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한양도성(숭례문-소의문-돈의문-창의문)/漢陽都城 (崇禮門~昭義門~敦義門~彰義門) 』

鄕香 2019. 5. 7. 14:14

『한양도성(漢陽都城)』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城입니다.

북악산(白岳)을 주산으로 우측에 인왕산(仁王), 좌측에 낙산(駱駝), 정면 남쪽에 木覓山(남산)이 옹성처럼 둘린 盆地 수도 한양을 품고 있는 4개의 산 정상과 능선을 아우르며 백악과 인왕 2곳에 曲城을 두었고 봉우리 요소에 5개의 雉를 구축하였으며 4방위에 4개의 큰 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을 세우고 그 마다 4개의 소문 광희문 · 소의문 · 혜화문 · 창의문을 두었으며 그 사이 적정한 곳에 9개의 암문과 두 개의 수문 그리고 바라보는 앞 木覓山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築城한 전체 길이 약 18,600m에 평균 높이 6~8m의 한국 고유 축성기법과 집단의 장인들이 빗어낸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514년(1396~1910,)동안 그 원형을 보전하였으며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 별로 다른 돌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과 더불어 한국적 교육 건축 환경 생활문화를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며 대문과 성벽이 훼철되었고, 6.25전쟁과 서울의 팽창과정에서 자발적 훼손으로 더욱 피폐되어가다가 1968년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도성 안으로 침투하는 1.21사태로 인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은 600년에 걸쳐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숭례문/崇禮門》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3년(태조2년)3월15일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王師 무학대사(無學.自超)의 의견을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정하였습니다. 1393 9월에 시작하여 13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태묘, 사직, 궁전 등과 肅靖門, 興仁門, 崇禮門 , 敦義門 4대문과 光凞門, 昭德門, 彰義門, 弘化門 등의 4소문을 건설하여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숭례문은 태조5년(1396년)에 처음 축조되어 1398년 2월 중건되었습니다. 숭례문은 궁궐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남향으로 한양도성의 정문입니다. 세종30년(1448년)에 크게 고쳐 지은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태종의 長子 讓寧大君이 쓴 숭례문 현판은 다른 문의 편액과 다르게 세로로 쓰여 있는데 그 까닭은 崇禮의 2글자가 불꽃을 의미하여 궁궐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일렁이는 듯한 불기운을 맞불로서 꺾기 위한 의미가 담겼습니다. 숭례문의 이름은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禮를 숭상한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숭례문/崇禮門》

우리나라 대문 중에 가장 큰 숭례문은 화강석의 홍예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진 아래 위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門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건물 내부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만 우물마루이고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있고 위층은 널마루입니다. 우진각지붕에 상하층 모두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를 달았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를 두었습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네 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 제1호로 지정 되었으며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이 있는데 이는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2006년 다시 복원 공사를 마쳤으나 2년 후인 2008년 2월10일 어처구니없는 일로 몰지각한 한 사람이 방화해서 안타깝게도 석축을 제외한 목조가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다시 복원공사를 착수하여 2013년 5월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숭례문에서 소의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도로에 의해 사라진 자리(도로 부분)에 성곽이 있던 곳임을 붉은 칠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한양도성 탐방로는 상공회의소 건물과 에스원빌딩 사이 길로 들어서서 5~600m정도 걸어가면 호암아트홀과 소의문터에 이르게 됩니다.  

    

 

대한상공회의소 뒤 소의문(서소문)으로 가는 길가에 한양도성 잔여 성벽이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투박하고 자연스런 고색 미와 제도적으로 정갈한 맛의 현대석축이 아우러져 이색적인 멋을 내고 있다. 

  

         

도심의 거리가 미끈하게 매끄럽고 깨끗하다.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축성한 한양도성의 멸실된 일부구간의 성벽을 재현하고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2005년 복원한 것이다.

  

                     

《소의문자리 표석/昭義門址》

昭義門은 도성 서남쪽에 자리한 4소문 중 하나입니다. 태조 5년 (1396년) 한양도성을 築城할 때 지대가 낮은 이곳은 토성으로 쌓을 때 이 문도 함께 건축하였으며 이름을 昭德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세종4년(1422년) 이 지역의 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았으며 영조 20년(1744년)에 문루를 개축하면서 이름을 昭義門으로 바꾸었습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헐려 없어지고 지금은 소의문 자리였던 이곳에 표지석만 세워져 있습니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소의문을 보면 그 모습이 지금의 광희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듭니다. 성보다 높게 석축을 쌓은 가운데에 1개의 홍예문을 세우고 그 위 석축 사면에 벽돌로 나지막한 담을 두르고 양 측에 문을 내어 문루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위에 용마루 兩 머리에 용두가 있고 네 곳 내림마루에는 여러 가지 잡상을 장식하여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습니다. 또한 소의문 밖 넓은 마당은 조선시대 사형집행장이었습니다. 천주교 순교자들 다수도 이 문밖에서 처형당하였기에 외국인들 사이에는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도성이 이어지는 건너편 정동으로 가기위해 호암아트홀 앞을 지나가다 소의문 표석을 돌아서서 바라본 주변모습입니다. 

