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回 벗모둠

제13차 한양도성 모둠.

鄕香 2016. 6. 18. 12:55

오늘은 내 고향 성동구 흥인의 모둠이 있는 날이다. 아침 5시 집을 나서 제천역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바라본 하늘은 눈에 박힌 희뿌연 하늘이다. 제천발 05시25분 열차에 몸을 실고 청량리에서 1호선전철로 갈아타고 종로3가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도착한 경복궁역 지하2층에는 한 시절 출퇴근 때 마다 반기던 신라토기인물기마상/新羅土器人物騎馬像이 언제나처럼 반기고 지하1층에선 不老門을 넘나드는 이의 長生을 약속하고 있었다. 3번 출구로 나가기 전 시각을 보니 10분전 9시다. 곧이어 우석이로부터 09시면 도착할 수 있겠다는 전화가 왔다. '우석아 서두르지 말고 와라' 이미 너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후 걸리는 시간은 너의 의지와 상관없는 시간일 뿐이다. 출구 밖으로 나와 보니 언제부터인가 늘 그러하듯 하늘은 해도 보이지 않는 눈부신 뽀얀 하늘이다. 저 알 수 없고 달갑지도 않은 뽀얀 煙霧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다시 한 번 어린 시절 티 없이 맑고 파란하늘에 그림쟁이 구름 한 점이 무척 그립다. 나 오늘 그 파란하늘 아래 티 없이 뒹굴던 동무를 만나는 날, 마음은 벌써 그 아름답고 순박한 빛깔에 물이 들어간다. 이내 우석이가 왔다. 1020번 초록버스를 타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 앞에서 내려 창의문탐방관리소에 등록하고 패찰을 받아 목에 걸고 백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각은 09시 48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백악산정상을 지나고 白岳稚에 올라 주변경치도 보고 말바위에 이르렀을 때 전화가 울려 받았더니 범호가 10시에 자하문으로 해서 이미 2진 동무들이 모여 있는 와룡공원에 도착했다는 이야기. 어찌된 일인가 종잡을 수 없이 어지럽다. 그럼 같은 코스를 늦게 출발하여 우석이와 나를 앞질러 이미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 이를 어쩐다! 바로 와룡공원으로 가 있어야할 범호가 나를 놀래주려고 쫓아 왔는데 우리가 치에 들린 사이 稚를 그냥 지나쳐 일어난 일이다. 범호의 정감에 가슴이 뭉클하고 50분에 그 거리를 주파한 능력에 놀랍다. 그렇게 도착한 와룡공원 앞 성곽에는 일찍부터 도착한 경희, 범호, 종순, 지철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날씨가 이성을 잃었나보다. 찌는 날씨로 인해 숨이 막히고 비처럼 솟아난 땀에 온몸이 젖어 끈적인다. 낙산에 이르렀을 때 비명이 들린다. "나는 나는 갈테야! 바닷가로 갈테야! 출렁이는 파도 타고 갈매기 노래하는 바닷가로 갈테야! "경희가 노래처럼 비명을 지른다. 그 심경이 내 심경이고 모두의 심경이리라. 에고 이 몸이 죄 많은 몸이여, 죄만스럽다.
잠시 놓은 정신 줄을 추수려 길용이가 있을 혜화문을 향한다. 바쁜 시간에도 짬을 내어 참여해 주는 그의 성의가 또한 고맙다. 성북동 성곽을 돌아 경신고교 뒤 성곽을 끼고 들어설 때 길용이가 이 더운 날에 상의를 어깨에 걸치고 마주오고 있다. 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모여 옛 모습을 회상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인지문에 이르렀다. 뽀얀 연무는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를 배가 시켜 온 서울을 달구고 달궈진 열기를 받은 아스팔트는 그 열기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내니 자동차도 사람도 모두 녹아내리고 있다. 그 안에 흥인지문은 열기와 진동과 분진 삼중고로 아사직전이다. 그 끔직한 로터리를 어떻게 헤어난 줄도 모르게 종순이의 이끔으로 인해 섬으로 구출되었다. 경희의 비명 같은 노랫소리에 감명된 섬이 통 채 서울복판으로 옮겨 왔는가 보다. 이름하여' 백일도/白逸島" 복어가 제철이란다. 푸짐한 찬은 차치하고 구수하고 담백한 복지리가 냄비도 아닌 크나 큰 양푼으로 가득하니 3이나 놓였다. 그 간의 고초가 한순간 뽀얀 국물에 녹아들고 뽀얀 살코기 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 뽀득뽀득 거리고 오장이 즐거워 지르는 비명도 있었으니 기쁨의 소리요 환희의 노래다. 오늘 이렇게 좋은 음식을 찬조한 종순아 이 글을 통해 다시 고마움을 갖는다. 몸에 좋은 음식을 대접받은 만큼 동무들아 모두 더욱 건강하자! 어려서 부르던 동요를 쪼끔 각색해서 부른다.
"동무들아! 나오라 나오라 나오라 동무들아 나와서 같이 놀자, 같던 지난날 달콤한 추억들 동무들아 나와서 같이 나누자."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가 없구나 동무들아~~,"  고맙다. <鄕香享>    
 
