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옥수동과 압구정(서로가 마주보던 그림 같은 풍경)

鄕香 2019. 3. 29. 11:13

《楮子島/玉水洞/金湖洞/押鷗亭》

옥수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토박이인 동무와 둘이서 모처럼 내 고향 압구정과 옥수동의 옛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뜨거운 뙤약볕에도 아랑곳없이 사라진 옛 모습을 찾아 요소마다 설명해준 동무의 열정과 수고에 고마움을 드립니다. 서울에 흐르는 한강을 예전에는 京江이라고 불렀습니다. 驪州市 앞에 흐르는 한강을 驪江이라고 부르듯이 말이지요. 玉水洞과 狎鷗亭 사이를 흐르는 京江을 東湖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 넓은 강물의 잔잔하기가 마치 호수와 같다하여 동호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넓은 강 가운데 楮子島라는 모래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의정부 너머 동두천 그 어디에서부터 발원한 물과 道峯山, 水落山, 佛岩山 峨嵯山 등에서 發源한 물이 모여 中浪川을 이루고 중랑천은 다시 漢陽都城을 에워싼 木覓山, 仁王山, 白岳山, 洛山 등에서 발원한 물이 모여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淸溪川과 合水하여 살꽂이다리(箭串橋) 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中浪川과 漢江이 합치는 곳을 두물개 또는 두뭇개라 부르며 漢字로 豆毛浦라고 썼습니다. 두 물이 箭串을 사이에 두고 合流하는 過程에서 중랑천과 한강에서 쓸려 내려오던 土沙가 두 물길이 합수되는 물리적인 과정으로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섬이 楮子島였습니다. 이 저자도에는 韓紙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이 自生하여 그 나무 이름을 붙여 "楮子島"라고 불렸습니다. 저자도는 철새들의 낙원이 되었고 그 섬에서 생활하는 기러기雁나 오리鴨의 모습들은 아리수와 兩 江岸 풍경과 어우러져 絶妙한 아름다움을 創出하여 평화롭고 빼어난 景觀에 墨客과 畵家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피똥 싸고 해방되자 이념 간 종족 간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민들은 피땀 흘리며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지지리도 가난하게 자란 세대 서럽게도 오로지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과 돈 밖에 몰랐기에 韻致도 모르고 景致도 모르니 景觀은 더더욱 모르고 백년 앞을 모른 채 돈만 보이는 돈벌레처럼 그 아름다운 금빛은빛 모래자갈 다 퍼다 보도 알도 못하던 인간닭장 짓고, 결국 뜯어내고 철거한 청계천 복개와 삼일고가차도 짓는다고 흔적도 없이 다 퍼간 그 자리에 넓고 푸른 강 너울 잔잔하니 새로운 東湖가 되어 세상 한가롭고 그 위로 가로 놓인 다리 이름 또한 동호를 따서 東湖大橋로 명명되었지만 정작 고요하고 아름다운 옥수동과 두뭇개나루는 찾아볼 수 없수 없습니다.


《 중랑천과 한강물이 합수되는 곳)
 좌측  鷹峯, 중랑천, 강변북로 그리고 가운데 전곶 끝머리(두물머리) 그 우측 한강과 성수대교입니다  
 사진에 중랑천과 한강이 합쳐 하나의 넓은 강이 펼쳐진 가운데에 두 물줄기가 쓸어 옮겨온 모래가 합수되는 과정에서 쌓인 섬 저자도가 있던 곳입니다. 그 은빛 모래 퍼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터 돋아 올리고 청계천 覆蓋하고 삼일고가차도 짓는데 모두 퍼다 쓴 楮子島가 있던 자리입니다. 자연은 그 저자도를 만들기 위해 수천 년 세월에 걸쳐 꾸며 놓았는데 인간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한 순간의 생각으로 한 시절에 없애는 영악함을 보였습니다.  
  


 

箭串에서 바라본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모습, 그 자리는 침수가 심한 낮은 지대였던 곳을 그 앞 저자도 모래를 퍼다가 돋아서 현대아파트를 건설하였습니다. ※串이란, 바다나 강 또는 호수쪽으로 돌출되어 나온 육지로 삼면이 물로 둘러 쌓인 땅을 이르는 말입니다. 규모가 크면 半島라고 부릅니다.

 

 

중랑천과 한강이 합수되는 첫머리의 '전곶'이라 불리던 곳의 끝머리 자전거 도로에서 담은 사진으로 동호대교 쪽 한강하구 방향을 담은 사진으로 동호대교 중간쯤부터 저자도(楮子島)가 있던 곳이다.

 

 

《두뭇개와 동호/豆毛浦 · 東湖》

전곶에서 바라본 옥수동과 개나리꽃 핀 달맞이봉의 모습입니다. 옥수동 일대는 두뭇개(豆毛浦)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랑천과 한강이 합수된 후 저자도 못 미쳐 옥수동 앞 강물이 다시 본류와 합수되는 형국이어서 두 물이 흐르는 물가 즉 두물개라 하였고 발음에 따라 두뭇개가 되었습니다. 중랑천과 한강이 합수된 후 강 가운데를 저자도가 막고 있어 물살이 빠르지 않고 늘 호수처럼 잔잔하여 동쪽의 호수라 하여 동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삼일(청계천)고가차도》

