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의 首都 漢陽』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하고 옛 전통과 풍수지리,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한양을 건설하였습니다. 궁궐은 백악 기슭에 건립하고 '周禮' . '考工記'에 따라 좌측에는 왕실 조상신을 모시는 宗廟를, 우측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社稷을 두었다. 궁궐 앞 대로에는 六曹를 비롯하여 중요 관청을, 興仁之問과 敦義問을 그리고 崇禮門을 丁字로 연결하는 중심 대로에는 상업시설인 市廛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의 경계가 되는 도성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白岳(北岳山), 駱山(駱駝), 木覓山(南山), 仁王山의 內四山능선을 따라 山勢에 의지하여 쌓으면서 4대문 4소문을 세우고 낙산에서 남산에 이르는 평지부분까지 연결하여 완성하였습니다.
「태조 1년(1392년) 조선 건국, / 태조 3년(1394년)한양 천도,/ 태조4년(1395년)궁궐,종묘,사직 완성./ 태조5년(1396년) 도성 건설. /태조7년(1398년)육조,성균관 건설./정종1년(1399년)개성 환도./ 태종5년(1405년)한양 再천도,창덕궁 건설,/태종12년(1412년)市廛건설(약 2천칸),개천공사./세종4년(1422)도성개축/세종10년(1428년)도로 정비.」
국가를 새롭게 건국한 태조 이성계 임금님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양도성을 축조하였습니다. 북악산(白岳)을 주산으로 우측에 인왕산(仁王), 좌측에 낙산(駱駝) 정면 남쪽에 木覓山(남산)이 옹성처럼 둘린 盆地 수도 한양을 품고 있는 4개의 산 정상과 능선을 아우르며 백악과 인왕 2곳에 曲城을 두었고 봉우리 요소에 5개의 雉를 구축하였으며 4방위에 4개의 큰 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을 세우고 그 間마다 4개의 소문 광희문 · 소의문 · 혜화문 · 창의문을 세우고 그 사이 적정한 곳에 9개의 암문과 두 개의 수문 그리고 바라보는 앞 木覓山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築城한 전체 길이 약 18,600m에 평균 높이 6~8m의 한국 고유의 축성기법과 집단의 장인들이 빗어낸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514년(1396~1910,)동안 그 원형을 보전하였습니다.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 별로 다른 돌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과 더불어 한국적 교육 건축 환경 생활문화를 발전해 왔으나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며 대문과 성벽이 훼철되었고, 6.25전쟁과 서울의 팽창과정에서 자발적 훼손으로 더욱 피폐되어가다가 1968년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도성 안으로 침투하는 1.21사태를 계기로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은 600년에 걸쳐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東輿圖 都城圖》(김정호 1861년 경 作/30.5×40.0cm/보물1358-1)서울역사박물관.
哲宗 7년(1856년)~철종12년(1861년)5년여에 걸쳐 완성한 古山子 金正浩가 만든 分疊折帖式 筆寫本 彩色地圖입니다. 도성내 각 지역의 옛 지명과 주현 간의 경계를 선으로 표시하였으며 그 구획 바탕에 城, 州縣, 坊面, 陵寢, 營鎭, 鎭堡, 把守, 烽燧, 驛道, 牧所, 道路, 倉庫 등을 상세히 표시하였으며 거리표시에 있어서 1첩1면에 방안을 그려놓고 "方十里每片"이라고 하였으니 매방의 실제거리가 10里 임을 알리고 있다. 옛 지도를 볼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일이 걸어서 답사하고 이렇게 지도를 그린다는 게 놀라운 일입니다.

《낙산 끝자락에서 흥인지문으로 이어지는 城 내곽의 모습》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는 한양 도성의 동, 서, 남, 북의 4대문은 각각 유교의 기본적 윤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태조 5년(1396년) 다른 성문과 함께 築造된 興仁之門의 본디의 뜻은 이렇습니다.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후 흥인지문을 왕궁(경복궁)에서 볼 때 풍수지리학적으로 좌청룡이며 동쪽에 있습니다.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멱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한데다 흥인지문 터와 앞 지대마져 평평한 낮은 평지여서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쌓은 것도 甕城이며, 또 현판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다른 문은 모두 글자가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으며, 흥인(興仁)이라고 이름 한 것은 흥(興)은 번창한다는 뜻이 있고, 인(仁)은 오행으로 목(木)이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쪽의 기운이 일어나서 虛함을 막으라는 풍수적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흥인지문은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로 2층의 문루(門樓 : 간단히 이야기하면 성벽 위의 목조 건물)를 올려 성문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없습니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합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데 유리하게 하였습니다. 흥인지문은 태조 5년(1396)축조된 이래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루는 간단한 구조에 장식이 많은 19세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 적의 공격에 취약한 흥인지문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의 4대문 가운데 숭례문과 흥인지문 뿐이었으나 숭례문은 일본강점기에 철거되고 흥인지문에만 남아 있습니다.

1397년(태조 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대석(臺石)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 : 네모 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무사석 위 주변에는 누각을 둘러막은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기부에 놓인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栱包)를 짰다. 공포는 하층은 내3출목, 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조선 말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데 살미〔山彌〕가 뾰족이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져 연결되었으며, 안쪽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이룬다. 상층의 변주는 하층 대량 위 중간쯤에 세워졌다.
바닥은 하층에는 중앙에만 마루를 깔고 상층은 전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의 하층은 모두 개방하고 상층은 사방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龍은 玄武, 朱雀, 鳳凰, 麒麟, 등과 함께 상상의 동물로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이외 상상의 동물문양으로 무엇이든 탐하여 먹어치운다는 饕餮이 있습니다. 한양도성 四大門, 四小門 중 천장에 용을 그린 문은 현재는 숭례문과 흥인지문 뿐입니다.

검은 바탕 가운데 여의주를 구심점으로 황룡과 청룡을 대비하여 배치하고 그 여백은 촘촘히 오색 구름무늬를 넣었다. 모두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문양입니다. 안정, 화목, 번영,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하겠다.

남쪽에서 바라본 흥인지문은 전면(동쪽)을 감싼 옹성으로 인하여 그 위용이 철옹성을 보는 느낌이다.

