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漢陽都城)』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城입니다.
북악산(白岳)을 주산으로 우측에 인왕산(仁王), 좌측에 낙산(駱駝), 정면 남쪽에 木覓山(남산)이 옹성처럼 둘린 盆地 수도 한양을 품고 있는 4개의 산 정상과 능선을 아우르며 백악과 인왕 2곳에 曲城을 두었고 봉우리 요소에 5개의 雉를 구축하였으며 4방위에 4개의 큰 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을 세우고 그 間마다 4개의 소문 광희문 · 소의문 · 혜화문 · 창의문을 두었고 그 사이 적정한 곳에 9개의 암문과 두 개의 수문 그리고 바라보는 앞 木覓山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築城한 전체 길이 약 18,600m에 평균 높이 6~8m의 한국 고유 축성기법과 집단의 장인들이 빗어낸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514년(1396~1910,)동안 그 원형을 보전하였으며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 별로 다른 돌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과 더불어 한국적 교육 건축 환경 생활문화를 발전해 왔으나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며 대문과 성벽이 훼철되었고, 6.25전쟁과 서울의 팽창과정에서 자발적 훼손으로 더욱 피폐되어가다가 1968년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도성 안으로 침투하는 1.21사태로 인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은 600년에 걸쳐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 숙정문 / 肅靖門 》
史蹟 第十號로 보호되고 있는 이 문은 漢陽都城의 북쪽 大門으로 조선 태조 5년(1396년)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築造 되어 숙청문 (肅淸門)이라 하였다.
그 후 제3대 태종 13년(1413년)에 최양선(崔揚善)이라는 풍수학자가 상소를 올리기를 "백악산 동.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되옵니다."고 하니 이를 계기로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경복궁 바로 뒤에 있는 창의문과 함께 폐쇄하였다.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지만 애초 숙정문 아래 삼청동은 맑은 물이 흘러 내리는 골짜기였다. 해서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렸는지도 모른다. 음양오행을 따르면 北方은 陰이니 물이고 여자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 10년(1504년)에 숙정문을 약간 동쪽으로 옮겨 문루 없이 다만 돌로 홍예문을 세웠다.(임진왜란 때 문루는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여성 편력이 화려한 임금이었던 연산군이 어떤 연유로 당시만 해도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렸을 숙정문을 옮기게 했을까 이는 연산군 만 알 것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렸다가 북쪽에 있는 연유로 북대문으로 불렀으며 언제부터인가 숙정문으로 불렸는데, 중종 18년(1523년) 처음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고, 중종 26년(1531년)에 北靖門, 선조 20년(1587년)에 다시 肅淸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엄숙하게 고요함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풀이 되는 숙정문(肅靖門)은 다른 문과 달리 성문좌우 성벽이 헐리거나 무너지지 않고 이어져 현재에 이른 유일한 대문으로 홍예 안쪽에 四神圖는 물론 天障도 없는 사대문 중 유일하다. 1976년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한양도성을 복원할 때 숙정문의 없던 門樓를 태조 때 창건한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 건립하였으며
현판은 당시 朴正熙 大統領께서 손수 쓰신 親筆 편액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숙정문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숙정문은 깊은 산중 높은 산 중턱에 있어 당시를 생각할 때 더욱 길이 험하고 대문을 나서면 가파른 비탈에 깊은 골짜기와 산이 가로 막고 있으며 동쪽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혜화문 앞 을 지나게 되어 있어 이용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고 북쪽에서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는 혜화문이 더 가깝고 편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숙정문을 閉鎖해도 지장이 없으므로 굳게 닫아 놓았을 것이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 陰陽五行思想으로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는데, 北쪽은 그늘이 지니 陰이며 南쪽은 볕이 드는 陽이므로 가뭄(旱災)이 들면 陰인 물을 들인다는 의미에서 北門인 북정문은 열고(開門) 남쪽의 陽인 南門(숭례문)은 닫아 熱氣차단하여 한재(旱災)를 다스리고 陰을 浮揚하고자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태종16년(1416년)에 처음 시작하였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안의 여자들이 淫亂해진다하여 늘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그 緣由는 北門은 陰方에 있는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숙정문 홍예(虹霓)에는 천장(天障) 없이 가운데 부분과 兩 가에 높낮이의 段을 둔 석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 다른 성문과 달리 天障도 어떤 문양도 없다.
연산군 이래 한번도 무너지거나 헐린 적이 없다는 숙정문의 성곽이다. 태조 5년(1396년)에 쌓은 성벽과 세종 4년(1422년)에 쌓은 성벽이 어우러져 있다.
이제 말바위안내소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오늘 나의 출입패 1466.
창의문 탐방관리소에서 발급 받은 출입증을 반납할 말바위안내소입니다.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다시 성곽을 끼고 진한 소나무 향내 맡으며 성곽너머 풍경을 음미하며 걷노라니 온갖 번뇌 스며들 틈 없네.
목멱산을 당겨보는 것은 내 발길 저곳에 있었고 지금은 마주서서 바라보고 있기에..
다시 아스라이 보이는 목멱산 그 성곽, 선조들의 숨결 들리는 듯 다시 가보고 싶어라.
말바위 쉼터로 가는 길가 이정표. 이곳에서 와룡공원이 100m라지만 족히 600m가 넘는 거리이다.
성북동 고급주택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수유리 살적에 삼청터널 거쳐 출퇴근 지름길이어서 자주 다니던 길이니 눈에 선하다.
행여나 그냥 스쳐 갈까봐 성가퀴를 살펴보기를 님의 얼굴 보듯 하건만. 그런 내게 한오라기 기쁨도 주지 않네.
하늘다리 모양의 전망대 밑을 통과해서 우측으로 돌아서면 저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렷다.
이곳에서 와룡공원 아래 암문있는 곳까지 두 길로 갈립니다. 도성 안쪽 길과 도성 바깥쪽 길로 나뉩니다. 도성외곽탐방길은 위에 설치된 조망데크에서 성북동 방향 계단으로 내려가 골짜기를 가로 질러 능선으로 좀 올라가면 바로 도성외곽탐방길입니다. 도성내곽탐방길은 성벽 안쪽으로 말바위를 지나 성벽에 위치해 있는 군부대를 우회하여 삼청공원을 거쳐 성균관대 후문을 지나 와룡공원 앞에서 다시 성곽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두 길은 각각 성벽을 사이에 두고 100m정도 내려가다가 성벽외곽탐방길은 소멸되고 암문을 통해서 내곽성벽길과 합쳐 하나가 됩니다.