한강에는 광나루 수영장, 뚝섬 수영장, 압구정 앞 샛강과 금호동 앞 무쇠막강 사이의 흰 모래섬(저자도), 여의도 인근 엄청난 백사장(이 백사장에서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이 백만 군중 앞에서 유세遊說 연설를 하기도 한 곳입니다.) 등은 은빛도 찬란하게 곱고 아름다운 하얀 모래와 둥굴거나 넓적한 강자갈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 모래와 자갈을 모두 퍼다가 압구정 현대아파트 터 돋아 올리고 청계천 복개와 삼일고가도로를 걸설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 한강 모래 백사장에는 수많은 새끼자라가 놀았고 참재첩, 칼조개, 강소라, 말조개, 두드럭조개 등이 자갈 반 조개 반이었습니다. 개발을 하더라도 자연과 조화되도록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애초에 청계천을 복개하지 않았다면 한강도 청계천도 그 모습을 살려 자연과학적으로 가꾸었다면 지금처럼 어색하고 인위적 냄새나는 청계천이 아닌 참으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서울이 되고 청계천이 되고 한강이 되지 않았을까 아쉽습니다. 

 


삼일고가차도의 橋脚의 잔해입니다.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청계천 복개를 제거하고 청계천삼일고가차도를 철거하고 기념비적으로 남긴 橋脚 전시물입니다.



《압구정(狎鷗亭)/옥수동(玉水洞)》

지금의 강남구 압구정동은 1960년대 이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京畿道 廣州郡 彦州面 狎鷗亭里 21番地)이었다.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대에 따라 서울의 면적은 268㎢ 에서 605㎢로 두 배 이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때 광주군 소속의 언주면과 대왕면 중 일원, 수서, 시곡, 율현, 세곡 등 5개 동리가 성동구에 편입되어 새로 설치된 언주출장소의 행정적 관할지역이 되었다가 오늘의 강남구가 되었습니다.

그 狎鷗亭里는 나의 조상들께서 대대로 뼈를 묻고 살아왔던 고향입니다. 서울 성동구 신당7동(栗園洞)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던 나는 할아버지댁에 가려면 가까운 금호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무쇠막강을 건너 저자도에서 내려 모래톱을 거쳐 다시 샛강을 헤엄쳐서 건너 다녔습니다. 그 강물은 얼마나 맑고 모래섬은 또 얼마나 고왔던지 재첩이 모래위로 꽃처럼 솟아있고 물가에 새끼자라 동무하던 꿈같은 곳이었습니다.

원만한 丘陵처럼 아늑한 동산에 철따라 개나리꽃 진달래꽃 복사꽃 목련꽃 싸리꽃 목화꽃 축제의 화려함은 그대로 꽃대궐이었고 오곡의 황금물결 춤출 때 기러기 날아가는 서러움에 서걱대는 강가에 갈잎의 노래, 그 아름다움 어찌 글로 표현하랴 특히 배나무과수원으로 삶의 일상을 살아가는 내 고향 압구정은 모두가 할아버지 아저씨 형제들이 500년을 조상대대로 오손도손 모여사는 조선조 세종대왕 제 5왕자 광평대군 후손들의 集姓村이었습니다. 마을에 부서져 내리는 달빛에 반짝반짝 하얀 배꽃 자지러지듯 아름답고 그 향기로움 그대로 순박하고 소박한 마을 心性이었습니다. 마을 앞 강물에 돛단배 한가롭게 두둥실 바람을 타고 나룻배 어기여차 강물 거스르는 두 줄기 강 사이 희디흰 하얀 모래 눈부신 백사장 楮子島, 옥수동의 풍경도 압구정의 경치도 더욱 절경으로 꾸민 것은 모래섬 저자도입니다. 예쁜 강자갈과 금강석처럼 반짝이던 흰 모래섬이 강물 가운데 하늘의 구름처럼 두둥실 떠 있는 듯한 아름다운 저자도를 안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마주 바라보며 서로 네가 더 멋지다! 아니야 네가 더 아름답다, 도타운 정 나누던 압구정과 옥수동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 금호나루에서 배를 타고 무쇠막강을 건너온 후 모래섬을 양산을 바쳐 들고 맨발로 걸어 압구정으로 오는 여인들과 뒤에 큰 미루나무 3그루와 금호나루와 응봉산이 보입니다. 사진의 백사장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터 돋아올리고 삼일고가차도 짓는데 모두 파다 사용된 삼각주(楮子島)입니다. 자연은 이 저자도를 만들기 위해 천년 세월에 걸쳐 꾸며 놓았는데 인간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한 순간의 생각으로 한 시절에 없에는 영악함을 보였습니다.  



《 1960년대 초 압구정리 앞 샛강에서 빨래를 하고 모래 둔덕너머 집(압구정리)으로 돌아가는 엄마와 아이들 》



압구정에서 강물과 하얀 모래섬 저자도와 아울러 바라보는 옥수동의 鷹峯山이 지닌 江岸의 아름다운 모습은 가히 朝鮮時代의 玄洞子 安堅이나 鶴林正 李慶胤,  玄齋 沈師正 같은 大家들이 欽慕하고 탐할만한 풍경이었기에 韓明澮는 강가 언덕에 정자를 지어놓고 빼어난 경관을 바라보며 오리鴨와 갈매기鷗와 더불어 白壽를 노닐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 정선의 그림 속 압구정에서 바라보니 삼각산 도봉산 한 눈에 들어오고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성 달려오네. 남태령 대모산 우면산 뒤질세라 急急한데 남산자락 강물에 잠기고 멀리 강 하구에 갈매기 날고 세월은 꿈길만 같고 살꽂이다리는 더욱 살갑게 파고든다.


