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흥인지문-혜화문 /興仁之門-惠化門』刻字城石

鄕香 2019. 6. 7. 19:34

 

 

『한양도성(漢陽都城)』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城입니다.

북악산(白岳)을 주산으로 우측에 인왕산(仁王), 좌측에 낙산(駱駝), 정면 남쪽에 木覓山(남산)이 옹성처럼 둘린 盆地 수도 한양을 품고 있는 4개의 산 정상과 능선을 아우르며 백악과 인왕 2곳에 曲城을 두었고 봉우리 요소에 5개의 雉를 구축하였으며 4방위에 4개의 큰 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을 세우고 그 마다 4개의 소문, 즉 광희문 · 소의문 · 혜화문 · 창의문을 두었고 그 사이 적정한 곳에 9개의 암문과 두 개의 수문 그리고 바라보는 앞 木覓山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築城한 전체 길이 약 18,600m에 평균 높이 6~8m의 한국 고유 축성기법과 집단의 장인들이 빗어낸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514년(1396~1910,)동안 그 원형을 보전하였으며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 별로 다른 돌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과 더불어 한국적 교육 건축 환경 생활문화를 발전해 왔으나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며 대문과 성벽이 훼철되었고, 6.25전쟁과 서울의 팽창과정에서 자발적 훼손으로 더욱 피폐되어가다가 1968년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도성 안으로 침투하는 1.21사태로 인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은 600년에 걸쳐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제1호 흥인지문은 처음 건축시기인 태조 때는 흥인문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판에는 之자가 하나 더 붙여졌지요. 李肯翊(1736-1806)의 「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동쪽 방면이 虛하여 흥인문 편액에 '之'를 더하고 담(甕城)을 쌓았다" 고 합니다.

한양도성의 4대문 4소문 중 현재 남아 있는 성문 중 숙정문을 제외하고 숭례문, 흥인지문, 광희문, 창의문, 혜화문은 천장을 갖췄으며 그 천장에는 숭례문, 흥인지문, 광희문에는 용을, 창의문과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숭례문에는 여의주를 중심에 두고 황룡과 청룡이 상하의 위치에서 머리는 앞을 향하고 여백에는 다소 큰 瑞氣紋樣(오색구름)으로 모두 채워져 있습니다. 흥인지문에는 황룡과 청룡이 좌우에 자리하고 중앙의 여의주를 감싸고 주시하며 여백에는 작은 서기문양을 촘촘히 채워 넣었습니다. 광희문 천장에는 황룡과 청룡이 좌우에서 여의주를 감싸고 있고 여백은 큼직한 서기문양으로 채웠습니다. 창의문에는 봉과 황이 좌우에서 역방향의 자세에서 마주하고 여백은 서기문양으로 조화를 이뤘으며, 혜화문은 상하에서 봉황이 마주하고 여백에는 성글게 서기문양으로 채웠습니다.

흥인지문 지붕은 용마루 양 끝에는 용두로 장식되었고 추녀마루에는 끝에서부터 대당사부(大唐師傅), 손행자(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 이귀박(二鬼朴),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을 장식했습니다. 이러한 잡상은 화재와 잡귀로부터 건물을 보호한다는 주술적 의미를 가집니다. 건물의 위상에 따라 잡상의 수도 다르지요. 문루가 2층 건물인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상층 9개, 하층 8개의 잡상이 장식되었으나 단층 문루인 돈의문, 숙정문, 창의문, 혜화문, 소의문에는 7개의 잡상을 두었습니다. 각 대문의 내력은 앞서 올린 '한양도성'에 서술한 것으로 갈음합니다.  

 

 

 

 《세종 4년(1422년) 각 지역별 축성 분담구간》

32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은 보수하고 기존의 흙으로 쌓은 토성은 모두 석성으로 다시 쌓았습니다. 공사는 철저한 구간별 책임제로 쌓았는데, 천자문 순서대로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고 각각 담당 군현을 정하여 축성과 함께 사후 보수까지 책임지게 하였습니다. 각 도의 구간을 천자문 순서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기도 天地玄黃 宇宙洪荒 日月盈昃 辰(13구간)〉· 길도 宿(2구간)〉· 강원도寒來(3구간)〉·