안내표시에 優秀한 조망소라고 소개되고 있는 구름다리입니다.
이곳부터 통제구역이 있어 순방길이 두 길로 갈라집니다. 이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벽 외곽을 끼고 돌면 와룡공원 앞에 도착하고, 도성 안쪽 말바위를 거쳐 삼청공원을 거치는 도성내곽순방길과 만나게 됩니다. 먼저 도성내곽순방로를 이용하여 와룡공원 아래 암문까지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와서 도성외곽순방로를 가기로 하겠습니다.
성곽 안에서 성곽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성벽 위로 浮橋를 설치한 시설로 일명 구름다리라고도 합니다 다리위에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겸하고 있으며 성북동이나 외곽순성길로 이어지는 계단과 함께 설치되어 있습니다.
《말바위전망대》 서울시내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옛 선비들이 한양성내를 조망하며 담소하던 말바위 주변입니다.
나도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는 남산골과 木覓山과 한양성내 중심부를 옛 선비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리보면 어떠냐고요? 그리 보니 도타운 정 굴뚝으로 모락모락 피워내는 초가와 기와집만 보이고 빌딩은 하나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말바위/馬巖>
말 같이 생겨 붙인 이름인가 싶었는데 안내판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말을 타고 이곳에 올라와 나무그늘에 앉아 주변의 경관과 한양성내와 遠景을 즐기며 詩를 읊으며 쉬던 명소로 말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백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末바위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종종 바위에 벼락이 친다고 해서 벼락바위라고도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시 성곽따라 삼청공원 방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말바위전망대를 내려와 뒤돌아본 말바위 전경.
말바위를 내려서자 성곽 옆으로는 통제구역이고 바로 삼청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예요. 삼청공원에서 감사원 경계선을 거쳐 성균관대 후문 쪽으로 돌아가면 와룡공원 앞에서 다시 성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길 하나는 잘 만들고 잘 뚫어났지요. 정작 잘 해야할 정치꾼들은 거꾸로 가지만..
이왕에 들어선 삼청공원 이참에 삼청동으로 내려가 "서울에서 둘째로 맛있는 팥죽"(商號)도 먹고 조랭이 떡국집이나 들렸다 갈까보다.
나무계단에 마포 깔아논 길에 나무흙계단에 길도 참 다양하네요.
300m라더니 꼬불꼬불 제법 멀게 느껴집니다.
이만한 약도이면 길잡이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성벽으로 가려면 감사원 담(철망)을 끼고 삼청공원 후문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여기가 삼청공원 후문 인근인가 봅니다. 그런데 약도를 보니 뭔가 잘못되었군요. 말바위에서 성 바깥쪽은 알겠지만 성곽 안쪽으로도 길이 표시되어 있네! 분명 그곳에는 군 시설이 있고 다닐 수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되올라가 볼 수도 없고 허 참..
방금 내려온 길을 참고삼아 올립니다.
파고라를 나와서 감사원 뒷길로 나가 와룡공원과 성균관대후문 앞을 거쳐 다시 한양도성탐방길을 향해 갑니다.
이 길로 넉넉잡고 300m 정도 가면 성곽일 겁니다.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앞에서 또는 삼청터널에서 삼청동 중앙연수원 앞에서 꺾어 들어서서 감사원 앞을 지나 와룡공원 앞을 거쳐 한양도성 성곽에 이르는 도로입니다. 도로명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삼청동감사원길이라고 불렀습니다만...
길 건너 철조망 담은 감사원 담이고 그 옆 계단은 방금 나온 삼청공원으로 들어서는 샛길입니다.
공원 앞이라 그런가! 조각품도 있네. 보자니 여인의 형상인가 본데 곡선미를 담은 것 아닌가 싶은데, 와룡공원 앞에 이렇게 세워 놓으면 와룡선생이 보시기에 점잖지 못하다고 한마디 없지 않겠네요.
바로 와룡공원에 붙어 있는 성균관대 후문입니다. 전철3호선 안국역 계동 쪽 출구 앞에서 마을버스 2번을 타면 이곳이 종점이지요.
성균관대학교 후문을 지나 바로 보이는 백악구간 와룡공원 입구입니다. 사각정자 좌측에 성벽이 터져 있고 밖으로 성북동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으로 내려가는 길과 말바위에서 창경궁으로 갈 수있는 길로 가는 암문까지 이어진 성벽 외곽 순성길이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말바위에서 이곳까지 성 밖으로 탐방 길이 붉은 선으로 표시되었고 말바위전망대~와룡공원정상까지 530m에 18분 소요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사진에는 일부 잘려나기는 했지만 성 안으로도 삼청공원을 거쳐 이 자리로 오는 붉은 선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정자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후 4시15분을 넘어 20분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잠시 정자에 앉아 사과 하나 먹고 다시 혜화문을 향해 갑니다.
성벽 안 탐방로에서 바라본 삼선교 종암동너머 용마산이 흐린 날씨로 인하여 희미하게 보입니다.
탐방로 옆에는 예쁜 꽃들이 다투어 피어 고풍스런 성벽과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늦은 오후 성곽을 끼고 가는 호젓한 길은 내리는 가랑비로 촉촉이 젖어 마음 마저 우수에 젖어 들게 합니다.
암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내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보듯이.. 지나온 길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뒤돌아봅니다. 그러나 돌아본 길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뿐 지난 세월처럼 아쉬움은 없더이다.
어린 시절의 수많은 시련들이 지금도 변한 것 없이 오롯이 숨 쉬는 도심을 바라보니 수많은 감정이 가슴에 북받쳐 눈가에 어립니다. 그 때는 힘든 줄도 느낄 틈도 없이 앞만 보고 왔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그 시련도 고통도 그냥 아쉽고 그립기만 합니다.
외곽탐방순성길과 내곽탐방순성길이 이 암문에서 하나로 합치는 곳입니다. 이 암문은 통해 성북동으로 내려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말바위휴게소에서 성곽 안쪽 삼청동과 성곽 바깥쪽 성북동으로 갈린 순성로가 합치는 곳입니다. 이제 성곽 바깥쪽 성북동순성길 답사를 위해 다시 말바위로 가서 외곽성벽을 따라 여기까지 올 것입니다.
암문 앞 안쪽 풍경입니다 갈림길에서 우측은 창경궁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은 성을 끼고 경신고등학교 뒤 성축을 따라 혜화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물론 경신고 고갯길에서도 성북동으로 갈 수 있고 혜화동 로터리로 갈 수도 있습니다.
