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 89

洛東江 東岸의 古墳遺物 2

가야의 수장급 무덤에는 富와 權力을 상징하는 다량의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다. 이들 유물은 현실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것과 정신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전자가 풍부한 무기, 무구류, 농공구류등의 존재로 상징되어 진다면, 후자는 이보다는 무속적인 성격이 강한 유물의 부장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동래 복천동 22호墳에서 출토된 이 청동제 칠두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김해 대성동 14호墳 출토 거울조각 팬던트, 23호墳 출토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四神鏡) 등 銅鏡을 귀히 여기고 또 부장한 점 등에서도 신앙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이 고분들이 당해지역의 최고 수장급 무덤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볼 때, 가야 사회의 지배 논리는 군사적 강제력에..

洛東江 東岸의 古墳遺物 1

낙동강 河口의 동쪽에는 금관국에 버금가는 유력한 權力集團이 존재했던 사실이 부산 복천동유적의 조사로 밝혀졌다. 《三國史記》에 전하는 居柒山國, 또는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의 瀆盧國의 實體가 그것이다.福泉洞 遺蹟은 당시 이 지역의 首長級들의 墓域으로서 무덤이 영조된 中心年代는 4~5세기代 이다 이들 수장급의  무덤으로는 일직선상(日字形)의 부곽을 갖춘 대형목곽묘大形木槨墓가 주류를 이룬다. 무덤내에서는 鐵鋌 등 풍부한 鐵器類와 토기 등이 대량 埋納되어 있고 殉葬된 人骨도 출토되어 당시 그들의 경제적 富의 축적뿐 아니라 정치적 권력 집중도 잘 보여준다. 복천동 유적을 營造한 세력의 성장기반으로는 철생산의 장악과 함께 馬具나 甲胄 등에 보이는 새로운 북ㅂ北方文物의 수용을 들 수 있다. 4세기대의  대형목곽묘..

가야 신라에 병합시기의 양식문화

562년 대가야의 멸망이후 가야지역은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급격히 신라문화를 수용하게 됩니다. 신라의 지방제도인 군(郡)-성 . 촌(城 . 村)으로 편제되고 신라양식의 토기와 굴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이 유행합니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어 갈 무렵 가야의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토기들은 신라양식으로 완전히 통일되면서 같은 토기문화로 바뀌어 갑니다.  통일양식토기란 6 -7세기경 신라가 자신의 영역으로 넓힌 한강이남과 강원도지역과 가야의 전 지역에 걸쳐 출토되는 같은 모양과 종류의 토기를 말합니다. 이 토기들은 굽다리가 짧고무늬도 단순하며 규격화된 같은 모양을 한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껴묻히는 양상도 비슷하여 낮은 굽다리접시(短脚高盃)와 목꺽인항아리(附加口緣長頸壺)를 주된 조합으로 하여 출토됩니다. 굴..

낙동강 동안의 고분과 가야 . 신라 정세와 문화의 흐름

서기 400년대에 들어서자 낙동강 동쪽의 여러 지역에서는 구덩이 속에 깬돌로 직사각형의 벽을 쌓아 주검을 위에서 넣고 뚜껑돌을 덮은 구덩식의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竪穴式石槨墓 . 石室墳)이 널리 만들어졌습니다. 구덩식돌방무덤은 점차적으로 한 쪽 벽을 출입구로 사용하여 주검을 옆으로 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