《謙齋 鄭敾 鴨鷗亭 》紙本淡彩 935×755 서울시 所藏.


 

압구정 앞 강가에 거룻배 두 척 고기를 낚는데 돛 내린 돛단배들은 하늘만 응시한 채 돛 올릴 줄 모른다.


《謙齋 鄭敾 鴨鷗亭 》絹本彩色200x130 澗松美術館 所藏

 

《狎鷗亭 》

狎鷗亭은 韓明澮가 이 자리에 亭子를 짓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翰林學士 倪謙에게서 지어 받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한명회가 중국 宋나라 宰相이던 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그의 서재이름을 압구정이라고 했던 故事에서 따온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狎鷗亭은 "세상을 다버리고 강가에서 살며 갈매기와 아주 친근하게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합니다. 근대까지도 '압구정'은 정자가 있던 이 자리는 東湖라 불리던 옥수동과 압구정동 사이 남쪽 강가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닥나무가 무성했던 楮子島와 강물 사이에 서남쪽으로 바라다 보이던 낭떠러지 언덕바지에 위치하였고 서울시로 편입되어 현대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까지도 필자(廣州郡 彦州面 狎鷗亭里210番地)의 증조부댁 옆에 아담하지만 암봉의 한강쪽 낭터러지 위에 정자(狎鷗亭)와 멋진 소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어려서 압구정에 올라서서 보면 목멱산 줄기 응봉산과 아차산너머로 멀리는 북한산 도봉산 불암산 수락산 등 여러 봉우리가 시아에 들어와 절경을 이루던 곳입니다. 조선시대 이곳의 자연부락은 '뉘주니, 먼오금, 옥골(玉谷), 장자말(長者洞)이라고 불렸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후 일제강점기에 지명개편되면서부터는 압구정리로 불리었습니다.

 

 

한명회는 두 女息을 예종과 성종의 비로 삼고 세조, 예종, 성종, 세 임금 하에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領議政을 지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는 역사상 너무 잘 알려져 다 아시는 인물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자리는 世祖 때 權臣 韓明澮가 癸酉靖亂의 一等功臣으로 시작하여 高官大爵 富貴榮華 고루 取하고 노후 여생 오리와 갈매기 벗 삼아 노닐던 화려한 亭子 압구정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죽어서는 剖棺斬屍를 당합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자리 오늘 다시 와 보니 강건너 그림 같던 옥수동 絶景 오간데 없고 아파트에 둘려싸여 아낙들의 수다場 되었습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모습, 옛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狎鷗亭里

한낮이면 부서져 내리는 햇살에 모래알처럼 반짝이던 배꽃들 다 어디로 갔을까! 햇볕 아래 그 강가 그 자리에 격조 없는 건물만 무심하게 차지하고 있나니..

 

    

《옥수동 / 豆毛浦》

옥수동은 남산에서 매봉 달맞이봉 응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등에 업고 한강을 바라보는 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서울의 명당 중 明堂이라고 합니다. 木覓山(남산)을 主峯으로 한강변을 따라 이어진 산줄기는 지금의 매봉과 응봉으로 이어지며 봉우리마다 아름다운 한강주변의 絶景을 眺望하기 좋은 위치에 風流를 즐기고자 樓亭도 많았습니다. 그 중 특기할만한 亭子로는 睿宗의 둘째 아들 齊安大君은 帝王의 次子만이 가질 수 있는 서글픔을 鷹峯山 품에 그림 같은 정자를 짓고 펼쳐지는 자연의 그림에서 정자의 이름처럼 물처럼 노을빛처럼 悠悠自適 위안을 삼았던 流霞亭, 훗날 燕山君은 鄭蘭貞이라는 깊은 늪에 스스로 뛰어들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술과 유희에서 헤어날 줄 몰랐던 皇華亭, 꿈에서 조차 갈매기를 벗삼아 노닐던 夢鷗亭을 들 수 있겠습니다. 또한 임금님에게 진상하던 玉井水라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도로를 내면서 매몰되고 없지만 지금의 玉水洞 地名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좌측으로부터 동호대교 위로 솟은 봉우리가 매봉산→옥수동아파트촌(두뭇개)→달맞이봉→금호동아파트촌(무쇠막)→응봉산)

 

《두뭇개 / 豆毛浦》

조선500년 그 세월에 끊임없이 樓亭이 이어지고 수많은 文士와 畵伯들의 詩題가 되고 그림의 素材가 되었던 江岸의 豆毛浦와 강 가운데楮子島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압구정의 경관은 찬사와 감탄의 대상이었습니다.

두뭇개 앞을 흐르는 물이 얼마나 맑고 고왔으면 玉水라 했으며, 잔잔한 물결에 반짝이는 노을빛이 얼마나 편린처럼 예뻤으면 동편의 호수라 했을까!

두뭇개 포구(豆毛浦)는 선박의 接岸이 容易하여 일찍부터 사사로이 나룻배가 운행되어 강건너 압구정 방면으로 교통로가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이곳은 경상도 전라도의 세곡선 등 물자를 실은 배들의 집결지로서 漕運의 편의를 위한 나룻터로 이용되었습니다. 두모포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성을 떠나 일본으로 가는 4개교통로의 하나로 세종1년(1419) 己亥年 5월14일에 대마도 정벌(己亥東征) 출정식 때 세종대왕께서 친히 나와 잔치를 베풀고 이종무(李從茂1360-1425).유정현(柳廷顯1355-1426)을 爲始하여 여덟 장수를 전송하면서 승리하고 돌아올 것을 당부한 곳이기도 합니다.

