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한양도성. (창의문~숙정문)/漢陽都城 (彰義門~肅靖門) 』

鄕香 2019. 6. 5. 09:10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09시가 되어 간다. 어제 무의도를 다녀와서 늦잠을 잤나 싶다. 밖을 보니 흐렸지만 비는 올 것 같지 않은데 휴대폰으로 날씨를 검색하니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한다. 자주 오기도 싶지 않은 서울에서 오늘 어디를 갈까 생각하니 박물관이 경복궁 내에 더부살이하던 시절 인근에 있어도 늘 바라만 보던 백악산과 한양도성을 둘러보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강동역에서 5호선 전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와 청와대 뒤 자하문을 향해 가는 길가에서 낯익은 건물들을 보며 감회가 새롭다. 인근에서 30년을 근무하면서 이 일대 주변을 손금 보듯 꿰고 지냈으니 畵廊이나 음식점 어느 것인들 철 따라 변한 모습인들 눈에 익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스라한 심경으로 주변 건물들과 눈도 맞추고 대화도 나누며 도달한 이곳은 청와대 옆 궁정동에 자리한 조선 후기 세도가 安東 金氏를 있게 한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의 집터였다.




김상헌은 문신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형조ㆍ예조ㆍ공조판서ㆍ우참찬ㆍ대사헌 등 중직에 두루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석실로 돌아갔다.  조선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에서 君臣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물리치자 청나라 태종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 하였다.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하자 청음(淸陰)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 갔으며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도 척화와 항전을 주장하였고 그는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뒤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에 의해 世子를 인질로 보내는 것을 반대했고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 지은 항복 국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인조의 물음에 “천도()를 믿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청음집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1637년 1월에 김상헌은 죽음을 결행하기도 했다. 엿새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풀어주어 살아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 거의 죽을 뻔한 것이다.

그달 그믐, 인조는 성을 나왔고 항복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가장 큰 굴욕이었다. 척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67세의 노대신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청을 배격한 그는 인조 18년(1640년)11월에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에 의해 심양으로 압송될 때 도성을 지날 쯤 인조는 다음과 같은 어찰을 내려 그를 위로 하였다.

"卿은 선조()의 옛 신하로서 나를 따라 함께한 지 역시 여러 해가 되었다. 의리로는 군신 사이지만 정리로는 부자와 같다. 뜻밖에 화란이 터져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내가 현명하지 못한 소치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껄끄러운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했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해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바란다." 이에 

김상헌은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끝내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라고 화답하였다. 이후 귀환되어 다시 석실로 내려가 있을 때 인조 24년(1646년)3월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무려 32번이나 사직하여 한직으로 물러났으며, 효종이 1649년 5월 즉위하자 다시 그에게 좌의정을 내렸으나 끝내 固守 固辭하였다. 그 대신 10월에 효종을 알현하여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 대사헌 김집(金集)을 천거하였다. '崇明排淸'하여 신의를 절개로 삼은 청음 김상헌의 지조가 당시 政世에 옳고 그름을 떠나 신의를 중히 여겨 처신한 것은 높이 사고 싶다. 노대신은 효종 3년(1652년) 6월25일 82세로 임종하여 석실의 선영에 모셨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지금의 남양주시 미금 수석동에 세워진 석실서원을 비롯하여 여러 서원과 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에 모셔졌고 효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이 시비를 보면 병자호란 당시의 참담한 실정을 여실히 짐작할 수 있겠다.

  「참고 문헌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선비'2002년 현암사, '한국한시작가연구'9 2005, 정옥자.



《 최규식 경무관 》

1931년 9월9일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한 최규식 경무관은 1961년에 경찰에 투신하여 1967년부터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19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파주 지역에서 남하 중이란 첩보를 접수하고 이를 막기 위해 경찰관들을 현장에 배치하고 지휘하였다. 무장공비 일행이 청와대 바로 옆(현재 청운실버센터 앞)에 이르렀을 때 최규식 서장이 그들을 검문하며 막아섰고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공비들이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적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면서 현장에서 순직하였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으로 공비들의 청와대 쪽 진행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었다. 그는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치안 책임자로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임무를 완수하였고, 이에 정부는 경무관으로 추서하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당시 일간지와 연일 매 시마다 뉴스를 통해 체험적으로 느꼈으니 눈에 선한 일이고 이 1.21사태로 인하여 나는 육군병사로 35개월20일이라는 다소 긴 국민의 의무를 마치게 되었다.   