〈충청도往秋收冬藏閏餘成歲(10구간)〉·〈전라도 律呂調陽雲騰致雨露結爲霜金生麗(15구간)〉·〈경상도水玉出崑岡劍號巨闕珠稱夜光果珍李柰菜重芥薑海(22구간) 〉·〈평안도 鹹河淡鱗潛羽翔 (7구간)〉 ·〈황해도 龍師火帝鳥官人皇始制文字乃服衣裳推位讓國有虞陶唐弔(25구간)〉 총8구역 97구간》

 

이 8개 구역은 천자문순서대로 시계방향으로 배치되었습니다.따라서 세종 때 흥인지문에서 혜화문까지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이 축성한 구간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성가퀴(女墻)의 각자성석은 모두 순조 때 여장을 개축하면서 새겨 놓은 것이며 가톨릭신학대학교 안에서는 헌종 5년 己亥年(1839년)에 각자한 城石 1개와 순조 때 새긴 각자성석이 1개가 확인되었습니다. 그 외 성가퀴에 각자된 성석은 광희문 옆 성가퀴에 2개가 있고 백악구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각자성석/刻字城石》

아래 각자성석들은 흥인지문 북측 도로건너 성벽이 유실되거나 훼손된 성벽을 복원하면서 성벽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던 각자가 있는 성돌을 복원할 당시 단절된 전면 하단 한곳에 모아 끼어쌓아 놓은 것들입니다.

 

(訓局훈국 策應兼督 役將十人책응겸독 역장십인) · (使韓弼榮사한필영) · (一牌將일패장 折衝절충

 *折衝(절충)은 조선시대 武臣 품계 명칭이며 正三品  堂上官입니다. 따라서 1패장 절충 성세각은 折衝將軍 정삼품 당상관으로 총 책임자입니다.

 

  

 

 成世珏 성세각) (二牌將이패장 折衝절충 全守善전수선) (三牌將삼패장 司果사과 劉濟漢유제한)

 * 司果는 무관의 품계 이름이며 正六品 입니다.

  

 

(石手 都邊首 吳有善 석수 도편수 오유선 ) · (一牌 邊首 梁六賢 일패편수 양육진)

*도편수은 편수의 우두머리 호칭입니다. 편수는 석수의 위 호칭입니다. 따라서 석수는 편수의 지시를 받고 편수는 도편수의 지시를 받습니다.

 

   

(二牌邊首 黃承善이패편수 황승선) · (三牌 邊首 金廷立삼패편수 김정립) · (康熙 年 四강희 년 사) · (四十 五月 日 改築사십 오월 일)

   

 

사람들이 오고가는 인도 옆 단절된 성벽하단에 색 바랜 성석이 한줄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각자성석입니다. 이곳에서부터 바깥성벽을 따라 혜화문까지 갔다가 혜화문에서 다시 안쪽 성가퀴(女墻)를 따라 이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二牌頭/이패두> 牌는 구간을 말하며 頭는 시점(始築點) 즉 두번째 구간의 공사가 시작된 곳이라는 뜻입니다. 牌將은 구간공사를 책임감독하는 사람의 직함입니다.  각 구간의 시점을 세종 때에는 始를 조선 후기에는 頭로 표현하였습니다.   

 

 

위 각자(二牌頭)가 있는 위치를 담은 사진입니다.

성벽이 단절된 면에 여러 각자성석이 있는 자리에서 우측 바깥 성벽 초입 나무계단 끝나는 위치에 있습니다.

 

 

 

《  타妥(?)扶부)부타?》 

이 刻字는 세종 때 축성할 때 새긴 글자로 지명입니다만, 오래된 옛 한자이어서 부족한 식견으로 인해 해독을 못하였습니다.                    

                                                                                          

 

위 각자성석이 위치한 장소의 전경입니다. 좌측 하단 모서리에 빨간연필이 세워져 있는 곳입니다.

 

 

<三牌頭/삼패두>

牌는 구간을 말하며 頭는 시점(始築) 즉 세번째 구간의 공사가 시작된 곳이라는 표시를 한 머릿돌입니다.

 牌將은 구간공사를 책임감독하는 사람의 직함입니다. 始築點을 세종 때는 '始' , 순조 때는 '頭'

 

 

현 위치는 창신동으로 성벽 안쪽은 서울역사박물관(옛 이화여대부속병원건물)이 위치해 있는 공원입니다.

  

 

 "沃涓 옥연"  

涓자로 보이는 글자 아래 一모양은 새긴 劃이 아니고 자연현상이겠습니다.