기차에서 내려 파주행급행전철을 기다리는 짬에...

녹색 시내버스1020호에서 내려 彰義門(紫霞門)을 向해서..

<한양도성 순환 안내판/漢陽都城 順煥 案內板>

지난 4월16일 창의문 앞 스테인리스 스틸 안내판을 담은 사진인데 내 뒤로 一團의 탐방객들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창의문 懸板>

<창의문의 紋章> '鳳凰'


사적 제 10호 창의문(彰義門)은 종로구 부암동 249번지, 청운동 산1-1번지에 위치하는 작은 문(小門)으로 서쪽의 돈의문과 북쪽의 숙정문 사이 서북방향에 위치하는 작은 성문이다. 창의문은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졌으며 서울 북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창의문은 다른 문들과 같이 화강석을 이용해 홍예문으로 만들었으며 성문 위에는 목조 누각건물을 지었다. 이 문루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 17년) 1월21일에 다시 지은 것이지만, 서울성곽의 사소문 누각(四小門 樓閣) 중에 300년 가까운 역사를 갖는 유일한 小門이다.

호젓한 옛 성문을 들어서는 정장을 맑끔하게 차려 입은 휜칠한 중년의 여인의 맵시가 날아오를 듯 치솟아오른 자하문의 추녀마루 맵씨같다. 



왕을 상징하는 鳳이 왕비凰과 구름사이에서 어우러지고 있다. 임금이 계시는 도성임을 문양으로 넌지시 알리고 있다.


 <여장/女墻> 적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용이하게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근총안, 원총안, 타구를 묶어 1타(垜)라고 한다.

근총안은 가까운 적을 보고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고 원총안은 먼 곳의 적을 보고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이 성의 여장은 태조 때 쌓은 것이다.



 내 동무는 아직 5십대

백악산

백악산정상에서 줌으로 당겨본 북한산의 모습.


<청운대/靑雲臺>

푸른 구름이 검은 구름보다 높이 떠 있는 데에서 높은 벼슬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니 높은 뜻을 다짐하는 자리라는 뜻이겠지


태조 5년(1396년)에 쌓은 도성으로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여 성을 쌓았으며 성벽의 구배(勾配)를 넓게 잡았다. 위 女牆의 타(垜)는 후 대에 복원한 것이다.



지금의 한양성축에서 세종 4년(1422년)에 쌓은 성벽 중 가장 좋은 상태로 남아 있는 성축으로 아래는 큰 돌을 면을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둥굴둥굴한 모습으로 쌓았고 위쪽 여장 아래는 태조 때 사용되었던 작은 돌을 그대로 쌓았다.



숙종 30년(1704년)에 쌓은 도성으로 큰 돌을 정사각형으로 다듬어 벽돌 쌓듯이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쌓아 올렸다.



