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丙申年도 어느새 양력설과 음력설 모두 보내고 2월의 후반기 雨水에 들어섰다. 이때면 꽃샘추위라는 매서운 날씨가 잠시 기승을 부리기도 한다지만, 오늘은 날씨도 많이 풀리고 봄기운에 나뭇가지에 물오르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한 청명한 날에 소싯적부터 고향이 서울인 초동친구들 9명이 전철 서울역10번 출구에서 만나 후암동 옆 남산(木覓山) 산책길을 들어섰다. 어려서 신당동 살 때 남산 하면 장충단으로 오르는 길만 생각했고 오르내렸지만, 서울역인근 양동으로 오르기는 처음이다. 옛날에는 음침하고 문란한 곳이어서 청소년이 다닐 수 없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도시정비로 인해 산뜻도 하지만 파란하늘에 밝은 햇살로 더욱 새롭고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이가 나이인 만큼 큰 병마를 갓 이겨낸 동무도 있어 세상에 더없을 조선시대 선비마냥 바쁠 일이 없이 따사로운 햇살을 피부로 즐기며 봄기운을 만끽하며 초동의 순수함을 나눴으니 더없을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양도성의 축조형식/漢陽都城 築造形式>
5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한양도성은 축성시기에 따라 성벽의 축조형식도 다르게 차이를 주고 있다. 조선왕조 태조 때의 축조된 초기의 성벽은 주로 山地지역에서 채석하여 깬 거친 돌을 이용하여 平築하여 쌓아 올렸고, 세종 임금 때에는 平地와 丘陵地에 주로 축조되었는데, 이 시기의 성벽은 잘 가공된 장방형의 돌로 아래쪽은 규격이 크고, 상부로 가면서 차츰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이후 숙종 때에는 전란 등으로 훼손된 성곽을 전면적으로 수축하였는데, 이때는 正方形의 돌을 이용하여 수직에 가깝게 성벽을 쌓아올린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한양도성/漢陽都城>>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조된 城이다. 1396년 (태조5년)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內四山의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수축하였다.평균높아 약5~8m,전체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토록 (1396년)~(1910년) 514년간 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면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4개의 큰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4개의 작은 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체 구간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고,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은 다시 복원되었다.
한양도성 외측 모양이다. 도식적 형식과 높고 각진 현대식 건물에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성축은 유연한 곡선미와 단아하고 위용이 있어 시각적으로도 편함을 주고 있다.
<태조 때 축조된 城乭의 규격과 짜임새>
1396년1월과 8월, 두 차례 공사를 통해 축성을 마무리하였다. 山地는 石城, 平地는 土城으로 쌓았다. 성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세종 때의 축조된 城乭의 규격과 짜임새>↓
1422년 1월, 도성을 재정비하였다. 이때에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성돌은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짜임성 있게 사용하였다.
<숙종 때의 축조된 城乭의 규격과 짜임새> ↓
1704~?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새로 쌓았다. 성돌 크기를 가로, 세로 40~45cm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 하였다. 이로써 성벽은 이전보다 더 견고해졌다.
<순조 때 축조된 城乭의 규격과 짜임새> ↓
1800~ 순조 때에 가로, 세로 60m 가량의 정방형 돌을 틈새 없이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렸다. 각자상석은 여장에 있다. (현재 학술연구 진행 중이다.
한양도성 안쪽 풍경으로 힐튼호텔이 보인다.
<사색의 공간>
남산내 공원으로 백범선생의 호를 따서 백범광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남산공원 백범 광장>
모진 세월을 겪고 이겨낸 훈장처럼 빛나는 해방둥이의 자랑스런 모습이다. 박지철, 이원형, 이경희 Bravo!
기라성 같은 빌딩들이 내려다보이는 옛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호젓한 길이다. 옛 모습 옛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기도...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조선 시대 명신 백사 이항복 선생의 10대 직계손으로 서울 저동 13번지에서 1889년 12월9일 출생하여 1969년 4월17일 별세하셨다.