 


《 정종수 경사 》

정종수 경사는 1935년 7월17일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60년 경찰에 투신하여 종로경찰서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21일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무장공비와 교전 중 순직하였다. 이에 정부는 경사로 추서하고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무장 공비의 침투를 몸을 던져 저지한 곳에 표석을 마련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이 바라보이는 이곳 자하문 고개에는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드높은 애국 충절을 기리고 있다.



창의문으로 오르는 길이다. 창의문 바로 위에 출입관리소가 있고 그곳에서 비치되어 있는 '북한산한양도성탐방신청서'를 작성하여 신청하면 표찰을 준다. 신청서 양식은, 이름, 생년월일, 주소, 휴대폰번호를 기재하는 정도로 간략하였으나 2019년 다시 와보니 신청서 작성 없이 표찰을 준다.

  



《 순성길 / 巡城道路 》한양도성을 따라 걸어서 서울 내 4개의 산 즉 백악산(白岳山), 낙산(洛山), 남산(木覓山), 인왕산(仁王山)을 잇고 흥인지문(興仁之門), 숭례문(崇禮門), 돈의문 터(敦義門 址), 숙정문(肅靖門), 4대문과 4소문인 광희문(光熙門), 소의문 터 (昭義門 址), 창의문(彰義門), 혜화문(惠化門)을 거치면서 주변의 다양한 문화 유산을 체험하는 길이 21km의 탐방길이다. 오늘 나는 자하문-백악산정상-청운대-백악곡성-숙정문-말바위-와룡공원-혜화문-낙산공원-흥인지문까지 탐방할 것이다. 안내도에서는 총7km에 4시간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진은 인왕산자락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도로로 인해서 단절된 흔적을 가름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 과정입니다.

  

 

『한양도성(漢陽都城)』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城입니다.

북악산(白岳)을 주산으로 우측에 인왕산(仁王), 좌측에 낙산(駱駝), 정면 남쪽에 木覓山(남산)이 옹성처럼 둘린 盆地 수도 한양을 품고 있는 4개의 산 정상과 능선을 아우르며 백악과 인왕 2곳에 曲城을 두었고 봉우리 요소에 5개의 雉를 구축하였으며 4방위에 4개의 큰 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을 세우고 그 마다 4개의 소문 광희문 · 소의문 · 혜화문 · 창의문을 두었고 그 사이 적정한 곳에 9개의 암문과 두 개의 수문 그리고 바라보는 앞 木覓山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築城한 전체 길이 약 18,600m에 평균 높이 6~8m의 한국 고유 축성기법과 집단의 장인들이 빗어낸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514년(1396~1910,)동안 그 원형을 보전하였으며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 별로 다른 돌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과 더불어 한국적 교육 건축 환경 생활문화를 발전해 왔으나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며 대문과 성벽이 훼철되었고, 6.25전쟁과 서울의 팽창과정에서 자발적 훼손으로 더욱 피폐되어가다가 1968년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도성 안으로 침투하는 1.21사태로 인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은 600년에 걸쳐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현재  돈의문과 소의문은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자하문(紫霞門)》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에서 만나는 곳에 있는 문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17년(1741년)에 다시 세웠다. 門樓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걸어 놓았다.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인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사적 제 10호 창의문(彰義門)은 종로구 부암동 249번지, 청운동 산1-1번지에 위치하는 작은 문(小門)으로 서쪽의 돈의문과 북쪽의 숙정문 사이 서북방향에 위치하는 작은 성문이다. 창의문은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졌으며 서울 북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창의문은 다른 문들과 같이 화강석을 이용해 홍예문으로 만들었으며 성문 위에는 목조 누각건물을 지었다. 이 문루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 17년) 1월21일에 다시 지은 것이지만, 서울성곽의 사소문 누각(四小門 樓閣) 중에 300년 가까운 역사를 갖는 유일한 小門이다. 



창의문 천장에는 구름과 어우러진 鳳凰 한쌍이 그려져 있다. 鳳은 수컷을 가리키며 凰은 암컥을 의미한다. 봉황 두 마리가 그려진 것을 쌍봉도()라 부르며, 예로부터 봉황은 용, 기린, 현무와 함께 사령(, 신령스러운 네 가지 동물)의 하나로 불린다.