여기의 '옥연'도 세종 때 전라도의 어느 고을 지명이겠습니다.

글자와 의미는 다르지만 옥연'이라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

안동 풍천면 하회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물이 광덕리에 이르러 물빛이 옥같이 맑고 잔잔하기가 못과 같다하여 그곳 바위에 玉淵이라고 새기고 옥연정사라는 누각을 지은 곳입니다.  沃涓도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玉淵이 세종 때에는涓이었는지도 모르지요.

 

 

 

<汸口방구> 

옛 地名이겠으나 알 수 없습니다. 위 刻字石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란히 있는 2개의 각자석을 우측하단 모퉁이에 두고 담은 풍경입니다.

 

 

 

《정읍/(井邑)》

정읍 지역 백성들이 쌓은 구간을 표시한 것입니다.  

 

 

 

'井邑' 각자석이 있는 위치의 풍경

  

 

 

《金堤(김제)》

전라도 김제지방에 사는 백성들이 축성한 구간을 표시한 것입니다.

 

 

  

소나무가 자라는 세종 때 축성한 성벽에 전라도 지방 지명이 각자되어 있는 곳입니다. 성벽너머로 서울시도성박물관건물이 보입니다.

 

 

 

다시 앞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咸悅/함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지역의 지명입니다. 이곳 위치의 성벽은 옛 익산에 살던 백성들이 축성한 것이 되겠습니다. 각자성석은 세종 때 전라도 지방에서 쌓은 구역인 흥인지문에서 첫 암문이 있는 그 사이 성벽에 몰려 있습니다. 

 

 

《同福始(동복 시)》

同福은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의 한 面으로 백제 때는 豆夫只였고 경덕왕16(757) 동복으로 개칭되었는데 조선 태종 5년(1405년)에 화순현에 倂合되어 태종7년(1407년) 福順으로 개명되었다가 9년 후 1416년 다시 분리되었다가 고종32(1895) 동복이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同福面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옛 전라도 동복에 살던 백성들이 이 자리에서 축성공사를 시작한 곳이겠습니다.

 

 

 

   同福 刻字가 있는 위치와 성벽의 모습입니다.

   

 

《암문(暗門)》

흥인지문에서 혜화문 사이 첫 암문입니다. 때에 따라 암암리에 드나들거나 유사시 적의 눈을 피해서 적의 동태나 정보를 얻기위해 드나들던 비상문입니다.

 

 

  암문 안쪽의 모습입니다.

  

 

충신동 암문을 좀 지나서부터 수없이 많은 '天使'라는 한자를 성벽에 페인트로 써놓았습니다. 충신동 일대는 무속인 들의 거점이라할 정도로 무속인 들이 많은데 신앙적으로 어떤 염원적인 문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은 인류가 시작과 함께 발전한 사상이념이지만 그 행위에 있어서 문화적 시각도 따라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암문입니다. 충신동에서 이화동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성벽바깥쪽에서 성벽 안쪽 이화동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성벽안쪽 풍경을 보기위해 안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성벽안쪽 좁은 골목길이 성벽을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젊은 주부들이 자녀를 데리고 그 좁고 조금은 구차해 보이는 골목길로 성벽나들이를 하는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도 행복합니다.

     

 

성벽안쪽 암문의 모습입니다. 다시 성벽바깥쪽으로 나갑니다.

  

 

두 번째 암문으로부터 30m 정도 지나서 뒤돌아서서 바라본 암문주변 풍경입니다.

 

 

세종 때 쌓은 밑에 성석은 풍화작용으로 돌이 삭아 부서지고 있는데, 그 위에만 새로 보수를 했습니다. 그냥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안쓰럽네요.

   

 

 쉼터를 지나 다시 성벽을 살펴보며 가는데 각자된 흔적이 보입니다. 상하 두 개의 성석에 각자를 한 흔적이 있는데 위 성석에는 '山'자와 辶획만 확인이 되고, 그 아래 성석에는 '湃'字 비슷한 字痕과 '始'字가 있습니다. 

 

 

    刻字城石을 우측 하단 귀퉁이에 두고 주변을 담은 풍경입니다.

