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지리크(Pazyryk) 문화는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 산지 알타이지역에 존재했었습니다.
그 문화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에 새로운 주민의 유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 이전 신석기 .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에 거주했던 유목종족들은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에서 온 강한 기마유목민들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이 정복자들은 놀라운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문화의 대부분이 앗시리아, 미디아, 이란의 고대 예술과 문화에서 채택된 것이었습니다. 알타이 원주민과 정복자들이 가진 두가지 전통이 융합된 결과로 나타난 이 문화는 오늘날 전세계 고고학자들에게 파지리크 문화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화의 초기 단계에서 새로운 이주민들은 파지리크 사회의 원주민을 지배하게 되었고,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은 상호 결혼을 통하여 혼혈이 되었고 그후 100년도 채 못가서 단일 종족의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소수의 이주민들은 알타이 주민으로 흡수되었던 것입니다.
정복자들의 권력에 대한 접근은 사회적 계층의 형성을 가속화시켰습니다. 파지리크 문화는 그 자체가 거대한 부족의 연맹으로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부족들은 여러 부족장에 의해서 이끌어졌습니다. 이외에도 부족의 귀족계급을 형성하는 기마집단인 전사 귀족층, 사제집단, 그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유민 등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계층은 파지리크인들의 장례의식에서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를 거대한 봉분(알타이에서는 적석의 둥근 언덕으로 나타남)아래에 매장하였습니다.
산지 알타이의 강가 계곡에는 수백기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 고분들 중에서 부족장들이 매장된 대형고분은 봉분의 지름이 60m나 되는데 그 수는 극히 적습니다. 일반인들이 매장된 대부분의 무덤들은 대체로 지름이 10m정도이고, 지름이 5m나 그 이하인 무덤에는 어린아이들이 매장되었습니다. 파지리크인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산지 알타이와 같은 생태계에서 방목은 경제적으로 효과적이었습니다.
<파지리크시대의 목곽적석墳(크르칸)>산지 알타이 칼쥔 2호분.
파지리크인들은 주로 양, 말 약간의 소를 사육하였고, 남부에서는 낙타도 사육하였습니다. 1인당 가축수는 대략 19마리 정도 였으며, 목축의 생산물은 사회복지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주식은 고기와 우유였으며, 발효된 우유로는 "쿠미스(Kumis)라는 술을 제조하였습니다.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서 말의 종자는 고대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그 말들이 이 지방의 기후에 가장 잘 적응한 말보다도 더 좋은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말 안장이 달린 순종의 말이 부족장과 귀족의 전사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파지리크인들은 이 말을 중동지역에서 얻어 온 것이었습니다. 파지리크인들은 양과 낙타의 털로 질 좋은 펠트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은 옷을 만들기 위한 직물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바느질한 옷, 신발, 말안장, 말안장의 장신구와 덮개, 카페트 등)에서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짐승의 가죽은 옷과 신발을 꿰매거나 마구와 여러가지 장신구들을 제작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파지리크인들은 주업인 목축 이외에도 사냥, 어로, 농경, 야생초 . 곡물, 딸기류, 견과류의 채집도 병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 사회는 보다 공고히 유지되었으며, 식량 공급도 늘어 나게 되었습니다. 목축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연의 기후 변동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목장을 파괴시키는 이상 기후는 10년마다 일어났습니다. 사냥은 고기의 공급, 군사훈련, 여가생활 뿐만 아니라 가치있는 모피(검은 담비, 다람쥐, 여우, 마모트, 구름표범, 늑대와 다른 동물들)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모피는 농경국가와 물물교환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모피들은 이웃 지역과 교역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곡물, 수공업제품과 기타 생필품이나 위세표시에 필요한 물품들과 물물교환되었습니다. 알타이 산맥의 기후와 파지리크인들의 생활양식은 곡물을 경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요 곡물은 중국의 논경민이나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지역과 물물교환하거나 약탈하였습니다.