창의문 안쪽 홍예문 정수리에 봉황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금껏 본 한양 성문에서 이와같이 홍예문 정수리에 봉황이 새겨진 문은 본 적이 없으니 창의문에서만 볼 수 있는 문양이라 하겠다. 다만 경복궁 광화문의 3개의 문에는 왕의 문인 가운데 제일 큰 문에는 발가락이 5개인 龍의 문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좌측 홍예문 정수리에는 蛟이, 우측 홍예문 정수리에는 螭龍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옛 유럽왕국 귀족의 문장 같은 느낌을 준다. 봉황은 일찌기 천자와 임금의 상징적 동물로 태어난 祥瑞롭고 吉한 상상의 동물이다.

"說文解字"에 의하면 鳳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목은 뱀,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 등 10獸의 특징을 가졌으며 오색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악집도 圖〉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주서 ≫에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다. 이처럼 봉황의 모양은 한결같지

않은 것은 상상의 동물임을 말하고 있다.

 

어찌됐든 상서롭고 아름다운 상상의 새로 인식된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산()을 지나 지주()의 물을 마시고 약수()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은 성천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고 그 궁궐을 봉궐()이라고 했으며, 천자가 타는 수레를 봉연()·봉여(輿)·봉거()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천자가 도읍한 장안()을 봉성()이라 하였고 궁중의 연못을 봉지()라고 불렀다. 이처럼 봉황이 천자의 상징이 된 까닭은 봉황이 항상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나타난다고 믿어 천자 스스로가 성군()임을 표방한 것에 연유한다.



《자하문(紫霞門)》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에서 만나는 곳에 있는 문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17년(1741년)에 門樓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걸어 놓았다.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인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하문의 측면 모습입니다. 창의문 우측 추녀 밑 공간으로 도로 건너편 성곽의 단절된 부분이 확인됩니다,  



창의문을 좀 지나서 뒤돌아보니 인왕산자락의 성곽과 창의문 그리고 백악산 자락의 성곽이 일치되어 이어진 듯이 보입니다.

  

 

창의문에서 바로 이어진 성벽 위 여장(女墻)의 모습입니다. 이 여장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뎌 낸 모습이 역력합니다. 돌이 크지 않고 다듬은 돌로 쌓은 구성으로보아 세종 때 축성한 것으로 짐작되며 구성미가 자연스럽고 고풍스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女墻은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물로서 여담, 여첩(女堞), 타(垜), 성가퀴 등으로도 불립니다.

 


가파른 층계를 오르다가 참시 멈춰 돌아다본 남산타워가 흐린 날씨로 인하여 시아에 마치 대륙간탄도미사일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백악산 정상을 바라보고 성을 끼고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오를만하다.

 


잠시 성벽 너머로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 일부를 바라본 풍경이다.



인왕산 매바위를 나뭇가지사이로 바라본다.



북한산, 수없이 오르고 올랐건만 바라볼 적마다 끌리는 매력이 있다. 흰 암벽을 이루고 있는 인수봉, 백운대의 미끈함과 웅장함 그리고 기암 괴석을 이루고 있는 경탄스런 아름다움에 철따라 채색을 달리하는 까닭도 있겠다.


 

창의문에서 백악산 정상까지는 네 번의 折曲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절곡 구간을 오를 적 마다 다음 절곡구간은 보이지 않는다. 첫 절곡 끝에는 紫北正道 비석이 있고 쉴만한 여분의 공간이 있고, 두 번째 절곡머리에는 돌고래쉼터가 있다. 세 번째 절곡머리에는 백악쉼터가 있으며 마지막 절곡 끝머리는 백악정상이다. 구간 거리는 대략 100m 정도이다.

 

 

백악산 구간에서 처음 맞이하는 암문입니다. 암문은 유사시 적의 눈을 피해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문으로 성곽 바깥에서 노출되지 않은 위치에 세웠습니다.

    

 

암문을 통해 바깥쪽 성벽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성곽 바깥으로는 군부대 철조망이 둘려져 있어 백악구간은 성곽 밖으로는 순성길이 없습니다. 다만 필요에 따라 일정 구간은 성곽 밖으로 순성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암문 바깥 모습입니다. 군사지역이라 보안에 위배되는 곳은 사진에 담지 않았습니다.

 

 

다시 성곽을 따라 백악정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일단의 계단이 잠시 멈춘 자리 옆 성돌에 刻字가 보입니다. 백악구간에서는 처음 목격되는 각자이며 210년 세월에도 각자상태가 양호합니다. 

