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우리나라 최고의 古建築物이며 세계문화유산기념물에 등재된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봉정사 답사를 생각했으나 교통사고를 당한 후 여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40도를 육박하는 무더위에 또 미루어 오다가 오늘은 구름이 낀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자전거를 가지고 길 떠나기로 했다. 안동행 첫 차(용문역07시18분)를 타기 위해 구리역에서 06시15분 전철을 탔다.
주말아침이건만 전철안은 텅 비어 실내가 쾌척하다. 너무 무덥다보니 내 집만 한 피서지도 없겠다.
구리역을 출발하여 50여분을 달려 도착한 용문역에서 청량리(06시40분)발 안동(10시11분 도착)행 열차를 기다린다. 구름이 끼고 아침이건만 후덥지근하다.
안동행 열차 안에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칸은 전에 스낵바 비슷한 열차카페였는데 전철 객실처럼 개조했다 좌석표가 매진될 때 입석표를 끊은 승객을 위한 객실이다. 문쪽 구석에 본시부터 있던 자전거 유치대가 서넛 그대로 있다 그러나 있던 것을 없앤 것도 있다.
승객을 내려주고 태우기 위해 정차한 제천역이다. 제천은 내 짝지가 있으니 남다른 곳 어찌 아닌가!
10시11분 정확한 시간에 안동역에 도착, 열차에서 내려서 담은 플랫폼의 모습이다. 용문에서 7시18분 출발하여 2시간53분만에 도착하였다.
안동하면 양반이 생각난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내노라 하며 권세를 누린 인물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이름 하여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의성 김씨, 풍산 유씨, 풍산 김씨, 고성 이씨, 진보 이씨 어디 그 뿐인가 書院도 많고 宗宅도 많다. 이참에 나열해 본다. 화천서원, 병산서원, 임천서원, 고산서원, 서산서원, 도산서원, 묵계서원, 호계서원, 예안향교, 안동향교, 기양서당, 월천서당 등 향교2과 서당2까지 12개나 된다. 여기서 배출된 양반의 종택은 또 얼마나 될까! 향산고택, 치암고택, 주하동경류정종택, 안동권씨승소종택, 고성이씨탑동파종택, 임청각, 송곡종택, 계상고택, 퇴계종택, 농암종택, 노송정종택, 의성김씨종택, 정재종택, 성성재종택, 전주류씨무실종택, 학봉종택, 대산종택, 안동김씨종택, 가일수곡고택, 안동풍산김씨종택, 하회마을 풍산류씨종가, 등 21가옥이다. 이러하니 양반고장이란 말이 나올만도 하겠다.
驛舍를 나와 바로 안동여행안내소에서 여행자지도를 챙겨서 봉정사 가는 길을 살펴보고 길 떠난다. 시각은 10시30분, 세컨드 애마야 오늘도 너를 믿는다. 잘 부탁해..!
도로를 감싸듯이 길게 橫으로 세워져 있는 '西義門' 은 이 지방 사람들의 自矜心의 發露인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란 슬로건의 상징적 건물이다. 봉정사로 가는 길은 저 문을 지나기 전에 우측 924번 도로로 진행한다. 이 지점까지 오는 동안 삼거리에 사거리에 오거리도 있어 길을 묻고자 사람을 찾아도 사람이 없다. 무더위에 꼼짝을 않는 건가! 소중한 시간을 소득도 없이 보냈다.
길고 긴 오름이다 무더위 때문에 더욱 길었을 것이다.
봉정사까지 4km, 오름은 계속이다. 이 오름이 있기에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힘들이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내림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내가 그리 살아오지 않았던가 생각하니 즐거운 고통이다. 어려움을 즐기면 반드시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어려운 오르막 중에 내림의 즐거움도 맛보지 못한 채 봉정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되돌아 갈 때를 생각하면 어찌 즐거운 기쁨이 아니리오! 매표소에는 60대의 남자가 입장권을 관리하고 있었다. 경로 무료입장을 확인 받고 미안해서 쉼터 의자에 놓고 온 배낭에서 롯데백화점 내 제과점에서 사갖고 온 잦과 과일을 넣어 만든 페이스트리 빵 3개 중 하나를 꺼내다 주니 너무 고마워한다. 그 모습에 나는 그 이상 기쁘고 행복했다.
무더운 날씨건만 사찰로 오르는 경내는 건강한 숲이 품어내는 기운으로 상큼하고 싱그럽기 그지없다.