  

 

소이문터에서 바로 길 건너 정동으로 이어지는 성벽길을 따라가기 위해 호암아트홀 앞을 거쳐 서소문로터리로 우회해야 합니다. 

     

 

통일로 순화동로터리에서 횡단보도 건너 우측으로 가다가 소의문터 맞은편 골목인 배재고등학교로 가는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순화동로터리를 거쳐서 도착한 순화빌딩 앞에서 마주보면 직선거리로 50m인 소의문자리가 바라보이는 풍경입니다.

      

     

 순화빌딩 옆 옛 지명 '수렛골'이라는 작은 길로 들어섭니다. 

    

   

  숙종의 계비이자 영조의 어머니 뻘인 인현왕후 여흥 민씨는 장희빈과 더불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왕비입니다.

  

 

 넓지 않은 길가에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재된 근대에 유럽풍으로 건축된 교회가 멋진 모습으로 눈을 즐겁게 합니다. 

    

  

 《평안교회》

  

   

 평안교회를 지나자 바로 우측으로 꺾인 길 안에 배재학당을 설립한 선교사 아펜젤러기념관과 공원입니다. 기독교나 배재학당과는 인연은 없지만, 아펜젤러 그는 힘도 없고 가난하고 암울했던 이 나라에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배재학당/培材學堂》

 고종22년(1885년)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134년의 전통을 가진 사학명문입니다.

 

 

배재공원

 

    

삼일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성들의 선언서인 "대한독립여자선언서" 기념비입니다. 후면에 그분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동제일교회/貞洞敎會》사적256호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한 기독교 감리교회입니다. 고딕풍 붉은 벽돌 건물로 1895에 착공하여 1897년에 완공한 건물로 인근의 배재학당, 이화학당과 더불어 개화기 미국 문물 도입의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을 일궈낸 국부 초대 대통령 고 이승만 박사께서도 한 때 다니셨던 교회로 알고 있습니다.

 

 

《정동극장/貞洞劇場》

우리나라 근대문화거리로서 호젓한 덕수궁 돌담길과 어우러져 낭만이 흐르는 정동에 1908년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던 圓覺社의 복원을 이념으로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 육성을 목적으로 1995년 국립극장 분관으로 건립되었던 건물입니다.

 

 

《중명전/重明殿》

 

 

《중명전 일원/重明殿》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확장할 때 궁궐에 포함되었습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사용되었던 중명전은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에 지어졌습니다. 처음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재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되었습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 만회당을 비롯한 10여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 이후 중명전 이외의 건물은 없어졌습니다. 중명전은 고종이 1904년 경운궁 화재이후 1907년 강제퇴위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채결한 비운의 치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요람 정동은 덕수궁 돌담과 아울러 유럽의 건축양식을 감상하며 서정적 감상에 젖어볼 수 있는 명소입니다. 

   

      

덕여자중학교 건물

   

 

이화여자고등학교

    

     

현재 캐나다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이 회화나무는 수령 500년이 넘는 서울시 보호수입니다 . 

대한제국이 탄생한  덕수궁을 근거로 미국공사관(1883년)을 시작으로 외국 공관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정동은 외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이화학당,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교회 등이 태동하는 과정을 수령 500여년의 이 회화나무는 근대문화 1번지 정동의 격세지감을 묵묵히 바라보며 한사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정동길이 끝나는 낮은 언덕에는 서울시청 앞 교차로에서 통일로로 연결되는 서소문로가 가로 놓여 있고 길 건너에 돈의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옆 마주 보이는 길이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길이자 성곽이 이어지는 순성길로 이어집니다. 도로 입구 우측에 돈의문박물관민속마을이 있고 그 우측으로 경희궁이 있으며 그 뒤로는 서울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던 서울시교육청이 있습니다. 

    

 

   《돈의문 터/敦義門 址》

길 건너 흑갈색 가림판에 돈의문터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돈의문이 있던 곳입니다.  