 

"嘉慶十年 乙丑十月 日 看役 崔日成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가경십년 을축십월 일 간역 최일성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嘉慶 十年은 중국 淸代 仁宗의 年號로서 朝鮮 純祖 5년(1805년)입니다. 즉 순조 5년 을축해 10월에 최일성에게 공사를 맡겼고 이동한이 감독을 했으며 돌을 쌓는 책임은 석수 우두머리인 편수 용성휘가 맡았습니다. 창의문에서 가까운 인왕산자락에서 본 가경11년 병인十月의 각자상석에 각자된 같은 사람들이 같은 직책으로 1년 전에 이곳 공사도 맡았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紫北正道 - 자하문 북쪽 정의로운 길,  하지만 이곳은 산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는 힘든 길일세.


 

자북정도를 힘겹게 오르고 보니 두번째 각자가 쉬어가라는 듯이 눈에 들어옵니다. 직사각형 면을 다듬어 액자창을 만들고 그 안에 각자를 했는데 성돌 표면이 풍화되어 더러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성돌에 새겨진 글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嘉慶九年 甲子十月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가경구년 갑자 시월 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조선 순조4년(1804년) 갑자년 십월에 패장 오재민이 공사를 받고 이동한이 감독하였고 석공들 책임자로 전문석수 용성휘가 맡아 보수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위 각자성석 3m거리에 떨어져 있는 근안총구 아래 城石 面안에 정사각형으로 곱게 갈아낸 자리에 새겨진 각자 '丙子' 두 글자입니다. 이 때의 병자年은 조선 인종16년(1816년)입니다.

 


자북정도 비석 앞 모퉁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보니 창의문을 오른 후 처음으로 내리막 계단이다. 산행에서는 내려가면 그만큼 다시 올라가게 되어 있나니.. 삶의 여정 또한 그렇지 않던가! 그러니 살만한 인생이지..



근총안 아래 성돌 면석에 직사각형 액자 형태로 깎아내고 곱게 다듬은 그 면에 '辛酉十月日牌將 徐衛信 監官 劉孝澤 邊首 龍成焞(신유 십월 일 패장 서위신 감관 유효석 편수 용성돈)'을 새겨 놓았습니다. 조선 순조 원년(1801년)10월에 이 구간 성벽보수 책임관과 감독관 그리고 실무 책임자 등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돌고래 쉼터를 앞에 두고 제법 가파른 오름입니다. 오르면서 여장을 살펴보니 일부 계단에 가려 한 두자 글자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겹꽃이 핀 복숭아꽃 빛깔도 곱다. 한 다발 꺾는다면 뉘를 줄까 안겨주고 푼 마음 하늘의 미세먼지 만큼인데, 받아줄 사람 이제도 어제도 없고 또한 내일도 없을 것이다.



《돌고래쉼터》

안내판에 의하면 창의문에서 돌고래 쉼터까지 10분 거리라고 하던데. 성가퀴를 살펴보며 오르다 보니 족히 30분은 걸린 것 같습니다

 


돌고래쉼터에 앉아 토마토로 점심을 하면서 마주본 인왕산, 그 인왕산 치마바위에는 내 55년 전 少年期에 본 엄청나게 큰 한시가 각조되어 있는데, 글자 한 자의 크기가 대략 60cm가 넘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째서 경회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치마바위에 그렇게 큰 글자로 한시가 새겨져 있었을까! 조선시대에 새긴 것은 아닐 테지요. 왕궁의 경회루에서 빤히 보이는 가까운 곳에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성을 끼고 설치되어 있는 나무계단은 가파르다. 그래서 그런가! 돌고래쉼터에서 한 30m 정도 올라온 것 같은데 또 쉼터가 있다.

 

 

백악쉼터 앞에 잠시 멈춰 여장(女墻) 너머로 수없이 오르내려도 질리지 않던 북한산이 아련히 그립다. 제천에서 지낸 후 가본지 5년이 넘었으니..  



백암쉼터에 이르도록 가파른 능선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3번이나 바뀐다.

 

 

안내판을 보니 창의문에서 여기까지 650m이다 백악마루가 300m로 되어 있으니 대강 300m마다 쉼터가 있는 셈이다. 그만큼 가파르고 힘든 곳이겠다.



저 위 성곽이 꺾이는 곳이 백악마루이겠다.

 

 

백악마루 뒷면 모습입니다.