선생은 대한제국 신진개화 관료로서 약관17세에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외교부 교신국장, 한성재판소장, 평안남도 관찰사(평안감사) 등을 거쳐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주도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진흥하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왕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45년 해방 때까지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재직하여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을 계승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7년 성재학원 신흥대학(現경희대)을 설립하였다. 1948년7월20일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1959년 4월17일 6,25전쟁으로 피난처인 부산 동래에서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백범 김구 선생 동상>
난세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 누구라도 선각자이신 이 분을 모르시리..
<안중근 의사 시비>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아시는 우리의 불세출의 영웅이십니다. 다 쓰러져가던 우리의 자존과 패기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민족혼에 자신을 초개같이 산화시켜 도전과 웅지와 자긍심과 독립심을 일깨워 주신 이 나라의 진정한 장군이요 선구자요 우리 민족의 깃발입니다.
<안중근 의사 애국시>
"사나이 뜻을 품고 물 밖으로 나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을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들 마세." 一九ㅇ八 六月 두만강 전투에서,
"합성산패 만고정리 / 合成散敗 萬古定理"
" 견리사의 견급치명 / 見利思義 見危致命 "
'눈앞에 이익을 보면 먼저 의리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에 내 몸을 바친다.'
"안중근 義士 광장"
이 광장을 지날 때 잠시나마 하늘을 우러러 저 파란하늘 어딘가에서 우리를 보고 계실 수호신 안중근 의사께 자세를 가다듬고 경의를 표합니다.
남산의 소월길에서 "素月 金廷湜 詩 '산유화'"
중학시절 이성에 눈을 뜨고 소월시집을 몽땅 외우다시피 하여 연애편지를 쓰던 추억이 뭉게구름처럼 둥실 떠간다.
동무야, 너도 구름처럼 부푼 시절에 소박한 소녀에 대한 애틋한 정이 있었나 보다 소월 詩碑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뜨질 못하니..
" 남산 타워"
조상 대대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그렇게도 올라가 보고 싶던 저 타워를 지금까지도 올라가 보지를 못했는데, 지금 그 타워 옆에 있건만 나이 稀壽에 이르니 어릴 적 그 소망 어디로 가고 공자의 '從心所欲踰矩'란 말이 어슴푸레하다.
젊어서 배울 때나 놀 때 우리는 늘 어서 배우고 신명나게 놀고 무엇이든 빨리 했었지, 그런 우리도 이제는 느림의 美學을 터득 하였는가 그런 나이가 되었는가, 이렇게 앉아 담소의 느긋함에 향기가 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자니 단기 4291년 3월3일 졸업식 전에 단기 4290년 가을 졸업앨범용으로 사진사가 흥인 모교 강당 앞에 준비해온 3단식 발판 위에 3출로 앉거나 서서 졸업앨범사진을 찍었던 그 어느 날이 아리도록 그립다. 『단기에서 (-2333)을 + 하시면 =서기』
우측 앞줄 左坐, 범호, 경희, 인남, 종순, 종득. 立座 규명, 기창, 원형, 지철.
종득이와 기창이의 사진을 보니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어쩜, 이렇게 옛 분위기가 변함이 없다더냐! 기창아 종득아 사진에서 너희의 어린 시절의 품성을 흐트러짐 없이 볼 수 있어 이 또한 즐겁다.
모자를 반듯하게 쓰고 차렷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던 기청이는 언제나 모범생답고, 모자를 이마 위에 걸치듯이 쓰고 웃도리 단추를 풀어 헤치고 발을 벌리고 조금은 불량기 도는 모습을 한 종득이는 자연스럽지만 언제나 멋진 놀짱같네..
<인남이와 종순이>
사진을 보니 중앙시장 안에 있던 청계극장 앞에서 놀던 얘들이 혹시 너희가 아니었는지.. 알쏭달쏭 하다.
여기는 모두 6학년 5반 일세.