 

(두뭇개 지금의 옥수동은 동호대교가 관통하고 일대는 아파트촌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쇠막(水鐵里)/금호동(金湖洞)》

달맞이봉과 응봉 사이에 위치하는 지금의 금호동의 옛 조선시대 이름은 무쇠막 한자로는 水鐵里라 하였습니다. 그 무쇠막이 발음에 의하여 '무수막' 또는 '무시막'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무쇠막은 무쇠(銑鐵)를 녹이거나 제련하여 무쇠솥이나 각종 農器具를 만드는 대장간과 나라에 납품하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상인들이 많았으며 그들간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지명이었습니다. 또한 무쇠막은 강가 마을이어서 그 앞에 흐르는 한강을 무쇠막강 또는 무시막강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무쇠막강가에는 입석포가 있었으며 한양이나 강 건너 사람들의 왕래가 적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또한 수철리(무쇠막)를 지금의 金湖洞으로 부르게 된 것은 옛 이름 水鐵里의 鐵에서 쇠金자를, 東湖에서 호수湖를 합쳐서 유래되었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金湖란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이 금빛처럼 아름다운 호수와 같다고 隱喩的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달맞이봉과 응봉 사이의 금호동(무쇠막)은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 있습니다.〉

 

《응봉/鷹峰》

 개나리꽃이 온 산을 노랗게 물들였네요. 강안의 응봉에서 달맞이봉을 거쳐 매봉과 대현산 그리고 목멱산으로 이어지는 옛 모습은 東湖와 저자도와 아우러진 풍경으로 동호독서당을 품었고 아름다운 절경에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은 수많은 누각과 정자를 세웠던 것입니다.

 

 

《성동교/城東橋》

 2호선 한양대역 앞 행당동에서 뚝섬으로 이어지는 성동교입니다 이 다리 건너 성수동 일대가 뚝섬벌이었습니다.

뚝섬은 조선 태조부터 제 9대 성종 때까지 이 일대와 자양동 구의동 광나루까지 아우러 사냥터로 삼았으며 군대를 사열하거나 싸움터에 보낼 때 이곳에 纛旗를 꽂아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으며 이곳 지형이 중랑천과 한강에 둘러쌓여 그 형태가 섬島과 같고 둑기纛旗를 세웠다 하여 둑도(纛島)라 하였으며 이를 둑섬에서 뚝섬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둑기(纛旗) 깃발 둑(纛)자의 원음은 독이지만, 속 음은 '둑'이다 쇠꼬리 끝 떨로 장식한 큰 깃발을 뜻하는데 임금의 수레나 군대의 왼쪽에 세워 임금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살곶이다리/箭串橋》寶物 第1738號

전곶은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지명입니다. 옛날에는 뚝섬, 지금의 성수동 일대를 전곶이라 했습니다. 그 전곶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의 간청으로 방원의 어린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로 봉하자 마땅치 않게 생각하던 차에 실권자인 신덕왕후 강씨(방석의 생모)가 죽자 방원이 제 2의 왕자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입니다. 이에 분노한 태조가 고향 함흥으로 가버리자 박순과 무학대사가 함흥차사가 되어 함흥으로 태조를 찾아가 간절히 설득하여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오니 태종 이방원은 이곳(살곶이)에서 부왕 이성계를 맞이합니다. 이때 하륜은 태종에게 천막기둥 뒤에서 절을 올리라고 조언을 하였습니다. 조금 후 갑자기 태조가 태종 이방원에게 활을 쏘았지만 화살은 기둥에 맞았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궁인 태조의 화살이 빚나가니 이에 태조도 방원이 왕이 된 것은 천명이라 여기고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화살 꽂힌 벌판'이 줄임말 '살꽂이 벌' 또는 '살꽂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이 일대를 전곶이라 하였으며 중랑천에 놓은 돌다리를 살꽂이다리(箭串橋)라고 불렀습니다. 

 

 

寶物 第1738號 살곶이다리는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놓은 다리입니다. 매 사냥터, 말목장, 군대를 사열하는 장소로 쓰인 동교 일대를 살곶이들(箭串坪)이라 하여 다리이름을 살곶이다리라 하였습니다. 이 돌다리는 평평한 평지를 걷는 듯해서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부른다 세종 2년(1420년)에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부왕 태종이 붕어하자 3년 시묘살이를 계기로 중단되었다가 성종14년(148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조선 전기에 만든 다리로는 제일 긴 다리로 기둥은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로 만들었습니다.

 

 

측면 모습.

 

교각의 짜임새 모습. 물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압력의 영향을 분산시키기 위해 물의 흐름에 부응하여 교각를 마름모형으로 세웠습니다.

 

 

살곶이다리 상판.

 

한강과 중랑천 합수머리 주변 풍경입니다.