 

     

백악마루 오르기 전 뒤돌아보니 인왕산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줌으로 당겨본 모습입니다.   

경복궁에서는 고개를 서쪽으로 조금만 돌려도 인왕산이 잘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치마바위에 크게 새겨 놓은 漢字의 形體가 어렴풋이나마 보일 정도입니다. 치마바위에 무슨 그리 큰 漢字냐 하시겠지만, 1960년도 초여름에 친구와 처음으로 인왕산 치마바위에 올라갔다가 크기가 80×80cm 정도 되는 한자가 두 줄 縱帶로 길게 새겨져 있었고 좀 작은 한자도 서너 줄로 내리 새겨져 있었고 더 작은 한자 역시 여러 줄로 내리 새겨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인왕산의 치마바위 전설이 생각납니다. 중종은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의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보위에 오른 후 연산군과 관계가 된 처가 때문에 왕비에 오른 신씨를 폐위시켜야 했습니다. 금슬 좋았던 중종은 신씨를 잊을 수가 없어 가끔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기슭에 있는 신씨의 친가 쪽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신씨는 경회루에서 중종이 바라볼 때 눈에 잘 띄도록 궁궐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아 중종이 바위에 펼쳐 놓인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 싶은 마음을 삭였다는 치마바위 전설이 경회루와 관련하여 전해옵니다. 바로 그 치마바위에 경회루에서도 보일 정도로 큰 漢詩가 새겨(刻彫)져 있었습니다. 56년 전 내 어려서 보았을 때는 그 냥 '엄청 큰 글씨네.' 그저 신기하게 생각하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단경왕후 신씨와 연관 있는 詩가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어째서 경회루와 마주한 그 치마바위에 그렇게 엄청 큰 한자들을 새긴 것일까! 그 한시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인왕산은 개방되었지만 그 일부는 군 시설이 있어 출입이 여의치 못합니다. 수성동계곡 옛 옥인아파트 자리에서 바라보니 그 한자의 윤곽이 희미하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폐비 신씨는 신수근의 딸로 태어나 12살 나이에 고모부(姑母夫)인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훗날 중종)과 결혼하여 府夫人이 되었고 이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부부인 신씨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지만, 그녀의 아버지 좌의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으로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결국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반정군들은 역적의 딸을 왕비에 둘 수 없다하여 왕비 신씨(후일 단경왕후로 복위)도 7일 만에 폐비시켜 사저로 쫓아냈습니다.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고모인 연산군 부인과 함께 19세에 폐비가 되었으니 겨우 7일을 왕비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고모와 조카가 동시대에 모두 왕비에서 폐비가 되었습니다.

신수근(愼守勤)은 누이동생을 연산군에게 시집보내고, 딸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中宗)에게 시집보내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나 성공하면 딸은 왕비가 되겠지만, 누이를 생각하면 딸을 버려야 하고, 딸을 생각하면 누이를 버려야 함에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중종반정을 거절하므로서 결국 누이와 딸 모두 폐비가 되고마는 비극을 안고 말았습니다.



인왕산 매바위너머 안산인가?  연무인지 미세먼지인지 세상을 희뿌였게 뒤덮고 있어 희미하지만 보이는 산 사이 골마다 溪谷은 오간데 없고 아파트만 날로 늘어난다.



이제 오름의 정점인 백악마루가 20m 앞이라니 다온 셈이다. 여기서 창의문이 1.5km, 숙정문까지 1.6km라면 숙정문까지 반은 온 셈이다. 이제 가파른 오름은 없겠다. 



해발 342m, 높지 않은 산이지만, 단숨에 오르기에는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백악마루에서 동서남북 안 보이는 곳이 없다.



백악산 정상에서 북한산 방향.



  

백악산 정상에서 남산 방향



백악산 정상에서 남산타워를 줌으로 당긴 사진입니다.



성벽너머 뿌연 연무로 인해 희미하다. 바로 아래는 삼청동 골짜기 그 너머 성북동 골짜기 그 아래 낙산이겠지..



백악산 정상을 내려서며 내려다본 숙정문으로 이어진 도성벽과 활짝 핀 산벚나무 꽃이 어우러진 풍경이 황홀경이다.



우측으로 북악스카이웨이 한편에 팔각정이 보이는데 도성답사 길과는 다른 방향이다. 오늘 산벚꽃을 원 없이 본다.



여기에 올린 사진은 2회에 걸쳐 꽃이 만발 했을 때와 꽃이 지고 난 때에 탐방한 사진을 함께 정리해서 올린 것입니다. 

