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耶의 胎動》 (원삼국시대)
紀元前 1세기 後半부터 西紀 300년경까지 약 3세기간을 우리나라 考古學에서는 原三國時代로 부르고 있다. 이 시기는 文獻에 보이는 三韓 중 弁韓이 소위 部族聯盟體의 성격을 띠고 지금의 洛東江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考古學的 資料에 의하면 이때는 靑銅器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드는 반면 鐵器 製作은 크게 성행하여 武器는 물론 일반 農工具類까지 철기로 대체되었다. 또한, 발달한 철제 농기구를 토대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철과 철기 따위를 멀리 樂浪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여 交易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보수적 성격이 강한 墓制에 있어서도 새로이 木棺墓 木槨墓가 채용되어 널리 유행하였다. 원삼국시대 초기에는 목관묘가 주로 축조되었으나 후기에는 목곽묘가 유행하였다. 이들 무덤은 삼국시대 古墳처럼 큰 封墳을 아직 쓰지 않았고 副葬遺物도 본격적인 무기나 馬具類는 드물다.
墓制의 변천뿐 아니라 토기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청동기시대 이후 계속 사용되던 無文土器는 차츰 소멸되고 대신 중국 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成形時 打捺法이 수용되고 燒成時 露天窯가 아닌 밀폐된 平窯나 登窯를 채용하여 만들어진 소위 瓦質土器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와질토기는 특히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토기의 형태도 다양해져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 주머니壺, 短頸壺, 長頸壺, 火爐形土器, 直口壺, 高杯 등 많은 器種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원삼국시대는 墓制와 출토유물의 조합 및 유물 자체의 분석을 통해 前 後 2기로 나누어진다.
〈原三國前期와 茶戶里遺跡〉
가야지역에 있어서 원삼국시대 前期에 해당되는 유적은 昌原 茶戶里, 大邱 達城, 固城 松川里, 金海 良洞·池內洞, 釜山 久瑞洞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모두 墳墓유적인데 크게 木棺墓와 甕棺墓로 구분된다.
이중 창원 다호리유적은 원삼국시대중 가장 빠른 유적으로 1988년에 발견된 이후 6차에 걸쳐 목관묘 44기, 合口式 甕棺墓 5기가 발굴조사되었다. 특히 1호분에서는 거의 완전한 모습의 통나무관과 많은 副葬遺物이 出土되어 당시의 문화복원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漆器類, 木器類, 鐵器類, 土器類 등의 부장유물이 棺바닥과 둘레에서 발견되었는데 나무자루가 달린 따비의 존재는 당시 철기의 보급이 農器具에까지 미칠 정도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각종 칠기제품은 이 지역의 칠기문화가 매우 독창적이며 韓國式銅劍文化의 전통 위에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토기류는 後期 無文土器와 古式 瓦質土器가 동시에 출토되어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다.
(창원 다호리 유적 전경 / 昌原 茶戶里 遺蹟 全景)
〈茶戶里遺跡의 통나무관〉 다호리 1호분 목관(茶戶里 1號墳 木棺)
원삼국시대 前記에 유행한 묘제墓制는 옹관묘甕棺墓와 목관묘木棺墓이다. 이 중 목관묘는 기존의 낙랑유적과 경주 조양동 유적을 통해 그 형태가 板材에 의한 평면 장방형의 상자모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다호리유적에서는 이와 달리 통나무로 만든 구유형 목관이 출토되었다. 이 목관은 길이 240cm, 너비 85cm, 지름 65cm 크기로서 굵은 통나무를 길게 반으로 잘라 그 내부를 파낸 뒤 각각 관의 덥개蓋部와 몸체身部로 사용하였다. 또한 上下 관재棺材의 결구結構는 각이 진 긴나무를 촉으로 사용하였다. 관의 운반을 위하여 관의 양 측면에 4개의 운반형 고리구멍을 관통시키고, 토광土壙내에 안치시安置時는 굵은 밧줄을 이용하였다. 한편 관 아래에는 한가운데 별도의 부장구덩이副葬坑를 파고 그 안에 각종 유물이 담겨진 대바구니를 부장하였다.
(茶戶里 1號墳 木棺)
(부장갱내죽협 / 副葬坑內竹篋)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에 담긴 각종 무기류 (다호리 1호분)
(칠초동검 / 漆鞘銅劍) 창원 다호리 昌原 茶戶里 1號墳
(칠초동검 / 漆鞘銅劍) 창원 다호리 昌原 茶戶里 1號墳
(성운문경 / 星雲文鏡) 창원 다호리 1호분.
(오수전 / 五銖錢) 창원 다호리 1호분
(붓 / 筆) 창원 다호리 1호분
(여러 가지 옥 / 玉類) 다호리 1호분
(노끈 뭉치) 다호리 1호분/茶戶里 1號墳
1. 무기武器
다호리유적에서는 동검銅劍, 동모銅鉾 등 동제품 외에도 철제 무기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한국식동검 韓國式銅劍에서 자루와 칼집을 본뜬 철검鐵劍은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던 의기적儀器的 성격의 철기로서, 청동기靑銅器에서 철기鐵器로 옮겨移行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모鐵鉾는 다량의 철기 유물과 함께 경제적 부富를 상징하는 동시에 형태에 있어서 원삼국후기 이후에 나타나는 장대한 길이의 철모鐵鉾와는 달리 길이가 짧고 자루의 힘을 전달하는 공부銎部가 강조된 점 등은 이들 철모鐵鉾는 무기로 직접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 철모· 동모 / 鐵鉾 · 銅鉾 ) 철로 만든 창과 동으로 만든 창.