 

 

<平澤造/평택조> '造'字 옆 성돌에 확실치 못한 成자 같은 글자 흔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 성벽은 옛 충청도 평택에 사는 백성들이 맡은 구간의 축성을 마친 곳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평택은 태종13년(1413년) 충청도 평택현이었다가 1895년 평택군이 되었으나 지금은 경기도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각자는 세종 때 새긴 것이니 이 구역은 당시 충청도 백성들이 축성한 구역이겠습니다.

 

경복궁 주봉인 백악산에서 동쪽 방향으로 한양도성축성구역을 나열하면,

1.경기도 天地玄黃宇宙洪荒日月盈昃辰(13구간),  2.함길도 宿列(2구간),  3.강원도 寒來(3구간),  4.충청도 往秋收冬藏閏餘成歲(10구간),  5. 전라도 律呂調陽雲騰致雨露結爲霜金生麗(15구간),  6. 경상도 水玉出崑岡劍號巨闕珠稱夜光果珍李柰菜重芥薑海(22구간),  7.평안도 鹹河淡鱗潛羽翔 (7구간),  8.황해도 龍師火帝鳥官人皇始制文字乃服衣裳推位讓國有虞陶唐弔(25구간),  총 8구역 97구간》입니다.   

 

 

    평택이 새겨진 성돌과 주변을 담은 풍경입니다.

 

 

《左龍亭/좌룡정》

성벽에 새겨진 각자성석이지만 축성과는 상관없는 刻字 입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한양인근에 있던 많은 활터 중 한곳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엽서에 이곳에서 활쏘는 장면이 실리기도 했던 그 장소입니다.

  

 

    《造 · 始 · 八㒷》

造자 위에 글자의 흔적이 있습니다. 造字가 있는 성돌에서 한 단 거쳐 그 아래 있는 성돌에 始자가 새겨져 있고 始字성돌 우측에 세로(縱)로 각자된 八㒷 두 글자가 확인이 됩니다. '팔흥'은 조선시대 함길도 지방으로 함흥시와 흥남시에 편입된 고을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造 팔흥 백성들이 성축공사를 시작한 곳입니다. 

 

     ○

     造

             八

     始     㒷

 

 

  〈八㒷〉 좌측 성벽 하단에 팔흥 각자성석을 두고 주변을 담은 정경입니다. 

 

 

낙산공원-동대문역 간 운행되는 '종로마을버스 03번'입니다.

 

 

 

 

낙산공원 03번 종로마을버스 종점 주변 모습입니다. 전철 동묘역 또는 동대문역에서 환승하면 이곳 낙산공원으로 올 수 있습니다.

  

 

다시 성벽 따라 혜화문 방향으로 갑니다.

    

 

마을버스종점에서 150m 정도 걸어가며 낙산암문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60m 앞 안쪽은 가톨릭신학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벽 아래 길에 내려와 정면으로 바라본 암문입니다.

  

 

암문 앞 데크에 올라서서 성벽 안을 보고 바깥 암문을 담은 모습입니다.

 

 

    암문 안쪽에서 내다본 풍경으로 한성대학교건물이 보입니다.

 

 

암문 앞에서 혜화문 방향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낙산암문에서 80m 앞 세종 때 쌓은 성벽에서 확인한 각자입니다. 한글자는 표면이 풍화로 박리되어 알아볼 수 없고 한 글자는 '造'자입니다.

 

 

각자를 좌측 하단에 넣고 주변을 담은 정경입니다. 

 

 

성돌이 한 가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보기에 어땠을까요. 시대별로 성돌모양이 다르고 보니 바라볼 때 밋밋하지 않고 마치 조각보를 보듯 재밌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의 풍화로 돌 속까지 삭아 부서지고 있습니다.

 

 

찾고 있는 각자상석은 보이지 않아도 보기에 아름답고 호젓한 도성외곽 따라 걷는 길 마음에 평화를 담아줍니다.

    

 

유유자적 걷다보면 절로 노래도 흥얼거려집니다.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니 자국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진달래꽃 피던 길에 첫사랑 불태웠고 지난여름 그 사랑에 궂은 비 내렸다오,

종달새 노래 따라 한 세월 흘러가고 뭉게구름 처다보며 한 시절 보냈다오.

잃어버린 지난세월 그래도 후회는 없다 겨울로 갈 저 길에는 흰 눈이 내리겠지-" 

  

 

 

가톨릭신학대학교를 감싸고 있는 한양도성을 끼고 삼선교로 내려가는 끝자락입니다.