돈의문은 태조 5(1396)에 도성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는데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 , ,, 중에서 를 따서 지었습니다. 본래 돈의문은 사직동 고개마루턱에 지었던 것을 태종13년(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의 상소로 돈의문을 닫고 새로 西箭門을 설치하였는데 이숙번의 건의로 인덕궁 앞 小洞에 세웠다고 태종실록 25권에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세종실록 제15권 기록에 세종4년(1422년)도성축조 완공과 함께 서전문을 폐쇄하고 다시 돈의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숙종37년(1711년)에 돈의문을 새로 지은 기록이 있는데 어떤 연유로 새로 지었는지 모르나 그 연유로 돈의문을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런 까닭으로 그 주변 도로나 지명도 따라 신촌, 새문안, 신문로 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근대에 와서는 방위에 따라 서쪽의 문이다 해서 서대문으로 부르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말살하기 위해서 사대문의 본질을 깎아내리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1915년 일제는 도로를 개설한다는 이유로 그 마저(돈의문)도 헐어내어 지금은 흔적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서소문로를 건너 돈의문 옛터에서 사직동으로 이어진 도로주변을 담은 풍경입니다. 우측으로 돈의문박물관마을의 한옥건물이 보이고 그 뒤로 서울교육청건물이 보입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가운데에 있는 마당입니다. 많은 가족들이 찾아와 우리 옛 문화와 전통을 체험하며 여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돈의문박물관마을회관 앞 마당을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는 신문로2가 30-1번지의 이 가옥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시대의 한옥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보기에도 그 형태가 매우 특이합니다. 1956년에 신축되어 전체적으로 변형 없이 주택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건물의 배치와 1층 평면은 마당을 중심으로한 안채와 아래채로 나뉜 한옥 평면이고 2층은 테라스와 서재 등 서양식 공간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조는 일식 木구조에 '오오가베 아라이다시(おおかべ あらいだし)' 기법을 쓴 한일 양식을 절충한 가옥으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으로 '독립운동가의 집'이란 테마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おおかべ あらいだし/ 오오가베 아라이다시> 오오가배는 목조건축에서 벽 한 면에 판을 설치하거나 혹은 칠을 하여 기둥을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한 기법 / 아라이다시는 벽돌벽의 표면을 바르지 않고 바탕 그대로 둔 것. 또는 삼나무 널빤지를 물로 씻어 내어 나뭇결을 도드라지게 한 기법을 말합니다.

 

(일층 마루 입구와 이층 창호 모습, 1층은 본채 마루 모습이고 2층은 일본식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거실처럼 꾸민 마루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방이 배치되었습니다. 좌측 귀퉁이에 화장실도 있구요.

      

  

 좌측 방 좌측에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측은 안중근 열사 등의 공간입니다.

  

 

     

우측 방 전면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대형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도산과 현순 두 분 외에는 꽃 같은 청년입니다 특히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하여 여의도 백사장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백만 유권자 앞에서 유세를 하고 다시 유세차 열차로 부산으로 향하던 중 기차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신 신익희 선생이 낯설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40대 초반의 젊은 가족이 많습니다. 

   

 

 우측 벽에는 붙박이 옷장과 함께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에 올라서서 이층을 올려다봤습니다.

 

  

 한 칸 남짓한 다다미를 깔아놓은 큰 창이 있는 방입니다. 아래층과 다르게 일식건축양식이 가미되었습니다.  

  

  

산뜻하고 가벼운 느낌의 한일 절충가옥을 나와 장중하고 엄격한 무게감을 주는 한옥들이 줄서 있는 옆 골목의 풍경입니다. 이 가옥들은 전통음식이나 수제 공예품점입니다.

 

  

 다시 한양도성 탐방 길로 들어섰습니다.

  

    

 곧바로 가면 사직동 사직단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통일로로 통하는데 한양도성 성곽은 우측 붉은 노면 옆으로 들어서야합니다.

     

 

 

    

한양도성 성벽 가까이 잘 가꾼 집터가 있는데 이 터에 은혜로운 영국인이 살다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한 곳입니다. 정의로운 일을 하다 돌아갔으니 지금은 평안한 안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고인이시여 고맙습니다.

    

 

 다세대주택들이 모여 있는 미로 같은 길로 들어섭니다.

  

     

다세대주택 주차공간을 통해 바라본 성곽의 성돌이 곤혹스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차공간으로 들어가 가까이 다가서서 살펴보니 성벽 위는 집들이 눌러앉아 있고 앞은 이렇듯이 다세대주택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 처연함에 어루만져 주고 나도 어쩔 수 없는 답답한 심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그나마 애처로운 성곽의 모습도 이제는 흔적도 보이지 않고 확 트인 주택가에 길이 되어버린 성곽의 흔적을 따라 저만치 보이는 인왕산의 성곽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버스가 나오는 길이 성곽바깥쪽 탐방로 입니다. 두 사람이 안내판을 보고 있는 곳이 성곽안쪽 탐방로입니다. 사직단 옆에서 서대문로로 이어지는 길로 인해 단절된 성곽자리인 도로에 자주색깔의 성돌 모양의 문양을 찍어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먼저 성곽바깥으로 답사를 시작합니다.  

  

   

 돈의문터에서 창의문까지 도성탐방로 약도입니다.

        

     

성곽바깥 탐방로는 인왕산 정상부 왼편에 있는 曲城(雉城)에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어 통제구역이고 또한 접근이 어려운 절벽으로 탐방로가 없으므로 다시 이 자리로 되돌아와서 성벽안쪽을 답사를 할 생각입니다. 물론 오르는 도중에 안팎으로 성곽을 넘어 다닐 수 있는 구름다리시설이 두 곳에 설치되어 있어 성벽 안팎으로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외성곽에 있을지 모르는 각자성돌을 찾아보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서 내성곽의 여장도 살펴볼 생각입니다.

 

   

100m 정도 지점에 성 안으로 통하는 암문이 있습니다. 돈의문과 창의문 사이에서는 처음 맞는 암문입니다.