α 다시 말바위휴게소입니다. 여기서부터 城郭 內 순성길과 성곽 外 순성길로 나누어졌는데 먼저 성곽 안 길을 올렸고 이제부터는 성곽 바깥 순성길을 끼워 넣겠습니다. 두 길은 다시 이 암문에서 성곽 안 길로 하나가 됩니다. Ω
(성벽 위 가로 놓여 있는 구름다리는 말바위휴게소 겸 전망대입니다. 말바위는 성벽 따라 더 가야 있습니다.)
이정표에서 우측을 가리키는 삼청공원 순환산책길을 외면하고 말바위전망대 위로 오르면 성북동 방면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길로 성곽 바깥 길로 암문까지 갑니다.
오늘은 저 아래 솔숲으로 해서 암문까지 가보자 발길아 기분아 너희도 괜찮지?
계단으로 내려가서 앞 능선으로 오르면 통제구역이 끝나는 지점이 나오고 성벽따라 한양도성 암문까지 가는 길입니다.
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숲 깊은 골짜기입니다. 다시 앞 능선으로 오르면 통제구역인 군부대를 지나 성벽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지나온 골짜기를 내려다본 정경으로 아래쪽에 길이 보입니다.
성벽 가까운 능선에 화장실이 있고 성벽이 보입니다. 호젓하고 나무들이 많고 싱싱해서 산책하기 좋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말바위 갈림길에서 방금 내려온 구름다리 겸 전망대 시설물이 보입니다.
말바위전망대에서부터 이곳까지 이처럼 군부대가 성곽을 안팎으로 차지하고 있어 군부대를 중심으로 두 갈래의 우회로가 생겼습니다.
성곽과 숲이 어우러진 호젓한 길을 호젓한 기분으로 호젓하게 가노라..
보이는 샛길은 북쪽으로 돌아앉아 無常大道를 깨닳기 위해 인생을 공부하는, 공부하는 인생이 한 때를 머물던 이가 짓고 살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이름 '尋牛莊'
성벽을 잘 살펴보세요. 이 곳 터줏대감이신 귀한 분이 계십니다. 못 보셨다고요 그러실 것같아 아래에 모셔 왔습니다.
刻字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짜기 소리가 나네요. "나 찾니?" 에고 놀래라! 찾는 각자는 안보이고 귀여운 녀석! 다람쥐 ~~ 네가 내 피곤함을 잠시나마 풀어주려는 거구나! 고맙다 ^^ 그럼 나도 네게 동요 한곡 선물하마 ^^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폴짝 폴짝 참 날씨도 좋구나 " ㅉㅉㅉ 참 잘 했어요~~~ ^.~
내 동요 소리에 성벽이 반주를 울렸나 봐요 쿵작쿵작쿵작자~숙종세종순조세종숙종세종~~`참말예요! 보세요! 성벽을~~.
하도 길이 호젓해서 미소 한 올도 못 지었네요.
쉼터가 있고 성벽이 터져 있어 와룡공원 및 성균관대학 후문을 지나 감사원으로 갈 수 있는 도로가 있고 한양성곽 안쪽 순성길이 있습니다.
쉼터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본 모습으로 오른 편에 심우장과 성북동으로 가는 오솔길이 있습니다.
성북동으로 내려가는 길로 좀 내려가다 보면 卍海 韓龍雲 선생이 1933~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심우장尋牛莊이 있습니다. 심우장은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는데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은 연유는 다 아시겠지만 남쪽에 총독부건물이 있어 남향으로 지을 경우 총독부를 바라보는 격이 되어 등지고 산다는 의미로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지요.
쉼터 정면은 성곽이 터져 있어 성곽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본디 암문이 있던 자리인지 근대에 필요에 따라 성벽을 터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은 성곽 안팎으로 군통제지역이 있어 안팎간에 소통을 위한 교통로로 사용하기 위해 터놓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도로 우측은 통제구역입니다.
성안쪽으로 들어와서 성 바깥 쉼터를 바라보고 담은 사진입니다.
말바위안내소 데크조망대에서 갈라진 두 길이 와룡공원 삼거리인 이곳에서 만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안팎으로 순성길이 있어 성벽 안으로 가나 바깥으로 가나 200m정도 지나 암문 앞에서 바깥성곽 길은 단절되고 암문에서 성벽 안 순성길로 합칩니다. 사각정자 아래 화장실이 있고 바로 와룡공원입니다. 아까 이곳에서 다시 말바위전망대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도착한 것입니다.
성벽 바깥 탐방로 모습입니다
麻布를 깐 길과 나무계단이 번갈아 이어지다가 암문에서 다시 성벽 안 탐방로와 합칩니다.
쉼터에서 다시 성벽 바깥 길 따라 암문까지 갑니다.
가로 놓인 성벽을 바라보며 순전히 몸으로 해냈을 옛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서는 성 안쪽 여장에서도 성 바깥쪽 성돌에서도 각자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없지는 않았을 텐데...
바로 앞 돌계단 끝나는 곳에 원목으로 막은 것으로 보아 암문이 있는 곳이고 성 밖 순성길도 끝나는 곳인가 봅니다. 바깥 순성길은 왠지 탁 트이고 후련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 Splendor in the Grass / 초원의 빛 》(William Words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초원의 빛, 꽃의 영광어린 시간을 그 어느 것도 되불러올 수 없다 한들..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죽음 너머로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바깥 순성길은 여기서 끝나고 옆 암문을 통해서 안쪽 순성길을 이용해서 성곽 따라서 혜화문으로 갑니다.)
성 바깥 순성길은 끝나고 암문입니다 이 암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창경궁으로 이어진 길이 있고 성곽 따라 가면 경신고등학교가 있는 성북동과 혜화동 경계인 고갯길이 됩니다.
성벽 바깥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암문의 모습입니다. 성 안쪽 지대 높이만큼 돌계단을 놓았습니다.
성벽 바깥 순성길에서 안으로 들어와 바라본 암문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암문은 창의문에서 숙정문 사이 2개가 있고 숙정문에서 혜화문 사이로는 첫 번째 암문입니다.
성곽 안 암문 앞에서 혜화문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입니다.
이제는 성벽이 아닌 성가퀴를 살펴보며 각자를 찾고 있습니다. 城郭 바깥 城壁에서 볼 수 있었던 刻字는 태조 · 세종 때와 숙종 때 새긴 것이고 여장에서 확인된 것은 거의 순조 때 새긴 것들입니다.