 

 

낙산의 한양성곽이 도로에 의해 끊기는 시점입니다. 건너편에 혜화문이 바라보입니다.

  

 

《 혜화문(惠化門)》

속칭 동소문으로도 불리는 혜화문은 태조5년 한양도성을 축성할 당시 다른 문들과 함께 축조되었습니다.

창건 당시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던 것을 중종 6년(1511년)에 이름을 혜화문으로 바꾸었습니다.

영조 20년(1744년)에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문루(門樓)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 말살 정책으로

문루는 1928년에 홍예(虹霓)는 1938년에 각각 훼철되었습니다.

1994년 본래 혜화문이 있던 자리는 지대가 낮아지고 도로로 인하여 북서쪽으로 10여m 위치에 터를 잡아 

홍예와 문루를 새로 지었습니다.

 

 

혜화문을 돌아보고 다시 길 건너편 한양도성 낙산구간 성곽 안쪽의 성가퀴를 답사하기 위해 오던 길로 되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에 가톨릭신학대학교 교내에 있는 성벽 안쪽을 답사하기 위해 가톨릭신학대학으로 갑니다.

  

 

년중 단 하루 일반에 개방된다는 가톨릭신학대학 교정에서 성소행사(2019년5월10일)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번거로운 절차 없이 성곽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교정에 들어서니 성소주일행사가 진행 중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계시네요 ^^ 행사장을 거쳐서 건물 뒤쪽 성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이제부터는 성외곽 답사가 아닌 성내곽의 성가퀴 답사가 시작됩니다.

    

 

이 길은 신부의 길로 들어선 신학생들이 사색을 통하여 자아성찰을 하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가퀴 너머 나뭇가지 사이로 혜화문 지붕이 보입니다.

  

 

혜화동로터리~삼선교 간 도로로 인하여 성곽이 단절된 가톨릭 신학대학 안 북쪽 끝 모습입니다. 건너편에 혜화문이 마주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낙산공원 방향으로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刻字城石을 성가퀴를 살펴보며 찾아볼 생각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교 內 북쪽 끝 한양성벽(성곽 안쪽은 성축은 볼 수 없고 성가퀴만 보입니다)에서 가톨릭대 남쪽 담장까지 대략 3~400m 정도 이어진 성가퀴(女墻)에 있을 각자를 찾아 답사를 시작합니다. 출발 시점 장소에 여장 수축공사를 할 당시 교체된 지붕돌과 석재들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낙산자락 언덕 따라 높아지는 위치에서 성벽 너머로 바라본 혜화문입니다.

 

 

  

 앞서 본 성가퀴와 달리 어쩌면 각자성석이 있을지도 모르는 숙종 때 개축한 성가퀴가 앞을 잇습니다.

    

 

《각자성돌/刻字城石》 

예측대로 각자성석이 있습니다.

여장의 원총안구 아래 헌종 5년(1839년)에 새겨 놓은 각자가 있습니다.

성가퀴(女牆)를 개축하고 공사를 담당했던 인사들의 직책과 이름을 새겨놓은 것입니다.

 

 

    성가퀴 따라 150m 정도 걸어가며 여장을 살펴보는데 地面에서 두 번째 줄에 각자성석이 눈에 띕니다.

 

 

 

 

각자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築城監官 張萬豊 治石監官 黃起春 書員 車○汶 庫直 金光洛 石手邊首 李一福 使擦軍 林雨奭 己亥五月 日. /축성감관 장만풍 치석감관 황기춘 서원 차○문 고직 김광락 석수편수 이일복 사찰군 임우석 기해오월 일)" 이 때의 己亥年은 헌종 5년(1839년)입니다.

이 각자성석에는 이제까지 확인한 각자성석 중에서 가장 많은 직책과 이름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직책에 있어서 생소한 감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일정 기간 동안을 위한 別職이겠지만, 광희문의 옆 여장에 辛未年 순조11년(1811년)에 각자된 치소감관(治所監官)이 있는데 이곳 가톨릭신학대학 안 성곽여장에는 치석감관(治石監官)이라는 직책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또한 흥인지문 여장에도 '築城監官 出身 崔學淳 治石監官 直赴 金相鉉 石手邊首 申萬吉 同治十二年癸酉九月日/ 축성감관 출신 최학순 치석감관 직부 김상현 석수변수 신만길 동치12년계유 구월 일' 에서도 治石監官이 있습니다. 현대에 가까울수록 직책이 세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각자된 서원의 이름 가운데 글자는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한양도성을 처음 쌓은 때는 성벽 바깥 성벽하단에 축성한 지방을 새겼고 그 후 숙종 때 무너진 성곽을 대대적으로 개축과 보수하면서 역시 성벽 바깥 성석에 공사지역에 관계되는 인물들의 직책과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다시 순조 때와 그 후대에는 주로 성가퀴를 개보수하면서 이와 같이 성가퀴에 공사 책임자들의 이름과 직책을 각자로 기록하였습니다.   