조상 대대로 5백여 년을 살아온 내 고향 서울에는 門이 모두 8개가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八大門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팔대문은 다시 4대문 4소문으로 구분합니다. 4대문을 方位로 구분하면 동서남북 방위순서대로 똑바른 동쪽(正東)에 흥인지문(興仁之門), 仁 즉 德을 세워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門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 불리지요.
똑바른 서쪽(正西) 방위의 돈의문(敦義門), 義를 돈독히 한다는 뜻을 지닌 敦義, 곧 서대문이지요. 무자비한 일본에 의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의 門입니다.
똑바른 남쪽(正南)에 숭례문(崇禮門), 예를 존중하고 높이 받든 조선 오백년의 근본인 유교적 사상이 배어나는 門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약간 비켜 자리하고 있는 崇禮, 곧 남대문이지요.
똑바른 북쪽(正北)에 위치한 어지러움을 가지런하게 정리한다는 의미를 가진 숙정문(肅靖門), 원래는 숙청문(肅淸門) 이었는데 여러 理由(풍수지리적, 음양오행설)를 들어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뀐 북대문입니다.
그리고 4소문은 동북(東北)방향의 혜화문(惠化門), 곧 동소문(東小門)이고요. 동남(東南)방향의 광희문(光熙門) 수구문(水口門)또는 시구문(屍口門)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문입니다. 서남(西南)방향으로는 소의문(昭義門) 곧 서소문(西小門)입니다. 서북(西北)쪽으로 창의문(彰義門) 바로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문입니다. 따라서 팔대문은 4대문과 4소문을 합쳐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존속한 기간은 지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소문이라는 小門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장충단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턱에 남소문이 있었습니다. 세조 때 세웠는데 예종 원년에 음양설에 따라 페지하였고 남아 있던 초석마저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습니다. 현재 그 터에 표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흥인지문 남쪽 곡성에는 보기처럼 개축한 흔적이 많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어영청성역등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이 여장 개축에 관한 계를 고종10년 9월20일에 어영청에서 올린 기록입니다.
"癸酉九月二十日 啓曰 本廳字內興仁之門南邊曲城改築處 女墻亦己畢築之意敢啓(계유구월이십일 계왈 본청자내흥인지문남변곡성개축처 여장역기필축지의감계)

흥인지문은 평지에 위치함으로서 적의 공격에 취약하고 적의 무력에 파손되거나 소실되기 쉬움으로 대문 앞에 적의 접근을 차단하고 방어와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옹성을 쌓아 둘렀습니다.

『한양도성(漢陽都城)』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城입니다.
북악산(白岳)을 주산으로 우측에 인왕산(仁王), 좌측에 낙산(駱駝) 정면 남쪽에 木覓山(남산)이 옹성처럼 둘린 盆地 수도 한양을 품고 있는 4개의 산 정상과 능선을 아우르며 백악과 인왕 2곳에 曲城을 봉우리 요소에 5개의 雉를 구축하였고 4방위에 4개의 큰 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을 세우고 그 間마다 4개의 소문 광희문 · 소의문 · 혜화문 · 창의문을 두었고 그 사이 적정한 곳에 9개의 암문과 두 개의 수문 그리고 바라보는 앞 木覓山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築城한 전체 길이 약 18,600m에 평균 높이 6~8m의 한국 고유의 축성기법과 집단의 장인들이 빗어낸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514년(1396~1910,)동안 그 원형을 보전하였으며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 별로 다른 돌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과 더불어 한국적 교육 건축 환경 생활문화를 발전해 왔으나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며 대문과 성벽이 훼철되었고, 6.25전쟁과 서울의 팽창과정에서 자발적 훼손으로 더욱 피폐되어가다가 1968년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도성 안으로 침투하는 1.21사태로 인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은 600년에 걸쳐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한양을 감싸고 있는 內四山(백악산, 낙산, )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내 낮은 지대로 모여 흐르니 이를 청계천이라 합니다. 우기가 되면 그 물의 수량이 늘고 범람하여 그 피해가 매우 크므로 청계천을 준설정비하고 그 물을 신속히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성축 밑에 만든 오간수문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오간수다리입니다. 오간수문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볼 수가 없습니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는 도성에서 가장 낮은 지대로 남산(木覓山), 낙산 북악산 인왕산 등에서 발원하여 도성가운데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물을 도성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 성벽 밑에 물이 통과할 수 있도록 5개의 홍예식 문을 만든 것이 五間水門입니다.
지금의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청계천 둑에 오간수문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시작한 성벽은 이 자리에 五間水門 놓아 목멱산과 인왕산 그리고 백악산과 낙산에서 흘러내려 모인 청계수를 동쪽 한강으로 흘려보냈습니다. 지금은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에 이처럼 모형만 존재합니다. 오간수문을 거친 성벽은 다시 이간수문(二間水門)을 열어 남산계류를 청계천으로 합류시키고 동남쪽 광희문으로 이어집니다.

옛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되었습니다.

오간수문을 거친 성벽은 다시 이간수문(二間水門)을 열어 목멱산(남산)계류를 청계천으로 합류시키고 동남쪽 광희문으로 이어집니다. 성벽 아랫부분에 2개의 수문을 마련하여 이간수문이라고 합니다. 이 이간수문은 운동장을 만들 때 흙에 묻혀 있던 것이 운동장을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복원한 것입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시작한 성곽은 五間水門을 놓아 목멱산과 인왕산 그리고 백악산과 낙산에서 흘러내려 모인 청계수를 동쪽 한강으로 흘려보내고 다시 이간수문(二間水門)을 열어 목멱산 동쪽 계류를 청계천으로 합류시키고 동남쪽 수구문이란 별칭을 가진 광희문(光凞門)으로 이어진 성곽은 남산(木覓山)을 거쳐 숭례문(崇禮門)에 이어지고 지금은 헐리고 없는 서소문으로 불리는 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으로 불리는 돈의문(敦義門)을 지나 인왕산 능선을 타고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른다. 한 숨 고른 성곽은 다시 백악산을 타고 청운대를 지나 북쪽의 큰 대문인 숙정문(肅靖門)에 다다르고 가파른 등성을 타고 엎어질 듯 내달아 동소문이라 불리기도 하는 혜화문(惠化門)에 이르러 긴 숨을 내쉬고 걷듯이 동쪽의 큰 문 흥인지문(興仁之門)에 도달하니 이를 한양도성으로 부른다. 2개의 수문 상단은 성벽과 여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좀 더 높던 성벽의 일부분과 여장은 복원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아취형(虹霓)의 이간수문(二間水門)은 일제강점기에 단절되고 헐렸지만 애초에는 흥인지문에서 이어진 성벽은 도성내에 흐르는 물을 성밖으로 내 보내기 위해 물길위에 아취형의 수문을 내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아 광희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간수문의 성 안쪽 모습입니다. 수문 안쪽과 바깥쪽 앞에는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형태의 석축시설이 있으며 남문과 북문 사이 가운데 돌기둥에는 물길을 두 수문으로 가름을 자연스럽게 나누어 가운데 기둥에 미칠 물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한 도끼날형태로 깎은 뱃머리모양의 석축시설이 있습니다. 북쪽 수문에 있는 목책은 도성 안으로 침입하는 무법자 및 적을 막기위한 목책시설 일부로 청계천의 오간수문과 수원 화성의 예를 참고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이간수문은 목멱산 동쪽, 남소문동에서 내려오는 溪流을 도성바깥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한 두 칸 구조의 수문으로 윗부분은 홍예(虹霓:무지개)로 되어 있습니다.