天燈山 鳳停寺는 1971년 極樂殿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그 창건 시기가 1,300여년 전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能仁大師가 창건한 천년사찰로서 그 아름다움 우리나라 고건축의 白眉라 할 수 있겠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능인대사가 천등산 굴에서 수도하던 때 어느 날 종이로 鳳을 만들어 도술을 불어 넣어 날렸다 그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했다는 說과 능인대사가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여 절 이름을 봉정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목제 건축물이 이만한 세월을 겯뎌 낸 만큼 전해 오는 이야기 또한 신비한 전설이 아닐 수 없다 창건 후 능인은 이곳에다 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하였다고 한다. 이후 6,25전쟁 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經典과 寺誌를 모두 불태워 역사를 알 수 없다. 그러나 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는 딸린 암자가 9개가 있었으며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墨書銘을 통해 朝鮮 初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논밭 500여 結을 소유하였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찰내 건강한 나무의 기운을 받았음인가 달려오느라 늘어졌던 몸에 피가 돌듯 생기가 마구 솟아난다.
어찌 이리 기묘하게 생겼느냐? 천등산 기를 너무 받아 주제할 수가 없었느냐?
정문격인 萬歲樓 누각위에 "寺停鳳山燈天" 라는 현판이 보인다. 이 돌계단은 출입금지 되어 만세루 아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회해서 바로 만세루 뒤편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현재 이 절에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과 보물 제55호에서 국보 제311호로 승격된 대웅전, 보물 제488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 고금당 등 지정문화재와 승방(無量海會), 萬歲樓, 雨花樓, 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또한 대장경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經板庫와 높이 3.35m 크기의 고려 때의 3층 석탑(경북유형문화재182호)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 교구 孤雲寺의 末寺로서 1999년 영국 여왕 에리자베스 2세가 4월21일 방한했을 때 안동하회마을과 봉정사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지난 6월24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개막한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6월30일 한국의 7개 산사(산지승원)를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그 어렵고 까다로운 유네스코 심사를 거쳐 등재되는 영예를 가졌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들 7개의 사찰이 7-9세기에 창건된 이후 현재까지 이어온 점에서 우리나라 불교의 깊은 역사성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山地라는 지형적 요인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한국식 배치로 내 외부 공간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점, 한국 불교만이 갖는 統불교적 사상과 의식이 있고, 승려 및 山寺에서의 생활과 산사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높이 보았으며 이런 특징들이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기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번에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 산사는 '통도사(경남 양산), 부석사(경북 영주), 봉정사( 경북 안동), 법주사(충북 보은), 마곡사(충남 공주), 선암사(전남 순천), 대흥사(전남 해남)이다.
만세루 문 앞에서 바라본 만세루 정면이다 문 앞 공간이 짧아 유감스럽게도 누각전체를 담을 수가 없다.
문에서 정면으로 대웅전 안 부처님을 뵐 수가 있다. 어떤 중생이 오는가 내려다 보고 계시는가 보다.
《봉정사 만세루/鳳停寺 萬歲樓》경북 유형문화재 제 325호
이 건물은 대웅전 앞에 누각형태의 2층 건물로 사찰 입구에 해당되며 2층에는 法鼓와 木魚가 비치되어 있다. 숙종 6년(1680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는 이 건물은 원래 德暉樓로 불리었으나 언제부터 만세루로 불리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사찰의 경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정면은 2층이고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방식은 부석사의 安養門과 같다. 만세루는 17세기 후반의 건실하고 당당한 건축수법을 잘 나타내고 있어 조선 중기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만세루 건물 안 동편에는 범종을 서편에는 목어고, 법고, 운판 등 법전사물이 설치되었던 것을 건물의 노후로 인해 무거운 범종은 따로 범종각을 건립하여 옮긴 것으로 보인다.
못질 하나 없이 나무로만 홈을 파서 잇고 골격을 세워 2층을 짓고 흙으로 벽을 치고 흙을 구워 지붕을 올리고 자연의 재료를 자연스런 손재주로 지은 그 지혜가 경탄스럽고 탄복할 일이다.
만세루에는 서편에 불전사물 중 목어와 법고와 운판 등 비교적 가벼운 것만 걸렸다. 건물도 나이 들고 보니 무거운 범종은 견딜 수 없도록 무거웠을 것이다. 범종이 걸려 있었을 동편은 텅 비었다.