성가퀴를 살펴보고 가는 동안 뒤에 오던 세 사람이 저만치 앞서 가네 두 사람은 다리도 불편해 보이던데...
나뭇가지 사이로 낯익은 주택들이 보이고 학교건물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북동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의 경신고와 옛 보성고 사이의 도로가 가까이 있겠습니다.
이제 옛 보성고등학교였던 서울과학고 옆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종종 다니던 길을 10년 만에 와서보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저절로 떠오르네.
성벽이 단절된 성북동쪽 성곽주변 모습입니다.
숙정문에서 지금까지 내려온 방향입니다.
성북동에서 혜화동으로 내려가는 방향입니다 우측은 경신고등학교 좌측은 옛 보성고등학교 자리였던 서울과학고등학교입니다.
숙정문에서 이곳까지의 성벽은 잘 남아 있지만 이곳에서 마주 보이는 서울왕돈까스점 옆 골목으로 성벽은 이어지지만 혜화문에 이르기까지 성벽을 학교나 교회 그리고 개인주택이 축대 삼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 조선시대 때 옷감을 삶거나 빨아 볕에 바래는 일을 했던 마전터가 있었습니다. 성벽아래 성북동 길가에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 제1호 최순우 선생이 생전에 살던 한옥과 간송미술관, 심우장, 수연산방 등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마주보이는 좁은 골목길에 성벽이 보입니다.
성벽 위에 경신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회불럭으로 쌓은 학교담장이 세종 때 쌓은 성벽 위에 느긋하게 올라앉아 있습니다.
순조 때와 숙종 연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돌입니다 .
아래 보이는 길은 삼선교에서 옛 대원각(길상사)을 지나 삼청터널로 가는 성북동길이고 앞에 보이는 한옥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고 최순우선생이 살던 집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기금으로 구입한 제1호 최순우기념관입니다.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갑니다.
성곽이 잔재해 있는 좁은 골목길로 이어집니다.
골목길가 옆에 성벽은 알게 모르게 이어져있습니다. 텃밭 안 성벽 위에 교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안타까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곳도 언젠가는 마땅히 복원되어 길이 보존되어야할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 신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불법주차된 차에 가려 있는 것을 어렵게 찾았는데.. '第三 (兌)' 붉은 자도 알송달송 확실하지 못합니다.
이 刻字城石은 세종 때 쌓은 것으로 세 번째 구간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알송달송한 1글자는 천자문 순서로 나눈 구역을 표시한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해봤으나.. '兌'字는 천자문의 순서로는 100번째를 훌쩍 넘는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도성을 축성할 때 97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을 천자문의 순서대로 백악산 정상을 '天' 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구역이 천자문의 97번째 글자인 '弔'字로 끝나므로 이 성석의 각자는 천자문 순번의 구역을 의미하는 글자는 아니겠습니다. 그렇다면 알송달송한 글자는 '兌'자가 아니거나 축조를 담당했던 지방 이름이겠는데, 1글자는 정확히 '兌'字로 보기 어렵고 그 아래는 어렴픗이나마 박리된 흔적이 있으나 글자가 있었는지 조차 판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성벽은 重症으로 곳곳에 진단을 받고는 있지만 위로는 온갖 건축물이 빼곡하게 타고 앉아 있으니 이 난감함을 어찌 할까!
第三 襄(?)瑑琦 / 제삼 양(?)전기 사람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더러는 붕괴의 기미도 엿보입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께서 국가의 기반을 다진 성벽을 그 후대들이 사유로 점령하고 검게 부식되어 가는 모습에서 안타깝습니다.
서울시 문화관광체육본부에서 600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도심구간 성벽 일부에서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한 풍화, 배부름, 균열현상이 발생하고 있어 시민의 안전과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성벽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안전진단 및 계측을 시행하고는 있습니다.
백악구간이 끝나고 낙산구간이 시작되는 혜화문이 나무 뒤로 숨어 있습니다. 혜화문 복원할 때 인근 성벽의 사라진 여장도 새롭게 복원한 것이 보입니다.
혜화문 남쪽과 북쪽은 각각 크고 작은 도로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작은 도로로 인하여 단절된 혜화문 북쪽의 모습입니다.
혜화문으로 오르는 문입니다.
혜화문으로 이어진 성벽과 개인주택 담벽 사이의 탐방로 입니다.
북쪽 측면의 모습입니다. 본래 혜화문은 혜화동사거리(대학로~ 성북동, 창경궁~삼선교, )에서 삼선교로 이어지는 도로위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헐어내고 도로를 냈습니다. 1994년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었습니다. 혜화문 남쪽에 길로 인해 단절된 모습이 비극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혜화문 누각 안의 모습.
혜화문에서 길 건너 가톨릭대학 담장 역할을 하고 있는 성곽을 바라보니 기분이 미묘합니다.
문루와 동일한 위치에서 측면으로 바라보니 정면으로 본 것 보다 감각적으로 멋집니다.
안에서 본 혜화문.
혜화문 천장에는 구름 문양을 바탕무늬로 鳳凰 한 쌍이 그려져 있습니다. 봉황은 용과 같은 想像의 동물로 왕과 결부된 동물로 기린 거북과 함께 四靈으로 여겼으며 鳳은 수컷, 凰은 암컷으로 그 형상은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例를 들자면 《說文解字/설문해자》에는 鳳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이마는 황새, 부리는 닭, 턱은 제비, 목은 뱀, 등은 호랑이, 깃은 원앙, 무늬는 용, 꼬리는 물고기에 五色을 갖추고 있다. 하였고, 《樂汁圖/악집도》에 묘사된 봉황은, 닭의 머리, 제비 부리, 뱀의 목, 용의 몸, 기린의 날개,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것으로 되었다하고, 《周書/주서》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 하여다. 이와 같이 봉황의 모양이 다른 것은 용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아닌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봉황은 용과 함께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동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혜화문/惠化門》
태조5년 한양도성을 축성할 당시 다른 문들과 함께 축조된 혜화문은 창건 당시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던 것을 중종 6년(1511년)에 이름을 혜화문으로 바꾸었다. 영조 때에 없던 문루(門樓)를 세웠으나, 문루는 일제강점기 1928년에 홍예(虹霓)는 1938년에 각각 헐렸는데, 1994년 본래 혜화문이 있던 자리는 지대가 낮아지고 도로로 인하여 북쪽으로 터를 잡아 홍예와 문루를 새로 지었습니다.