 

 

가톨릭신학대학교 내 성벽 북쪽 방향에서 남쪽 낙산공원 방향으로 여장을 살펴보며 성벽 따라갑니다.

 

 

조금 낮은 성가퀴 너머로 혜화문과 돈암동, 보문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순조 때에 쌓은 성가퀴입니다. 운 좋으면 이곳에서도 각자성석을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서 확인한 각자성석에서 1백m 거리에 또 다른 각자성석입니다.

 

 

각자는 단지 "監官 任致淵 己卯十月 日/감관 임치연 기묘십월 일" 만 새겨 놓았습니다. 감관 임치연은 橫으로 년월 일은 縱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己卯年은 조선 제 23대 純祖19년(1819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1년 전에 임치연이라는 분이 이곳 성벽 보수공사 감관으로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가퀴(女墻) 內 遠銃眼과 近銃眼 위와 城廓 지붕돌 사이 직사각형 城石 面에 액자형으로 꾸민 그 안에 刻字가 보입니다.

 

 

이곳 가톨릭신학대학교 내 성가퀴에서는 두 곳에서 각자성석이 확인되었습니다.

  

 

가톨릭신학대학과 낙산공원사이를 막고 있는 적색 벽돌담장입니다.
성곽지붕 위 철살 틈을 통해 바라보니 성곽은 단절됨 없이 낙산공원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낙산공원으로 나갈 수 없기에 다시 가톨릭신학대학 정문으로 나가서 이제까지 탐방한 가톨릭신학대를 감싸고 있는 성벽바깥쪽을 끼고 가다가 첫 번째 암문을 통해 낙산공원으로들어가 이 담 너머 이어진 성벽에서부터 탐방을 이어갑니다.

  

 

가톨릭대 안쪽 성벽의 길이는 대략 300m 정도입니다.

  

 

목자의 길 옆에 세워진 '서울 맨발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옛 터 기념비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1940년에 프랑스 엘 가르멜 수도원에서 마리 메히틸드 수녀와 그 동료들이 서울가르멜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1939년 5월 한국에 도착하여 1940년 이 자리에 설립하고 1963년 까지 23년간 온 삶을 교회에 봉헌하며 관상수도를 영위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女牆(성가퀴)답사를 끝내고 다시 '목자의 길'에서 잠시 성곽을 바라보고 발길을 돌립니다.

  

 

답사를 마치고 성소행사가 있는 교정에 이르러보니 교황님까지 참석하셨습니다. ^^

교정을 나오면서 운수 좋게 각자성석을 볼 수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가톨릭신학대학을 나와 신학대학 뒤쪽 바깥 성벽이 시작되는 나무계단에서 잠시 뒤돌아서서 혜화문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안개비가 내립니다. 앞서 외성곽 답사를 하면서 낙산암문이 있는 곳에서 여기까지 답사 중 두어 곳의 각자성석이 있던 것을 다시 살펴보면서 낙산공원으로 갈 생각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교 바깥성벽의 모습입니다.

 

 

성벽을 따라가는 길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산뜻하고 호젓하여 주변에 공원과 볼거리도 많아 젊은 남녀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세종 때 쌓은 장대한 성벽을 보고 있자니 오랜 세월에 풍상으로 삭아 부서져 내리는 성석에서 애틋한 정을 느낍니다. 고향을 떠나 멀고 먼 타향 한양도성에서 어렵고 힘겨운 성 쌓기에 힘들었을 옛 사람들의 체취를 느끼며 엄숙한 마음으로 글자를 손끝으로 그려가며 보듬어 봅니다. 눈에 들어온 城石은 풍화로 剝離되고 부서져 내려 글자 하나는 점만 남고 남은 글자는 始字뿐입니다.  