《이간수문 발굴당시 모습》
舊동대문운동장 발굴은 2008년 1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해 9월 축구장부지 발굴에서 이간수문 홍예부분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당시의 모습 사진입니다. 이간수문은 동대문운동장 지표 3.7m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수문 바깥쪽)

(수문 안쪽)

안내게시판의 사진과 설명입니다. '발굴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홍예내부와 물길석축, 그리고 성벽에서 철근콘크리트 파일이 다수 발견되었다. 콘크리트 파일은 동대문운동장을 증. 개축할 때 성벽이 없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기초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발굴과 복원을 위해서 철거하였다.'
(수문 바깥쪽)

(수문 안쪽)

발굴 당시 이간수문 홍예 내부에서 목책으로 짐작되는 길이 440cm 정도의 목재가 발견되었다.
(퇴적물을 모두 제거한 이간수문 초기 축성 모습 )

광희문을 향해 성벽을 따라가다 뒤돌아서서 이간수문이 있는 곳을 바라본 주변 정경입니다.

《雉城/치성》
성벽의 일부를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의 특정 시설을 치(雉)라고 합니다. 좌우측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한양도성의 치성은 英祖28년(1752년) 洪鳳漢과 암행어사로 이름을 날린 朴文秀의 건의로 쌓게 되어 이듬해 영조 29년(1753년)완성되었습니다. 평지구간인 흥인지문부터 광희문 남측까지 모두 5대의 치성이 있었으나 일제의 도성 파괴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내에 있는 이 치성은 2008년 발굴 조사되어 정비된 모습입니다.

성벽이 있던 자리에서 二間水門-城雉 그리고 거쳐온 성벽이 있던 자리를 아우러 흥인지문과 낙산자락의 성곽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지금은 길이 된 성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광희문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이 도로 좌측(동쪽)으로는 보문동 - 신당사거리로 이어지는 도로와 우측에는 동대문-을지로 6가 사거리를 거쳐 장충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습니다 두 도로 사이에 위치한 성벽 길 따라 광희문으로 갑니다.

광희문 옆 왕십리~퇴계로 간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 질러 바닥에 성벽을 눕혀놓은 듯이 깔려 있는 돌바닥은 흥인지문에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거쳐 광희문으로 이어진 성벽이 있던 자리를 표시한 설치물입니다.

한양중공업고등학교 앞 횡단보도 앞에서 바라본 광희문의 주변 모습입니다. 신당동사거리에서 을지로와 퇴계로 갈림길 앞 좌측 퇴계로 들머리 남측에 광희문이 보입니다. 어려서 신당동에서 살았고 이 근처 흥인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다녔기에 이 일대의 옛(60년 전)모습을 손금 보듯 기억에 살아 있습니다.

도로(퇴계로)건너편에서 바라본 광희문 內側面,

<광희문/光凞門>
일제강점기와 1928년 문루가 철거되기 전의 광희문 모습입니다. 좌우측 성벽 위 여장은 모두 훼손되거나 멸실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광희문/光凞門》
조선 시대 태조5년(1396년) 2차 도성 수축공사 때 창건된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도성 동남쪽(광희동)에 위치합니다. 세종4년(1422년)에 1차 개축된 것으로 추정되며,《숙종실록(肅宗實錄》에 숙종37년(1711년)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으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光凞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 1928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우리 문화 말살정책으로 문루는 헐어내고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虹霓石築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 m 옮겨쌓아 그 위에 문루(12坪)를 짓고 현판을 걸었으며 주변 200평을 녹지로 조성하였습니다. 이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39년 만인 2014년 2월 17일부터 연중무휴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습니다.

60년대만 해도 4대문 안은 장안 또는 문안이라 불렀으며 성밖 변두리나 근교에 사는 사람들이 볼 일이라도 있어 서울시내로 갈 때는 '장안 다녀온다' 또는 문안 다녀온다.' 고 한 것에서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을 문안사람이라 했습니다.

《수구문 유래/水口門 有來》
옛 사람들은 광희문(光凞門)을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렀습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장안사람들이 한강물을 수도국산에서 배수받아 수압차에 실어온 것을 공급받아 먹고 살았는데 그 물이 모두 이 광희문을 통해 들어오는 까닭으로 수구문이라 불렀습니다. 장충단고갯길과 약수고갯길이 합쳐지는 마루턱 도로 좌측에 대현산 일명 수도국산이라는 배수장이 있는데 이 저수지는 구한말 1907년 11월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상수도시설로 뚝섬정수장에서 생산된 한강물을 공급받아 저수하여 서울에 공급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5,000㎥ 의 소규모였으나 이후 계속 증설되어 58.500㎥ 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1998년 8월에 철거하고 그 자리에 2002년 10월 200,000㎥ 용량의 배수지를 새로 건설하면서 지상에는 산책로에 각종 수목을 조성하고 다양한 운동시설을 조성하여 시민의 휴식공원(호당공원)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밖에도 수구문에서 옛 흥인국민학교 건물이었던 성동여실을 지나 신당로터리 못미처 수도국이 있었는데 지금은 '충무아트홀'이 들어서 있습니다. 한편에는 이간수문에서 가까워 水口門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습니다.
(광희문 안쪽)

《시구문 유래/屍口門 有來》
屍口門이라 부른 것은 장안사람들이 죽으면 그 屍身이 광희문을 통해 나왔다하여 시구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광희문 밖 일대에 무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광희문처럼 시신을 내올 수 있는 門으로는 昭義門(서소문)이 있습니다. 성내에서 초상이 나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성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4대문 4소문 중 오로지 광희문과 소의문으로만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女墻에 새긴 글자》
광희문 안쪽 바로 옆 성벽의 女墻과 여장 사이 垜口 좌우에 刻書가 보입니다. 이 위치의 성벽은 순조 때 쌓은 곳인데 태조, 세종, 숙종 때와 다르게 성벽 바깥 하단 성돌에 각자를 새긴 것이 아닌 성 안쪽 여장에 刻書를 한 점이 특이합니다. 이와 같이 여장 안쪽에 새겨진 각자는 이곳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확인이 되는데 '辛酉十月日 牌將徐衛信 監官劉孝澤 邊首龍成焞(신유십월일패장서위신 감관유효석 편수용성돈)'이나 '嘉慶十年, 乙丑十月看役崔日成監官李東翰邊首龍成輝('가경십년, 을축십월간역최일성감관이동한편수용성휘) 식으로 패장, 간역, 감관, 편수 등 관련자의 직책과 이름, 그리고 청나라 연호, 간지, 월일을 쓰거나 또는 간략하게 간지와 월일로 공사 시점을 새겨 놓았거나 단지 간지 두글자만 새겨 놓은 것도 있습니다. 공사 시점은 거의 순조 재위 기간에 속합니다.
여장에 새긴 각자들은 인왕산 북쪽 능선이 탕춘대성 쪽으로 갈라지는 부근과 숙정문 남쪽 부근 사이에 모여 있습니다. 그 밖에 지역에서는 혜화문 남쪽 가톨릭대학교 구내에 "監官任致淵 己卯十月日(감관임치연 기묘십월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순조 때 한양도성의 여장 만을 중점으로 무너지지거나 부실한 곳을 집중 개축한 것으로 보아집니다.

