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12책 12권(太白山書庫本)에 의하면 숙종8년(1682년) 강화유수(江華留守) 조사석(趙師錫)이 문수산성 쌓기를 청하니, 이에 숙종 임금이 "강화도의 성과 문수산의 성은 같이 쌓도록 하라 그리고 삼군부(訓練院, 御營廳, 禁衛營)에서 힘을 합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하여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숙종20년(1694년)흉년이 들어 축조공사가 중단 되었다. 기약 없이 그대로 방치되면서 쌓았던 성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숙종 38년(1712년) 문수산성을 보전하기 위해 통진읍을 문수산성 내로 옮기자는 결정이 내려졌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다시 숙종44년(1718년)에 김포를 통진읍에 이속시켜 문수산성 수비에 협력하게 하였다. 축성된 둘레가 5,529보, 여장이 2,173첩에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1명,군관161명, 사병56명, 돈군6명, 수첩군80명, 모입군 72명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에 의해 결정된 문수산성 수축은 순조12년(1812년) 강화유수 홍의호가 성의 남문(喜雨樓) , 서문(控海樓), 북문(取豫樓) 등 3곳의 성문을 수축하였다. 문수산성은 정상부(將臺)를 기점으로 3개(남측, 중앙, 북측)의 능선이 서쪽으로 뻗어 염하에서 멈추어 마치 포크 (fork)형의 능선을 이루었는데 남측과 북측 두 능선에만 성곽을 쌓아 항아리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남측 능선 끝에 남문(喜雨樓)를 북측 능선 끝에 북문(取豫樓)을 세우고 다시 성벽은 서측 염하 해안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중간 해안선에서 남,북의 성벽은 이어져 서문控海樓)을 세웠을 것입니다. 해안선을 따라 축조된 서측의 성벽과 서문은 모두 유실된 상태입니다. 산성 남측 능선에서 산성 내부를 가로질러 서측 염하 해안까지 뻗은 중앙능선이 산성 내부를 문수골과 산성포로 양분하고 있는데, 문수골에는 정상부에서 발원한 수계가 모여 이루어진 옛 이름 馬潭으로 여겨지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능선부 바깥 성벽은 수직으로 쌓은 편축성이고 안쪽은 흙으로 채운 내탁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유실된 서쪽 평지구간은 안팎으로 성벽을 쌓은 협축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며 3개의 수문과 나루(갑곶나루)를 두었으며 나루에는 석축을 깔아 축조한 선착장이 있습니다, 서문(控海樓)의 위치도 이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문수산성은 문수산정상에 장대를 세우고 가운데 능선을 감싸고 있는 좌우 능선에 성을 쌓아 마치 말굽 징 모양이며 그 안 성내를 1개의 능선이 양분시켜 생긴 문수골과 산성포 계곡을 모두 감싸는 포곡식산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문수산성 약도》
남문(喜雨樓)은 발굴조사에서 성문 기단석이 발견되어 六축부를 복원하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누각을 올렸습니다. 사방으로 문루 여장을 둘렀으며 좌우에 협문을 두었습니다. 남문은 염하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들이 통행했던 문으로 강화도의 관문 역할을 했던 문이었습니다. 남문, 북문 주변 성벽은 화강암을 사용하였습니다.
남문에서 내려다본 강화대교
문수산 탐방로에는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무성하여 산책을 겸한 문화답사와 상큼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고 산성따라 가는 도중에 펼쳐지는 경관은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줍니다.
남문을 지나서 문수산 탐방로를 따라 100m 정도 가다가 시작되는 성곽 바깥, 여기서부터 성벽답사를 시작했습니다. 성벽은 8천1백만 년 전의 지각변동으로 하천이 솟아올라 이루어진 문수산 퇴적암을 거칠게 다듬은 성돌로 쌓고 틈새는 굄돌로 보강하였습니다.
바깥 성벽은 수림이 무성하여 살펴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성곽 언저리는 그냥 방치되고 있어 잡목과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악전고투 끝에 성벽 위로 올라서서 바라본 성곽의 모습입니다.