  

      

  암문을 지나서 다시 바깥쪽 성곽을 따라갑니다.

   

     

    태조 때 築城한 곳을 순조 때 改築한 곳입니다.

   

  

  성곽을 따라가면서 성벽을 보면 성돌의 크기와 축성법에 따라 축성한 시대를 구분해 볼 수 있겠습니다.

      

     

   본래의 바위를 그대로 활용해 감싸듯이 쌓았습니다.

    

  

    오백년 세월의 더께가 새로 올린 여장의 무게를 감내하기조차 버거워 하는 표정입니다.

   

 

 이 성돌이 새겨진 각자는 '鳳山上'입니다. 세종 때 황해도 봉산현(황해도 봉산군)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구간 마다 성벽을 쌓은 지방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로 올라와 다시 쌓게 하였습니다. 완전 책임제이니 한번에 잘 쌓으라는 의미가 담겼으니 한번에 잘 쌓으려고 했겠지요.

 

 

숙종 때 쌓은 성벽 여기저기 6.25전쟁의 아픔이 상흔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종, 숙종, 순조 때 쌓은 성돌들이 그대로 성곽의 무늬가 되었네요.

     

  

 《숙종임금》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의 존호를 가진 숙종은 고양시 西五陵 內 明陵에 잠들어 계시다. 이름은 순(), 자는 명보(明普)이며 현종의 외아들이십니다.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시다. 숙종 임금은 생전에 세 분 왕비를 두셨는데

초비(初妃)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로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에 얼힌 분이시고, 

2계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시다.

효종2(1661) 815일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현종8(1667)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현종이 승하하신 해(현종15/1674)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해(1720) 6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셨습니다.

왕의 치세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는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黨弊)가 심화되고 붕당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의 정국형세를 살펴보면 왕의 즉위 초는 앞서 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 허견(許堅)의 역모와 관련되어 남인이 실각(庚申大黜陟)하고 서인이 집권하였으나 다시 숙종15(1689)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왕자(후일의 경종)에 대한 세자책봉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정권이 들어섰다가(己巳換局), 숙종 20(1694) 남옥(濫獄)이 문제되고 폐출되었던 인현왕후 민비(閔妃)복위시킴을 계기로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되었고, 그 대신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甲戌換局)연속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도 노론·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숙종42(1716)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추어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잦은 정권교체와 함께 복제(服制)에 있어서 송시열(宋時烈)의 오례문제(誤禮問題)를 둘러싼 고묘논란(告廟論難), 김석주(金錫胄김만기·민정중(閔鼎重) 등 외척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정치에 대한 사류(士類)의 공격에서 비롯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공방, 존명의리(尊明義理)북벌론(北伐論)의 허실을 둘러싼 노론·소론 사이의 명분논쟁, 계비 민씨의 폐출에서 야기된 왕과 신료(臣僚)들 간의 충돌, 그리고 송시열·윤증(尹拯)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회니시비(懷尼是非), 왕세자와 왕자(후일의 영조)를 각기 지지하는 소론·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 사상(史上)에 저명한 정치쟁점으로 인하여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前代)에 비할 수 없으리만치 격심하였습니다.

남인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서인 역시 노론·소론으로, 그리고 노론이 다시 화당(花黨낙당(駱黨파당(坡黨)으로 분립하는 등 당파내의 이합집산이 무상했으며, 이러는 와중에서 윤휴(허적(許積이원정(李元楨송시열·김수항(金壽恒박태보(朴泰輔) 등 당대의 명사들이 죽음을 당하는 화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정쟁 격화는 붕당정치 말의 폐가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또 한편 앞서 현종 때의 예송논쟁을 통하여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왕은 군주의 고유권한인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을 행사, 환국(換局)의 방법에 의하여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치세기간 신료 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정비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우선 경제적인 면을 보면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에까지 실시, 그 적용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선조 말년 이래의 계속사업을 일단 완성하였고, 또 전정(田政)에 있어서 광해군 때의 황해개량(黃海改量)에서 시작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1709)와 삼남지방(1720)에 실시함으로써 서북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주전(鑄錢)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호조·공조 및 훈련도감·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전라·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습니다.

왕의 치세기간에 이루어진 이러한 경제시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발달과 사회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음 대외적인 특별한 긴장관계는 없었지만 국방과 군역문제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조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大興山城황룡산성(黃龍山城) 등 변경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였습니다. 특히 영의정 이유(李濡)의 건의에 의하여 숙종38(1712)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또 효종 시대 이래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군제개편을 완료하였습니다.

당시 민폐의 제1요인이던 양역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호포제(戶布制)실시를 한때 추진하다가 양반층의 반대로 좌절되자 그 대신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고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함으로써 1필에서 3,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는 양정(良丁) 1인의 군포부담을 일률적으로 2필로 균일화하였습니다.