 

 

《옥수동토성/玉水洞土城》

옥수동에는 백제 초기 慰禮城 때 쌓은 것으로 볼 수 있는 土壘로 쌓은 城이 있다고 문화유적총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름하여 玉水洞土城입니다. 土壘란 敵을 막기 위해 흙으로 쌓은 陣阯이며 堡壘와 그 용도나 성격이 같습니다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높이 약5.4m 주위 약 4.2m로 현존하고 있으며 지금도 陶器片, 瓦片 등이 산재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흔적이 없습니다. 앞서 하남지방은 백제의 건국 터전으로 초기 백제의 중심이었으며 최근 학술조사로 들어난 춘궁동, 초일동, 광암동 일원의 二聖山城은 한강변을 위치한 삼국시대의 토성인 서울의 夢村土城, 삼성동토성, 옥수동토성, 楊津城, 阿且山城, 風納洞土城, 岩寺洞土城과 광주군의 남한산성, 龜山土城, 미금시의 壽石洞土城과 放射狀으로 연관되어 전략적 요충을 이루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매봉 팔각정 앞 능선

옥수동 토성이 있었을 법한 위치입니다.

 

 

《신정왕후 조대비 생가 터/ 神貞王后 趙大妃 生家址》 

玉水洞은 純祖(1790~1834/재위1801~1834)의 아들 孝明世子의 세자비가 되었으나 세자의 요절로 왕비(중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 憲宗(1827~1849/재위18341849)이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 효명세자를 翼宗으로 追封함에 따라 왕대비가 되었고 아들 헌종에 이어 哲宗마저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興宣君 李昰應의 次子 李載晃을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오르게 한 대한제국 高宗의 양어머니 神貞王后 趙大妃의 생가이자 조대비의 아버지 조만영의 가옥과 쌍호정雙虎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생가터에 민가(2층 벽돌 건물)와 정자가 있던 자리에 표석만 남아 있습니다. 또한 조 대비의 작은 아버지(叔父) 趙寅永은 영의정에 이른 인물로 추사 김정희와 절친한 벗이 었습니다. 두 사람이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진흥왕순수비문 68자를 판독하고 그 비 측면에 이름을 새겨놓기도 하였습니다. 

 

 

 《쌍호정 터 / 雙虎亭 址》

趙大妃가 태어나던 날 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이 정자 앞에 나타났다하여 亭子 이름을 雙虎亭이라고 하였습니다.

 

  

1940년대 초 성동구 옥수동의 모습입니다. 정중앙의 기와집은 趙 大妃 생가이자 그의 아버지 조만영의 가옥입니다.

趙萬永의 본관은 豊壤(지금의 남양주) 자는 胤卿. 호는 石崖, 父는 이조판서를 지낸 趙鎭寬이고 동생은 영의정 趙寅永입니다. 순조13년(1813년) 중광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 겸문학 지내다 순조16년(1816년) 암행어사로 전라도지방의 민정을 살펴본 후 민폐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전라도관찰사를 파면시켰으며 순조19년(1819년) 딸이 효명세자빈이 되어 豊恩府院君이 되었습니다. 1820년 이조참의, 순조21년(1821년)에 금위대장,1826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세자의 장인으로서 세력을 키우고 1828년 이후 훈련대장을 겸임풍양 조씨의 기반을 곤고히 했습니다. 순조30년(1830년) 효명세자(사위)가 죽은 후에도 호조, 예조판서, 한성부윤,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외조카인 세손(헌종)의 보호에 힘썼습니다. 헌종이 즉위(1835년)한 후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지내며 동생 조인영(영의정) 조카 趙秉鉉 등과 풍양 조씨 가문의 세력을 곤고히 하는데 힘썼으며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헌종7년(1841년)부터 왕이 직접 친정을 하게 되자 임금의 원조에 힘 입어 일족이 요직을 차지하여 그동안 중앙권력의 중심이었던 안동 김씨에 버금가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조만영의 아우 趙寅永은 金正喜와 절친한 사이로 두 사람이 함께 비봉에 올라가 북한산진흥왕순수비문의 68자를 판독하고 진흥왕순수비 측면에 두 사람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孝明世子嬪 趙氏는 아들(憲宗)이 純祖의 뒤를 이어 1835년 보위에 오르자 아버지 효명세자를 追尊王(翼宗)으로 추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히 嬪에서 大妃(神貞王后)가 되어 헌종, 철종, 고종에 이르기 까지 3대에 걸쳐 왕실의 최고의 어른으로 요절한 남편 효명세자(翼宗)의 유업을 이루기 위해 안동 김씨들이 차지한 권력으로부터 왕권을 살리고자 흥선군 이하응과 손을 잡습니다. 헌종에 이어 철종에게서도 대를 이을 왕자가 없자 흥선군의 차남을 수양아들(고종)로 들여서 즉위시켜 세도가 안동 김씨 일문을 정권에서 쇄락 시켰습니다.

 

  <조만영 肖像>

    