<1.21사태 소나무>

백악산 정상을 넘어 2백m 정도 지나서 순방길 옆에 기념비적인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등 31명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타운(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軍.警과 치열한 교전 중 이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아군복장과 민간복 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1월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결과 침투한 31명 중 1명 도주, 29명 사살 1명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나는 35개월20일 동안 국방의 의무를 오지게 할 수 있었다.  



<숙정문 현판/肅靖門 懸板>

1976년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한양도성을 복원할 때 숙정문의 없던 門樓를 태조 때 창건한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 건립하였으며 현판은 당시 朴正熙 大統領께서 손수 쓰신 親筆 편액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예 안쪽에는 다른 대문과 다르게 龍이나 鳳凰은 물론 天障도 없는 사대문 중 유일한 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렸다가 북쪽에 있는 연유로 북대문으로 불렀으며 언제부터인가 숙정문으로 불렸는데, 중종 18년(1523년) 처음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고, 중종 26년(1531년)에 北靖門, 선조 20년(1587년)에 다시 肅淸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엄숙하게 고요함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풀이 되는 숙정문(肅靖門)은 다른 문과 달리 성문좌우 성벽이 헐리거나 무너지지 않고 이어져 현재에 이른 유일한 대문이다. 숙정문은 도성의 다른 문과 다르게 홍예 안쪽에 四神圖는 물론 天障도 없는 사대문 중 유일하다.



<와룡공원>

오늘 참석한 동무들이 합류한 장소이다.



<혜화문/惠化門>


혜화문 천장에 그려진 鳳凰 한쌍 鳳은 수컷, 凰은 암컷이다. 창의문의 그림보다 봉황도 단조롭고 구름의 문양이 성글다.



《혜화문/惠化門》

태조5년 한양도성을 축성할 당시 다른 문들과 함께 축조된 혜화문은 창건 당시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던 것을 중종 6년(1511년)에 이름을 혜화문으로 바꾸었다. 영조 때에 없던 문루(門樓)를 세웠으나, 문루는 일제강점기 1928년에 홍예(虹霓)는 1938년에 각각 헐렸다, 안내판에 의하면 1994년 본래 혜화문이 있던 자리는 지대가 낮아지고 도로로 인하여 북쪽으로 터를 잡아 홍예와 문루를 새로 지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조상 대대로 5백여 년을 살아온 내 고향 서울에는 큰 門이 모두 8개가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八大門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팔대문을 方位로 구분하면 동서남북 방위순서대로 똑바른 동쪽(正東)에 흥인지문(興仁之門), 仁 즉 德을 세워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門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 불리지요. 똑바른 서쪽(正西) 방위의 돈의문(敦義門), 義를 돈독히 한다는 뜻을 지닌 문, 곧 서대문이지요. 무자비한 일본에 의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의 門입니다. 똑바른 남쪽(正南)에 숭례문(崇禮門), 예를 존중하고 높이 받든 조선 오백년의 근본인 유교적 사상이 배어나는 門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약간 비켜 자리하고 있는 門 곧 남대문이지요.

똑바른 북쪽(正北)에 위치한 어지러움을 가지런하게 정리한다.는 의미를 가진 숙정문(肅靖門), 원래는 숙청문(肅淸門) 이었는데 여러 理由(풍수지리적, 음양오행설)를 들어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뀐 북대문입니다.

그리고 동북(東北)방향의 혜화문(惠化門), 곧 동소문(東小門)이고요. 동남(東南)방향의 광희문(光熙門) 수구문(水口門)또는 시구문(屍口門)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문입니다. 서남(西南)방향으로는 소의문(昭義門) 곧 서소문(西小門)입니다. 서북(西北)쪽으로 창의문(彰義門) 바로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문입니다. 따라서 팔대문은 4대문과 4소문을 합쳐 이르는 말입니다. 


