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回 벗모둠

광희문/光凞門(동무들과 옛 추억에 젖어 )

鄕香 2014. 12. 10. 16:23

제천역을 향해 집을 나서니 싸늘한 아침 이내가 밤새도록 잠을 설쳐 몽롱한 머릿속을 휑하니 관통한 듯 번쩍 정신이 들도록 시리다. 달리는 열차차창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끝도 없이 펼쳐내어 기차여행의 풍미로 한 것 흥을 돋아주건만 이에 아랑곳없이 뇌리의 활동사진은 60년 세월 뒤안길을 어슬렁거리며 향수에 젖는다. 오늘 만나는 동무는 원형이 길용이 지철이 모두 셋인데 지철이는 초등학교 졸업 후  57년 만에 처음 만나는 동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얼굴의 밑그림이 전혀 잡히질 않는다. 그렇게 도착한 동대문은 더욱 내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들을 타래처럼 실오라기를 풀어 보인다. 그렇다 그 추억의 실체를 이제 만나러 가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내 삶의 정서적 밑거름이 되었던 그 무대에서 지울 수없는 역할을 하던 동무들을 만나는 기쁨 어찌 행복아니리.. 

       


12시에 만나기로한 약속장소 동대문역사공원역 13번출구에 도착하여 시각을 보니 10시50분이다.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둘러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마치 색동옷이라도 입힌 양 알록달록한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필리핀의 교통수단의 하나인 버스란다. 이름하여 상상버스 파라뽀카 (" DDP" Fancy Bus, Para po Car) 그 생김을 보니 6,25전란 이후 미군부대에서 불하(拂下)받은 제무시(GMC)를 손으로 개조하여 대중교통으로 활용하던 옛 시내버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 또한 나를 어린 시절 추억으로 이끈다. 이 필리핀을 대표하는 교통수단의 대표적인 차 '파라뽀'는 우리나라처럼 미군이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생긴 부산물이 아닌가 싶다. 군용차(Jeep)가 달리는 것이 마치 조랑말(Pony)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그 이름이 '파라뽀'란다. 승하차장이 따로 없고 원하는 곳 어디에서나 "파라뽀"라 외치면 세워준다고..



이간수문(二間水門)에 연결된 성벽이다. 앞쪽 단절된 곳에 아취형(虹霓)의 이간수문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단절되고 헐렸지만 애초에는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시작한 성곽은 五間水門을 놓아 남산과 인왕산 그리고 백악산과 낙산에서 흘러내려 모인 청계수를 동쪽 한강으로 흘려보내고 다시 이간수문(二間水門)을 열어 남산계류를 청계천으로 합류시키고 동남쪽 수구문이란 별칭을 가진 광희문(光凞門)으로 이어진 성곽은 남산(木覓山)을 거쳐 숭례문(崇禮門)에 이어지고 지금은 헐리고 없는 서소문으로 불리는 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으로 불리는 돈의문(敦義門)을 지나 인왕산 능선을 타고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른다. 한 숨 고른 성곽은 다시 백악산을 타고 청운대를 지나 북쪽의 큰 대문인 숙정문(肅靖門)에 다다르고 가파른 등성을 타고 엎어질 듯 내달아 동소문이라 하는 혜화문(惠化門)에 이르러 긴 숨을 내쉬고 걷듯이 동쪽의 큰 문 흥인지문(興仁之門)에 도달하니 이를 한양도성으로 부른다.  


 


오간수문에서 조금 남쪽에 있는 이간수문입니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는 도성에서 가장 낮은 지대로 남산(木覓山), 낙산 북악산 인왕산 등에서 도성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도성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 성벽 밑으로 물이 통과할 수 있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는데 이간수문은 남산 남소문동에서 내려오는 물을 도성바깥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한 두 칸 구조의 수문으로 윗부분은 홍예(虹霓:무지개)로 되어 있습니다. 


 

수문 안쪽과 바깥쪽 앞에는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형태의 석축시설이 있으며 남문과 북문 사이 가운데 돌기둥에는 물길가름을 용이하게 하고 가운데 기둥에 물발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한 도끼날형태로 깎은 뱃머리모양의 석축시설이 있습니다.  



舊 동대문운동장 발굴은 2008년 1월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그해 9월 축구장부지 발굴에서 이간수문 홍예(虹霓)부분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간수문홍예상부는 동대문운동장지표 3.7 m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간수문 내부에서 길이 440 cm되는 목재가 발견되었는데 이 목재는 도성 안으로 암암리(暗暗裏) 들고나는 범법자나 침입하는 적을 막기위한 목책시설의 일부로 청계천의 오간수문과 수원 화성의 예를 참작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수문 안의 목책(木柵)은 성 안팎으로 들고나는 범법자나 적을 막기 위해 설치된 시설이며 이 목책은 새로 복원된 것이다. 