첫 번째 전망대입니다.
가시덤불과 나뭇가지와 전쟁을 치른 몸을 잠시 쉬며 담은 풍경입니다. 염하에 고깃배 여럿 한가롭습니다.
전유리 포구
다시 바깥성벽 답사를 시작하였으나 무너져 내린 성돌들이 산재한 곳에 풀과 나무들이 무성하고 하단에 남은 성벽은 무너져 내린 위쪽 성벽 잔해에 묻혀 도저히 바깥성벽을 살펴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성벽 위로 올라와 거쳐 온 성벽바깥 수풀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저 속을 소득도 없이 거쳐 온 일이 꿈만 같습니다. 저 수풀을 걷어내고 무너진 성벽 잔해를 정리해야 그나마 남아 있을 뭔가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문수산성 부속시설 》
문수산성은 문터 일곱 군데를 비롯해서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 성벽에 근접하는 적을 감시하고 취약점에 해당하는 곳에 성벽을 연결하여 설치한 用道 등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돌로 쌓은 대규모 산성입니다. 성 밖에는 서문인 공해루와 연결되는 甲串津 (갑곶나루)선착장 석축로가 있고 城안에는 文殊寺가 있습니다. 성안에 文殊鎭 水門, 무검정, 제승당, 南庫, 內舍, 鎭舍, 田大同庫, 馬潭 등의 군사 시설이 있었으며, 남문의 동남쪽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봉 쉼터 팔각정》
문수산 중턱에서 개성 송악산을 마주보고 앉아 있는 정자입니다.
쉼터에서 내려다보니 조강을 동구 앞에 두고 있는 문수골에는 정상부에서 발원한 수계가 모여 이루어진 馬潭(옛 이름)으로 보이는 저수지가 내려다 보입니다. 또한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은 갑곶나루와 선착장 석축路가 있는 곳입니다.
답사를 하다가 잠시 갈증을 해소하던 정자와 성벽 사이에 있는 평상 쉼터입니다.
다시 성벽으로 다가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근래에 복원한 구간이 보입니다. 성벽 바깥으로 길도 보이니 살펴보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대로 복원이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만 하면 이제까지 가시덤불과 잡목 속에 꼭꼭 숨어 있어 찾아내지도 못하고 찢어진 옷과 상처 난 것을 보상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文殊山城의 城壁》
문수산성의 성벽은 鹽河 앞 남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윤곽이 확인됩니다. 북문에서 정상부로 향하는 지점에는 깬돌을 이용하여 세운 성벽이13단까지 남아 있고, 정상부에서 남문 방향으로는 암석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쌓았는데 성벽 구간별 쌓은 방법의 차이 또는 고쳐 쌓은 시기별 차이를 보입니다. 북문쪽 성벽은 40~60cm 크기의 자연석과 깬돌을 수평으로 맞물려 쌓았으며, 석재 사이의 틈에는 5~12cm 크기의 쐐기돌을 이용하였습니다. 남벽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2007년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한 결과 기본적인 양상은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9~14단, 높이 250~300cm 내외로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성벽 곳곳에는 銘文이 남아 있어 찾아온 보람을 느낍니다. 숙종 때 성돌에 새긴 刻字는 성벽 구간별 명칭과 그 구간 성벽 쌓기에 동원된 군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과 석수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二牌》
드디어 이곳 문수산성에서 처음으로 각자를 대하는 순간입니다. 牌는, 축성구간을 말하며 二牌는 두 번째 築城區間을 뜻합니다. 한양도성 흥인지문 옆 낙산자락 성곽에 새겨진 것과 구간 분류 호칭이 같습니다.
이곳 복원한 성벽에는 '牌'字가 새겨진 刻字城石을 여럿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좀 전 우려했던 대로 복원을 하면서 구간을 표시한 각자성석을 본래의 위치에 배열하지 않아 사이 간격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산성을 쌓은 석재는 문수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퇴적암으로 사암, 역암, 이암 등이며 보시는 것처럼 자갈 섞인 콘크리트 형상입니다.