《봉정사 대웅전/鳳停寺 大雄展》(보물 제 55호에서 국보 제311호로 승격)
봉정사의 중심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 앞에는 축대를 높이 쌓고 윗면에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세웠으며 안에도 마루를 깔았다 법당 안 중앙 뒷면에 높은 기둥 2개를 세워 그 기둥에 의지하여 불단을 만들었다.
기둥 사이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건립된 후 변경되었으나 공포식 구성에서 힘있고 단순한 수법은 초기의 다포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단청은 건립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 시대적 요소를 보여주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퇴락하여 2000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簇子로 된 靈山會上圖를 벽에 걸고 그 앞에 석가모니불을 主佛로 좌우 挾侍菩薩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빼어난 대웅전 추녀마루의 구조가 참으로 아름답다 배흘림기둥머리 홈에 끼워 맞춘 창방 위에 산방, 그 위 두부, 추녀, 그 위에 사래 위에 토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합이 이뤄 낸 조선시대 건축미를 대표하는 격조 높은 미술품이 아니겠는가!
대웅전 뒷모습이다.
《봉정사 무량해회/鳳停寺 無量海會》
무량해회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로 법당의 중심 마당으로 향한 튓마루를 단아하게 하여 내방객을 맞는 방식이라든지 높이가 크게 차이가 나는 구릉 쪽에 마루를 내어 수직의 경직감을 여유 있게 처리하는 방식으로 장중하고 품격 있는 주변의 건물들과 잘 어우러진다.
《봉정사 화엄강당/鳳停寺 華嚴講堂》보물 제 448호
이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남쪽에 2칸 부엌, 북쪽에 4칸 온돌방이었으나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지금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있었다.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불당에 비해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다. 측면 중앙에 사각기둥을 하나 세워 대들보를 받쳤고 그 사이에 창을 내었다. 1969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선조21년(1588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단조롭지만 단아하고 간결한 멋이 있는 화엄강당의 柱心包式 맞배지붕의 측면이다.
《봉정사 극락전/鳳停寺 極樂展》국보 제15호
이 건물은 우리나라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1972년에 실시한 보수공사로 인해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 후 첫 수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이며 그 후 조선 인조 3년(1625년) 등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다. 원래는 大藏殿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 가구의 古格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돌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였으며 전면과 후면 중앙 칸에 판문을 달았고 양쪽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다. 불당 중앙 뒤쪽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極樂展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법당으로 무량수전 또는 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극락전 안에 모셔진 이 아미타불은 극락의 주불로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중생을 위해서 설법하고 있으므로 극락전은 이에 상징성을 갖는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사찰에서는 극락을 의역한 '安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안양문, 안양교, 안양루 등을 갖추기도 하는데 그 좋은 예로 영주의 부석사가 있다. 보통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져 있다. 봉정사 극락전에 걸어놓은 족자탱화에는 모두 그려져 있으나 불상은 아미타불만 봉안되고 두 협시보살은 자리만 마련되어있다.
정교하나 조잡하지 않고 화려하나 속되지 않은 문양과 구성이 더없이 찬란하다.
극락전 측면이다. 아름다운 건축미와 섬세하고 중후한 단청과 문양의 이 건물은 五樑柱心包式의 우리나라 最古의 건물이다.
柱頭, 小첨차, 大簷遮, 外目道里, 柱心道里
《안정사 석조여래좌상/安定寺 石造如來坐像》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44호.
극락전 옆에 모셔진 通肩衣를 두른 이 불상은 신체에 비해 작은 佛頭에는 螺髮(나선형 머리카락)과 큼직한 肉髻(살상투)가 인상적이다. 당당하고 둥근 어깨에서 느껴지는 양감에 비해 가슴은 비교적 빈약하고 결가부좌를 튼 하반신을 높여 중량감과 안정감이 있다. 손은 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온갖 번뇌를 물리치고 도를 깨닫는 순간에 짓던 손동작이다.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불상에서 주로 볼 수 있는 手印이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기쁨을 석가모니가 깨우침을 얻은 手印에 상응하는 의미를 두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이 수인은 결과부좌한 座像만이 취하는 것으로 立像이나 倚像에서는 볼 수 없다. 이 불상은 9세기 경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불상은 안동군 월곡면 미질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곳에 있던 안정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본래는 蓮花座臺에 안치된 석불상인데 안정사 주지가 방에 안치 하면서 금분을 칠해 원형이 다소 손상되었다고 한다. 臺座와 光背도 없어졌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되면서 1973년부터 봉정사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봉정사 고금당/鳳停寺 古今堂》보물 제 449호
맞배지붕에 정면 2칸 측면 3칸의 이 건물은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전각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요사체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 복원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16년에 고쳐 지은 사실이 있으나 처음 건립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당초 남쪽에는 雨花樓가 있어서 남쪽 지붕이 이 건물과 연결되고 그 아래쪽을 부엌으로 사용하였는데 1969년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해체하면서 철거하였다.