또 대외관계로는 일찍부터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郡地)에 관심을 보여 무창(茂昌자성(慈城) 2()을 설치, 옛 땅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조선인의 압록강연변 출입이 잦아지면서 마침내 인삼채취사건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분쟁이 일자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하여 정계비(定界碑)를 세웠습니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倭館貿易)에 있어서 왜은(倭銀:六星銀) 사용의 조례(條例)를 확정지었으며,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출입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의 귀속문제를 확실히 하였습니다.

한편, 왕의 치세는 정치적으로 명분과 의리 이 크게 성행하였던 탓에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大報壇)이 세워지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들이 복관되며, 또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姜氏)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관계를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개소의 서원 사우가 건립되고 131개소가 사액되는 남설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璿源系譜·대명집례 大明集禮·열조수교 列朝受敎·

북관지 北關誌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大典續錄·신증동국여지승람· 신전자초방 新傳煮硝方등이 간행되었습니다.

숙종은 민비와 희빈 장씨의 예에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고 그것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신료간의 붕당정치에 견제 받고 손상되었던 왕권의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양역변통문제에 대한 해결 시도에서 나타나듯 민생문제에 큰 관심을 보여 민폐의 제거와 민생안정책의 시행에 주력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면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동요된 사회에 대한 수습과 재정비의 과정을 일단 마무리 지은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운데 직사각형 城石으로 쌓은 연분홍빛 성벽이 숙종 때 쌓은 것입니다. )

     

다시 인왕산도로로 인하여 성벽은 끊깁니다.

 

 

 인왕산 순환도로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계단에서 목멱산을 향해 바라본 풍경입니다. 

     

      

지나온 성곽을 내려다보니 참 호젓한 길을 걸어왔구나 싶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광화문과 그 주변입니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안평대군이 많은 문사들과 어울리던 匪懈堂이 있던 수성동 계곡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 바로가면 창의문에 도달합니다.  노면으로 단절된 상벽이 있던 자리를 자줏빛 색깔로 성돌모양의 문양을 그려 놓았습니다.

 

 

   길 건너 사람 없는 성벽바깥 길로 들어섭니다.

   

  

 남한산성이나 김포 문수산성보다 견고한 느낌이 듭니다.

  

  

 세종 때 새긴 각자입니다. 옛 지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 ? 㒷(?흥) 

  

 

   성벽 바깥 성석각자는 대부분 태조, 세종 때 축조 당시 새긴 것과  숙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할 때 각자한 것인데 각자가 있는 성돌의 표면이 풍화로 부식되어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위 각자는 성벽에 있는 바위 옆 성돌이며 세종 때 쌓은 성벽입니다.

     

 

 두 곳에 각자성돌이 있는 곳의 풍경입니다.

 

   

 세종 때 쌓은 성벽에 있는 각자성석입니다.  "丁元浧 石手 全○ ○○ 趙㳙成/ 정원영 석수 전량○ ○○ 조연성" 등 일부만 확인이 됩니다.  다듬지 않은 돌 표면에 각자를 한 것이 오랜 세월에 삭고 박리되어 일부 각자는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주색 글자는 曖昧한 글자입니다. 각자는 숙종 때 개축하면서 새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자된 성돌이 있는 위치의 풍경입니다.

   

   

 각자된 성돌이 있던 곳을 돌아서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성벽은 지난 세월을 풀어내고 구름은 변함없이 풍류를 즐기는 멋쟁이입니다.

  

  

 성벽 따라 올라가다 보니 성벽을 넘나들 수 있는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저기서 구름다리를 이용해 성벽 안으로 들어가거나 안산방향으로 꺾어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監後 沈泛/감후 심범》 감후은 '살펴보았다' 심범은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沈字는 한자전으로 볼 때 ' 가라앉을, 잠길, 마음이 침착한, 막힐 등의 뜻을 가진 '침'과 즙액(汁)의 심(瀋), 그리고 姓 등의 뜻을 가진 '심'도 되지요. 이 刻字는 수축이 끝난 후 심범'이라는 인물이 수축한 상태를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성벽을 넘나들 수 있는 구름다리로 오르는 계단 뒤 성벽 아래 성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시설은 성곽 바깥으로 이 자리까지 온 사람들이나, 정상에서 성벽 안쪽 탐방로를 통해 이곳까지 내려온 사람이 각자 의향에 따라 성 바깥이나 성 안쪽으로 자유롭게 길을 선택할 수 있고 안산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성벽 바깥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구름다리가 있는 곳까지이고 바라본 곳은 더 이상 進入이 어려운 곳입니다. 이 성벽을 따라가면 瓮城雉가 있는 성벽의 바깥은 오를 수 없는 바위절벽에 이르게 되며 별성치 안에는 군 시설이 있고 통제구역이기 때문에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우선 절벽 前 갈 수 있는 곳까지 성벽을 따라갑니다.

  

 갈 수록 가파르고 잡초가 무성해서 각자성돌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어쩌다 찾아도 성돌의 상태로 보아 글자를 식별하기도 싶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성벽 밑으로 가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옆 작은 바위봉우리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입니다. 우측 뒤에 안산을 마주하고 있는 옹성치에는 望臺와 감시카메라가 있어 앞만 바라보고 담은 풍경입니다. 

