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外國)/알타이(Altai) 문명

냉동고분의 발굴 (파지리크 문화)

鄕香 2011. 9. 21. 18:05

 

파지리크 문화는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있는 고분의 덕택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각 가족은 일련의 무덤을 가지고 있었다. 한 계곡에 있는 일련의 고분들은 한 가족의 공동매장지를 구성했다. 파지리크인들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유목민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영구적인 주거지역과 나무로 만든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고분 발굴조사 만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인데 그 이유는 주거지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지리크 문화의 고분은 러시아 학술원 회원인 라드로프(V.VRadlov)에 의해 19세기 말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알타이 남동부를 여행하면서 부족장이 매장된 베렐(Berel)고분과 카탄딘(Katandin)고분을 조사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알타이 현상" 즉 냉동고분이 드러났다. 거대한 냉장고 속에서 처럼 고대의 얼음 속에서 고고학자들이 보통 접근할 수 없었던 부장 유물들이 유지되고 있었다. 즉 옷, 목제의 장신구, 접시, 카페트, 말안장 덮개, 인간의 시신과 말의 시체 기타 여러가지 유물들이 있었다. 왜 무덤안은 얼음으로 형성되어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 요소가 운 쫗게 결합된 결과이다. 첫째는 산지 알타이의 모진 기후, 즉 추운 겨울과 지면이 완전히 녹지 않게되는 짧은 여름이었고, 둘째는 파지리크 고분의 구조적 특징에 기인한다. 귀족들을 매장하기 위해서는 깊이가 6m, 크기가 7m×7m 정도의 사각형 구덩이가 파여졌다. 구덩이 바닥에는 마루와 같은 목재 골격(여러개의 통나무 열과 덤불 잔가지들을 덮은 일종의 지하실)이 만들어졌다. 이런 구덩이는 돌들로 꼭대기까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런 고분들의 예상되는 범위는 각각 잇대어 놓여진 호석(護石)으로 둘러 쌓여져 있다. 호석 내부의 전체적인 공간도 역시 돌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처음에 매우 큰돌이 놓여지고 작은 돌들이 이전에 놓여진 돌들을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체 구조물이 작은 자갈과 돌들로 뒤덮히게 되었다. 

 

<알타이적 현상> 무덤의 내부가 얼어 붙은 상태로 발견되는 현상을 말한다. 

 

묘실의 남쪽 벽 가까이에는 피장자의 시신이 놓여지는 밀폐된 목관(木棺)이 있었다. 더러 2개의 목관도 있었다. 묘광의 북쪽에는 말들이 매장되었다. 그 말들은 보통 육중한 청동도끼로 두개골의 앞쪽을 맞아 죽었고 그 시체는 줄에 매달려 묘실에 내려져서 배를 대고 다리를 몸통 아래로 꾸부린 채, 몇 열로 서로 겹쳐서 눕혀졌다. 한 고분에서는 22마리의 말이 매장되기도 하였다. 무덤을 덮고 있는 적석과 무덤 내부는 빽빽히 차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물들이 쉽게 묘실로 침투해 들어 갔으며 곧바로 묘실은 물로 채워지게 되었다. 겨울에는 스며든 물이 얼게 되고 이듬해 여름동안에도 그것은 녹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매우 천천히 고분의 부장물들이 얼음속에 잠기게 하였다. 그 얼음은 부장물들을 보존시켜 주었다. 유물의 갈라진 틈을 따라 얼음에 의해 토기는 깨졌고, 나무는 쪼개졌으며, 나무로된 물건들을 덮고 있던 금박이 떼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얼음 때문에 파지리크 문화의 찬란한 부장물들이 보존되었다. 만약에 그러한 무덤들, 특히 풍부한 유물들을 가진 무덤들이 얼어 있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풍부한 유물들은 단지 몇개의 철재품과 청동제품, 그리고 금박이 된 유물들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파지리크 문화는 우리에게 불분명한 역사적 현상만을 남겨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에 중부 알타이에서 발견된 "짜르급"인 퉁엑타(Tuecta)와 바샤다르(Bashadar) 파지리크 고분을 루덴코가 발굴한 이후에도 명확하지가 않았다. 이 고분 역시 도굴당했지만 이곳에서 보존된 것들은 학자들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이러한 고분들은 매우 거대했으며 묘실은 깊었고 또한 얼어 있었다. 고분들을 완전히 조사하는데 여름 한철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러한 "짜르급" 고분은 단지 고분의 중심부와 거기에 이르는 넓은 트렌치만을 따라서 조사되었다.             <N.V Polos' m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