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弘智門(홍지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 4번지에 소재하는 弘智門과 蕩春臺城은 숙종 45년(1719년)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간의 사각지대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연결하기 위하여 지형에 맞춰 쌓은 關門 성격을 지닌 城입니다. 성 안에는 練戎臺라고 하는 鍊武場을 만들고 군량을 비축하는 창고 등을 갖추었습니다. 城廓의 길이는 약 5km 정도입니다.

漢北門으로도 불렸던 弘智門은 1921년 홍수로 인해 홍지문과 오간수문이 무너진 것을 1977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홍예 위에 정면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 각 추녀마루에는 대당사부(大唐師傅)를 비롯하여 모두 8개의 잡상이 배치되어 있고 무사석 위 주변에는 누각을 둘러막은 女墻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홍지문 안쪽 모습.

홍지문 우측은 溪流를 가로지른 5칸의 오간수문이 있는데 각 수문은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홍예정수리 안팎에는 귀면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홍예문 바깥쪽의 귀면입니다.

오간수문 위 여장(성가퀴)의 모습입니다.

홍예문 안쪽의 귀면입니다. 바깥쪽보다 곰살맞은 모습입니다.
홍지문 현판이 걸려 있는 바깥쪽 모습입니다.
계단을 올라서서 좌측 상명대학교정문 방향으로 올라가면 탕춘대성 능선입니다.
수정처럼 맑은 옥수가 흐르던 세검정 계곡이 생활수로 물빛이 탁하고 악취를 풍깁니다.
상명대학교로 가는 도로입구에서 상명대학교정문으로 가는 길을 외면하고 바로 좌측 골목으로 들어서서 탕춘대능선의 성벽이 시작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가파른 동네 골목길을 2백여m 정도 오르니 능선과 함께 성벽이 보입니다.
홍지문에서 가파르게 올라선 성벽이 여기서부터 능선 따라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입니다. 돌아서서 한양도성에서 갈라져 나온 탕춘대성벽이 기차바위능선을 거쳐 홍지문을 지나 이곳에 이르른 성벽을 바라보노라니 건너편 인왕산줄기가 보입니다.
세검정계곡에 위치한 홍지문에서부터 가파른 능선으로 올라선 탕춘대성 바깥성벽아래서 인왕산줄기를 바라본 모습입니다. 성벽은 큰 돌들을 서로 맞물리게 튼튼히 쌓았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서서 앞으로 갈 방향을 바라본 성곽의 모습입니다.
성돌들은 틈새 없이 서로 물리고 물려 있습니다.
蕩春臺城의 본래의 이름은 한양도성의 서쪽 능선에 있다하여 西城입니다.
연산군 때 세검정 동편 봉우리에 탕춘대를 짓고 연회를 배풀었던 것에서 탕춘대성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바깥성곽은 잡목에 막힌 곳이 많고 숙종 때 쌓은 외성벽에는 각자가 발견된 적이 없어 다시 성벽 안쪽으로 올라와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북한산 앞 낮은 봉우리에 쌓은 상명대학교건물일부가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습니다.
등산객들로 인해 허물어진 성벽위에 이정표가 염치도 없네. 네 주인이 市長일진데 보호해야할 소중한 문화재를 이리 홀대하다니 차라리 그 자리에 門이라도 내주던가!
비록 여장은 무너지고 없지만, 대체로 성벽은 온전한 편입니다.
성벽을 살펴보며 능선을 가다보니 큰 바위가 불쑥 솟아나듯 보입니다. 애초 능선에는 바위도 많았을 것인데 모두 성벽 쌓을 때 사용해서 이만한 바위나 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명대학교 뒷산 격인 탕춘대성 능선 중간 못미처에 불광동과 세검동간 산책로 겸 지름길을 오가는 발길에 헐어지고 무너진 성벽을 정리하고 길을 터주기 위해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공사구간을 지나 외성곽을 따라 향로봉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탕춘대성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근안총과 2개의 원안총으로 구성된 여장을 목격합니다. 큰 돌로 튼튼하게 쌓은 성벽과 대조적으로 그 위 성가퀴는 다듬지 않은 막돌로 쌓았습니다.
탕춘대성벽 전체 5km에 달하는 길이에서 700여m 길이에 2垜의 蓋石없는 성가퀴(女墻)가 남아 있습니다.