순조 때에는 주로 성벽 상층부인 女墻을 개축하였는데 축조한 책임자나 時期 등을 안쪽 女墻石에 새겼는데 이는 성벽하단부인 성벽을 개축한 것이 아니고 높은 상층부 여장을 개축한 것이므로 바깥쪽 에 새기면 문제가 있을 경우 확인이 어렵고 안쪽은 상층부라 해도 그 높이가 높지 않아 확인이 어렵지 않고 개축한 부분 또한 여장이기에 각자를 여장 안쪽에 새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점에 대한 학술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
이 광희문 문루 옆 각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官監 金壽涵 軍金英得 石手金成福 辛未八月日(관감 김수함 군김영득 석수김성복 신미팔월일)

'治所監官 金德亨 書員 李珎燁 庫直 金光福(치소감관 김덕형 서원 이진엽 고직 김광복 ),'
이 외에도 이와 같이 여장 위치에 각자한 것이 있는데 축성 방식이나 각자의 위치와 간지로 볼 때 순조 때에 집중적으로 여장을 수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木覓山(남산)방향 동호로 따라 장충동으로 뻗어간 성벽의 모습입니다. 100 여m를 끝으로 성벽은 없어지고 주택가에 묻히고 맙니다.

광희문에서 이어진 성벽은 100여m 지점인 이곳에서 끊어지고 성벽은 여장이 유실된 채 땅에 묻히거나 일부 드러난 채 호텔신라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흙속에 묻혀 주택들이 그 위에 들어섰고 드러난 성벽을 축대 삼아 앉아 있는 모습도 더러 목격됩니다.

한양도성순례길이기도 한 동호로 20길을 따라갑니다.

광희문에서 장충동 신라호텔 옆 성벽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동호로 20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 샛골목 안에 성벽이 간헐적으로 보이는데 성축을 토대로 민가가 염치도 없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좁은 골목 안에 숙종 때 쌓은 성벽이 보입니다. 이 길은 우측으로 직각으로 꺾어 성벽을 끼고 마주 보이는 대문 앞에서 다시 좌측으로 90도 꺾어 성벽 위 궁색한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좁은 길로 이어집니다.

〈순조 때의 도성 축조(1800년~)〉
가로·세로 60cm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았습니다.

골목 안에 보이는 대문 좌측으로 골목길은 90도로 꺾어 미로를 이루고 있는 성벽 위로는 달동네 같은 모습으로 한사람 겨우 다닐 수 있는 미로 같은 골목길이 같은 모습으로 사방으로 갈라지며 작은 집들이 한치의 틈도 없이 닥지닥지 붙어 있습니다. 이곳 성벽은 순조 때 축성한 성벽입니다.

적벽돌 주택의 이 축대는 세종 때 쌓은 것을 숙종 때 보축한 것으로 동호로 20길 큰 길 좌측으로 보입니다.

광희문에서 신라호텔 옆 성벽으로 이어지는 동호로 입니다. 길 끝머리에 장충단사거리에서 약수동으로
이어지는 장충단로와 교차되는 지점이고 그 건너편부터 다시 성벽은 능선을 따라 국립극장 앞 도로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동호로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장충단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길 건너편에 마주보이는 자주색 좁은 도로의 이름도 동호로입니다 그 우측으로 성벽이 보이는데 자주색 도로를 따라 100m정도 걸어가면 성벽 밑에 데크로 설치된 순성길로 들어섭니다. 우측 안쪽은 호텔 신라가 들어서 있습니다.

성벽밑 바깥쪽에 데크로 순성길을 내었습니다.

이곳의 성벽은 세종 시대에 축성한 성벽입니다. 세월의 더께로 흰 돌이 검은 돌이 되었고
성벽은 불룩하게 불거져 있어 수년 내에 보축이든 개축이든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텔신라 동쪽 담장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漢陽都城 刻字城石》
慶山始面(경산시면), 호텔신라 동쪽편에 위치한 세종 때 쌓은 한양도성 성벽 하단석에 새겨진 刻字로 일정한 구간마다 이러한 각자성석이 있습니다. 이 각자성석은 경상도의 경산현(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백성들이 담당한 축성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입니다. 세종 때는 구간마다 성벽을 쌓은 고을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그 고을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와 다시 쌓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刻字城石이라고 합니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습니다.

허리를 꾸부리고 오랜 세월 풍화에 깎이고 삭아내린 각자를 침침한 눈으로 간신히 읽어보고 허리를 펴면서 나의 뿌리 세종 할아버지 시대에 쌓은 성벽을 애틋한 마음으로 본 모습입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漢陽都城 刻字城石》
(十三受音始/십삼수음시)
이 각자성석은 태조와 세종 때 도성을 쌓은 공사 구간을 이두식으로 受音(받음 또는 쉼)이라고 불렀는데 이 각자성석은 13번째 공사구간 임을 뜻합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漢陽都城 刻字城石》(世宗)
(㒷海始面/흥해시면) 경상도 흥해군(지금의 포항시 흥해읍)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입니다.

《세종 4년(1422년) 각 지역별 축성 분담구간》
32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은 보수하고 기존의 흙으로 쌓은 토성은 모두 석성으로 다시 쌓았습니다. 공사는 철저한 구간별 책임제로 쌓았는데 천자문 순서대로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고 각각 담당 군현을 정하여 축성과 함께 사후 보수까지 책임지게 하였습니다.
〈경기도 天地玄黃 宇宙洪荒 日月盈昃 辰(13구역)〉· 〈함길도 宿列(2구역)〉· 〈강원도 張寒來(3구역)〉
〈충청도 暑往 秋收冬藏 閏餘成歲(10구역)〉·〈전라도 律呂調陽 雲騰致雨 露結爲霜 金生麗(15구역)〉
〈경상도水 玉出崑岡 劍號巨闕 珠稱夜光 果珍李柰 菜重芥薑 海(22구역) 〉·〈평안도 鹹河淡 鱗潛羽翔 (7구역)〉 ·〈황해도 龍師火帝 鳥官人皇 始制文字 乃服衣裳 推位讓國 有虞陶唐 弔(25구간)〉 《총 97구간》

(자료출처 : 이 자료는 남산 서편 잠두봉 인근 공사가림벽에 게시되어 있는 사진을 복사한 것임)
<세종 때의 도성 축조(1422년)>
1422년 1월 都城을 재정비하였습니다. 이때에 태조 때 평지의 흙으로 쌓은 성(土城)을 돌(石城)로 고쳐 쌓았으며 성돌은 옥수수 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습니다.