《봉정사 삼층석탑/鳳停寺 三層石塔》경북유형문화재 제182호
한 변의 길이가 237cm인 하나의 地臺石 위 상면에 兩가에 隅柱(모서리기둥)를 중심面에 撑柱(받침기둥)을 새겨 3면으로 나눈 후 각 면에 귀꽃이 있는 眼象을 1구씩 새긴 하층기단 면석 위에 약간 경사지게 처리된 갑석을 올렸다. 상층기단면석은 하나의 정방형석재에 양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새겼다. 상층기단 갑석 역시 1매의 판석으로 下面에는 얕은 副椽(옥신고임)이 있고 상면에는 3단 받침을 彫出하여 1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정연히 새겨졌는데 탑신 정면에는 자물통이 돋을새김 된 문비형門扉形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의 하면에는 1층 3단, 2.3층은 4단의 옥개받침이 낮게 彫出되어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길이가 짧아 둔중한 느낌을 주는데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되고 있다. 옥개석의 상면에는 角形 2단의 탑신 바침이 조출되어 있다. 相輪部에는 鐵製 擦柱와 함께 寶珠, 仰花, 覆鉢, 露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탑은 2층 기단을 구비한데다 하층기단의 안상과 1층 탑신의 문비형 등 신라 말기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기단부에 비하여 탑신부의 폭이 좁고 각 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이 적으며 옥개석 역시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 중반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강당의 맞배지붕과 대웅전 처마에 달린 풍경의 모습을 담았다.
佛展四物의 중심이 되는 이 범종은 만세루에서 새로 지은 범종각으로 옮겨온 것이겠다.
대웅전 좌측 길로 조금 내려서니 바로 영산암이 높은 돌계단 위에서 나를 기웃거린다.
《영산암/靈山庵》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
영산암은 봉정사의 부속암자로서 응진전,염화실,송암당,삼성각,우화루,관심당 등6개의 棟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건물의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우화루 앞 문으로 들여다 보니 마치 조선시대 儒家的 대갓집 안채를 보는 느낌이다.
영산암 건물 배치와 구조는 전체적으로 담장도 없이 건축물로만 'ㅁ'자형 으로 구성되어 있어 외부에서 볼 때 폐쇄적이고 고립무원 같은 느낌이었지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지형의 높이를 이용하한 3단의 마당을 두고 우화루의 벽채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 등에서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을 보이고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영산암 입구에 해당하는 雨花樓의 현판은 원래 극락전 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고 전한다고, 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법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산암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다. 위는 누각으로 처리되어 철옹성 같은 느낌을 덜어냈다.
꽃비누각 아래 문을 들어서니 바로 돌계단이고 2단 중간층 좌우로 송암당과 건강하고 잘 생긴 소나무와 이제 막 화사하게 활짝 핀 木백일홍 붉은 꽃이 자칫 음영이 드리울 분위기를 밝게 받혀주며 觀心堂을 마주하며 영산암의 중심이 되는 위치이다. 위로 마주 보이는 3단에는 응진전과 그 옆에 삼성각이 있고 그 측면에 염화실이 자리하고 있다.
응진전 안에는 중앙에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을 그 좌측에 여의를 든 문수보살을 우측에 연꽃을 든 보현보살를 협시로 그리고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설법을 듣던 나한을 모신 곳을 응진전이라 한다.
《三聖閣》
삼성각은 산신령, 서낭당 등 우리나라 토속신앙을 불교에 접목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옆 건물은 염화실이다.
주지스님의 거처로 쓰이고 있는 松岩堂이다. 士林들이 모여 詩를 짓고 학문을 논하고 교분을 나누는 정자처럼 우측에 마루가 붙어 있다.
송암당과 마주하고 있는 觀心堂 마음을 들여다 보는 곳인가? 그렇다면 참선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관심당과 우화루는 'ㅁ'자의 모서리처럼 이어져 있다.
우화루 2층의 누각 옆 방 하나 茶香室이라는 현판대로 라면 차 향기 스며나는 곳이겠다. 건물에서 대들보나 받침목을 보면 휘고 구부러진 나무들을 생긴대로 절묘하게 응용하여 자연스럽고 꾸밈이 아름답다.