 

 

 

1,21사태 소나무를 거쳐 청운대로 가는 길.

 

 

1,21사태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총탄에 상처를 입은 소나무 앞 성곽 여장에 새겨진 각자된 성돌입니다.

乙酉九月 看役 金壽○ 監官 梁岡○ 邊首 李重○/을유구월 간역 김수○ 감관 양강○ 편수 이중○ 입니다 을유해는 순조 25년(1825년)입니다.

 

 

《 1.21사태 소나무 》

백악산 정상을 넘어 2백m 정도 지나서 순방길 옆에 기념비적인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등 31명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타운(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軍.警과 치열한 교전 중 이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아군복장과 민간복 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1월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결과 침투한 31명 중 1명 도주, 29명 사살 1명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이 각자성석의 글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嘉慶九年 甲子 十月 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가경구년 갑자 십월 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嘉慶은 중국 淸代 仁宗의 연호로 조선 순조 4년에 해당하며 갑자해는 1804년입니다. 10월에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감독은 이동한이 담당하였으며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한 것입니다. 한양도성에 새겨진 각자들을 종합해 살펴보면 셋으로 구분지어 볼 수 있습니다. 14세기에는 천자문 순서대로 天으로 시작하여 축성 구간을 표시하였으며, 15세기에는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겼으며, 18세기 이후에는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조만치 보이는 곳이 청운대입니다. 조팝나무인가 마치 눈꽃을 보는 듯합니다.  

 

 

청운대 평평한 곳에 긴 의자 여러 개가 설치되어 있으니 한여름 백악을 오르며 흘린 땀과 열기를 바람에 식히기에 좋은 장소가 되겠습니다.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니 세상을 품안에 담는다 하겠습니다. 이런 자리에 정자가 있었다니 과연 조선은 풍류를 아는 시대였습니다.

 

 

靑雲臺.. 이곳 봉우리에서 많은 선비들이 한양을 내려다보며 입신출세를 위한 포부를 스스로 다짐한 것일까..

 

 

좌우로 나뭇가지를 두고 성곽여장을 바탕으로 그위에 올린 뿌연 연무에 싸인 북한산의 아스라한 풍경이 청명한 날씨는 아니지만 이런대로 보는 느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암문이 있는 곳까지 성 안쪽은 통제 되고 성곽 밖으로 순성길은 이어집니다.

 

  

 

청운대 앞 성곽에 설치된 데크시설물을 이용해 성벽을 넘어 성곽 밖으로 나갑니다.

 

 

데크로 만든 시설물위에서 바라본 고양시 원당 방면입니다.

 

 

숙정문으로 이어가는 성곽과 그 옆 북악스카이웨이에 있는 팔각정이 목격됩니다.

 

 

이제까지 성벽 안쪽으로만 걸었는데, 청운대에서부터 성 밖으로 성곽따라 걸어보니 낮은 성가퀴(女墻)만 보던 가볍던 마음이 비로써 성채를 보는 나쁘지 않은 묵직한 무게감을 느낍니다.


 

성 밖 성벽을 따라 가는 길은 어림잡아 한 100m 정도인데 무너졌거나 전란으로 상한 곳을 보수했거나 새로 쌓은 성벽을 보는데 왠지 그 얼룩진 모양이 조각보를 보는 듯이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이 사진은 세종 때 쌓은 성축과 숙종 때 쌓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부분은 숙종 때 쌓은 것이다.



 

좌측 잔돌로 쌓은 성벽은 세종 때 쌓은 것이고 우측 정사각형에 가까운 큰 돌로 쌓은 것은 숙종 때 중수한 것이다. 위 성가퀴(女墻)는 1976년 故 박정희 대통령 당시 복원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여장 / 女墻 》

성곽 위에 담장을 '여장' 또는 '성가퀴'라고 부른다.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아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군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총격전이 잦아지면서 많이 축조되었다. 한 개의 여장을 1타(垜)라 부르며 1타에는 3개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다. 가까운 곳의 표적을 쏘는 근총안(近銃眼) 한 개가 한가운데 있고, 그 양옆에 먼 표적을 쏠 수 있는 원총안(遠銃眼)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원총안은 대개 구멍을 수평으로 뚫은 반면 근총안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암문 30m 앞에 철조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세종, 숙종, 순조 때에 걸쳐 築城의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창의문에서부터 암문으로는 두 번째 암문입니다. 데크시설을 이용해 성벽을 넘어 성 밖으로 나올 때와 다르게 암문을 통해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성벽의 이모저모를 둘러보고 암문을 이용하여 성축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감시카메라가 나를 지켜보고 있군요.