유목사회의 역사는 정착 농경 문명와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파지리크 남자와 아마도 미혼여성까지도 모두 군인이었을 것입니다. 생활방식 자체가 병영생활에 알맞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이동하는 생활은 목축을 위한 계절에 따른 것이나 소위 '수직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축과 함께 계곡을 오르락 내리락 하였으며 새롭게 펼쳐진 고산성 목축지를 개척하였습니다. 파지리크인들은 겨울집과 여름집인 2가지 유형의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통나무로 만들어진 사각형과 다각형의 영구적으로 사용하는 집과 짐승의 가죽, 펠트와 나무껍질로 덮은 간단한 골격으로 이루어진 가벼운 이동식 집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름 목초지에는 청동제품 및 철제품들과 금박을 만드는 장인들이 집결하는 정착지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또한 곡식을 경작하는 사람들도 살았습니다.
파지리크인들에게 수공업은 금속제품을 제외하고는 독립적인 분야로는 성립되지 못했습니다. 의복들과 여러가지 경제 생활에 필요한 가재도구들은 각 가정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파지리크 여성들은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를 가졌습니다. 귀족에 속하는 여성은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사르마타아인(Sarmatian)들처럼 파지리크 소녀들은 군사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으며 적을 죽이지 않고서는 결혼할 수도 없었습니다. 전통의 수호자로서 여성들은 정신 문화를 구체화시켰습니다. 여성들은 종종 남자들 이상으로 신화에 대한 구술자였는데, 그 신화 속에는 파지리크인의 세계관과 파지리크 땅에 대한 관념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여성들은 남자들 이상으로 의사이자 사제였습니다. 사제는 존경을 받았고 행동이 자유로웠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세속적인 권력은 사제집단 지도자들과 갈등을 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귀족계급의 지도력은 목초지를 분배하고 이동을 조직화 하며 야생동물들과 적들로부터 유목민 야영지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가축떼를 이끌고, 갈등을 진정시키며 이웃 부족들과의 중재와 상업적 계약을 맡았고 기타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귀족들은 외국의 물건(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것)을 모았고, 이것들은 그들의 고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파지리크인들의 일상생활은 다소 불안정했습니다. 목초지 확보를 위한 갈등, 전쟁과 침략, 질병 가축의 분실 등 이와 같은 결과로써 오는 굶주림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산지 알타이 지역에서 조사된 수많은 고분들의 예로 보아 많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죽었고 노인이 되어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파지리크 문화의 역사에 있어서 불분명한 부분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유럽인종의 주민들 중 몽골종족이나 몽골인종의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분리된다는 사실은 더욱 주목을 끕니다. 더욱이 최고 신분의 귀족층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떻게파지리크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되었을까?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파지리크인 자신들은 누구일까? 그들의 이름은 임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잘 알려져 있는 파지리크 고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실제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는 월지(月氏)족이었으며 그 이름은 중국의 연대기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파지리크 문화속에서 몽골인종의 대표자로서 슈누(Syunnu)족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의 초기 단계에서 같은 문헌자료에 알려진 것처럼 월지족에게 종속된 슈누족일 것입니다. 그러나 곧 아시아 스텝지역의 상황은 변했습니다. 슈누족은 그들의 초기단계보다 더 강해졌고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고 유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파지리크 문화의 발전과정은 멈추었습니다. 귀족집단이 주도하는 일부 주민들은 강제로 항복하기 보다는 서쪽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유목민과 함께 그리코-박트리아(Greeco-Bactrian)국의 혼란에 참가하여 그곳을 정복하였습니다. 가장 뛰어난 파지리크인의 후손의 운명은 중앙아시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틸-테퍼(Till-Tepe:북부 아프카니스탄)의 부유한 유목민 고분에서는 파지리크 문화의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견해를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파지리크의 선돌> 산지 알타이 추야(Chuya)평원.
기원전 1세기에 알타이산맥 지역에서 슈누(Bulan-Kobinian문화)문화와 유사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불란-코빈문화의 담당자들은 거기에 남아 있던 파지리크인이었습니다. 이 문화는 이 종족의 몇가지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강력하고 놀라우며 고유한 것들은 없었습니다. < N.V.Polos'm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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