고대와 근대와 오늘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림처럼 바라보며 감상에 젖습니다.

古風서린 성벽 아래 도화꽃이 그 빛깔도 곱게 아름답습니다.

세종 때 쌓은 성벽이 무너져 내린 곳을 숙종 때 새롭게 보축한 곳입니다.

도성 안 나무들이 피워낸 연둣빛 이파리와 푸른 솔잎이 검은 성벽과 어우러진 고움이 한 폭 수채화 같습니다.

<숙종 때의 도성 축조(1704년)>
숙종 때는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레에 걸쳐 새로 쌓았습니다. 성돌 크기를 가로40cm, 세로45cm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였습니다. 이로써 성벽은 이전보다 더 견고해졌습니다.

짜임새 있고 견고한 이 성벽은 숙종 때 쌓은 성벽입니다.

연둣빛과 노랑의 나뭇잎이 부채처럼 시원한데 후 대에 복원한 여장의 흰 돌 그 아래 해묵은 성벽이 시대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심성이 고우면, 적당히 멋있게 아름답고 중후한 얼굴에 풍채도 듬직해지나 봅니다.
누구시냐고요? 어려서 함께 이 일대에서 뛰어 놀던 童舞지요.

《암문/暗門》
암문은 순찰 및 유사시 필요에 따라 비상으로 사용하던 비밀문입니다. 한양도성 성곽에는 이러한 암문을 모두 9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충신동 암문, 장충다산동 암문, 이화동 암문, 창의문과 백악 정상 간에 있는 백악암문 등이 있습니다.

광희문에서 도성벽을 따라 뻗은 동호로 옆 호텔신라 뒤편 좌측 동쪽에 위치한 이 암문을 통과하여 150m정도 가면 수도국정수장 정문 앞 장충단 길로 이어집니다.

장충단길에서 암문으로 가는 골목길. 따라서 암문을 통해서 나오는 길의 모습입니다. 좌측은 호텔신라 우측은 수도국정수장과 재향군인회관이 있습니다.

한양도성 전 구간에서 동쪽방향의 이 구간은 세종 때 쌓은 성벽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새 목련 꽃잎이 떨어져 낙엽처럼 뒹굴고 있습니다. 꽃피는 새봄도 이렇게 세월 따라가는 거죠,

돌아서서 지나온 곳을 바라보니 성벽 안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건물 호텔신라가 보입니다.

성벽 따라 오르다보니 능선삼거리입니다. 좌측 봉우리에 성곽마루팔각정이 있고 그 앞길로 들어서면 버티고개를 거쳐 응봉으로 가는 길이고 바로가면 데크로 설치한 길 따라 골프연습장 담을 끼고 반얀트리클럽 호텔주차장을 거쳐 목멱산(남산) 성벽길로 이어집니다.

성곽마루 팔각정입니다. 강북과 강남의 조망이 좋은 곳입니다.

데크를 거쳐 지나갈 골프연습장 너머로 목멱산(남산)과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성벽은 끊겨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골프연습장과 반얀트리클럽앤스파호텔이 자리해 있고 그 옆으로 데크로 길을 놓았습니다.

데크에서 바라본 한남동과 관악산이 목격됩니다.

데크로 놓은 길이 끝나고 호텔주차장으로 도성 순성길은 이어집니다.


반얀트리클럽호텔주차장을 가로질러 순성길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반얀트리클럽호텔 건물입니다. 한양도성은 이 건물을 관통해서 목멱산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지난날 관계 행정기관에서 조금만 생각을 했어도 문화재터에 이런 건물허가를 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얀트리클럽호텔 정문에서 바라본 목멱산(남산) 들머리 광경입니다. 마주보이는 건물은 국립극장 그 옆 남산길로 들어서기 전 먼저 좌측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장충단로 고개마루턱에 세조3년(1457년)에 세웠다가 예종 원년(1469년)에 음양가의 풍수설에 따라 폐지된 남소문 자리를 확인하고 도성 성곽따라 목멱산으로 갈 생각입니다.


약수동고개와 합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자 남소문터가 있는 방향입니다.
남소문은 이 도로 고개마루턱 한가운데(中央)에 있었을 것이고 표지석은 정차해 있는 3대의 버스 끌 우측 공사하는 구간 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답사를 하던 중에 오래 전에 이 표석을 본 적 있었건만 까맣게 잊어 지나치려는데 童舞는 남소문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 터를 확인해 보자며 이끕니다. 성동구와 용산구 경계인 고갯마루 이 자리를 일제가 길을 내면서 높이도 5m 정도 깎아내 남소문을 헐어내고 주초마저 사라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오늘 그 흔적을 찾아와서 보니 잘려나간 능선이 긴 세월에 풍화로 모래와 돌이 쓸려내려 공사 중입니다 그나마 세워져 있던 남소문자리표석도 굴러 떨어지는 돌들로 부터 생길 흠집을 막기 위해 솜포로 덮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표지석 바로 위 봉우리 능선에 반얀트리크럽호텔 건물이 직선으로 보이는데 그 자리를 한양성벽이 거쳐서 남소문으로 이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남소문 터 / 南小門 址》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도성을 쌓을 때 없었던 남소문은 세조 3년(1457년)에 한강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멀고 불편하므로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으면 좋겠다는 건의가 있었고 세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문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예종원년(1469년) 任元濬 등이 ‘이 문이 실용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陰陽家에서 巽方(正東南方)을 꺼려 좋지 않아 폐기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고 이 문을 설치한 뒤에 의경세자가 사망하여 음양가의 주장이 맞는다는 건의 때문에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에 폐지되었습니다. 또한 숙종 3년(1677년)에 金錫冑가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고 없습니다. 감여가(堪與家)의 말에 의하면 小陽을 열어야 함에도 지금 이를 열고 있지 않기 때문에 王家 자손들의 번창과 생산에 있어서 매냥 여자들이 많고 남자들이 적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지금 그 문을 열어 이로써 소양의 기운이 통할 수 있게 된다면 응당 길상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김안로가 이를 독단으로 폐쇄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고할 만한 명백한 실증이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정원이 아뢰기를, “전번에 운계령(雲溪令) 등이 남소문 열기를 청하는 일로 上言(그 상언은 ‘도적이 폐문을 이용하여 성 밖에 은익 하였다가 밤이 되면 성을 넘어와서 도적질을 하니 남소문을 여소서,’라는 내용이다)하였으므로 지금 日記를 상고하였더니 이러하옵니다. '예종 원년(1469년)에 경연(經筵)에서 강의한 후에 왕이 새 남소문을 폐쇄하는 것이 적당한지 여부를 물으니, 임원준(任元濬)이 ”도읍을 정할 당시 모든 규모(規模)를 정하는데 자세히 헤아렸지만 결국 이 문을 설치하지 않았고, 또 음양가(陰陽家)들도 손방(巽方)을 매우 꺼립니다. 처음 이 문을 세워 연 뒤에 의경세자(懿敬世子) 가 죽으니, 음양가의 설이 비록 믿을 만한 것은 못되지만 이 문을 폐쇄해야 합니다.“하니 상이 폐쇄하라고 명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어찌 우연하게 상량하여 폐쇄하였겠는가 그 상언은 받아들이지 말라하였다. 또한 숙종 5년(1679년) 남소문을 열어야 한다고 남인의 ’허적‘이 청하였으나 노론의 ’김석주‘가 반대의 소로 중지 시켰다 그 후 1913년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며 철거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고개를 5m 정도 깎아내 주초도 남지 않습니다.
도로공사로 산자락에 있는 남소문 표석을 포대로 덮어 놓은 것을 걷어 올리고 담았습니다. 표석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다시 세워야 할 것입니다.