    

  

목멱산을 바라보고..

  

  

  검단산과 남한산성을 향해 바라보고...

   

  

    관악산을 바라보고...

    

   

 이제 성곽안쪽을 탐방하기 위해서 바위봉우리를 내려와 다시 사직동길로 내려갑니다.

 

  

 성곽바깥쪽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는 중입니다. 좀 전에 지나갔던 인왕산길 입니다. 

 

 

 호젓했던 길로 다시 내려갑니다. 

     

 

 바위를 활용해 그 위에 성벽을 쌓은 곳도 다시 보고...

   

  

    '鳳山上' 刻字가 있는 곳을 또 지나서..

   

  

  인왕산코스에서는 첫 번째인 평거식 암문을 다시 지나서..

 

 

  드디어 도착한 '사직동~서대문' 간 도로가 있고 인왕산성벽탐방로 시점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성곽 안쪽으로 탐방하면서 성가퀴에 있을 각자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성가퀴와 탐방로가 좀 떨어져 있지만 각자를 찾는 데는 불편은 없습니다. 성곽 바깥은 성벽 밑 거친 성돌에 각자되어 있지만, 성가퀴에는 대체로 숙종 이후 새겨진 것으로 표면을 곱게 다듬고 각자되어 있으며 위치도 눈높이 위치에 적당하기 때문입니다.

   

   

  암문 앞을 지납니다. 암문 앞은 널찍한 마당가에 벤치도 있어 쉼터역할도 합니다.

  

  

 잠시 성곽 바깥으로 나와 암문을 정면으로 담았습니다.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와서 이정표와 함께 암문을 담은 모습입니다.

  

 

 성가퀴의 상태로 보아 순조시기에 개축한 것으로 판단되는 곳이지만 각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허리를 펴고 풍성한 구름과 굽이굽이 휘어진 성곽과 그리고 인왕산자락과 나무 틈새로 보이는 북한산을 담았습니다. 좌측으로 인왕산 길가에 주차된 차들도 보입니다. 또 길을 건너야 되겠습니다.

  

  

 준수하게 잘 생긴 북한산을 줌으로 당겨 담은 모습입니다.

  

  

 각자가 있을 만하다 싶은 계단처럼 착착 내려쌓은 성가퀴를 담아본 풍경입니다.

  

  

 인왕산길에서 단절된 부분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좀 전에는 성곽 바깥으로, 지금은 안쪽으로 가야겠지요.

   

  

 성벽 안쪽 들머리는 계단으로 시작됩니다.

     

   

 계단에 올라서서 지나온 곳을 뒤돌아서서 담은 풍경입니다. 두 여성이 방금 내가 온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벽 바깥길이 다 호젓하고 운치가 있는데..

  

  

수풀이 우거져 있어 성가퀴로 다가 설 수가 없어 계단으로 오릅니다.

 

  

 평일이어서 그런가 홀로 산책을 나온 주부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인왕산, 백악산, 북한산,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목멱산, 관악산 등 서울과 근교 산들의 바위봉우리들이 하나같이 특유의 기묘한 모습으로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정선의 실경산수화처럼 아름답습니다. 

     

  

곧게 뻗은 성벽이 흔치 않기에 담았습니다. 좌측 암봉 능선 일대가 군부대시설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 瓮城입니다.

   

  

 걸어온 성벽을 뒤돌아 바라보니 성곽은 목멱산 팔각정 봉수대를 향해 도심의 빌딩 숲을 헤쳐가고 있습니다. 

   

 

저만치 앞에 성벽을 넘나들 수 있는 구름다리가 보입니다. 바로 그 성벽 밑에 각자성돌이 하나 있지요. 그 좌측에 올라가서 서울 풍경 몇 장 담고 돌아내려온 바위도 보입니다.

   

  

  구름다리를 가까이서 담아봤습니다. 돌계단 따라 성가퀴도 같은 모양새로 단을 이루고 뻗어 오릅니다.

    

  

 구름다리를 넘어 다시 각자성돌을 살펴보고 또다시 성벽 안쪽으로 가려고 계단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각자성돌은 아래계단 살짝 보이는 안내판 뒤에 숨어있습니다.

    

 

무악동으로 내려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구름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잠시 구름다리 안쪽 쉼터에서 구름다리 주변 대각선으로 이어진 성가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인왕산 정상 방향을 바라보고 담은 풍경입니다.

    

  

 성가퀴 바깥쪽을 바라보니 아까 성벽 외꽉을 답사할 때 돌아서 내려왔던 바위가 검정 개구리가 되어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쳐서 바라보니 검정 개구리는 기암괴석으로 변신해 있습니다. 

   

 

 이곳 성가퀴는 현대에 보수한 것입니다.

  

 

 무슨 꽃나무인지는 모르지만 눈송이처럼 탐스럽고 은은한 향기가 머리를 맑게 해줍니다.