《讀書堂契會圖》

족자형식의 이 독서당계회도는 위에 隸書體로 '讀書堂契會圖'라는 題目을 쓰고 중간에 安堅의 화풍을 충실히 따른 16세기 前半期의 산수화로 계회가 열리는 장면을 描寫한 전형적인 계회도 방식입니다. 아래에는 계원의 명단이 座目되어 있습니다. 이 독서당계회도의 그림은 豆毛浦의 남쪽 가에 있는 독서당 주변의 실경을 소재로 한 것으로 아래 소나무와 어우러진 바위둔덕은 압구정이고 近景의 강은 東湖로 부르던 京江이고 그 江岸은 옥수동(豆毛浦)입니다. 압구정 쪽 강에서는 세 척의 배가 그물로 고기잡이가 한창이고  옥수동 쪽 한강에선 두둥실 떠 있는 술동이 몇 실린 큰 배에 의관을 정제한 계원들이 앉아 있고 옆에 작은 배에는 술동이만을 실고 따르고 있어 흥겨운 酒宴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 건너편 산 밑에 안개에 쌓인 채 지붕만 보이는 건물들은 독서당으로 생각되며 그 너머 백악산과 원경으로 북한산 도봉산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종26년(1531년) 독서당에서 연 계회를 기록한 그림입니다. 아래의 좌목은 계원들의 호, 이름, 자, 본관, 생년, 사마시 급제년도, 문과 등제연도 품계와 관직 등을 적었는데 계급의 등급 順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조선 초기에 가장 유행하던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기록적 성격의 記念畵로 직업화가에 의뢰하여 참석인 수대로 그리게 하여 한 폭씩 나누어 所持하였습니다. 좌목에 적혀 있는 사람은 張玉(장옥), 洪敍疇(홍서주), 許磁(허자), 林百齡(임백령), 宋麟壽(송인수), 宋純(송순), 周世鵬(주세붕), 李霖(이림), 許沆(허항), 申石潤(신석윤), 嚴昕(엄흔), 崔演(최연) 모두 12인으로 1516~1530사이에 사가독서하였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독서당의 선발은 급제한 젊은 문신으로 從6品職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간혹 40세가 넘어서 선발된 경우도 있었으며 대제학은 독서당을 거친 사람이어야 가능하게끔 제도화할 정도로 엄격한 기구였습니다.


〈絹本水墨淡彩 91.5×62.3cm 日本 個人所藏〉


독서당의 연혁을 따져 보면

1426년 12월 최초로 세종대왕께서 集賢殿 大提學 卞季良(1396-1430)에게 令을 내려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집에서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집현전학사 가운데 재능과 덕망이 넘치는 권체(1399~1438), 남수문(1408~1443), 신석견 세 사람을 선발하여 지금의 세검정 위쪽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사찰 장의사에서 공부하도록 하였으나 장소가 자택에 한정되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없어 효율성이 미흡하였다. 이를 湖堂이라고도 한다.

1442년 다시 세종대왕께서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 독서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申叔舟 . 成三問 등 6사람을 津寬寺에서 讀書하게 하는 上寺讀書를 實施하였다. 이 사가독서는 문종1년(1451)과 단종1년(1453)에도 실시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집현전이 혁파됨으로써 사가독서제는 폐지되었다. 그 뒤 성종은 1476년과 1486년에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성종23년(1492년)에 '자택에서의 독서는 내방객이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독서에 전념하가 어렵고 上寺讀書는 유교정책의 堅志에서볼 때 불교의 폐습이 전이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상설국가기구로 독서당을 두도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徐居正의 주청을 받아들여서 마포 한강변에 있던 歸厚署 뒤쪽 언덕의 폐사찰을 20칸 정도로 개축하여 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다. 이 독서당에서는 연산군1년(1495)부터 연산군4년(1498년)까지 매년 5,6명이 독서하였으나 갑자사화(1504년)의 여파로 폐쇄되었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인재양성과 文風 진작을 위해서 독서장려책을 적극 권장하였다.

중종 2년 (1507년)에 독서당제도를 부활하여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는 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업원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는 주청이 끊이지 않자

중종12년(1517년)에 豆毛浦 정자를 개축하여 독서당을 설치하고 東湖讀書堂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옥수동의 독서당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소각되기 전 75년 동안 이어져왔습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강변에 몽구정을 비롯해 9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독서당터와 비석/讀書堂址 · 碑石》

옥수동은 유능한 유학자들이 사가독서하던 東湖讀書堂이 있던 곳입니다. 지금은 그 터에 표석과 광희문에서 약수동 단국대 앞을 거쳐 한남동으로 이어지는 동호로라는 도로명과 광희문에서 약수동-금호동-옥수동으로 이어지는 독서당길이 있습니다. 

이 비는 2017년 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없었던 碑입니다.

2년 후인 2019년 4월5일 재 답사 중 이 비를 보게 되었는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때 주민이 옮겨가 보관하다가 구청에 기증하여 이자리에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이 비를 세운 년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보존상태나 刻子된 필체의 솜씨로 보아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때 세운 것으로 보여집니다.

碑의 前面, 後面, 兩 側面에는 많은 인물들의 이름과 號, 品階. 本貫이 새겨져 있습니다. 前面에는 篆書體로 '公夫子道'라는 큰 네 글자를 새겨 놓고 그 아래 43人의 이름과 號, 本貫, 品階가 새겨져 있습니다. 左側面에는 역시 큰 글자 전서체로 '統古'라고 세겨 놓고 그 아래 21명의 인물의 호, 품계, 본관이 새겨져 있습니다. 後面에는 '今淵源紀'라는 큰 글씨의 전서체를 새겨 놓고 그 아래 41人의 이름과 號, 品階. 本貫을 새겨 놓았습니다. 右側面에는 '念碑'라는 큰 전서체 아래 20명의 이름과 號, 品階, 本貫을 새겨 놓았습니다. 전면으로부터 좌측 시계방향으로 전서체를 나열하면 碑銘은 다음과 같습니다. "公夫子道統古今淵源紀念碑"입니다.

 

 

『공부자도통고금연원기념비/公夫子道統古今淵源紀念碑』前面

 

 

《공부자도/道子夫公》前面

 

左☞ 吉再,朴尙衷,鄭夢周,李穡,李殼,李齋賢,權溥,禹倬,白頥正,安裕(珦),崔沖,金良鎰,崔致遠,薛聰.