남소문 터 표지석을 확인하고 다시 국립중앙극장 앞으로 되돌아와서 목멱산(남산)서울타워로 가는 교통로를 100여m 오르면 있을 성곽을 끼고 가는 순성길 데크 계단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성벽 따라가는 길가에 벚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영산홍 민들레 등 많은 꽃들이 다투어 향기를 뿜어내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성곽마루 팔각정에서 반얀트리클럽호텔건물을 거쳐 남소문을 거쳐 목멱산(남산)으로 오르는 초입까지 멸실되어 보이지 않던 성벽이 다시 등장한 위치의 모습입니다. 장충동-한남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가로질러 반얀트리클럽호텔건물이 마주 보입니다.

다시 등장한 성벽은 100m 정도 이렇게 이어지다가 다시 남산 순환도로에 의해 단절됩니다.

도로에 의해 단절된 성벽의 모습. 남소문터와 반얀트리클럽 방향입니다.

일제가 남산에 신사를 짓고 신사로 오르는 길을 내면서 한양도성 성벽을 절단한 곳 좌우로 잘려나간 성벽이 보입니다. 우측은 도성을 따라 한양순성길을 만들면서 설치한 데크로 놓은 계단입니다. 도로 위 횡단보도 표시 앞에 성곽이 있던 자리를 보도에는 흰 선으로 차도에는 붉은 선으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제법 가파른 오름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현지에서 조달했을 다듬지 않은 본래의 자연스런 모습을 갖춘 돌로 쌓은 성벽이 주를 이룹니다.

<태조 때의 도성 축조(1396년)>
1396년 1월과 8월, 두 차례 공사를 통해 축성을 마무리하였는데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습니다. 山地는 돌로 쌓았고 坪地는 흙으로 쌓았습니다.

《태조 5년(1396년) 각 지역별 축성 분담구간》
태조4년(1395년) 궁궐과 종묘사직을 완성한 태조는 수도 방위를 위해 이듬해 도성 축조를 착수하였습니다. 총59,500척(18.6km)에 이르는 도성을 쌓기 위해 전국에서 약20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였습니다.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고 2차에 걸친 대공사로 4대문과 4소문을 잇는 도성이 완성되었습니다.
<자료 출처 : 이 자료는 남산 서편 잠두봉 인근 공사가림벽에 게시되어 있는 사진을 복사한 것임>

태조 때 쌓은 성벽입니다. 성돌은 자체에서 조달한 돌들입니다. 태조는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성을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구간 별로 군현을 지정하고 그 지역 백성들이 성을 쌓게 하였습니다. 구간은 천자문의 순서인 天地玄黃宇宙~ 순서대로 성을 쌓는 始石에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백악정상에서 天으로 시작해서 內四山 즉 낙산, 남산, 인왕산을 지나 마지막에는 천자문의 97번째 字인 조상할 弔자로 마칩니다. 또한 성을 쌓을 때 공사를 맡은 지역,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공사 일자 등을 성돌에 새겨 놓았습니다.

국립극장 앞 목면산 입구를 지나 조금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우측으로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놓은 계단을 좀 오르면 첫 번째로 맞이 하는 성벽에 새긴 각자성돌이 있습니다. 태조 때 쌓은 성벽 일부가 무너진 곳을 숙종 때 그 부분을 개축하면서 새로 쌓은 성벽 하단 나란히 붙여쌓은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2개의 각자성돌입니다. 이 2개의 성돌에는 '禁都廳監官李秀枝吳首俊(금도청감관이수지오수준) 石手邊首安二土里(석수편수안이토리) 庚寅三月日(경인삼월일)이라는 긴 글자가 각자되어 있습니다. 금위영 도청 감관인 이수지, 오수준 두 관리가 이 구간의 공사 감독을 맡았으며 기술 책임자인 石手는 邊首 안이토리입니다. 庚寅年(숙종 36년=1710년). 이곳은 태조 때 쌓은 성벽을 숙종30년(1704년)부터 숙종31년(1705년)까지 재성축한 성벽으로 그 가운데 문제가 생긴 곳을 숙종35년(1709년) 가을 다시 개축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겨울을 넘겨 숙종36년(1710년) 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사를 하면서 이 각자를 새긴한 것으로 보입니다. 편수는 석수의 우두머리이자 책임자입니다.

↑ ↑
숙종 때 성축한 곳입니다. 빨강의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성돌 두개가 각자성돌의 위치입니다. 여기서 다시 목멱산 동봉(당시는九嶷峯구억봉)을 향해 100m 정도 올라가면 다시 安二土里의 이름이 새겨진 성돌이 나옵니다.

태조 때 축성한 구간은 거의 자연그대로 형태의 돌을 사용하여 거친 느낌을 주지만 돌을 다듬어 쌓은 성벽보다 견고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세종 때 쌓은 성벽보다 든실히 남아 있습니다.

巨手 終闕 百尺(거수 종궐 백척) 제 21~22구간(巨~闕) 백 척의 끝자리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21 - 22 숫자는 천자문에서 거巨는 21번째 글자이고 궐闕은 22번째 글자입니다. 즉 한양도성을 97구간으로 나누어 천자문 첫 번째 글자 天에서 97번째 글자 弔까지 순서대로 번호를 정한 구간 중 이곳은 21번째 구간과 22번째 구간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태조 때 쌓은 상벽이 무너진 곳을 숙종 때 고쳐 쌓은 모습.