1垜는 1개의 近銃眼과 2개의 遠銃眼을 두고 있는 1개의 성가퀴를 말합니다.
성벽의 일부가 무너진 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탕춘대성 5.1km에 달하는 전체길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가퀴를 다시 바라보며 발길을 옮깁니다.
인왕산 동북쪽 갈라진 두 산줄기에서 한양도성성곽은 동쪽 창의문을 거쳐 백악으로 오르고 북으로 뻗은 또 다른 산줄기는 기차바위를 타고 세검정계곡의 홍지문으로 뻗어 탕춘대성이 되어 향로봉을 지나 비봉까지 이어집니다. 길이는 약 5,1km 정도입니다.
기초석이 되는 지반에 가까운 돌은 성 안쪽 지반하중을 충분히 견디고 밀려나지 않도록 큰 돌들을 방형으로 다듬어 튼튼히 쌓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위 성벽은 무너져 내려도 아래 성벽은 견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까닭이겠습니다.
불광동 방면에서 등산객들이 오르는 샛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기동과 평창동 일대의 주택들을 감싸고 있는 북한산의 모습에서 설악의 용아장성을 보는 듯합니다.
성가퀴 유실된 탕춘대성이 적을 방어하는 城이라기보다 마치 길처럼 보입니다.
수림이 짙고 오솔길처럼 정감이 느껴지는 걷기좋은 길입니다.
기존의 바위를 지지대 삼아 성벽을 붙여 쌓았습니다.
길고 완만한 능선은 평지를 산책하는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깊지 않고 낮은 고갯길이 가로놓인 곳인데 성곽이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곳에 이정표가 얼핏 보입니다.
이정표가 보이던 그 주변의 모습으로 암문이 있습니다.
탕춘대성의 유일한 암문입니다. 안 옆 석벽에 빗장을 질러놓는 홈이 보입니다.
암문 바깥 모습입니다. 암문은 유사시 적의 눈을 피해 정탐이나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해 드나드는 문입니다. 이 암문은 안팎 모두 야무지고 든든한 平据式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안쪽 모습입니다.
암문 옆에 게시된 북한산 둘레길 13구간의 각 구간 거리와 소요시간 그리고 북한산 들머리를 알아볼 수 있는 좌표입니다.
갈림길 삼거리에서 향로봉을 향해 성길 따라 직진합니다.
삼거리 이정표.
삼거리를 지나 향로봉으로 뻗은 탕춘대성 따라 갑니다.
구기동(0.9m)으로 내려가는 삼거리입니다. 향로봉까지 1.3km, 비봉까지는 1.6km, 대남문까지는 4.1km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나온 상명대까지는 1.2km입니다.
성벽 옆 시원한 바람에 솔내음 향기로운 예쁜 길은 발걸음도 사뿐사뿐 가볍고 즐겁습니다.
<탕춘대공원관리소>
탕춘대지킴터를 통과 300m 지점, 성벽은 향로봉으로 곧장 뻗어 있고 비봉은 우측으로 1.4km입니다. 나는 성곽 따라 곧장 앞으로 ..
지킴터에서 300m 지점 이정표 족두리봉1km, 비봉1.3km. 향로봉은 머리 위 성벽따라 갑니다.
향로봉으로 뻗어있는 성벽 옆 돌계단으로 갑니다. 어쨌던 두 길은 비봉에서 만납니다.
성벽은 향로봉 바로 밑에서 멈췄습니다. 이 지역은 수십길 절벽을 이루고 있어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아도 적이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향로봉은 통제구역으로 되어 있어 향로봉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비봉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향로봉 아래 탕춘대성이 멈춘자리의 모습입니다. 성벽은 방어 임무를 향로봉 절벽에 일임하고 향로봉 우측 능선에서 성벽은 다시 이어 비봉까지 갑니다.
향로봉 아래 바위봉우리에서 바라본 향로를 닮은 봉우리, 香爐峯의 모습입니다.
돌아서서 탕춘대성 능선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 세검정 마을과 그 너머 남산이 보이고 인왕산 우측 안산이 목격되고 그 너머로 관악산이 가물거립니다.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비봉을 선두로 그 줄기의 암봉들이 줄지어 따르고 있습니다.
다시 고개를 좌측으로 돌려보니 대각선상에 족두리봉이 얌전히 솟아 있습니다.
향로봉을 우회하여 오르는 길은 올망졸망 바위들이 울퉁불퉁 솟아 있어 딛고 오르는 즐거움에 여념이 없습니다.