龍은 玄武, 朱雀, 鳳凰, 麒麟, 등과 함께 상상의 동물로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이외 상상의 동물문양으로 무엇이든 탐하여 먹어치운다는 饕餮이 있습니다. 한양도성 四大門, 四小門 중 천장에 용을 그린 문은 현재는 숭례문과 흥인지문 뿐입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는 한양 도성의 동, 서, 남, 북의  4대문은 각각 유교의 기본적 윤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인(), (), (), ()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興仁之門은 태조 5년(1396년) 다른 성문과 함께 築造되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興仁之門의 본디의 뜻은 이렇습니다.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흥인지문을 왕궁(경복궁)에서 볼 때 풍수지리학적으로 좌청룡이며 동쪽에 있습니다.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면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한데다 흥인지문 터와 앞 지대마져 평평하여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쌓은 것도 옹성입니다. 또 현판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다른 문은 모두 글자가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으며, 흥인(興仁)이라고 이름 한 것은 흥(興)은 번창한다는 뜻이 있고, 인(仁)은 오행으로 목(木)이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쪽의 기운이 일어나서 虛함을 막으라는 풍수적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흥인지문은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로 2층의 문루(門樓 : 간단히 이야기하면 성벽 위의 목조 건물)를 올려 성문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없습니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합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데 유리하게 하였습니다. 흥인지문은 태조 5년(1396)축조된 이래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루는 간단한 구조에 장식이 많은 19세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의 성문 가운데 유일합니다.



흥인지문은 비록 동서남북으로 자동차물결이 허구헌날 무시로 싸고도는 도심 속에 기라성처럼 높은 侍衛같은 示威빌딩들에 에워싸였어도 기 죽지 않고 장중하고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지만 괴물같은 자동차며 인근의 지축을 흔들며 지나다니는 두더지 같은 지하철에 성벽이 쪼개져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 같아서는 저 국보다운 보물을 돋을 수만 있다면 번쩍 떠올려 높이 돋아 올려놓고 싶습니다. 또 인근 역사공원과 하나로 이어 엮어서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장충단에서부터 내려오는 길을 두타빌딩 있는 자리만큼 더 만큼 내물려 정비를 했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아니 아예 서울 도성 안은 재래시장을 더욱 활성화 하고 옛 한양분위기와 도성의 면면을 살려 한국적 미를 창출하는 고유 문화벨트로 묶어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아울렛이니 공룡빌딩은 묶어서 동대문 밖 적당한 곳에 새로운 타운을 조성하여 또 다른 소비문화 관광지역으로 발돋움 하면 일자리도 창출되고 강남처럼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저러나 애초에 문화재 인근에다 저 괴물 같은 두타빌딩은 누가 저리 높게 허가를 내주었나!? 지금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건축 "흥인지문"은 주저앉기 직전입니다. 사대문 안에서는 가스나 전기차로 대체한 대중교통차량과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환경도 살립시다. 제발 서울을 살립시다. 한양을 살립시다. 한국적 고유문화가 살아 숨 쉬는 색깔 있는 도시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이 한국 고유의 멋에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는 국제도시로 만듭시다. 정치 하는 분들이여, 파당과 권력에 집착 마시고 지역 간 이간시키지 마시고 제발 한마음으로 나라 발전에 이바지 하시고 정치꾼이 아닌 존경받는 政治家 되시고 제발 국민 좀 살려주시오.



다음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적 글을 옮깁니다.  

1397년(태조 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대석(臺石)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 : 네모 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무사석 위 주변에는 누각을 둘러막은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기부에 놓인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栱包)를 짰다. 공포는 하층은 내3출목, 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조선 말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데 살미〔山彌〕가 뾰족이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져 연결되었으며, 안쪽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이룬다. 상층의 변주는 하층 대량 위 중간쯤에 세워졌다.

바닥은 하층에는 중앙에만 마루를 깔고 상층은 전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의 하층은 모두 개방하고 상층은 사방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2016년6월17일. 한양도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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