    

 

 이 지점에서 성벽은 안산과 마주하고 있는 瓮城雉(군 부대시설이 있는 출입금지 구역)가 있는 봉우리를 감아돌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암벽으로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성벽은 단절되었다가 바위 봉우리의 절벽이 끝나는 능선에서 다시 성벽을 쌓아 인왕산정상 쪽으로 이어집니다.

    

  

 바위봉우리에 올라서서 성곽을 중점으로 담은 풍경입니다. 

    

  

  솟아오른 바위 위에서 담은 서울 동쪽 풍경입니다. 좌측 백악산 청와대, 낙산, 멀리 예봉산, 검단산 등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아차산과 목멱산까지의 풍경입니다. 잠실의 롯데월드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목멱산 봉수대로 이어진 성곽을 위주로 담은 풍경으로서 롯데월드에서 목멱산, 관악산 안산자락 등이 목격됩니다.

   

 

   이곳 바위봉우리 우측 도성 바깥쪽은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수십m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 따로 성벽을 둘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성벽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 우측 아래 모퉁이에 단절된 성벽의 성가퀴 일부가 보입니다.

  

   

  바위봉우리가 끝나는 절벽에서 낮은 능선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철재계단을 설치해 놓은 곳입니다 계단으로 내려서기 전에 담은 풍경입니다.  

    

능선의 성가퀴에 성벽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철재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홍제동이나 안산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가퀴에서 성벽 바깥을 내려다본 풍경입니다. 

    

   

  성벽 바깥에서 바라본 철재사다리 모습입니다.

  

  

   성가퀴에 설치된 철제사다리 위에서 지나온 방향의 성곽 바깥쪽을 담은 풍경입니다. 성벽은 세종  때 쌓은 것입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른 지대입니다.

  

  

 

 

  이 구간은 지그재그 오밀조밀 오르기에 재밌는 곳입니다. 

     

  

 쉼터에서 목멱산 서울타워와 인왕산 옹성雉를 대각으로 담은 풍경입니다.

 

 

 뽀얀 성가퀴가 보기에 우아합니다.

   

 

  보랏빛 자주색 엉겅퀴 꽃의 빛깔이 곱기에...

    

 

  돌을 쪼아내 만든 계단이 인상적입니다. 계단 가운데에 야광선을 두었네요.

    

 

 정상 직전의 모습입니다.

   

 

  서울 풍경

 

 

 인왕산 정상바위

  

 

  북한산과 평창동 일대 그리고 창의문으로 뻗어가는 한양도성 성곽

  

 

 이곳도 성곽 바깥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달리 성벽을 두지 않은 곳입니다. 

   

  

  철재계단을 내려와 다시 성벽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뒤돌아본 풍경입니다.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 중간 낮은 곳에만 성가퀴가 보입니다. 

   

   

 순조 때 쌓은 성가퀴로 보이는데 각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기차바위가 있고 세검정과 탕춘대로 이어지는 봉우리입니다.

 

  

기차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성곽의 모습으로 그 일대는 성가퀴 보수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곽너머로 경복궁이 보입니다.

   

     

백악산과 그 아래 청와대가 보입니다.

  

  

 기차바위능선의 기암 해골바위입니다.

  

 

 기차바위능선 정상부의 모습입니다.

  

 

 기차바위에서 세검정으로 내려가는 능선입니다.

    

  

 기차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불광동 구파발 원당 일산 방향 풍경입니다.

  

  

 성곽은 창의문을 거쳐 백악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성곽 따라 창의문으로 가기 위해 다시 인왕산줄기 성곽으로 되돌아갑니다.

    

  

성곽에 가람막을 치고 보수공사가 한창입니다. 공사중인 女墻(성가퀴)에 각자성석이 있는데 오늘은 확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대각선을 이룬 여장의 모습을 보는데 엉뚱하게 떠오르는 것은 풍금 키입니다. 

      

   

  우측은 백악산. 좌측은 북한산 비봉과 그 아래 평창동

    

    

   이제 다시 창의문을 향해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성벽 따라갑니다.

   

 

 성벽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길지 않은 거리여서 성 안팎을 모두 답사하기로 하고 우선 성벽바깥으로 나갑니다.

    

  

성벽과 성가퀴 모두 순조 때 개축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성 바깥에는 刻字城石은 없을 것이고 성벽 안쪽 성가퀴에 각자성석이 있을 법합니다.

   

  

  부암동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일부 태조 때 쌓은 성벽도 있지만 예상대로 성 바깥쪽은 각자성돌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벽에 붙여지은 가옥들이 있어 더 이상 성벽 바깥쪽으로는 성벽을 따라갈 수 없어  다시 성벽을 넘어왔던 철제사다리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오른 철제사다리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곳에 백악산이 솟아있습니다.  