다향실은 'ㅁ'자의 모서리처럼 松岩堂 튓마루로 이어진다.
이제 영산암 우화루를 나와 일주문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다.
지조암으로 가는 길인데 공사가 한창이다.
봉정사 안내판과 그 옆 근심을 더는 건물이다.
서의문을 마주보고 있는 송야천교, 이 자리 건너편에서 서의문으로 가기 전에 우측 도로로 빠져야 봉정사로 가는 도로이다.
이제 다시 안동역에 도착했다. 안동역 광장 앞 풍경이다.
기념은 늘 얘(세컨드 애마)가 하겠단다.
안동역~봉정사~안동역 33.62km
안동역(10시30분)-(이동시간 2시간9분)-봉정사도착(12시39분)-(답사시간1시간31분)-봉정사출발(14시10분)-(이동시간1시간18분)-안동역(15시28분) 총소비시간 4시간 58분.
《安東 東部洞 五層塼塔》(보물 제56호) 안동시(安東市) 운흥동(雲興洞) 소재(所在),
한국전쟁 당시 일부 파괴되었던 것을 1962년 박정희 대통령님의 문화 창달과 부흥정책지침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된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입니다. 탑은 건립된 이후 여러 번의 수리를 거치면서 원형이 일부 변경되어 외관이 적지 않게 손상되어 있습니다. 이 곳은 法林寺의 옛터라고 전하여 지는데, 서편 5m 지점에 떨어져 있는 幢竿支柱가 이를 뒷받침하여 줍니다.
이 탑은 원래 7층이었으며 법흥사 탑과 같이 금동제(金銅製)의 상륜부(相輪部)가 있었다고 전해오며 탑의 각 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형식적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지붕돌 윗면의 기와와 함께 목탑의 형식에서 비롯된 잔재로 보여 집니다.
남쪽 面 2층에는 인왕상(仁王像) 2구를 조각한 화강암 판석(板石)이 설치되어 있고 1층 탑신에는 화강암으로 중방과 문설주가 있으며 문은 없습니다. 감실은 남쪽면에만 3층 탑신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면에는 즉 동.서,북쪽에는 2층 몸신에 각각 작은 감실이 마련되어 있을 뿐 다른 양식은 없습니다. 탑의 높이는 8.35m, 탑신 길이27.5cm, 너비 12.5cm, 두께 6cm의 무늬 없는 길고 짧은 벽돌을 이음이 어긋나게 쌓았습니다.
「 안동시 운흥동 당간지주(安東市 雲興洞 幢竿支柱)」경상북도 유현문화재 제 100호
이 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로 높이 260cm 입니다. 兩 지주의 윗부분은 일부 파손되었고 두 지주 사이에 당간을 받쳤던 둥근 당간초석(幢竿礎石)만 남아 있는데, 문양이나 어떤 꾸밈도 없이 간결하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이 당간지주가 소속되어 있었던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동쪽에 있는 (약 5m 거리) 동부동 오층 전탑과 같은 사찰인 법림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울러 당간지주는 절 마당에 세운 것으로 볼 때 옛 법림사 터라는 것을 추측케 하는 자료라 볼 수 있으며 《영가지(永嘉誌)》의 법림사 전탑에 관한 기록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범림사에 관한 기록에서도 이 당간지주와 동부동 오층 전탑이 법림사 소속임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동역 연리목'에 얽힌 애틋한 사연>
안동역사(驛舍) 옆에는 작은 공터가 있는데 그 공터 안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오층 전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오래된 벚나무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되기 이태 전쯤, 안동역에는 한 젊은 역무원이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겨울 밤 열차를 맞이하러 나갔다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잃고 플랫폼에 쓰러지는 한 처녀를 발견하고는 역무실로 업고와 정성스레 간호해 주고 집까지 바래다주었답니다. 처녀는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 차 귀향을 하던 차였습니다. 며칠 뒤 처녀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그 역무원을 찾아 왔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되었지요. 당시 주변에는 두 사람이 만나서 시간을 보낼 만한 이렇다 할 장소도 없고 해서 둘은 늘 오층 전탑 주위를 거닐거나 당간지주에 기대앉아 사랑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며 벚나무 두 그루를 함께 심었습니다. 그러다 이년 쯤 뒤 그 역무원은 갑자기 일본 고등계 형사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독립단"의 단원이었는데 일본 육군 기념일을 기해 안동경찰서를 기습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정보가 새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왕 쫓길 바에야 만주로 건너가 제대로 독립운동을 해볼 생각이었지만 워낙 화급하게 쫓기는 몸이라 처녀를 만나 자신의 뜻을 전할 경황이 없었지요. 그래서 동료에게, 처녀가 걱정할 것을 우려해 ' 같이 심은 벚나무가 죽지 않는 한 자신에게도 별 일이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만주로 떠났습니다.