 


측면으로 담아본 두 번째 암문.

 


입구 앞 보안을 위한 카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그래도 기분 상하지 않는 것은 남북이 이념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래 조금 뒤로 떨어져서 "철통경계대장군"과 '부대관리여장군' 두 장승이 카메라를 좌우에서 보좌하고 있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군대가 병사들 눈치보고 병사들 부모가 부대장을 가지고 논다는 기사가 신문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데 그런 체제에서 命이 설 수 있을까요! 북쪽에서는 미사일을 쏘아대며 위협을 하는데 그런 군을 믿어도 되는지 도대체 어디에도 없을 그게 軍隊입니까!



우측에 초소가 있어 빼고 담은 성 암문의 안쪽 모습입니다.

 

 

허리 굽혀 여장만 살펴보던 허리가 길이 하도 호젓하니 저절로 기를 편다. 



이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성 바깥쪽으로 돌출된 '白岳曲城'이라는 성채가 있고 그 안 끝머리에 雉라는 것이 있습니다.

 

 

嘉慶十一年 九月 日 看役 孟尚賢 監官 李東翰 ○○ ○○○  순조6년(1806년) 9월에 맹상현이 공사를 맡고 이동한이 공사를 살펴 보았으며 그 외의 글자는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굽이 휘어 돌아가는 길과 나무들이 상큼하고 아름답습니다.

 

 

직사각형 성돌 면에 각 4개의 모를 죽인 형태의 직사각형 액자 형태를 구획하고 그 안에 각자를 했으나 중앙에 金字 외에는 알아볼 수 있는 흔적 조차도 찾기 어렵습니다.

 

 

백악곡성 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입니다.

 

 

嘉慶二十年十一月 日 看役 ○○春  監官 金○淳 邊首 金○○ /중국 청 인종20년 / 순조15년(1815년)

  

 

숙정문 쪽으로 가기 전에 백악곡성을 둘러보고 가야겠지요.



이곳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경계에 있어서 위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치/雉》

이 장소는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환히 眺望되는 곳으로 적군의 동태나 공격을 파악하고 살피는데 최적의 입지라고 할 수 있는 위치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사살하기에 좋은 곳이다. 현재도 경계에 있어서 중요한 要地로 軍경계시설이 있어 이곳에서 조망되는 주변을 찰영을 금지하고 있다. 한쪽 내부만 찍은 사진이다.     


 

치(雉)는 성곽 중 좌우의 성벽이 잘 보이는 높은 위치에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관망 및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쏘거나 공격하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백악곡성을 나와 숙정문을 향해 갑니다. 친구든 애인이든 함께 산책하기에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잘 보존되어 있는 女牆너머로 성북동 골짜기와 남산을 봅니다.


 

촛대바위 전 기묘하게 비틀어지고 멋진 절지로 춤사위를 고르는 소나무의 자태에 매료되어 담습니다만 멋없이 가늘고 길쭉한 왜솔은 지주제도 모르고 그 격조 높은 자리에 어우러지려 하네요.

 

 

역광 속에 뽀얗게 물이 든 촛대바위 주변의 무리 진 소나무들

 

 

《 촛대바위 》



촛대바위는 그 모양이 촛대 같다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 촛대바위에는 뼈아픈 사연이 있다는데 바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찬탈자들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죽인다는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아놓아던 곳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 혈을 끊고 죽이기 위해 이곳 외에도 전 국토에 요소마다 쇠말뚝을 무수하게 박아놓은 것을 1990년대에 들어서 모두 찾아내어 우리 손으로 뽑아냈습니다. 그 쇠말뚝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있습니다.