   

 

 

《黃澗(황간)》

잘 보이지도 알아내기도 쉽지 않는 각자의 흔적을 마음으로 더듬고 눈으로 읽어 내려니 눈은 더욱 침침해 집니다. 

黃澗은 신라 경덕왕 때 召羅縣을 황간으로 고쳐 영동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9년(1018년) 京山府(지금의 星州)예속 시켰으며 조선 태종13년(1413년) 충청도에 예속되었습니다.  

 

 

  

《황간시(黃澗始)》刻字城石

가까스로 읽어낸 글자는 黃澗始 석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백여년 전 충청도 황간 백성이 배당된 구역 중 이곳에서부터 성벽을 축성했음을 성돌에다 새겨 기록한 것이겠습니다. 

 

 

우측 하단 모퉁이에 각자성석을 기준삼아 담은 성벽의 풍경입니다.

 

 

 

《산시(山始)》또 한 글자가 있으련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경산일까 원산일까 무산일까 아니면 지금의 울산일까! 그러나 이곳은 당시 충청도 축성구역이었던 만큼 원산 , 무산은 아니요 울산은 더더욱 아니겠지요. 괴산이라면 몰라도.. 

 

 

    '山始' 각자를 확인한 성벽의 모습입니다.

   

 

돌이 삭아 부서지고 있습니다.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람과 물 뿐입니다.

 

 

 

좀 야하다 싶은 사람들 앞서 지나간 자리에 홀연히 나타나 내 시선을 붙잡습니다. 字痕을 이리보고 저리보고 더듬어도 보니  '盧山 始'입니다 노산은 전라남도 여수시의 옛 지명입니다. 따라서 전라도 여수 백성들이 쌓은 성벽이 되겠습니다.    

   

 

우측 하단에 노산 始 각자성석을 주로 하여 담은 주변 정경입니다.

 

 

 《永同(영동)》

앞서 노산 시 각자성석에서 5m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는 "永同"이 새겨진 각자성석입니다. 이 각자성석 앞에는 해설판이 있어 어렵지 않게 찾고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해설판을 옮겨 보겠습니다.  

 

 

 

 장수마을 동구 앞입니다. 성벽 안쪽으로는 여기까지가 가톨릭신학대학교 교정 안입니다. 가로등 너머 고갯마루에서 꺾어지면 낙산공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암문이지요 암문 안에서 이곳 위치까지 왔다가 다시 성가퀴 따라 암문 앞을 지나 흥인지문 방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저 고개만 돌아서면 바깥성벽 탐방은 끝나고 안쪽성벽인 성가퀴를 따라가는 탐방길입니다.

 

 

 낙산공원으로 들어가는 암문입니다. 동성고등학교와 대학로 문화거리로 통하는 문입니다.

  

 

암문으로 들어서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넓게 자리한 낙산공원은 산뜻하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일단 공원 북쪽 끝에 있는 가톨릭신학대학 담장이 있는 곳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하기 위해 발길을 북쪽으로 옮깁니다.  

  

 

 낙산공원 북쪽 끝과 가톨릭신학대학교 사이 적벽돌담장이 있는 곳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교 안 성벽답사를 저 붉은 벽돌담 안쪽까지 마쳤으니 다시 담장 밖인 이곳에서부터 흥인지문까지 탐방을 이어갑니다.

  

 

 이 붉은 벽돌로 쌓은 담 너머는 좀 전에 들어가 성가퀴를 답사한 가톨릭신학대학교입니다. 예비 신부(神父)님들이 성서를 공부하는 성역이니만큼 성가퀴 개석 위를 이용해 외부로부터 침입자를 막기 위해 설치한 철조 담이 성가퀴 위를 가로질러 허공까지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성가퀴는 순조 이후 헌·철종 때 개축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가퀴의 蓋石(지붕)을 통해 이곳의 성곽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흰 눈이 성곽 지붕에 소복히 쌓이면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좀 전에 들어왔던 암문 안쪽 모습입니다.

  

 

올 때와 다르게 낙산공원을 거쳐 성벽 안쪽으로 갑니다.

 

 

동쪽 성곽 밖으로 동숭동과 돈암동 일대가 눈에 들어옵니다.

   

 

낙산공원 끝은 도로에 의해 성벽은 끊기고 도로 건너 봉우리 위에서부터 다시 이어집니다. 그 봉우리 위에 멋진 포즈를 취한 한 여인의 그윽한 모습입니다.