며칠 후 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처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수시로 찾아와 전탑 앞에 서서 간절히 기도를 하고 벚나무를 보살폈습니다. 그해 여름 광복이 되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던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6.25전쟁이 일어나 그녀 역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제일 먼저 안동역부터 찾았습니다. 벚나무의 생사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기적처럼 역에는 그 역무원이 와 있었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생활을 하던 그는 해방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북한군에 편입, 장교로 지내게 되었고,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 안동까지 내려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국군의 반격으로 다시 북으로 후퇴해야 할 처지가 되었지만 벚나무를 보고는 그녀 생각에 도저히 떠날 수가 없어 그만 국군에 투항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이곳으로 찾아와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기뻐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이제 그 두 사람의 소식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심어 놓은 벚나무는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말해주려는 듯 연리목처럼 밑둥지가 하나로 붙은 채 오늘도 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고 있는데, 요쯤도 안동역을 찾는 젊은 연인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벚나무를 찾아가 그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맹세하곤 하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찾아와 보니 그 연리목은 죽어 베어지고 없구료 그 연인들이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일까..
2012년 8월14일 왔을 때는 비록 건강하지는 못했어도 이렇게 살아 있었는데..
내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나 지극히 아끼는 나무가 있는데 주인이 돌아갈 즈음이면 싱싱하던 나무가 시름없이 앓다 주인보다 앞서 죽어 주인의 운명을 예고하는 일입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시고 그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작가 최순우 선생과 그 분이 애정을 아끼지 않던 돈암동 그 분 자택 뒤뜰에 있던 푸르고 건강하던 벽오동나무가 어느 해 여름 줄기는 푸르고 싱싱한데 잎이 누렇게 시들어 한 잎 두 잎 떨어지던 어느 날 선생은 대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마치고 쾌유되시는듯하니 나무도 다시 싱싱하게 자랐습니다. 이듬해 1984년 여름 다시 벽오동은 줄기는 푸르고 싱싱하건만 푸른 잎은 한 잎 두 잎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며 시름시름 하다가 9월 중순 경 잎을 모두 떨구고 결국 죽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선생도 다시 병원으로부터 췌장암을 판정 받고 그 해 겨울 12월16일 운명하셨습니다. 또한 나라에 큰 재앙이나 큰 인물에 변고가 생길 때는 우물이 뒤집어 진다든가 이변이 생긴다는 옛 이야기는 이야기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시해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경복궁 중앙박물관(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옆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과 잔디밭에 엄청난 노래기가 발을 디딜 수 없이 떼를 지어 청와대 쪽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연 나흘이나 끝없이 무리지어 가는데 당시는 이 엄청난 노래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으며 한결같이 청와대 쪽으로 기어가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기아에서 허덕이는 이 나라와 국민을 일으켜 세우고 살린 다시 볼 수 없는 훌륭하신 지도자를 흉탄에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국가원수를 시해하는 슬픈 일이 생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물이나 나라에 흉사가 있을 때 자연에서 먼저 예기치 않은 이변을 예고하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실입니다.
※ 連理木 과 連理枝 : 연리목은 두 나무의 밑둥이 자라면서 하나로 붙은 것을 말하며 부부간의 깊은 사랑에 의미를 가지며 연리지는 서로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붙은 것을 말하며 젊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말합니다.
(안동역에서) 김병길 歌詞, 노래 진성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오는 건지 오지 않은 사람아 안타가은 내 마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어치피 지워야할 사랑은 꿈이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닾는데 안오는 건지 못오는 건지 대답없는 사람아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다리는 안동역에서,"
안동역에서,
하얗게 내리는 것은 눈이 아니라네 불볕이 타고 또 타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것이라오 하늘의 뜨거운 사랑인가! 미약한 중생의 많은 죄에 노여움이신가! 그 열화 속을 작은 티끌 같은 존재 마저 태우고자 달려왔네.
2018년8월11일(토요일) 안동역에서,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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