혜화문 앞 아래에는 작은 공간의 공원과 정자를 마련하여 쉼터로 쓰이고 있습니다.
혜화문 바깥 출구의 모습입니다.
도로 건너편 가톨릭신학대학교 안에서 볼 수 있는 한양도성 낙산구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바라봅니다.
혜화동사거리~삼선교 간 大路를 건너 바라본 혜화문 남쪽 측면 모습입니다. 저기까지가 창의문(자하문)에서 시작하여 북정문을 거쳐 혜화문에 이르는 백악구간입니다.혜화문을 쳐다보니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일본이 밉기 전에 우리의 자책입니다. 보세요! 지금도 정치꾼들이 국민을 대변하는 의원이 아니라 자신의 일신을 위해 작당한 패거리로서 적대 국을 옹호하고 좌편향적 교육과 지역감정을 조성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오로지 권력 챙탈에 몰두하여 나라를 망치고 국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정치가도 못되고 정치꾼입니다.
년중 단 하루 일반에 개방된다는 가톨릭 신학대학 교정에서 성소행사(2019년5월10일)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번거로운 절차 없이 성곽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선종하신 김수한 추기경님께서도 그 끝도 없을 먼 하늘나라에서 오셨습니다.
행사장을 거쳐 성곽이 보이는 목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목자의 길은 자신과 싸우는 인고의 길이요 그 안에 있을 사랑과 평화를 찾는 신성한 길이겠지요.
혜화문에서 단절된 끝머리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낙산자락을 따라 낮아지는 성벽 너머로 높은 위치에서 바라본 혜화문입니다.
낙산 북쪽 성곽이 혜화문과 단절된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낙산구간 가톨릭대학교 내 단절된 성곽 끝에서 나뭇가지로 잘 보이지 않는 혜화문지붕을 줌으로 당겨본 모습입니다.
혜화동로터리~삼선교 간 도로로 인하여 성곽이 단절된 가톨릭 신학대학 안쪽 끝 모습입니다. 건너편에 혜화문이 마주 보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교 內 북쪽 끝 한양성벽(성곽 안쪽은 성축은 볼 수 없고 성가퀴만 보입니다)에서 가톨릭대 남쪽 담장까지 대략 3~400m 정도의 성가퀴(女墻)에 있을 각자를 찾아 답사를 시작합니다. 출발 시점에는 여장 수축공사를 할 당시 교체된 지붕돌과 석재들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성가퀴 따라 150m 정도 걸어가며 성가퀴를 살펴 보는데 지면에서 두 번째 줄에 첫 각자성석이 눈에 띕니다 이건 행운이요 기쁨입니다.
각자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築城監官 張萬豊 治石監官 黃起春 書員 車○汶 庫直 金光洛 石手邊首 李一福 使擦軍 林雨奭 己亥五月 日. /축성감관 장만풍 치석감관 황기춘 서원 차○문 고직 김광락 석수편수 이일복 사찰군 임우석 기해오월 일)" 이 때의 己亥年은 헌종 5년(1839년)입니다.
이 각자성석에는 이제까지 확인한 각자성석 중에서 가장 많은 직책과 이름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직책에 있어서 생소한 감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일정 기간 동안을 위한 別職이겠지만, 광희문의 옆 여장에 辛未年 순조11년(1811년)에 각자된 치소감관(治所監官)이 있는데 이곳 가톨릭신학대학 안 성곽여장에는 치석감관(治石監官)이라는 직책으로 각자되어 있습니다. 또한 흥인지문 여장에도 '築城監官 出身 崔學淳 治石監官 直赴 金相鉉 石手邊首 申萬吉 同治十二年癸酉九月日/ 축성감관 출신 최학순 치석감관 직부 김상현 석수변수 신만길 동치12년계유 구월 일' 에서도 治石監官이 있습니다. 현대에 가까울수록 직책이 세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각자된 서원의 이름 가운데 자는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여장女墻에 각자된 것은 순조와 헌종 때 오래된 여장을 새로 축성한 것입니다.
혜화문 방향에서 흥인지문 방향으로 여장 따라 갑니다.
성가퀴 너머로 혜화문과 돈암동, 보문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성가퀴(女墻) 內 遠銃眼과 近銃眼 위와 城廓 지붕돌 사이 직사각형 城石 面에 액자형으로 다듬은 그 안에 刻字가 보입니다.
각자는 단지 "監官 任致淵 己卯十月 日/감관 임치연 기묘십월 일" 만 새겨 놓았습니다. 감관 임치연은 橫으로 년월 일은 縱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己卯年은 조선 제 23대 純祖19년(1819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1년 전에 임치연이라는 분이 이곳 성벽 보수공사 감관으로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刻字城石이 있는 성가퀴(女墻) 1타의 모습입니다.
여장이 말큼하니 고풍스런 맛이 없으니 덩달아 각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톨릭신학대학교와 낙산공원사이를 막고 있는 적색 벽돌담장입니다.
성곽지붕 위 철살 틈을 통해 바라보니 성곽은 단절됨 없이 낙산공원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낙산공원으로 나갈 수 없기에 다시 가톨릭신학대학 정문으로 나가서 이제까지 탐방한 가톨릭신학대를 감싸고 있는 성벽바깥쪽을 끼고 가다가 첫 번째 암문을 통해 낙산공원으로들어가 이 담 너머 이어진 성벽에서부터 탐방을 이어갑니다.
답사를 끝내고 다시 목자의 길에서 잠시 성곽을 바라보고 발길을 돌립니다.
목자의 길 옆에 세워진 '서울 맨발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옛 터 기념비입니다. 1940년에 프랑스 엘 가르멜 수도원에서 마리 메히틸드 수녀와 그 동료들이 서울가르멜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1939년 5월 한국에 도착하여 1940년 이 자리에 설립하고 1963년 까지 23년간 온 삶을 교회에 봉헌하며 관상수도를 영위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일년에 단 한번 일반에게 개방한다는 신성한 신학대학교 저는 어떤 행사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도 오셨네요 ^^
가톨릭신학대학교를 나와 낙산구간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바라보고 있는 곳은 들머리 입니다.
계단중간에서 올려다본 잘린 성벽에 제법 굵어진 빗줄기가 촉촉이 내립니다.
끊어진 성벽으로 시작되는 낙산구간의 아린 모습입니다. 좀 전에는 저 성곽 안에서 성가퀴를 답사를 시작하던 곳입니다. 이제는 그 바깥 성벽을 따라갑니다.