서울이란 공룡 속에 이리 호젓도 하구나, 남산오솔길 혼자저리 걷노라면 무슨 생각이 날까. 주변의 人之常情, 살아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아님 속세를 등진 구도자가 될까! 등에 진 배낭에 그 모두가 담겼으리..
오늘의 일일초청교사 기창이의 아버님 박지철 선생님, 인생특강을 하고 계신다. 1,2,3번 학생 원형, 인남, 종순군의 청강 모습에서 모범생임을 알겠네. 4,5번 학생. 기창이는 카톡에 정신없고, 경희는 지루한 강의에 열기 오르는 몸을 위해 재킷을 벗는 일에 몰두하고. 담임 종득 선생님은 기특한지 범생들만 바라본다.
학부모일일초청교사 기창이의 아버지 지철 선생님, 그래서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냐! 카톡에서 벗어나지 않는 기창, 아버지는 그런 기창은 모른척 범생 인남학생의 질문을 들으시고 있다. 담임 종득 선생님은 그런 기창이를 알밤을 먹이고 싶어도 참고 참았다지 아마..
초가지붕을 올린 작은 이 건물은 무엇일까, 기상에 관한 것이 더냐, 하얀 백자기에 정화수 담아 올리고 두 손 모아 염원하는 곳이 더냐, 그 무엇인지 까닭이야 내 알 수 없으나, 난 그냥 초가지붕이라서 그냥저냥 좋구나...
고색 아름다운 이 성역에 누가 허리를 자르고 아스팔트로 길을 늘어놓았느냐 이제라도 성벽허리 이어주고 저 검은 길 걷어내고 그곳에 문을 내고 오솔길을 내어다오.
옛 한양성벽을 따라 계단이 숨차게 따라 오르고 있네.
기나긴 세월에 묻혔어도 그 위용 잃지 않았는데 고풍의 도성 밖 솟아있는 빌딩이 심통을 부린다.
살아온 여정이 참으로 구성지다. 너는 초록으로 그렸고, 너는 남보라에 너는 노랑에 붉디붉은 색깔로 하나같이 곱게 색칠을 해서 모두 아우러지니 그 정경, 참으로 아름답구나! 무지개처럼..
얼굴에 수십 겹 세월이 덧칠했건만, 마음은 어찌 이리 갓 피워낸 듯 파랗게 피어나고 있다더냐! 보는 내가 따습고 희망이 돋는다.
흘러간 세월에 수없이 지나간 젊은 날의 肖像이 발길마다 부여잡건만, 마음은 처음처럼 설레기만 하여라..
삼거리에서 동국대학교 본관으로 들어서는 언덕을 넘어 오늘도 우리는 하루를 등에 짊어지고 세월을 넘는다.
4호선 동국대학교 (장충단)역으로 가기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지만, 내일이면 다시 붉은 태양을 맞으리라.
저 계단을 내려와 밤을 맞이 하겠지만, 내일이면 다시 붉은 태양을 맞으리라.
인남이의 안내로 찾아든 곳은 '해물찜' 주인의 솜씨가 좋아서 맛있었던 것인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남아, 나는 생각했다. 너의 도타운 정이 담뿍 담겨서 일거라고.. 고맙다. 동무들아, 벗들이여~~!
여러 가지 해산물에 고루 갖춘 양념을 넣어 찜한 것에 살가움이 담뿍 하니 그 맛을 뉘라 알리오, 맑은 술 막걸리 구분 없이 왜 그리 달달하고 잘도 넘어가더냐 그냥 눈물이난다. 너도 나도 모두가 고맙구나..
맛깔스런 도타움을 마련해 준 인남아, 그리고 함께 한 동무와 함께 나누지 못한 동무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드린다.
오늘 우리에게 붉은 열정의 떼깔로 눈은 즐겁게 맛은 기가막히게 좋은 양분 담뿍 담긴 음식으로 행복을 준 동무 '인남'에게 마음으로 고마움을 드리네. 고맙다! 동무야~~♣
2016년2월20일.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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