三牌와 四牌 두개의 각자성석이 일정한 구간 간격없이 위 아래에 붙다시피 위치하고 있습니다. 복원 당시 槪念없이 배치한 것 같습니다.
四牌
지면에 바로 놓인 각자성석 三牌(잡초에 듬성하게 가려져 있음 )가 놓여 있고 한 줄 건너 셋 째 단에 四牌 각자성석이 보입니다. 두 각자성석이 있는 위치와 함께 길게 평행을 이루고 있는 성곽과 길을 담은 정경입니다.
《南衙門 (暗門)/남아문(암문)》
문수산성文殊山城에는 南門(喜雨樓) 西門(控海樓) 北門(取豫樓) 東亞門(暗門) 西亞門 南亞門 北亞門 7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과 북문 그리고 2개의 암문인 남아문과 동아문만 있습니다. 여기서 각 아문은 비밀통로 暗門을 말합니다.
暗門인 南亞門의 안쪽은 평거식으로 축조하고 城 바깥쪽은 홍예문으로 동측 성벽은 면석을 6~7단 정도 쌓아올려 견고하게 축조 되었습니다. 홍예기석은 3단을 두었고 홍예돌은 좌우로 3개씩 배치하였고 그 중앙에 선단석으로 마감하였으며 선단석의 위쪽 부형무사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수축하면서 새로운 석재로 대체하였습니다.
안쪽 평거식 성돌은 멀쩡한데 바깥쪽 홍예문 주변은 彈丸이 남긴 상처가 어지럽습니다. 저 彈痕이 프랑스군에 의한 것인지, 6.25전쟁의 상흔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당시 조선의 백성을 지키고자 또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한국을 지켜내고자 守城에 사력을 다했을 병사를 대신하여 받은 총탄의 흔적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합니다.
南亞門의 성 안쪽의 모습입니다 바깥쪽 홍예식과 다르게 평거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남한산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五牌 옆에도 글자가 있는데, 일부가 剝離되어 판독이 어렵습니다.
정상으로 뻗어 있는 성벽은 장대까지 복원이 되었는지 보기에 성곽이 또렷하고 주변이 정리되어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줌으로 당겨본 '장대'의 모습입니다. 장대라기보다는 성안에 또 다른 작은 城砦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부 구간은 성석을 다른 석재로 사용하여 구분이 되는데 이는 후대에 여러 차례 保築하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성곽 밑단에 각자성석이 보입니다.
築城한 인원수와 신분을 알 수 있는 刻字城石입니다. 五牌 末端 / 石手 六名 軍 七十二名 / 5구간 끝나는 곳 / 석수 6명과 병력 72명이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6구간을 표시한 것입니다. 한양도성 각자성석에서 각 구간의 始築地點을 태조 때는 音字를 , 세종 때는 구간은 천자문 順番으로 시축지점은 始字를 새겼으며 숙종 때에는 숫자에 牌字를 사용하였습니다.
(?)패 상말 지기 봉달 / 〈(?)牌 上末 之記 逢達〉
牌字 위에 숫자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은 떨어져 나갔으며 '패' 일부도 유실되었습니다.
위의 두 각자성석이 곧추세운 큰 성돌 좌우에 있는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좌측에는 '六牌', 우측에는 '牌 上末 之記 逢達'이라는 刻字가 큰 성석을 사이로 새겨진 것으로 볼 때 6패의 시작점과 7패의 끝 마무리 점이 이어지는 곳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두 개의 각자성석이 있는 위치를 좌측 하단에 두고 장대를 담아 찍은 풍경입니다. 복원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각자성석과 장대를 아우러 담은 정경입니다.