第三十受 音 使郑祐/제삼십수 음 사 정우

태조 때 쌓은 성벽의 고색창연한 모습.

태조 3년(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며 쌓은 성벽을 310년 세월을 지나 숙종35년(1709년)에 부분적으로 개축을 하였으나 대부분 6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건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漢陽都城 刻字城石》
이 지대는 태조 때 목멱산의 자연석으로 쌓았던 성벽의 일부구간이 무너져 숙종 때 다시 개축한 곳입니다.
여기에 새겨진 각자는 '都廳監官 趙廷元 吳澤 尹商厚 邊手 安二土里 己丑八月日(도청감관조정원오택윤상후 편수안이토리기축팔월일)입니다. 이곳도 금위영 구간인데 앞서와 다르게 금위영이라는 표기는 생략되고 도청 감관 조정원, 오탁, 윤상후 3명의 직책과 이름만 새겼습니다. '邊首安二土里(편수안이토리)'에서도 성축을 쌓는 곳이니 석수라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라는 듯이 석수는 생략하고 직책 인편수와 이름만 새겼습니다. 己丑年은 숙종 35년(1709년)입니다.
*<"승정원일기" 숙종35년 4월11일(壬子) '又以兵曹意啓曰卽接南道 監役官牒報 則南小門邊九嶷峯禁衛營所據處體城五間許類落云 令繕工監 爲先把子의園排 多定軍士守直而亦令該 營 急速修築之意 分付 何如傳曰允>*
이 각자들이 있는 목멱산 동봉을 당시에는 九嶷峯(구억봉)이라고 하였는데 가파르고 오르기 힘든 지역입니다 그래서 인지 그 해 4월에 이곳 성벽 5간이 무너져서 7월부터 공사를 하였습니다 이 성돌의 각자에 의하면 8월에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각자가 새겨진 돌은 다듬지 않은 자연형태의 긴 돌로 태조 때 쌓았던 성돌로 보입니다.

그런데 서울시 담당자들에 의하면 안이토리'라는 이름이 새겨진 성돌이 또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성돌은 이곳 목멱산의 각자성돌과는 다르게 일반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군사지역 위치로 창의문에서 백악정상으로 오르는 100m 정도 정상을 앞에 두고 성벽 바깥 성돌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으며 "丁亥七月日 監官李俊綱金興錫○○祚 邊首安二土里(정해칠월일 감관 이준강 김흥석 ○○조 편수안이토리)"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진 3개의 돌에 나누어 새겼다고 합니다. 丁亥年은 숙종33년(1707년)으로 이 해 4월에 이 구간의 21간이 무너져서 5월 초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7월에 마쳤다고 각자되어 있다기에 직접 확인하고자 4월30일 다녀 왔으나 각자가 새겨져 있을 곳으로 생각되는 위치는 백악정상 100m 전의 가파른 바위 지대로 근접하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성곽 바깥에 돌려져 있는 군사지역이어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로 '안이토리'가 새겨진 각자성석이 있는 창의문(자하문)에서 백악정상으로 이어진 성곽모습으로 정상 200m 전 위치에서 담은 사진입니다.》

백악산 정상 100m 전 위치에 숙종 때 개축한 성벽으로 편수 安二土里의 각자가 있을 위치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참고로 올린 백악구간 사진입니다. 지대가 가파르고 성곽 안팍으로 철조망이 둘러막고 접근 금지구역(청와대 인근지역)으로 통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이토리'는 평민이요 일개 석수장이지만 다른 석수와 다르게 그나마 석수로서 책임있는 편수였기에 그 이름을 성돌에 남길 수있었으며, 후일 광희문의 성을 쌓다가 불행스럽게도 무너지는 돌에 깔려 사망합니다. 그 일로 승정원일기에 그 이름 '안이토리'가 남게 되었습니다. 승정원일기 숙종37년(1711년)4월8일자에 의하면 "금위영에서 계를 올려 말하였다. ' 지금 수구문(광희문)을 개축할 때 홍예석을 자리 잡아놓으면서 저희 營의 석수인 안이토리가 돌에 깔려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여러모로 치료를 하였지만 끝내 운명하였습니다. 일이 지극히 놀랍고 참담합니다. 저희 영에서 약간의 쌀과 포목을 지급하여서 염을 해서 장사 지내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계를 올리나이다.' 임금이 알겠다고 답을 하고 담당 호조로 하여금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승정원일기 4월8일 병인)
<'都廳監官 趙廷元 吳澤 尹商厚 邊手 安二土里 己丑八月日(도청감관조정원오택윤상후 편수안이토리기축팔월일)>

경사 각도가 족히 45도에 이르는 가파른 곳이건만 600년이 지나도 쌓은 돌이 아래로 처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기본기에 탄복합니다. 남한산성은 그 후대에 쌓았건만 그 기술이 이에 미치지 못한 보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벽의 하단부를 보면 지면을 계단식으로 파고 그 위에 돌을 사진과 같이 계단식 수평으로 쌓아올려 무게의 하중이 아래로 쏠려 무너짐을 방지한 것입니다.


구억봉(九嶷峯=목멱산 동봉)으로 오르는 이곳은 가파른 지대로 성벽을 쌓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무거운 돌을 옮기고 쌓았을 各地에서 올라온 옛 사람들의 고초가 검게 변질된 성벽의 돌 만큼이나 까맣게 탔을 것입니다.

잠시 뒤돌아서서 거쳐 올라온 성곽을 더듬어봅니다 국립중앙극장 우측 고개에서 반얀트리클럽호텔이 자리한 능선을 타고 성곽마루팔각정에서 다시 이어진 성곽은 호텔신라 동쪽 편을 돌아 동호로를 끼고 광희문으로 이어집니다.

구억봉 능선을 가로질러 남산타워로 향하는 성곽의 모습으로 능선마루에는 성벽을 조금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쌓아 雉城처럼 보입니다.

이 지역은 출입이 제한되어 우회합니다.

구억봉(목멱산 동봉)에 빨간 통신(?)철탑이 있는 곳(Camp Moss갬프 모스)은 출입통제구역으로 되어 있어 우회를 한 것입니다.
갬프 모스는 AFKN 전파를 송출하기 위한 미군 통신대 시설입니다. 부대 내부에 위치한 성벽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바깥에서 본 성벽 외곽은 잘 보존된 것으로 볼 때 안쪽 성벽도 그와 같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은 제1봉수대 자리였으며 이간수문으로 흘러드는 남소문동천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통제구역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와 성곽 따라가는 순성길의 모습입니다.

남산팔각정으로 가는 도로로 인해 단절된 성곽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성곽 바깥쪽으로 길 따라갑니다. 안쪽은 남산팔각정으로 가는 도로입니다.