       張維,金集,張顯光,李延龜,趙翼,金尙憲,姜沆,黃愼,李貴,金長生,趙憲,金誠一,柳成龍,金千鎰.

       趙庸.黃鉉,孔紹,許稠,黃喜,--<遺逸(篆書體)>----------鄭泰淳,○禹,蘓輝冕,宋秉璿,金平默.

       金自麟--------------------------------------,○錫璉,裵克壽,金積,宋啓幹.  <43人>

 

左☞ 길재.박상충,정몽주,이색,이각,이재현,권부,우탁,백이정,안유(향),최충,김양일,최치원,설총.

       장유,김집,장현광,이연구,조익,김상헌,강항,황신,이귀,김장생,조헌,김성일,유성룡,김천일.

       조용.황현,공소,허조,황희,<유일(전서체)>------------정태순,○우,어휘면,송병선,김평묵.

       김자린--------------------------------------,○석연,배극수,김적,송계간.  <43人>

 

 

이 후 각자된 글자들은 위에 각자된 글자와 다른 글씨체이며 書體의 품격도 현저히 떨어진 다른 글씨들입니다.

 

中左上 / 金忠善 號蔘夏堂, 贈兵判, 金海人. 金鳳洙, ○雙梧, 金海人, 諡文節. 

中右上 / 金錫瑛 官嘉善.金海人,號杴川. 李琪榮 號○隱, 處士, 慶州人.

中央 /  <忠勳 孝行> 文五潤, 貞惠公, 嘉善, 南平人.

中左 / 崔擎祿 號○山, 贈參議, 全州人. 中右 / 文重潤 孝度公, 監察, 南平人. 孫平民 號祭潭, 官判尹, 密陽人. 崔日輔 號湖隱, 崇敬 全州人

中左下 / 崔錫良 號石田, 全州人. 中右下 / 金養休 號龍庵, 恭孝公, 金海人. 

 

 

비석 전면 하단에 새겨진 이 글씨체들은 중단에 새긴 글씨체와 또 다른 서체이며 여러 인물이 各者 새긴 느낌을 줍니다.

下上 / 金成喜, 號溪巖, 嘉善, 慶州人. 李昶圭 湖源堂, 孝學, 全州人.

下 / 李鍾大 號石雲 參奉, 慶州人. 朴九秀 號柏悗, 正三品, 三陟人. 李炳宰 號正幹, 逸士, 全州人, 朴昌翰 號○隱, 吏參, 三陟人. 李觀海 ○○○湖隱 官通政. 牙山人. 最下段 /  具相穆 ○緵史, 朴舜直 敬松堂, 孝學, 咸陽人. 金景堉 金海人

 

 

《統古》右側面 (21人)

左☞鄭如昌,金宏弼,金宗直,卞季良,金自粹,崔哲,權近.

       尹拯, 許穆, 兪棨, 朴世采,尹宣擧,宋浚吉,宋時烈.

       朴仲休, 崔善門, 金末, 金鉤, 龍希壽, 金泮, 尹祥, 

 

左☞정여창,김굉필,김종직,변계량,김자수,최철,권근.

       윤증, 허목, 유계, 박세채,윤선거,송준길,송시열.

       박중휴, 최선문, 김말, 김구, 용희수, 김반, 윤상,

 

 

下段部 / 崔桭洪 號 石俺(掩) 全州人

 

《今淵源紀》 後面 (41人)

左 ☞ 成潭,李珥,李滉,柳希春,金麟厚,李彦迪,徐敬德,盧守愼,白仁傑,金湜,李延慶,金正國,金安國,趙光祖. 

        吳熙常,金鎭圭,宋明欽,金良行,金元行,閔遇洙,金昌翕,尹鳳九,韓元震,李縡,宋奎濂,金昌協,權尙夏,閔鼎重. 

        尹善道,郭再祐,高敬命,文緯世,金繼輝,盧禎,鄭磏,李之菡,金世弼,李耔,金净,龍天奇,徐居正.

 

        성담,이이,이황,유희춘,김인후,이언적,서경덕,노수신,백인걸,김식,이연경,김정국,김안국,조광조. 

        오희상,김진규,송명흠,김량행,김원행,민우수,김창흡,윤봉구,한원진,이재,송규렴,김창협,권상하,민정중. 

        윤선도,곽재우,고경명,문위세,김계휘,노정,정렴,이지함,김세필,이자,김정,용천기,서거정.

 *김계휘, 선조 때 인물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김장생의 父. (父子가 함께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念碑》左側面 (20人)

左☞ 尹根壽, 鄭澈, 奇大升, 徐起, 宋翼弼, 成世昌, 尹斗壽.

       奇正鎭,任憲䀲,趙秉悳,李恒老,成近默,李亮淵,洪直弼.

       金邁淳, 宋煥箕, 李載亨, 李象靖, 崔愼, 鮮宇淶.

      

       윤근수, 정철, 기대승, 서기, 송익필, 성세창, 윤두수.

       기정진,임헌목,조병덕,이항노,성근묵,이양연,홍직필.

       김매순, 송환기, 이재형, 이상정, 최신, 선우래.