《각자성석/刻字城石 》
성벽축조 구간은 八角亭 쉼터에서부터 將臺址까지 一牌에서 시작되어 7패까지 확인할 수 있었고 복원되지 않은 위치에서 "十三牌 康熙三十二年 八月 日 後司中哨官 朴世雄 一旗摠 姜成吉 書記 吳成安 石手 宋德觀 宋无昌 李侖玉 金生男" 라고 새겨놓은 刻字城石을 볼 수 있었습니다. 康熙32년은 중국 청나라 年號로서 聖祖32년이며 조선 숙종19년(癸酉年1693년)입니다. 따라서 이곳 성축은 숙종 8년(1682년)부터 시작하여 중단과 시작이 반복되며 숙종44년(1718년)에서야 완성되었으며 순조 12년(1812년)에 강화유수 홍의호가 문수산성의 남문(희우루) , 서문(공해루), 북문(취예루) 등 3곳 성문에 누각을 올렸습니다.
정상으로부터 100m 정도 되는 곳에서 복원공사는 쉬고 있습니다. 이제 탐방이 산행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성벽만 쳐다보며 오르다가 뒤돌아서서 바라보니 이제까지 타고 오른 성벽은 마을로 내달리고 황토 빛에 황반처럼 물들었던 동공은 강물과 산과 파란하늘에 화들짝 놀라 쟁반만큼 커집니다. 이곳부터 외곽 성벽은 무너지고 잡목과 수풀이 무성하고 더 이상 살펴볼 수 있는 정황이 아니며 장대 바로 밑인 이 자리까지입니다. 이제 성벽안쪽 옆 탐방로를 100m 정도 이용해 將臺로 오릅니다.
장대로 오르는 길은 제법 산행의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60m나 기쁨을 느겼을까 이내 그 즐거움 여운만 남기고 사라지네
《장대/將臺》
정상에서 바라보는 문수산은 서울의 첫 번째 관문이며 舟橋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또한 분단의 최전선이어서 북한과 지척에 대치하고 있으며, 계절 따라 북녘 땅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면밀히 조망할 수 있습니다.
《文殊山城 將臺址》
해발 376m의 문수산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강화입구를 지키고 한양도성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숙종 때 돌로 쌓은 산성으로 고종 3년(1866년)에 치른 병인양요의 전쟁터였습니다. 이곳은 문수산 동쪽의 가장 높은 지대로 조선시대 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군사를 지휘하던 將臺가 있던 터에 복원한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옛 지도를 보면 문수산성에 남문(喜雨樓), 서문(控海樓), 북문 등 3개와 비밀통로인 아문 4개가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이 가운데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병인양요 때 사라졌는데, 지도에는 공해루의 위쪽으로 성내의 시설물들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에 병영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文殊山 頂上 標石/문수산 정상 표석》
문수산은 김포의 북서쪽 끝자락 조강과 염하가 만나는 지점으로 강화대교를 건너기 전에 우측에 불쑥 솟아 있는 산으로 비솔산, 비아산, 통진산 등으로 불렸으며 우리나라 13정백 중 하나인 한남금북정맥의 한 갈래인 한남정맥 끝단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376m에 달하는 산입니다.
김포평야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 정상에 오르면 서쪽은 염하를 사이에 둔 강화도, 북쪽으로는 조강을 사이에 둔 북한의 개성 송악산, 동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둔 파주와 고양시의 사계절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김포의 금강'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문수산 지질은 사암, 역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礫巖의 역은 사암, 규암, 화강암, 편마암, 이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데크에서 바라본 장대와 정상碑. 문수산(376m) 정상 표석과 將臺.)
문수산 將臺는 문수산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해와 한강 일대 뿐만 아니라 서울 주변의 모든 산과 개성의 송악산이 한눈에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군사를 지휘하던 곳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6.25 전쟁 이후 군용 헬기장으로 사용되면서 유적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2009년 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암반을 해체하고 발굴조사한 결과 장대의 기단부 석렬(돌을 쌓아 올린 구조물)과 門址 한 곳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 철제 말 등 21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2017년 김포시에서는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전체면적 약 25.7㎡의 장대를 복원하였고 유적 아랫부분에 남아 있던 돌로 쌓은 부분과 벽돌로 쌓은 부분을 정비하고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將臺는 팔작지붕 건물에 마루를 깔아 놓은 정자식 건물입니다 장대 주변은 한개의 문을 둔 성가퀴(女墻)을 갖춘 성벽으로 둘렀습니다.)