외팔이 이정표씨 오로지 비봉가는 길만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위를 오르는 즐거움 몇 년만인가!
작지만 바위틈도 비집고 통과해 봅니다. 십년 전 아름산악회 젊으신 형제자매님들과 어우러져 오르던 바위타기 추억이 그립고 아련합니다.
이번에는 세 팔의 이정표가 세 갈랫길을 또렷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내가 갈 사모바위 1.5km, 오르지 말라는 향로봉은 바로 350m위에 솟아 있고 뒤돌아서 1.3km 지점에 족두리봉이랍니다.
비봉까지 이어졌던 탕춘대성의 무너져 내린 돌이 등산로 돌계단으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지대입니다.
향로봉 밑자락을 우회하여 능선으로 오르는 턱을 넘습니다.
능선에 올라서니 전망 좋고 쉬기 좋은 마춤한 듯 마음에 드는 곳입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땀을 식히며 둘러보는 기쁨을 외면할 수 없지요.
우측을 바라보니 바위봉우리에 하얀 비석이 작은 피뢰침처럼 보입니다. 바로 碑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 비봉입니다.
향로봉 능선에 오르니 향로봉으로 오르는 능선 길은 목책으로 막아놓고 통제구역안내게시판과 이정표를 세워 놓았습니다.
향로봉을 뒤로하고 비봉을 향해 가는 길은 지루하지 않을 바위능선입니다.
비봉 바로 전 마당바위에 올라서서 동,남,북쪽 경관을 둘러봅니다. 숨은 벽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의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비봉이 가까이 마주 보이고 그 좌측 뒤로 형제봉 보현봉 등이 謙齊 鄭敾의 한 폭 眞景山水畵처럼 다가옵니다.
남쪽을 正視하니 산봉우리를 병풍처럼 두른 분지에 조선의 도읍 한양, 서울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남서쪽 풍경입니다.
발을 하나 더 붙인 세발까마귀는 고구려의 상징적 동물이듯 까마귀는 길조입니다.
이제 저 비봉에 올라서서 비록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비석을 살펴볼 생각입니다. 박물관에 모셔놓은 진품에 새겨진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지...
줌으로 당겨본 비봉의 모습입니다.
사모바위도 줌으로 당겨본 풍경입니다.
마당바위를 내려서서 비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은평구 진관공원지킴터로 가는 삼거리입니다.
비봉능선지킴이바위를 우측이든 좌측이든 살짝 비켜갑니다.
진관사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 솔향 폴폴 향기로운 오솔길로 들어섭니다.
솔향기에 취해 오솔길을 벗어나니 길 옆 바로 우뚝 솟아 오른 듯이 비봉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북한산진흥왕순수비문은 삼국시대 신라 제 24대 진흥왕(진흥왕16년 : 555년)의 영토 확장과 순수의 목적, 순수에 참여한 인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불교의 이상적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를 원하였으며 불과 수 년 만에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영토를 넓혀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에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 되고자 한 젊은 화랑들의 헌신적인 희생도 한 몫 하였습니다. 568년 진흥왕은 太王을 자부하며 변경까지 수레를 몰아서 나라 안을 살피는 순수의 길에 올랐습니다. 북한산을 거쳐 8월에는 함경도 함흥에 있는 황초령黃草嶺에 이르러 비문을 남겨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신라 진흥왕순수비에 즈음하여》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신라를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야심찬 왕입니다. 어린 나이(7세)에 즉위하여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으나 551년 약관18세에 이르러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열어 나갔습니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지금의 천안 또는 증평)과 금현성金峴城(지금의 전의)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확보한 한강하류유역의 전초 기지를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제 성왕은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하였으며, 진흥왕은 居柒夫를 비롯하여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등 8 장군에게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高峴/지금의 철령)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습니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지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 사이에 맺었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이듬해(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습니다. 신라는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 교통를 확보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던 것입니다. 성왕의 죽음을 가져온 관산성 전투 이 후부터 백제와 신라는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관계로 빠졌으며 이는 지금의 한반도에 있어서도 삼국의 역학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습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좌(北漢山眞興王巡狩碑座)》사적 제228호
신라 제24대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 동북 해안에 이르는 지대와 가야를 쳐서 넓힌 후 순수할 때 영토의 경계를 정하고 기념비를 세운 자리입니다. 비석을 세운 이래1,200여 년 동안 잊혀 오다가 조선 純祖 16年 丙子年(1816년)에 추사 김정희가 비문 六十八字를 판독하여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비문에는 진흥왕이 북한산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나온 여러 고을에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수를 석방하게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후 비석이 풍화에 부식되고 마모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고 비석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6.25전쟁 당시 총상으로 금간 자리가 갈라져 떨어져 나갈 위기에 처하여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봉의 옛 비석자리에는 복제품을 만들어 설치하였습니다.