단절된 낙산구간 성벽에서 마주보이는 혜화문의 모습이 날씨 탓인가 쓸쓸해 보입니다.
태조, 세종, 숙종 때 쌓은 성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성벽 안쪽은 가톨릭신학대학교 동숭동 校舍가 들어선 곳입니다.
흰 화강암이었건만 긴 세월의 삭아 부식되고 더께가 쌓였지만 견고하게 잘 쌓았습니다.
옛 성벽 돌아가는 그윽한 길목에 꽃도 길도 나지막한 지붕에 둘린 꽃담장도 아름답고 정겨운데 길 안내자 가로등이 고즈넉이 서 있네.
어쩌다 역광모드로 바뀐 줄도 모르고 담은 사진입니다.
고색창연한 성벽에 취한 듯 나무는 뿌리 깊이내리고 긴 의자 넋 놓고 비 맞으며 내가 오는 줄도 모르네.
성벽 따라 길게 휘어지고 드리워진 황토 빛 고운 길 젊은 아낙의 몸매마냥 예쁘구나.
땅속에 내려야할 나무뿌리가 전위예술이라도 하는지 성벽 틈새로 비집고 나와 멋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태조, 세종, 숙종, 현대가 더불어 성축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그 모양이 마치 조각보를 연상시킵니다.
뒤돌아서 보니 한양을 감싼 백악산줄기 그 너머 북한산이 소중한 도읍을 감싸 안고 그윽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벽의 크고 작은 돌들이 무늬가 되어 아름다운 작품으로 다가옵니다.
낙산공원이 있는 위치의 외성벽은 조선시대 축성 변천사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를 보는 듯합니다.
우측에 메주덩이만 한 크기의 돌을 다듬어 築城한 것과, 장방형의 돌을 기본으로 잔돌을 끼어 쌓은 城築을 좌측에 두고 있는 가운데에 2자X2자의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튼튼하게 축성한 성벽은 석재 하나를 장정 4명이 들 수 있는 무게라고 합니다. 작은 성돌로 쌓은 가운데에다 어찌 저렇게 끼워 맞춰 쌓았을까
각자가 있는 성돌입니다. (虛山 始 / 옛 허산 지역 백성들의 築城工事가 시작되었던 곳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첫자가 虛字가 맞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성벽 틈새에 야생화 흰 괴불주머니가 꽃을 피웠습니다.
성벽 바깥 삼선동 동숭동으로 내려가는 마을길과 나란히 이어진 동네의 집들이 비록 생활은 궁핍했어도 이웃과 더 나아가 마주치는 사람들 간의 배품과 온정을 서슴없이 나누던 젊은 시절의 낯익은 모습을 하고 있어 정겹습니다. 그 당시의 청계천언저리를 비롯해서 동선동, 삼선동은 물론이고 약수동, 해방촌, 한남동 금호동, 성북동, 삼양동, 왕십리, 창신동, 미아리, 삼양동, 노량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높은 지대의 집들이 거의 다 판잣집들이었습니다.
성곽 동쪽 기슭인 고지대에 자리한 이 장수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 바람을 타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당시 공유지였던 이 험한 성곽 밑에 모여들어 판자촌을 이루고 살면서부터 형성된 마을입니다. 마을주민들 대다수가 같은 형편에 어려운 시절 40여년을 함께 의지하며 살아온 까닭에 마을공동체가 잘 발달했고 60세 이상의 노인이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나봅니다. 당시 서울 高地帶에는 이처럼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공유지를 무단 점거하고 판자나 시멘트불록으로 허술하게 집을 짓고 동네를 이루었습니다.
긴 세월동안 무너질 때마다 쌓은 성벽에 역사와 사연의 흔적이 얼룩져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마치 수를 놓은 듯이..
한성대학교와 삼선근린공원 경동고등학교 등이 보이는 삼선동 동숭동 보문동 일대의 전경입니다.
북한산 遠境을 줌으로 본 모습입니다. 도성 탐방길은 성곽의 변천과정을 보며 조선시대역사를 짚어볼 수도 있지만 도성 내의 도심경관과 도성 밖 원경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큽니다.
한성대학교와 보문동 일대의 전경입니다.
성벽 안쪽 낙산공원의 큰 나무에 마주 걸린 까치집 둥지가 정겹듯이 두 젊은 남녀가 우산을 받쳐 들고 가볍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산책을 즐기는데 가로등 홀로 쓸쓸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낙산구간 혜화문~흥인지문 사이 첫 암문입니다. 낙산구간은 가톨릭대학교 담장이 끝나는 대학로에서부터 성곽안쪽으로도 탐방로가 있어 성곽여장을 따라 흥인지문까지 갈 수 있습니다.
성곽에 설치된 이 암문은 유사시 적이 모르게 드나들 수 있는 비밀통로입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으로 통합니다. 성 안쪽 탐방길로 가볼까 싶어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이 통로는 보문동 일대 주민이나 낙산 대학로 동숭동 주변에서 도보로 오가는 지름길이 되겠습니다.
암문으로 들어서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넓게 자리한 낙산공원에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산을 받치고 가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에 다시 성벽이 바람을 막아주는 성 밖 탐방로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성 밖으로 나와 바라본 성벽의 모습입니다. 높은 지대를 오르내리기 쉽게 데크가 아닌 나무로 계단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순조 때 쌓은 성곽 밖 탐방로를 따라 흥인지문으로 가며 맞물려 짜 맞춰 쌓은 성벽의 세세함에 어느 세월에 정으로 쪼아 저렇게 쌓았을까 탄복을 합니다.