장대로 들어서는 옹성문을 통해서 옹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성벽은 장대를 마주하고 있는 봉우리 너머 東衙門으로 이어집니다.
장대에서 구름 속에 아스라이 보이는 開城 松岳山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한강 하구를 바라본 풍경입니다. 漢江이 臨津江을 아우르고 祖江과 합수하여 다시 禮成江을 합수해서 서해로 흘러드는 전경입니다. 이 강들이 쓸어온 모래들이 河海같은 강안에 섬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뽀얀 연무로 인해 아련합니다.
강화도는 지정학적으로 서울을 기점으로 한반도 중심부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김포군과 더불어 내륙으로 통하는 요충지대로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 하류를 경계로 북한의 연백군과 개풍군이 인접해 있고 동쪽은 김포와 염화를 사이에 두고 무수한 포구와 나루를 탄생시켰습니다 예로부터 조강은 고대 삼국 이전 원삼국시대부터 중국 더 나아가 서역의 문물 교역이 들어오던 항구였습니다. 서쪽은 서해바다, 그리고 남쪽은 대규모 해안의 갯벌을 지나 웅진군의 여러 섬들과 인천의 국제공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성강 하구지역은 개성공단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으로 위치에 따라서는 맨눈으로 개성공단이 보이는 요충지입니다. 高麗 時代에는 서해에서 예성강 하구 碧瀾渡를 통해 아라비아의 상선을 비롯하여 중국의 배가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구 였습니다. 고려자기와 개성인삼 靑銅佛具 등 뛰어난 문화와 문물을 만방에 알렸고 조선 세종 원년 6월에 상왕 태종과 세종께서 豆毛浦(옥수동)에서 대마도 정벌 출정식을 거행한 후 이종무 삼군체찰사를 비롯한 8명의 장수 도체찰사가 승선한 전함이 이곳 조강을 거쳐 충청, 경상, 전라수군 병선 집결지인 거제도로 가던 뱃길이었습니다.
6.25전쟁이후 65년간 방치하다보니 지금은 예성강 하구도 토사가 쌓여 준설이 요구되며 이와 같은 상황은 한강이나 조강의 하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풍경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남북으로 갈라 놓은 이념은 한반도의 중심이요 심장을 동맥경화라는 重病에 들게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이 된다면 이곳에 쌓인 모래를 퍼다가 이북 5도 재건에 쓰고도 남을 것입니다.
일산 너머 북한산 방면의 풍경입니다.
김포와 강화 사이 수많은 포구와 나루를 아우른 조강과 염하가 흐르는 遠景입니다.
장대에서 바라본 강화대교 옆 김포와 강화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염화를 바라본 풍경입니다.
강화대교를 중심으로 바라본 풍경입니다. 그 너머 좌측 멀리 진강산, 정면에 혈구산, 우측에 고려산이 보입니다.
정면으로 진강산을 좌측에 마니산이 보입니다.
장대 옹성문을 나서기 전 옹성문과 바깥 풍경을 아울러 바라본 풍경입니다.
장대를 나와 바라본 한강하구와 파주방향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임진강을 합수한 한강물이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조강은 조선시대에 큰 배들이 다닐 수 있는 물길이며 조운선이나 큰 외국 상선들이 드나들던 강입니다. 지금은 남북 접경지역이 되어 군사지역에 포함되어 오래토록 방치되어 토사가 쌓이고 항구와 뱃길이 끊긴 서울의 중요한 길목입니다.
장대지(將臺址)는 문수산 정상부에 위치하며 둘레가 약 70m 폭20m에 이르는 원형으로 여장을 갖춘 성채로 서쪽에 홍예문을 두었으며 그 안에 단을 쌓고 동서남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누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뒤돌아보니 단아하고 아름다운 장대 그림처럼 앉아 있네.
