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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유적/咸安末伊山阿羅伽耶古墳遺蹟」

현재의 말이산 고분군의 全景寫眞를 찍고자 서울역에서 19시25분發 진주행 itx 열차를 타고 함안역에 내리니 子正 07분이다. 함안역 인근에 여관이라도 있겠지 생각했는데 咸安驛舍 바깥을 나와보니 허허벌판 가운데 역사만 덩그러니 있고 저 멀리 작은 마을에 전열등 같은 불빛 몇만 어둠을 이겨 내려고 깜박이고 있다. 조그만 저 마을에 여관이 있을까? 있다한들 이 한밤중에 어떻게 찾아간단 말인가? 발바닥은 아픈데 할 수 없이 역사로 되들어가 냉기만 감도는 플랫폼 대기실 걸상에서 새벽 6시가 되도록 6시간동안 어둠속에서 냉기와 친숙하기를 애쓴 밤, - 07시가 되어 함안읍내를 찾아갈 양으로 역사를 나서니 오 하느님의 은혜로움인가! 마침 택시 1대가 客을 기다리고 있어 구름 흐르듯 말이산에 이르렀다.    〔아라가..

原三國時代後期文化

원삼국시대 前期가 중국 漢文化의 수용과 移傳 初期鐵器文化를 발전시킨 과정이었다면, 원삼국시대 後期는 前期의 문화적 전통 아래 정치 문화적으로 점차 중국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시켰던 시기이다.이러한 영남지방의 원삼국시대 後期문화는 墳墓規模 규모의 확대와 부장유물의 전반적 數的 증가에서 알 수 있듯이 전기와는 다른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철기유물의 양적증가와 보수적인 묘제의 변화 및 부장품과 무덤 규모의 차이는 지배계급의 성장문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에 보이는 三韓이 漢郡縣과 전쟁을 치르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3세기대의 기록은 원삼국시대 후기의 내용으로 보인다. 이 시기 영남지방의 주요유적으로는 경주 조양동, 김해 양동, 부산 노포..

「가야의 태동 (원삼국시대) /伽耶의 胎動(原三國時代)」

《伽耶의 胎動》 (원삼국시대)紀元前 1세기 後半부터 西紀 300년경까지 약 3세기간을 우리나라 考古學에서는 原三國時代로 부르고 있다. 이 시기는 文獻에 보이는 三韓 중 弁韓이 소위 部族聯盟體의 성격을 띠고 지금의 洛東江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考古學的 資料에 의하면 이때는 靑銅器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드는 반면 鐵器 製作은 크게 성행하여 武器는 물론 일반 農工具類까지 철기로 대체되었다. 또한, 발달한 철제 농기구를 토대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철과 철기 따위를 멀리 樂浪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여 交易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보수적 성격이 강한 墓制에 있어서도 새로이 木棺墓 木槨墓가 채용되어 널리 유행하였다. 원삼국시대 초기에는 목관묘가 주로 축조되었으나 후기에는 목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