도로에 의해 성곽이 잘린 이곳까지 종로마을버스 03번을 이용하여 어렵지 않게 성곽으로 올 수 있습니다. 낙산정류장(종점)에서 우산을 바쳐 든 분에게 여쭸습니다. 흥인지문까지 갈 경우 성벽 안과 성곽 밖으로 가는 것은 뭐가 다릅니까? 성곽 안으로 가면 볼거리가 없습니다. 성 밖으로 가면 나무도 많고 꽃도 피었고 성벽도 보며 가는 풍경이 좋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창의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성 안 탐방길은 여장너머로 보는 원경도 좋았고 이어진 성곽의 위세를 보는 풍경도 좋았습니다. 또한 운이 좋으면 성가퀴에 새겨놓은 각자를 발견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 밖 탐방길은 시대에 따라 다른 성벽 쌓은 모양새. 주변 경치와 아늑함 그 또한 나쁘다 할 수 없으니 어느 편이 더 좋고 나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비바람이 몰아치니 그 비바람을 막아주는 성벽을 따라가는 성곽 바깥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가랑비는 어느새 보슬비를 거쳐 제법 빗줄기도 굵고 세차게 내립니다. 이곳의 성곽은 무너진 부분을 1990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세종, 숙종, 순조 때 쌓은 성벽이 모여 그 모습이 하나의 문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조각보를 보는 듯 떠올리게 하여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종 때 쌓은 것이 일부 허물어 졌거나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파괴된 곳을 숙종 때 보수했고 세종 다시 세월이 흘러 순조 때 성축 보수를 하면서 사이를 용이하게 잇고자 무너져 있던 세종 때의 석재를 사이에 끼어 쌓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곽 아랫단에 무늬 고운 치마를 두른 듯이 무리 진 명자나무들이 끝머리에 피워놓은 붉은 꽃이 무성한 잎 사이로 명멸하듯 안간힘을 다해 불태우고 있습니다. 명자나무는 '애기씨꽃나무" 또는 '산당화'라고도 부르며 열매는 아이들 주먹만큼 크고 향기는 모과 향과 비슷하나 더 짙습니다. 직사각형의 성돌로 쌓은 것은 숙종 때 쌓은 것이고 직사각형에 가까운 큰 성돌로 쌓은 곳은 순조 때 쌓은 곳인데 그 중간 작고 검은 성돌은 세종 때 쌓았던 성돌입니다. 순조 때 성곽 보수공사를 하면서 숙종 때 쌓은 성벽과 만나는 모퉁이 구간을 용이하게 맞추기 위해 세종 때 쌓았던 작은 성돌로 끼워 쌓은 것 같습니다.
혜화문과 흥인지문 사이에 2 번째 보는 암문입니다. 이제부터 성 안 탐방로를 따라 갈 생각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성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성가퀴(여장) 옆에 탐방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암문 주변 어디에도 높게 위치한 도성탐방로로 올라가는 곳이 없습니다. 성곽 밑에 바짝 붙어 있는 주택만 밀집해 있습니다. 한참 두리번거리다 다시 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시 성곽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길가에는 성벽은 높이 쌓은 補築 위 개나리 뒤로 숨고 흐드러지게 핀 향기로운 보랏빛 라일락이 빗방울을 머금고 있습니다.
이제 補築은 낮아지고 다시 성곽을 대하고 보니 낙산마을버스종점에서 이 길을 추천한 분의 말이 생각납니다. 나무도 많고 꽃도 많고 볼거리가 적지 않은 데 무언가 2%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그것이 뭘까! 바로 탁 트인 조망이 없습니다. 또한 각자를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그러나 한여름에 뙤약볕이 따갑게 쏠 때는 생각이 달라지겠지요.
성곽과 이파리 없는 나뭇가지에 까치집 하나.. 굽어 처진 소나무와 그 뒤에 두타빌딩만 없다면 괜찮은 그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흥인지문에 다다른 것 같네요. 두타(두산타워)가 보이고 성곽이 엎어질듯 내리곤두박질을 하고 있습니다.
숭인동이 교회를 앞세워 성큼 다가섭니다. 이곳은 성벽을 보호하는 높은 補築과 그 위 개나리만 보입니다.
성곽길을 벗어나 돌아서서 바라본 한양도성 낙산구간 날머리입니다. 뒤로 옛 이화여대부속병원(현 서울도성박물관)이었던 건물이 보입니다.
날머리에서 바로 국보1호에 버금가는 보물1호 '興仁之門'이 보입니다. 팔이 잘려 나간 듯 성곽에서 떨어져 도로에 묶인 흥인지문과 성곽을 어떡하면 좋을까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할 방법은 없을까..!! 자동차 매연 미세먼지 등에 시달리는 이 주변을 이렇게 하면 어떨까!? 청량리~종로 도로는 낙산기슭 소위 말하는 동대문성곽공원의 높은 지대에 성곽 밑으로 터널방식으로 돌리고 주변 도로는 모두 원대하게 돌리면 어떨까..! 처음은 불편하다 하겠지만, 근대 백년의 생활에서 그랬듯이 부뚜막 가마솥이 전기밥솥으로 변하고 다시 밥맛 따라 전기솥이 가마솥을 찾듯이 생활은 익숙해지기 마련인 것, 아니면 한양도성 안 자가용 통행금지 하고 대중교통만 허용하자 자전거를 생활화하면 서울 공기도 좋아지고 시민건강도 챙겨 줄 수 있고 문화재도 덜 망그러질 테고..
흥인지문으로 향한 성곽의 단절된 부분을 복원하면서 끼워놓은 성곽의 명문들은 축성구간 감독이나 석공의 우두머리의 직함과 이름입니다. 성돌에 각자된 이 각자성석은 순조 때와 헌종 때 보축하면서 구간에 책임자들의 직함과 이름을 새겨 놓은 것입니다.
오른편부터 訓局 築應示督 役將 十人 (훈국 축응시독 역장 십인) . 使韓弼榮(사한필영) .一牌將 折衛(일패장 절위)
오른편부터 成世珏 二牌將 (성세각 이패장), 折衛 全守善 (절위 전수선), 三牌將 司果 劉濟漢(삼패장 사과 유제한).
劉濟漢 / 石手 都邊首 吳有善(유제한 / 석수 도편수 오유선)
一牌 邊首 梁六眞 二牌 邊首 黃承善 / 일패 편수 양육진 이패 편수 황승선
康熙四年 /朝鮮 顯宗6年(1665년) /중국 청대강희4년/조선 현종6년(1665년)
邊首 金廷立 / 四十 五月 日 改築 /편수 김정립 / 40 5월 일 개축
낙산구간 성벽 안쪽 탐방길 끝머리의 정경입니다. 저 성벽 밑으로 길을 돌리고 끊어진 성벽을 온전히 이어 복원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흥인지문성곽공원입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는 한양 도성의 동, 서, 남, 북의 4대문은 각각 유교의 기본적 윤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興仁之門은 태조 5년(1396년) 다른 성문과 함께 築造되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興仁之門의 본디의 뜻은 이렇습니다.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흥인지문을 왕궁(경복궁)에서 볼 때 풍수지리학적으로 좌청룡이며 동쪽에 있습니다.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면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한데다 흥인지문 터와 앞 지대마져 평평하여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쌓은 것도 옹성입니다. 또 현판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다른 문은 모두 글자가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으며, 흥인(興仁)이라고 이름 한 것은 흥(興)은 번창한다는 뜻이 있고, 인(仁)은 오행으로 목(木)이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쪽의 기운이 일어나서 虛함을 막으라는 풍수적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흥인지문은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로 2층의 문루(門樓 : 간단히 이야기하면 성벽 위의 목조 건물)를 올려 성문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없습니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합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데 유리하게 하였습니다. 흥인지문은 태조 5년(1396)축조된 이래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루는 간단한 구조에 장식이 많은 19세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의 성문 가운데 유일합니다.