정상봉우리 장대와 그에 버금가는 또한 봉우리 사이 고개에 데크로 커다란 평상처럼 쉼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쉼터를 가로질러 성벽을 따라 동아문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마주보던 봉우리에 올라서니 또 한 봉우리 나를 손짓으로 부릅니다. 임진강과 합수한 한강이 방대해진 몸짓으로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봉우리 너머로 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 험하지도 높지도 않은 내 고향 압구정 뒷동산 같은 봉우리를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고향 동산에 오르면 무쇠막강이 저렇게 파란하늘을 머금고 푸르게 흘렀지요,
봉우리로 오르는 무너진 성벽위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나를 반겨줍니다.
꽃이 시들거나 낙화되지 않고 그 모양 그대로 나무처럼 굳어집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꽃을 보다가 방금 내려온 봉우리를 올려다보니 전망대만 덩그러니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망대는 40대 세 분 자매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기에 전망대를 올라가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왔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마주하던 봉우리에 오르고 보니 성곽은 뱀처럼 앞 봉우리 능선을 타고 오르고 그 너머 또한 봉우리 너머 임진강과 합친 한강의 방대한 모습입니다.
봉우리에는 성벽이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되어 있습니다.
낮은 봉우리로 오르기 전에 정비된 성축 아래 암문이 있는 듯하여 내려가 보았습니다.
《동아문/東亞門》
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동아문은 평거식 암문으로 선단석에 접한 내 · 외측 성벽은 화강암 재질의 석재를 가공한 마름돌을 사용하였으며 턱물림으로 면석 간의 빈틈이 없도록 치밀하게 축조되었습니다.
《동아문/暗門》
성 바깥쪽 모습입니다. 안팎의 형태가 같은 평거식 장방형으로 축성된 암문입니다. 성문 주변 성벽의 일부 구간은 화강암으로 마름돌 바른층 쌓기로 축조되었으며 층이 어긋나는 지점에는 턱물림하여 틈새공간이 없도록 복원하였습니다. 1964년 8월29일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다시 성곽을 따라 북문으로 가기위해 성벽 위로 올라서서 동아문 위 성곽길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동아문은 문지정면이 지반침하로 훼손되어 상부 引放石 등이 유실된 상태로 있던 것을 2014년에 흩어져 있던 잔존 석재를 수습하여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4개의 아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홍예식 남아문과 평거식 동아문 2암문만 남아 있습니다.
앞 봉우리는 포곡식 옹성입니다. 한강과 조강이 합수되는 두물머리와 두물이 합수되기 전의 물줄기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성벽은 옹성에 오르기 전의 이 낮은 봉우리에서 능선의 우측(복원된 성벽)으로 앞 봉우리에 오른 후 봉우리(옹성)를 감싸고 다시 좌측(복원되지 않은 성벽)으로 능선을 타고 이 자리에서 우측 능선을 거쳐 북문으로 이어집니다. 북문에서 성곽은 다시 조강을 끼고 거슬러 올라가다 중간에 서문을 거쳐 남문으로 이어집니다.
옹성의 정상모습입니다. 안쪽 한곳에 동절기에 눈보라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지하 돌방시설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문수산성 북쪽 방향의 옹성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漢江이 臨津江을 아우르고 祖江과 합수하여 다시 禮成江을 합수해서 서해로 흘러 갑니다. 이 강들이 쓸어온 모래들이 河海같은 강안에 섬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뽀얀 연무로 인해 아련합니다.
옹성에서 서북방향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한강이 좌측 조강과 합류하는 모습입니다. 이 옹성에서는 염하를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배들을 분별하고 동태를 살펴볼 수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병인양요 때 염하로 들어온 프랑스 함대가 집중적으로 포격한 곳도 북쪽 성벽과 서쪽 성벽이었기에 성벽이 파괴되어 염하 건너 갑곶진으로 이어주던 갑곶나루까지 이어졌던 성벽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옹성 앞 끝 봉우리입니다. 봉우리 너머 구름 뒤로 송악산줄기가 아스라이 가물거립니다. 성곽은 앞에 봉우리를 남겨둔 채 이 봉우리를 둘러쌓아 옹성을 마련하고 다시 되돌아 바로 뒤 낮은 봉우리에서 서쪽 능선을 타고 북문으로 이어집니다.