(칠초철검 / 漆鞘鐵劍) 칼집에 옻을 칠한 철검
(목제검파부철검 / 木製劍把附鐵劍) 나무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철검
(봉상칠초 / 棒狀漆鞘) 옻칠을 한 몽둥이 형태의 칼집.
2. 농공구 / 農工具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목병木柄에 부착된 철부鐵斧들을 보면 오늘날의 도끼 또는 자귀와 같은 형태로 자루에 삽입되어 있다. 도끼와 같은 형태는 나무를 베거나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믿어지며, 자귀와 같은 형태는 깎거나 다듬는 공구로 사용하였을 것같다. 板狀鐵斧는 도끼와 같이 사용되기도 하고 ㄱ자형의 자루에 묶어 자귀와 같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농공구로는 따비와 낫이 있다. 따비는 傳大田出土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서 볼 수 있듯이 청동기시대 이래로 계속 사용되어온 우리나라 특유의 농기구로 손으로 쥐는 나무자루가 곧추 세워지고 先端部가 땅에 비스듬히 박혀 밭을 갈 수 있게끔 된 것이다. 이러한 따비는 慶州 朝陽洞과 蔚州 下垈遺蹟 및 昌原 大坪里遺蹟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원삼국시대 전기간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목병부철기 각종 / 木柄附鐵器 各種 ↕ (창원 다호리 1호분)
농경문청동기 앞면 (農耕文靑銅器 前面) 실체 너비 12.8cm. 출토 : 傳 大田. (대전에서 발굴되었다고 전해진다.)
머리에 깃털을 길게 달고 나체의 몸으로 따비로 밭을 일구고 있는 모습과 밭이 음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으로 인하여 따비의 용도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겠다.)
이 농경문청동기는 상부에 6개의 구멍이 뚤려 있는데 祭政이 분리되기 이전에 제사장(우두머리)이 구멍에 실을 꿰어 목에 걸었던 儀器로 추정된다.
농경문청동기 경작부분 세부( 農耕文靑銅器 耕作部分 細部)
농경문청동기 뒷면 (農耕文靑銅器 後面) 실체 너비 12.8cm
갈라진 나무가지 끝에 각각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음각되어 있다. 이 나무가지 새 음각문은 삼국이래 솟대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해 본다.
(철제 따비) 경주 조양동, 의창 대평리
(목병부철제/木柄附鐵製 따비) 창원 다호리 1호분.
〈鐵器〉
다호리유적의 목관 바닥과 주위에서는 많은 철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철기의 수량이 엄청날 뿐 아니라, 그 종류도 劍, 戈, 鉾, 鏃, 斧, 낫, 따비 등 武器類와 일반 農工具類에까지 미쳐 이 시기에 이미 철기류가 일반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철기들은 대부분이 한국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形態가 독특하고 鍛造 · 鑄造品이 모두 보이고 있어 鐵器製作技術이 상당한 水準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鐵斧 중 板狀鐵斧는 원삼국시대 초기의 嶺南地域 철기를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자루없이 목관내부에 여러점이 끈으로 묶여 副葬되거나 날을 세우지 않은 것도 있어 단순히 도끼역할 만이 아닌 鐵錠과 같은 地金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주조철부/鑄造鐵斧) 창원 다호리 1호분.
(판상철부 / 板狀鐵斧) 창원 다호리 1호분,
(농공구 각종 / 農工具 各種) 창원 다호리 각 유구,
〈漆 器〉
우리나라에서 칠의 사용은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한국식동검 사용시기인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간다.
기원전 3~2세기의 牙山 南城里, 瑞興 泉谷里, 咸平 草浦里 유적에서는 소량의 철편이 발견되어 鐵의 사용이 확인되었다.
茶戶里유적에서는 완벽히 보존된 漆器 및 漆皮만 남은 칠기 흔적이 다량 출토되었다. 각종 高杯, 四足器, 有蓋筒形器, 有蓋盒, 붓, 부채 등의 木胎, 토기에 직접 칠을 바른 陶胎, 대바구니에 칠한 籃胎, 철기류에 칠한 金胎 등 칠기의 종류 및 제작기법이 매우 다양하여 이 당시 이미 칠기가 널리 이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다호리의 칠기는 기본적으로는 옻나무에서 추출된 옻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종종 이 옻칠 바탕위에 다시 朱漆로서 三角鋸齒文, 格子文, 同心四角文 따위의 무늬를 베풀은 것도 발견되고 있다.
(칠기원형두 / 漆器圓形豆) 창원 다호리 1호분,
(칠기방형두 / 漆器方形豆) 창원 다호리 1호분,
(유개통형칠기 / 有蓋筒形漆器) 창원 다호리 1호분,
(칠기부채자루 / 漆器부채자루) 창원 다호리 1호분,
(원삼국전기토기 각종 / 原三國前期土器 各種) 창원 다호리 각 유구.
2024년10월14일 - 明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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