《북한산 진흥대왕순수비문》
『 진흥대왕급중신등순수△△지시기 / △언△령갑병지방△△△△△△패주설△ 상 △△ / 지소용고사서△△△△△상전지시신라 △ 왕△ / 굴덕불△병고△△△△△△건문대득인민 우 재척 / △시순수고△△△민심 욕노뢰여유충신 정 성△ / △가가○△△이△△△△△△속로과한 성척△ / 견도인△거석굴△△△△각석지사 / 척간내부지일척간사록령지잡간남천 군 주사 / 부지급간미지대내○△△△사록굴정차 내 / ○ △지△공유칙수△△△△겁초립 조 비 △ / 순수견△△△△△△△△세기정 △ △△ 』
신라 진흥왕순수비 측면에는 조선 純祖 때 추사 김정희가 두 번에 걸쳐 이 비석에 다음과 같이 刻字를 새겨 놓았습니다.
우측 "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往" 좌측 '丁亥六月八日金正喜 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순조16년(1816년) 병자년 7월에 약관 20세의 김정희가 김경연과 비봉을 찾아와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임을 확인하였음을 달필의 해서체로 새겼고, 다시 11년 후 순조27년 (1827년)정해년 6월8일 31살의 김정희와 그의 친구 조인영이 비봉을 찾아와 비문에 남은 글자 68자를 판독하였음을 김정희 특유의 추사체秋史體로 새겨 놓았습니다. 여기서 趙寅永은 趙 大妃(효명세자비이자 신정왕후)의 친정아버지 조만영의 동생이자 조 대비의 작은 아버지입니다.
가운데 새긴 '己未八月日 李濟鉉 龍仁人'은 순수비와 상관없는 長壽을 기원하는 의미로 무명인이 새긴 글자입니다.
모조품에는 당연히 빼버렸습니다.
총탄흔적이 있는 뒷면은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약간 비스듬히 담았습니다.

서쪽을 향한 모조품 순수비 면에 총탄 흔적이 보기와 같이 狼藉한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였습니다.
한양도읍을 내려다 보고있는 비석과 서울을 아울러 담은 풍경입니다.
남서방향의 풍경입니다.
비봉에서 북동방향(의정부)을 담은 풍경입니다.
비봉의 터줏대감입니다.
비석에 앉아 있다가 잠시 옆으로 비켜서 자리를 내준 비석지킴이입니다. 고마워서 담았습니다.
비봉을 내려와 사모바위로 가는 길입니다. 이 능선은 탕춘대성이 북한산성으로 잇기 위해 성벽을 쌓았던 능선으로 지금은 산행길이 되어 있습니다.
인왕산 동북쪽 한양도성에서 갈라진 기차바위 능선에서 시작한 탕춘대성은 이곳 북한산 비봉에서 소멸되는데 에초에 보현봉-형제봉-북악산을 잇는 능선에도 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숙종의 사망 등 정치적 이유로 시행하지 못한 채 지금의 성곽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사모바위, 紗帽라기 보다는 고려 때 남자들이 머리에 쓰던 頭巾에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주말이면 등산객으로 도떼기시장처럼 북적이는 이곳이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없이 고요한 적막만 흐릅니다. 저로서는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요 주변입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고 돌아서 하산해야할 시각입니다. 앞을 바라보니 비봉과 향로봉이 단아한 모습으로 어깨를 견주고 있습니다. 탕춘대성에는 기대했던 刻字城石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십여 년 전에 올랐던 비봉과 향로봉, 오늘은 향로봉은 엄두도 못 내고 비봉만 오르고 하산 길에 들어서자니 왠지 마음 한 곳이 허전합니다. 그때 그 시절 함께 오르던 산우들이 불현듯이 그리워집니다.
비봉 못가서 좌측 승가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구기동 이북5도청 방면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2019년6월25일 오후 5시20분.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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