일산과 파주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입니다.
발길을 돌리기 전 바라보니 이정표가 甕城의 파수처럼 북녁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종 때 이곳을 사수하던 병사처럼...
거쳐온 장대 방향으로 뒤돌아본 풍경입니다. 옹성에서 되돌아가는 복원되지 않은 우측 성벽은 좌측 복원해 놓은 성벽 끝머리에서 우측 소나무 있는 서쪽방향 능선을 타고 북문으로 이어집니다.
방금 내려온 옹성으로 중년 부부가 오르고 있습니다. 지어미는 복원된 성벽을 따라 오르고 지아비는 복원되지 않은 성벽 안쪽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옹성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무너지고 유실된 채로 그 윤곽만 남아 있습니다.
능선 따라 북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모습입니다. 프랑스 함포에 무너져 내린 것을 수풀이 덮고 있습니다.
북문으로 내려가는 능선에는 잡석이 널려 있습니다.
하산길 앞 봉우리는 좌우측 지형에 따른 취약한 성벽을 접근하는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원할 목적으로 능선에서 돌출된 봉우리에 성벽을 내어 쌓은 雉城입니다.
雉는 망대처럼 전망이 탁월하고 좌우 성벽을 살펴볼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능선에서 내려다본 치 아래 염하의 정경을 줌으로 당겨본 모습입니다. 鹽河 양 물가에 철책과 초소가 목격됩니다.
문수산성 바깥으로 펼쳐진 한강과 조강의 하구 주변 풍경입니다.
둘려진 산과 강물 그리고 마을이 조화를 이루며 한 폭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전경입니다.
문수산성 옹성 봉우리와 그 앞 봉우리 사이로 보이는 먼 산봉우리들을 줌으로 당겨서 담은 풍경입니다.
북쪽 성곽 중 쉽게 목격할 수 없던 성벽의 남아 있는 일부구간이 반갑게 다가와 담은 모습입니다. 이 성벽 외성곽 성석에도 각자성석이 있겠지만 현재로는 답사가 어렵습니다.
성벽 옆 길의 모습입니다.
성벽위에서 염하 건너편 강화를 아울러 담은 풍경입니다. 한쪽에 강화대교가 보입니다.
문수산성 탐방 내내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풍경을 보고 또 보아도 질림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강물이 옮겨온 삼각주가 논이 되었습니다.
염하 건너 아늑한 곳에 穴口山과 高麗山이 정답습니다.
이제 북문까지의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강화대교가 지척으로 보이고 앞 능선에 늘어선 성곽의 흰 등줄기도 길지 않은 느낌입니다.
문수산성 내 서너개의 길잡이 중 막내가 아닐까 싶은 말끔한 이정표가 거리는 알려주지 않아 아쉽습니다.
남문을 출발해서 남아문과 장대를 거쳐 동아문을 지나 북문으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나무로 세워놓은 이정표에서 봅니다. 이제 북문까지는 800m 거리 임을..
이제 저 봉우리에 올라서면 그 아래 북문이겠습니다.
끝 봉우리에서 바라본 능선상의 북쪽 성곽입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이름 모를 자줏빛 분홍색 꽃이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앞 물길을 염화라고 기술했지만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조강인지 염하인지...
북문을 6~70m 거리에 두고 복원된 성벽을 살펴 보았으나 각자성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염하(祖江?)를 측면으로 정면을 남으로 향하고 있는 북문의 동쪽 측면 모습입니다. 이 북문에서 성곽은 갑곶나루까지 이어졌던 것이지요.
누각 안에는 홍예문 천장부분인 가운데만 널마루를 깔아 놓았습니다.
지나온 복원된 성곽의 모습입니다.
복원된 북문(取豫樓)성 안쪽 모습입니다. 복원 전에는 무사석 일부와 홍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3~1994년에 홍예 및 육축부를 보수하고 정면3칸 측면2칸에 팔작지붕의 문루를 세우고 사방에는 문루여장을 둘러 복원하였습니다.