 

 

  

  성벽 안쪽의 계단을 내려가다가 돌아서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성벽위에 바깥으로 설치된 철제사다리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양도성에 새겨져 있는 글자》

(嘉慶十一年 丙寅十月 日 看役 崔日成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가경십일년 병인십월 일 간역 최일성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여기서 嘉慶十一은 중국 청나라 인종11년이며 가경은 인종의 년호로서 조선 순조6년(1806년)입니다. 따라서 이 각자성석이 있는 곳은 순조6년에 개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순조6년10월에 최일성이 공사를 돌봤고 이동한이 공사를 감독했으며 전문 석수 용성휘가 성벽 보수공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입니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刻字城石(성돌에 글자를 새겨놓은 돌)은 14C에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 15C 때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 18C 때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각자성석은 성가퀴(女墻)  좌측 원총안 밑 성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순조 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보수하였는데 대체적으로 성가퀴를 많이 개축하였습니다. 따라서 태조, 세종, 숙종 때에 성벽을 개축 또는 보수하면서 바깥성벽 아래에 각자를 남겼으나 순조 때는 모두 이처럼 성가퀴에 각자를 남겼습니다. 

   

     

  목마르게 찾던 각자성돌로 갈증을 달래고 다시 오늘의 종착지 창의문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2백여 m 내려가니 다시 공사구간이 가로 막습니다. 

     

  

공사구간을 벗어나니 다음과 같은 각자가 있습니다.

1978년 1월 4일 서울성곽 청운지구 중수 기공을 기념한 표식으로 전 서울특별시장 具慈春의 서명이 있습니다.

 

 

   

교회와 주택 등으로 성곽이 끝긴 곳입니다.

   

 

별칭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창의문이 근접해 있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성벽이 끝나는 곳까지 답사를 했지만 각자성석은 없었습니다.

  

 

 잠시 쉬면서 층층을 이루고 있는 성가퀴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양 여인들이 성가퀴 옆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다시 고요한 성가퀴의 주변은 새들의 노래만 들립니다.

  

        

창의문 옆 고갯길(청와대에서 부암동으로 이어진 길) 건너에서 창의문의 끊긴 옆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창의문 안쪽 홍예문 정수리에 봉황을 돋을새김이 있습니다. 지금껏 본 한양 성문에서 이와같이 홍예문 정수리에 봉황이 새겨진 문은 본 적이 없으니 창의문에서만 볼 수 있는 문양입니다. 다만 경복궁 광화문의 3개의 문에는 왕의 문인 가운데 제일 큰 문에는 발가락이 5개인 龍의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좌측 홍예문 정수리에는 蛟이, 우측 홍예문 정수리에는 螭龍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옛 유럽왕국 귀족의 문장 같은 느낌을 줍니다. 봉황은 일찌기 천자와 임금의 상징적 동물로 태어난 祥瑞롭고 吉한 상상의 동물입니다.

"說文解字"에 의하면 鳳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목은 뱀,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 등 10獸의 특징을 가졌으며 오색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악집도 圖〉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서 ≫에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봉황의 모양은 한결같지 않은 것은 상상의 동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상서롭고 아름다운 상상의 새로 인식된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산()을 지나 지주()의 물을 마시고 약수()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봉황은 성천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고 그 궁궐을 봉궐()이라고 했으며, 천자가 타는 수레를 봉연()·봉여(輿)·봉거()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천자가 도읍한 장안()을 봉성()이라 하였고 궁중의 연못을 봉지()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봉황이 천자의 상징이 된 까닭은 봉황이 항상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나타난다고 믿어 천자 스스로가 성군()임을 표방한 것에 연유합니다.

     

        

 《창의문 내면/彰義門 內面》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창의문은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영조17년(1741년)에 다시 건축한 것입니다.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을 통해 들어와 뜻을 이룬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창의문 안쪽 홍예문 정수리에는 봉황이 양각되어 있고 천장에도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두고 창의문 밖의 지세가 지네를 닮아 그 천적인 닭을 그린 것이라는 속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장에 그린 봉황은 그렇다 치고 문 바깥이 아닌 안쪽 홍예문 정수리에 양각된 봉황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당연히 성문 밖 지네형국의 지형을 향해 성문 바깥쪽에 새겨졌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창의문 외면/彰義門 外面》

사적 제 10호 창의문(彰義門)은 종로구 부암동 249번지, 청운동 산1-1번지에 위치하는 작은 문(小門)으로 서쪽의 돈의문과 북쪽의 숙정문 사이 서북방향에 위치하는 작은 성문입니다. 창의문은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졌으며 서울 북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창의문은 다른 문들과 같이 화강석을 이용해 홍예문으로 만들었으며 성문 위에는 목조 누각건물을 지었습니다. 이 문루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 17년) 1월21일에 다시 지은 것이지만, 서울성곽의 사소문 누각(四小門 樓閣) 중에 300년 가까운 역사를 갖는 유일한 小門입니다.

 

  

  청운동~부암동으로 이어지는 창의문 앞 고개마루턱

   

   

  창의문을 지나 백악구간으로 오르는 입구에서 돌아본 풍경에서는 창의문을 중점으로 인왕산줄기의 성곽과 백악산줄기의 성곽이 창의문에서 이어진 듯이 보입니다. 이제 창의문~숙정문 구간으로 넘어갑니다. 고맙습니다.

    

 

2019년 5월6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