  

 

나도 이내 그 봉우리에 올랐건만 어느새 여인은 떠나고 그 자리에 뽀얀 안개비만 내립니다.

 

 

단절된 성벽위에서 단절된 성벽을 바라봅니다.

 

 

다시 돌아서서 성곽 따라 발길을 옮깁니다.

  

 

순조 이후에 개축된 성가퀴에는 찾고자는 각자성석이 없기에 성곽에 근접한 풍경만 바라보며 갑니다.

 

 

이화동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아취 입구에 걸린 것은 '이화장터' 그 옆에는 '개뿔' 들어가 보면 어떤 곳일까 젊은 남녀들만 탁자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습니다. 들어갈까 말까 들어갈까 말까 에라이 쪼다 그냥 지나간다.

 

 

카페인지 뭔지 성벽 옆 비탈길가에 줄줄이 사탕입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앞을 보니 성가퀴 모습이 내가 바라던 그 모습입니다. 아, 뭐가 있으려나.. 그러나 기대도 잠깐 찾는 것은 없고 조만치 앞에서 꼬리를 감추고 마네요.

  

 

그렇다면 나도 널 왜면 할 꺼야 ~!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습니다.

  

 

'이화마루' 큰 뽕나무 아래 널찍한 평상이 있고 그 위에 오디가 두두둑 떨어져 있고 장년 몇 앉아 주절주절 정담 나누고 그 뜰 앞에 애틴 숙녀 몇 속닥속닥거리다가 깔깔 즐겁다.

 

 

 

 

 

 "오디가 까맣게 익어 떨어지던 이화 텃밭"

 

 

"지붕에 장닭이 아름다운 집"

  수예품店이야요~~ ^.~

 

 

  

 까만 오디가 두두둑 떨어지는 텃밭 그 아래, 근심을 술술 넘겨주는 물(望憂物) 파는 근사한 집도 있었다.

  

 

성곽 따라가는 이, 다시 성곽 따라간다.

   

 

 

 지방으로 서울로 온 성곽을 헤집고 다녔어도 이런 멍텅구리 성가퀴를 보기는 난생 처음일세 ~~,

  

 

  아, 인색 타!

駱山은 내게 한줄기 기쁨도 없구나!

그래도 흥인지문은 큰 문답게 한 아름 꽃으로 활짝 나를 반기네.

 

 

이 자리에서 흥인지문을 바라보니 50년대 말의 옛 정경과 정취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흥인지문 남측에 성가퀴는 없어지고 성축만 남아 길이 되어 있었고, 그 밑 다리 형국이 된 오간 수문(五間水門)으로 청계천이 흘렀었다. 청계천 따라 둑방에는 헌책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두산타워 자리에 덕수상고가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경성전기주식회사(한국전력 전신)전차차고가 있었다. 또 흥인지문 동남쪽 앞 '호텔 Dongdaemun'과 진라면 노란간판 사이 골목안쪽에는 기동차(뚝섬과 광나루 가는 전동차)종점이자 차고가 있었지 그 기동차를 타면 창신동 청계천 둑길을 달려 뚝섬이나 광나루까지 시원스럽게 달렸었다. 청계천 둑길 위 철로를 달릴 때면 뚝방촌이란 이름의 판잣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살던 풍경에서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했던 우리네 삶을 눈물 나게 볼 수 있었다. 그 가난을 사심 없이 오로지 국민복리만 생각하고 지금의 한국으로 이끌어 낸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시다. 그런 분을 독재자로만 매도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국가와 국민을 기만하고 궁지로 몰아 넣는 진정한 독재자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사심으로 가득한 부정한 권력들이여 각성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시라. 

 

 

 

흥인지문-외성곽-가톨릭대 안 성가퀴- 가톨릭대 외성곽-낙산 성가퀴-흥인지문의 두번째 답사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너를 따라가는 동안 기쁨도 있었지만 안타까움이 더욱 많았다. 그러나 어쩌리 너나 내나 이겨낼 수 없는 세월을...

 

 

언제 봐도 의젓하고 고풍스런 네가 보물1호를 뛰어 넘어 국보 1호를 능가하는 존재이다.

 

 

장엄하고 늠름하다 너의 위용~~~!

 

 

이제 한 끼를 때우기 위해 가는 노중에도 네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잠시나마 다시 너를 본다.

 

 

2019년 6월7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