우리의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취하고 싶다.  

 

 

  두륜산 산세와 그 기기묘묘한 바위에 마음 끌리고, 충절 담은 천년 고찰 숭고한 선승, 겨레의 귀감이네, 

 

 

꽃길만큼 아름답고 아늑한 오솔길 따라 다시 대흥사경내로 내려간다.  

 

 

 사찰 길가 바위에 병사, 군수, 중○장 등을 지냈거나 현직에 있는 관료들이 기념비적으로 직책과 이름을 새겨놓았다.

 

 

연리근 앞에서 바라본 北院 일부의 전경이다.

 

 

 

 

 

 

북원 담장의 모습.

  

 

    예술의 대가 담쟁이..

뻗어나간 선과 구성과 짜임새 가미한 열매의 배치 이것이 바로 자연이 빗어낸 미의 극치이겠다.  

 

 

 " 담쟁이 넝쿨의 전위예술"

옛 정취 물씬한 담장에 온 몸으로 무늬를 표현해 운치를 더했다.

 

 

단풍철이면 단풍이 곱지,

겨울철이면 청솔의 푸름이 좋지

이른 봄이면 잔설에 붉은 동백이 곱지..

 

 

    구비구비 아홉구비의 아름다운 계곡을 눈에 담으며 두륜산 대둔사 너부내 계곡을 내려간다.

 

 

   아홉 구비로 흐르는 너부내를 따라 하룻밤 묵을 유선관으로 간다오.

  

 

   《두륜산 대둔사/頭輪山 大芚寺》

  

 

 

2018년11월19일(월) -瓊 그리고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