《흥인지문 정면(동쪽) 모습.》
흥인지문 서측 모습
興仁之門 內面 모습
《興仁之門 虹霓 안 天障 龍文樣》
龍은 玄武, 朱雀, 鳳凰, 麒麟, 등과 함께 상상의 동물로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이외 상상의 동물문양으로 무엇이든 탐하여 먹어치운다는 饕餮이 있습니다. 한양도성 四大門, 四小門 중 천장에 용을 그린 문은 현재는 숭례문과 흥인지문 뿐입니다.
검은 바탕 가운데 여의주를 구심점으로 황룡과 청룡을 대비하여 배치하고 그 여백은 촘촘히 오색 구름무늬를 넣었습니다. 모두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문양입니다. 안정, 화목, 번영,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하겠습니다.
흥인지문은 비록 동서남북으로 자동차물결이 허구헌날 무시로 싸고도는 도심 속에 기라성처럼 높은 侍衛같은 示威빌딩들에 에워싸였어도 기 죽지 않고 장중하고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지만 괴물같은 자동차며 인근의 지축을 흔들며 지나다니는 두더지 같은 지하철에 성벽이 쪼개져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 같아서는 저 국보다운 보물을 돋을 수만 있다면 번쩍 떠올려 높이 돋아 올려놓고 싶습니다. 또 인근 역사공원과 하나로 이어 엮어서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장충단에서부터 내려오는 길을 두타빌딩 있는 자리만큼 더 만큼 내물려 정비를 했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아니 아예 서울 도성 안은 재래시장을 더욱 활성화 하고 옛 한양분위기와 도성의 면면을 살려 한국적 미를 창출하는 고유 문화벨트로 묶어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아울렛이니 공룡빌딩은 묶어서 동대문 밖 적당한 곳에 새로운 타운을 조성하여 또 다른 소비문화 관광지역으로 발돋움 하면 일자리도 창출되고 강남처럼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저러나 애초에 문화재 인근에다 저 괴물 같은 두타빌딩은 누가 저리 높게 허가를 내주었나!? 지금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건축 "흥인지문"은 주저앉기 직전입니다. 사대문 안에서는 가스나 전기차로 대체한 대중교통차량과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환경도 살립시다. 제발 서울을 살립시다. 한양을 살립시다. 한국적 고유문화가 살아 숨 쉬는 색깔 있는 도시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이 한국 고유의 멋에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는 국제도시로 만듭시다. 정치 하는 분들이여, 파당과 권력에 집착 마시고 지역 간 이간시키지 마시고 제발 한마음으로 나라 발전에 이바지 하시고 정치꾼이 아닌 존경받는 政治家 되시고 제발 국민 좀 살려주시오.
2016년4월16일 자하문에서 탐방을 시작 흥인지문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7시경 비가 내리고 어두워질 무렵이라 자세히 살펴볼 수 없어 역사문화공원에서 흥인지문의 모습을 원거리 촬영으로 한장 담고 집으로 온 것이 못내 아쉽고 마음에 걸려 5월27일 다시 찾아가 흥인지문의 사면을 사진에 담고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한쪽 지반이 내려 앉아 홍예문 오른쪽 성축이 갈라지고 성돌이 쪼게 졌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살펴 보건데 이건 흥인지문 오른쪽 지반이 내려앉았다는 이야긴데.. 이건 보수가 아닌 근본적인 대처를 해야 할 문제이다.
분명 오른쪽 지반이 내려앉아 갈라져 쪼개진 이 일은 절대 보수로 끝낼 일이 아님을 흥인지문은 명백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일은 정부의 차원을 넘어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여 다시는 이런 중병을 앓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 주변환경을 정비하고 흥인지문을 분해한 후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지대를 굳게 다진 후 다시 원형 그대로 복원해야할 것으로 믿습니다.
조상 대대로 5백여 년을 살아온 내 고향 서울에는 큰 門이 모두 8개가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八大門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팔대문을
方位로 구분하면 동서남북 방위순서대로 똑바른 동쪽(正東)에 흥인지문(興仁之門), 仁 즉 德을 세워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門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 불리지요.똑바른 서쪽(正西) 방위의 돈의문(敦義門), 義를 돈독히 한다는 뜻을 지닌 문, 곧 서대문이지요. 무자비한 일본에 의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의 門입니다.똑바른 남쪽(正南)에 숭례문(崇禮門), 예를 존중하고 높이 받든 조선 오백년의 근본인 유교적 사상이 배어나는 門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약간 비켜 자리하고 있는 門 곧 남대문이지요.똑바른 북쪽(正北)에 위치한 어지러움을 가지런하게 정리한다.는 의미를 가진 숙정문(肅靖門), 원래는 숙청문(肅淸門) 이었는데 여러
理由(풍수지리적, 음양오행설)를 들어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뀐 북대문입니다.
그리고 동북(東北)방향의 혜화문(惠化門), 곧 동소문(東小門)이고요. 동남(東南)방향의 광희문(光熙門) 수구문(水口門)또는 시구문(屍口門)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문입니다. 서남(西南)방향으로는 소의문(昭義門) 곧 서소문(西小門)입니다. 서북(西北)쪽으로 창의문(彰義門) 바로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문입니다. 따라서 팔대문은 4대문과 4소문을 합쳐 이르는 말입니다.
다음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적 글을 옮깁니다.
1397년(태조 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대석(臺石)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 : 네모 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무사석 위 주변에는 누각을 둘러막은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기부에 놓인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栱包)를 짰다. 공포는 하층은 내3출목, 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조선 말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데 살미〔山彌〕가 뾰족이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져 연결되었으며, 안쪽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이룬다. 상층의 변주는 하층 대량 위 중간쯤에 세워졌다.
바닥은 하층에는 중앙에만 마루를 깔고 상층은 전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의 하층은 모두 개방하고 상층은 사방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2016년 4월29일. <鄕香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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