사적139호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두 줄기 능선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 내에는 정상에서부터 함께 뻗어 내린 또하나의 산줄기를 포함하여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감싸 안고 해안지대에 이르러 해안을 따라 남쪽 성벽 끝머리인 남문과 북쪽 성벽 끝머리인 북문 사이에 협축식 성벽을 쌓고 서문을 세운 산성입니다. 이후 순조12년(1812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성벽은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더욱 튼튼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공격할 수 있는 성가퀴(女墻)를 둘렸 쌓았고 남문(喜雨樓) , 서문(控海樓), 북문(取豫樓)을 세웠습니다. 총길이 6.123m 였으나 현재는4.640m입니다. 북문과 남문 사이 서쪽 성벽은 서문과 함께 모두 사라졌습니다.
북문 옆 꽃이 핀 아름다운 뜰이 있는 있는 집입니다. 이 길로 들어가면 馬潭으로 추측되는 저수지가 있는 문수골입니다.
해변쪽에는 남문(喜雨樓)에서 북문 방향으로 3개의 수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문수골 앞 해안의 풍경입니다.
염하 건너 강화도의 甲串鎭이 있는 곳입니다.
왠지 이곳의 철조망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안보를 위한 시설이기 때문이겠습니다.
《馬潭》문수골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가두었던 '馬潭'으로 불리던 저수지로 보이는 제방이 보입니다.
해변쪽에는 서문(공해루)에서 북문 방향으로 3개의 수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고 물을 가두는 '마담'으로 불리는 저수지가 남아 있습니다.
제방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다 못 찾아 옛 이름 馬潭으로 추정되는 저수지를 살펴볼 수가 없었습니다.
문수골 마을에서 보았던 해당화 참 고왔습니다.
뽀얀 산목련처럼 고운 꽃인데 꽃잎이 4개입니다.
문수골에서 백여m 지났을까! 집 몇 채 있는 곳에 안내판이 있습니다. "갑곶나루"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267-8번지를 소재지로 하는 갑곶나루의 명칭은 삼국시대 초까지 전해지던 '갑비고차(甲比古次)가 후대에 변천한 것이라합니다. 전설에는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거할 때 이곳 염하의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서 병사들이 갑옷을 벋어서 쌓아놓고 건넜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고도 합니다. 옛 지도를 보면 갑곶나루가 문수산성의 서문(控海樓)과 연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갑곶나루를 산성나루라고도 합니다. 강화 쪽의 나루도 갑곶나루라고 불리는데 18~19세기 지도에 문수산성 갑곶나루와 강화도 갑곶나루를 연결하는 뱃길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의 지도에는 문수산성 서아문 쪽에도 강화로 건너가는 나루가 추가로 표기되는 등 다양한 뱃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강화도로 연결된 다리가 없던 시절 이곳이 강화로 건너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서구세력이 처음 침입한 곳이기도 합니다, 고종3년 9월 신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나루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때 문수산성의 주요 출입문이었던 공해루가 파괴되었고 공해루와 연결되는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만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 108호 갑곶나루는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도 갑곶리 사이 祖江을 오가던 나루입니다. 사지으로 보듯 석축로는 현재 김포쪽 선착장에 남아 있는데 폭12m, 길이40m, 앞면의 깊이 1.2m 규모로 직사각형 화강석으로 양쪽의 갓돌을 축대처럼 가지런히 쌓고 안쪽은 네모난 화강석으로 불규칙하게 채워 윗면을 고르게 하였습니다.
이곳 마을은 온통 꽃밭입니다. 길가나 집 담장 언저리나 마당에는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그대로 꽃동네입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꽃이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꽃밭의 꽃들과 철조망과 마을과 염하 그리고 조강과 도란도란 정담을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남문 원점에 이르렀습니다. 고맙습니다.
2019년 5월31일 오후, 꽃 피고 뭉게구름 한가로운 김포 문수산에서,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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