 

 

碑 左側面 中間部 / 崔英來 號淵, 都正, 全州人.  下段部 / 朴準箕 日新齋, 密陽人. 彭寬錫 孝仄堂, 浙江人

 

 

『공부자도통고금연원기념비/公夫子道統古今淵源紀念碑』後面

 

 

 

《讀書堂契會圖 》寶物 第867號
鷹峯山은 남산줄기 끝자락에 있다하여 終南山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종남산에 東湖讀書堂을 설치하였습니다. 이계회도는 삼단으로 구분지어 상단에는 篆書體로 '讀書堂契會圖' 쓴 제목을 中段에는 安堅풍의 筆致로 웅대한 모습의 응봉을 평풍처럼 두른 독서당으로 짐작되는 건물을 그렸습니다. 近景에는 楮子島와 돛단배들이 활기차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모두 9명의 계회도입니다. 좌로부터 柳成龍, 洪聖民, 辛應時, 李海壽, 李珥, 具鳳齡, 鄭澈, 鄭惟一, 尹根壽 모두 9사람이 독서당에서 가진 계회를 기념한 그림족자입니다. 그림의 사진상으로 유실된 부분이 있어 윤근수의 필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응봉 아래 아늑한 마을, 서울의 명당 중 명당일세. 기개 높은 선비들 모여 학문 쌓던 곳 그 명망과 瑞氣 강가에 서리서리 서렸네. 

絹本水墨102×57cm서울大博物館 所藏

 

남산木覓山에서 빗어 내린 산줄기는 매봉을 돋아 올리고 동으로 길게 뻗어 응봉을 솟아 놓고 강가에 그 능선은 소멸됩니다.



내 어려서도 보았던 오손도손 정겨웠던 강가의 옥정수마을은 과연 있었던 것인가? 群集된 아파트에 질려 그만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매봉 옆에 주산인 목멱산(남산)의 남산타워가 살짝 보입니다. 매봉과 달맞이봉 사이 두뭇개(옥수동아파트촌)를 담은 사진입니다.


 

아파트로 병풍을 친 달맞이봉입니다. 목멱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줄기의 맥은 저렇듯이 잘리고 깎아내고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응봉의 모습을 강 건너 둔치에서 담은 모습입니다. 지금도 부분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바위의 표면이나 골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옛 조선시대에는 중랑천 맑은 물이 산자락까지 흘러 아름답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어려서 서울흥인학교에서 함께 수학한 내 동무, 옥수동에서 5대 째 살고 있으면서 무척 고향 옥수동을 아끼고 사랑하는 벗입니다. 풍수가에 의하면 옥수동은 흑석동, 광장동과 더불어 서울의 3대 명당으로 그 중에서도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합니다. 내 보기에도 광장동은 東向 背山臨水의 明堂이요, 흑석동은 北向의 배산임수 명당이요, 옥수동은 전형적인 南向에 배산임수의 명당입니다. 童舞여 子孫萬代에 健康 富貴榮華 있으시라. 



이와같이 태고의 더께로 바위의 표면이 거무죽죽한 응봉과 달맞이봉을 압구정에서 바라볼 때 사철 푸르고 멋지게 비틀어진 소나무에 바위 틈 사이사이 진달래 없지 않았을 것이고 산 전체의 모습이 앞 맑은 무쇠막강물에 그림처럼 비취고 입석포 앞 저자도 모래사장에 갈대와 군무하는 철새 어우러져 사시사철 절경을 창출했을 것입니다.



옥수동 아파트 안쪽 산의 모습입니다. 멋진 자태가 아파트에 가려 빛을 잃었습니다.


 

  <옥수동 유래비>


 

길 한 편에 주차되어 있는 흰 차 지점이 玉井水가 매립된 위치라고 합니다.

 

   

《사한단/司寒壇》

두뭇개에는 조선초에 세워진 東氷庫 터가 있었고 동빙고 북쪽에는 司寒壇이 있었습니다. 이 壇은 水雨神인 玄冥氏에게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凍氷祭를 지내던 곳인데 지금의 달맞이봉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60년대까지도 제빙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겨울이면 꽁꽁 언 무쇠막강(금호동, 옥수동,한남동 앞 한강)얼름을 톱으로 켜내어 동빙고와 서빙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이면 서울시내 곳곳에 있는 얼음가게에서 시민에게 팔았습니다. 지금은 미타사 입구 앞 좌측에 司寒壇 표석을 세워 명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종남산 미타사 / 終南山 彌陀寺》


 

彌陀寺 境內 그냥 골목안 동네의 모습을 보는 느낌입니다.

이곳은 조대비의 원찰, 終南山彌陀寺라는 사찰입니다. 미타사는 普門洞 보문사(탑골승방), 崇仁洞 청룡사와 더불어 서울의 3대 비구니사찰입니다.

 

     

 《독서당 터 표석》
 옥수동전철역에서 독서당길로 이어지는 삼거리 전 우측에 있습니다.


  

 옛 독서당길은 광희문에서 응봉동과 금호동을 지나 옥수동을 거쳐 한남동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육참총장공관 뒤 매봉정상으로 가는 길입니다. 용산구와 성동구의 경계입니다.



습지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습지는 고갯마루 바로 아래 구릉과 구릉 사이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 부엽토가 깔린 곳에 샘이 있어 형성된 아담한 습지를 보완한 것입니다.

 

매봉정상에서 바라본 광나루로 굽어지기 전 롯데월드까지의 한강의 전경입니다.

해는 지고 땅거미 내리는데 저 아름다운 경관을 두고 돌아서자니 아쉬움 가득하네.



서산으로 해 지고 땅거미 내리니 때 맞춰 성수대교 지난날 허물로 희생한 넋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불 밝히는가 보다.



2017년 6월21일. 마주 보는 추억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