성북동일대와 요정정치시절 세간에 들리는 말로 삼천궁녀가 있었다는 요정 삼청각 기와지붕이 보이고, 또 그 아래 요정 대원각이었다가 길상사가 된 사찰지붕도 보입니다. 당시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엄마가 삼청각은 딸이 운영 하였는데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은 천재 월북시인 백석과의 애절한 사연이 있고 또한 송광사의 법정스님과의 인연으로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요정 대원각이 길상사라는 송광사의 말사로 다시 태어납니다. 백석에 의해 '자야'라는 이름을 얻은 김영한은 "수많은 재물도 백석의 시 한편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할 정도로 백석을 사모하였으며 영원한 사랑을 위해 남은 재산으로 '백석문학상"을 만들었으며 대원각이 길상사로 거듭나는 창건법회가 열린 날인 1997년 12월 14일 법정스님으로부터 吉祥花라는 법명과 염주 한 벌을 받습니다. 2년 후 길상화 김영한은 세상을 뜨기 전 날 길상사를 찾아와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튼날 11월14일 운명하였으며 김영한이 소망하던 대로 다비하여 길상헌 뒤뜰에 뿌려졌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 어느새 성벽은 추녀마루 위에 雜像들이 살고 있는 커다란 옛 건축물이 있는 곳까지 나를 이끌었습니다.



 

《 숙정문 / 肅靖門 》史蹟 第十號로 보호되고 있는 이 문은 漢陽都城의 북쪽 大門으로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다른 성문과 함께 築造 되었으며 처음에는 肅淸門으로 불렸다. 숙정문은 다른 문과 달리 성문좌우 성벽이 헐리거나 무너지지 않고 이어져 현재에 이른 유일한 대문이다. 위의 현판은 故 朴正熙 大統領께서 쓴 親筆이다.

 

 

숙정문 홍예에는 천장(天障) 없이 가운데 부분과 兩 가에 높낮이의 段을 둔 홍예의 석곽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다른 성문과 달리 天障도 그린 문양도 없다.

 

 

《 숙정문 / 肅靖門 》

史蹟 第十號로 보호되고 있는 이 문은 漢陽都城의 북쪽 大門으로 조선 태조 5년(1396년)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築造 되어 숙청문 (肅淸門)이라 하였다.

그 후 제3대 태종 13년(1413년)에 최양선(崔揚善)이라는 풍수학자가 상소를 올리기를 "백악산 동.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이를 계기로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경복궁 바로 뒤에 있는 창의문과 함께 폐쇄하였다.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지만 애초 숙정문 아래 삼청동은 맑은 물이 흘러 내리는 골짜기였다. 해서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렸는지도 모른다. 음양오행을 따르면 北方은 陰이니 물이고 여자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 10년(1504년)에 숙정문을 약간 동쪽으로 옮겨 문루 없이 다만 돌로 홍예문을 세웠다.(임진왜란 때 문루는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여성 편력이 화려한 임금이었던 연산군이 어떤 연유로 당시만 해도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렸을 숙정문을 옮기게 했을까 이는 연산군 만 알 것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렸다가 북쪽에 있는 연유로 북대문으로 불렀으며 언제부터인가 숙정문으로 불렸는데, 중종 18년(1523년) 처음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고, 중종 26년(1531년)에 北靖門, 선조 20년(1587년)에 다시 肅淸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엄숙하게 고요함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풀이 되는 숙정문(肅靖門)은 다른 문과 달리 성문좌우 성벽이 헐리거나 무너지지 않고 이어져 현재에 이른 유일한 대문이다. 1976년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한양도성을 복원할 때 숙정문의 없던 門樓를 건립하여 태조께서 창건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손수 쓰신 편액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 한양도성성곽을 따라 숙정문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숙정문은 깊은 산중 높은 산 중턱에 있어 당시를 생각할 때 더욱 길이 험하고 대문을 나서면 가파른 비탈에 깊은 골짜기와 산이 가로 막고 있으며 동쪽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혜화문 앞 을 지나게 되어 있어 이용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고 북쪽에서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는 혜화문이 더 가깝고 편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숙정문을 閉鎖해도 지장이 없으므로 굳게 닫아 놓았을 것이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  陰陽五行思想으로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는데, 北쪽은 그늘이 지니 陰이며 南쪽은 볕이 드는 陽이므로 가뭄(旱災)이 들면 陰인 물을 들인다는 의미에서 北門인 북정문은 열고(開門) 남쪽의 陽인 南門(숭례문)은 닫아 熱氣차단하여 한재(旱災)를 다스리고 陰을 浮揚하고 자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태종16년(1416년)에 처음 시작하였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안의 여자들이 淫亂해진다하여 늘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그 緣由는 北門은 陰方에 있는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한양도성을 하나로 올리려했으나 사진 분량이 너무 많아 4등분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2016년 4월16일 과 2019년5월1일 두 번에 걸쳐 담은 사진들《鄕香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