목책을 설치했던 홈 



광희문에서 이간수문으로 이어진 성벽



성벽위에서 이간수문쪽을 바라본 전경



<광희문/光凞門> 

옛 사람들은 광희문(光凞門)을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렀습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장안사람들이 한강물을 수도국산에서 배수받아 수압차에 실어온 것을 공급받아 먹고 살았는데 그 물이 모두 이 광희문을 통해 들어오는 까닭으로 수구문이라 불렀습니다. 한편에는 이간수문에서 가까워 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屍口門이라 부른 것은 장안사람들이 죽으면 그 屍身이 광희문을 통해 나왔다하여 시구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광희문 밖 일대에 무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광희문처럼 시신을 내올 수있는 門으로는 昭義門(서소문)이 있습니다. 60년대만 해도 사대문 안은 장안 또는 문안이라 불렀으며 성밖 변두리나 근교에 사는 사람들이 볼 일이라도 있어 서울시내로 갈 때는 '장안다녀온다' 또는 문안다녀온다.' 고 한 것에서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을 문안사람이라 했습니다. 

장춘단고갯길과 약수고갯길이 합쳐지는 마루턱도로 좌측에 대현산  일명 수도국산이라는 배수장이 있는데 이 저수지는 구한말 1907년 11월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상수도시설로  뚝섬정수정에서 생산된 한강물을 공급받아 저수하여 서울에 공급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5,000 의 소규모였으나 이후 계속 증설되어 58.500㎥ 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1998년 8월에 철거하고 그 자리에 2002년 10월 200,000㎥ 용량의 배수지를 새로 건설하면서 지상에는 산책로에 각종 수목을 조성하고 다양한 운동시설을 조성하여 시민의 휴식공원(호당공원)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밖에도 수구문에서 옛 흥인국민학교 건물이었던 성동여실을 지나 신당로터리 못미쳐 수도국이 있었는데 지금은 '충무아트홀'이 들어서 있습니다. 



서울흥인국민학교 제11회 동창이자 고향 동무들입니다. 어려서 신당동과 율원동, 유락동, 흥인동 인근에 살며 한 시절을 같이 보낸 동무들, 이제 七旬의 나이가 되어 그 시절의 추억을 돌이켜봅니다.  한 갑자를 보내고 십년을 맞은 古稀에 옛 어린 시절의 모습을 회상하며 동심이 서린 그 흔적을 찾아 이렇게 서로가 도타운 정으로 보듬고 있습니다.

 

동무야! 

건강한 너희 모습에 내 가슴이 따스웠고

중후한 세 사람, 고풍스런 光凞門과 잘 어울리니 보는 내가 즐겁다. 

光凞.는 광명, 밝은 빛이라니 너희에게 늘 밝은 나날이 되리... 

2014년 12월6일  <揆明>



수구문 저 앞 저 동무들은 일제강점기의 핍박을 벗어나던 해 乙酉年 해방과 함께 태어난 해방둥이지요. 반세기를 되돌아가 꿈 많은 동심이 되어 마냥 싱그럽고 행복합니다. 그 앞 보이는 곳에 대장간이 줄지어 있었는데 쇠는 달구어져 호미도 되고 쟁기와 가래도 되었다가 그 쓰임이 다하면 다시 달구어져 새롭게 태어나듯이 배움을 바탕으로 주어진 일에 열정으로 보람을 일구며 살다가 이제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옛 추억이 주저리주저리 성긴 동네와 모교 흥인국민학교(현 성동여실) 옛 교정과 현 교정(체신국 자리)을 둘러보고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신당동떡볶이집을 찾았습니다. 흐른 세월만큼이나 그 맛도 변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배곯아 먹던 그 입맛은 여전하여 임금님의 수라상에 乞人의 입맛인양 남김이 없었습니다.    



<광희문/光凞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의 광희문 모습.


 

조선 시대 태조5년(1396년) 2차 도성 수축공사 때 창건된 사소문(門)의 하나로 도성 동남쪽(광희동)에 위치합니다. 세종4년(1422년)에 1차 개축된 것으로 추정되며,《숙종실록(肅宗實錄》에 숙종37년(1711년)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으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719년 문루를 세워서 光凞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虹霓石築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 m 옮겨쌓아 그 위에 문루(12坪)를 짓고 현판을 걸었으며 주변 200평을 녹지로 조성하였습니다. 이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39년 만인 2014년 2월 17일부터 연중무휴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습니다.

光凞門은 昭義門(일명 서소문)과 함께 屍身을 내보낼 수 있는 문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光凞門을 屍口門으로도 불렀던 것입니다. 또한 수구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장안사람들이 한강물을 수도국산에서 배수받아 수압차에 실어온 것을 공급받아 먹고 살았는데 그 물이 모두 이 광희문을 통해 들어오는 까닭으로 수구문이라 불렀으나 이간수문에서 가까워 수구문()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습니다.    



광희문 천정의 그림으로 청룡 한 쌍이 雲霧에 싸여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고 있습니다. 청룡은 四神의 하나로 동쪽 방위를 지키며 28수 가운데 동쪽 일곱 별. 각(角), 항(亢), 저(), 방(房), 심(心), 미(尾), 기(基)를 통틀어 이릅니다.  



都城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


(낙산) -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 <광희문/光凞門>(수구문.시구문/水口門.屍口門) - (남산)  - <숭례문/崇禮門>(남대문/南大門) - <소의문/昭義門>(서소문/西小門) - <돈의문/敦義門>(서대문/西大門) - (인왕산) - <창의문/彰義門>(북소문/北小門) - ( 북악산) - <숙정문/肅靖門>(북대문/北大門) - <혜화문/惠化門>(동소문/東小門) - (낙산)



2014년12월6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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