성곽과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멋진 곳입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漢陽都城 刻字城石>
(칭자종야자/称字終夜字)
한양도성을 처음 쌓았을 때 공사구간을 97개로 나누고 각 구간은 천자문에 나오는 한자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刻字는 54번째인 칭자 구간이 끝나고, 55번째인 야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표시입니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부릅니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이제까지 목격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서울시한양도성연구소에 의하면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색 창연한 성곽과 봄기운이 솟아난 나뭇가지의 화사한 꽃들이 조화롭게 아우러진 풍경이 그림처럼 곱고 내게 꿈길처럼 아늑함을 안깁니다.


내 고향 한양은 꽃피는 서울 개나리꽃 버찌꽃 예쁜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성곽 그 속에서 오늘도 즐겁습니다.


<한양도성 성돌 각자 성석 유구/ 漢陽都城 城石 刻字 城石 遺構>
(監役判官崔有遠一百五十尺/감역판관일백오십척) 감역판관의 최유원이 150척을 쌓은 구간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각자 성석은 태조 5년(1396년)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했을 때 감역관(공사의 실무 관료)을 임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기 위해 도성이 완공된 후 성돌에 새겨 넣은 것으로 오늘날의 '공사실명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양도성벽에는 이런 식으로 축성 공사를 담당했던 옛 군부대, 지역, 담당자, 일시 등을 기록한 성돌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축성의 흔적과 기록은 도성의 역사성을 나타내 주며 당시 도성 관리의 철저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城廓 女墻 바깥 城壁에서 자란 나무의 아름답고 멋진 자태


남산 봉수대 앞 풍경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봉수대는 고려시대부터 법으로 정한 통신 수단으로 햇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위급한 소식을 전하던 곳이다. 외적이 침략하면 지정된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된 시설에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목멱산 봉수대는 조선 태조3년(1394년)에 설치하여 고종31년(1894년) 갑오경장 연간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어 왔던 시설입니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출몰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봉수대는 제1호 봉수대로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대'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도달하게 되는 중앙봉수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입니다.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여 5개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자리는 알 수 없고 "청구도" 등의 관련 자료를 종합하여 1개소를 복원한 것입니다.

《팔각정과 국사당 터》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國師堂이 있던 자리입니다. 조선 태조는 남쪽의 목멱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국가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고 제1공화국 때 국사당이있던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號를 따 '우남정'이라 하던 것을 4.19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남산 서울타워》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1969년 수도권에 TV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으로 세웠으나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인 N서울타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랑, 우정, 자아성찰을 다짐하고 그 약속을 묶는 잠글쇠 마당.


남산팔각정에서부터 안중근 의사 기념관 광장까지는 성곽 바깥으로 길이 없고 공사구간이 많아 살펴 볼 수가 없습니다. 관광객 번다한 성벽 안 길을 이용해서 숭례문까지 발길을 옮깁니다.

그냥 관광객이 되어 성벽따라 가며 주변 경관에 가슴에 담겨 있던 시름을 내려 놓습니다.

성곽은 안에서는 여장만 드러나 있고 바깥 외성벽은 성벽과 여장을 모두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구간은 현재로는 성곽 바깥쪽으로 길이 없고 통제되고 있어 살펴 볼 수가 없습니다.

《잠두봉/蠶頭峰》조망하기 좋은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
잠두봉은 누에머리를 닮았다 하여 예로부터 불려온 이름으로 인왕산,백악산,낙산,목멱산이 감싸고 있는 서울 도심과 북한산이 한눈에 조망됩니다.

잠두봉에서 바라본 풍경 좌로부터 안산, 인왕산, 백악산 그 뒤로 북한산 줄기가 한양을 감싸고 있습니다.

최근 부분적으로 본래의 성벽에 켭쌓아 개축한 도성의 모습입니다.

근래에 복원한 성곽의 모습을 돌아서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다시 숭례문 쪽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복원된 성곽이 산뜻하여 상쾌함을 풍깁니다.

인왕산이 우뚝 보이고 숭례문으로 이어진 성곽이 거의 온전한데 이 때도 성 안팎으로 가옥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또한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있기 전까지도 존속해 있던 초가들이 그리운 옛 시절 옛 풍경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 뭐지! 치밀어 오르는 이 뭉클함은...

위 옛 사진의 옛 아이들이 성곽위에 서서 내려다보던 위치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온전했던 성벽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는 길이 되어 자동차들만 물결처럼 흐릅니다.

회현동 성곽에서 남산공원내 단절된 성곽을 바라본 전경입니다. 남산순환도로 초입 힐튼호텔 앞 도로상 성곽자리를 성돌문양을 붉은 페인트로 표시해 단절된 남산자락의 성곽과 연결해 놓았습니다.

회현동에서 숭례문으로 이어가는 성곽의 모습입니다. 이 성곽은 퇴계로 이전에 단절됩니다. 이 도로는 퇴계로를 구름다리 형태로 건너 한국은행을 거쳐 숭례문에 도달합니다.

《숭례문/崇禮門》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3년(태조2년)3월15일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王師 무학대사(無學.自超)의 의견을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정하였습니다. 1393 9월에 시작하여 13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태묘, 사직, 궁전 등과 肅靖門, 興仁門, 崇禮門 , 敦義門 4대문과 光凞門, 昭德門, 彰義門, 弘化門 등의 4소문을 건설하여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숭례문은 태조5년(1396년)에 처음 축조되어 1398년 2월 중건되었습니다. 숭례문은 궁궐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남향으로 한양도성의 정문입니다. 세종30년(1448년)에 크게 고쳐 지은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태종의 長子 讓寧大君이 쓴 숭례문 현판은 다른 문의 편액과 다르게 세로로 쓰여 있는데 그 까닭은 崇禮의 2글자가 불꽃을 의미하여 궁궐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일렁이는 듯한 불기운을 맞불로서 꺾기 위한 의미가 담겼습니다. 숭례문의 이름은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禮를 숭상한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앞에 보이는 석재들은 2005년 통로 보수공사와 홍예문 입구 등 지표조사에서 발굴된 세종 때 것으로 보이는 아랫부분 석축 기단, 지대석, 박석, 문지도리 등 입니다.

《숭례문/崇禮門》
우리나라 대문 중에 가장 큰 숭례문은 화강석의 홍예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진 아래 위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門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건물 내부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만 우물마루이고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있고 위층은 널마루입니다. 우진각지붕에 상하층 모두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를 달았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를 두었습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네 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 제1호로 지정 되었으며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이 있는데 이는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2006년 다시 복원 공사를 마쳤으나 2년 후인 2008년 2월10일 어처구니없는 일로 몰지각한 한 사람이 방화해서 안타깝게도 석축을 제외한 목조가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다시 복원공사를 착수하여 2013년 5월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9년 5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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