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고고학자들은 일반 파지리크인의 고분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것은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여름 한철 동안에 학자들은 조그마한 고분을 10기 내지 그 이상을 조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분들 중에는 도굴되지 않았거나 얼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일반인이 매장된 파지리크 고분의 발굴은 산지 알타이인들의 문화, 생활, 예술에 대하여 새로운 것들을 알려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엘리트 계층과는 달리 일반인 전사들은 한 두마리의 말이 순장되었지만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대부분이 그것마저 없었다. 일반인이 매장된 파지리크 무덤은 수개의 어린이 무덤을 제외하고는 목관을 만들지 않았다. 피장자는 묘실의 남쪽벽 근처의 바닥에 놓여졌고, 때로는 시상대(屍床臺나무로된 침대)위에 안치되었다. 파지리크인들은 죽음이란 것이 사람들을 "하늘의 목초지" 위에 또 다른 삶으로 옮겨 주는 일종의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피장자와 함께 부장된 다른 모든 것들은 부유한 귀족의 고분들과 같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수적으로는 많았지만 그렇게 잘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우코크(Ukok)는 산지 알타이의 고고학 연구사에 있어서 특별한 곳이다. 이 고원성 평원은 해발 2,500m이며, 중국, 몽골과 동부 카자흐스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첫번째 고고학적 조사는 1990년에 시작되었다. 4년간에 걸쳐서 우코크에서 작업하는 동안에 부족의 귀족층에 속하는 파지리크 문화의 굉장한 고분이 몇몇 발견되고 조사되었다. 우코크의 고분들은 이전에 연구되었던 것과는 달리 얼어 있었고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지 않은 귀족층의 고분이었다. 이것은 큰 행운이었고 대단한 성공이었다. 마침내 그 문화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지 100년 이상이나 경과한 후에 도굴꾼들에게 더럽혀지지 않았던 파지리크 엘리트 계층의 무덤들이 고고학자들의 눈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 무덤들은 모든 것이 거의 장례를 행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완전한 셋트로 놓여 있었고 원래 그것들이 놓여 있던 제자리에 있었다. 통나무들은 서로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그 못들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코크에서 조사된 고분은 지름이 18-30m 정도의 중간 크기의 것들이었다. 무덤 구덩이는 5×5m 크기로 다소 크지만, 깊이는 3m로 그리 깊지 않았다. 지면이 완전히 얼어 있었기 때문에(우코크 평원에서는 영구 동결토의 부분이 존재함) 깊이 파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부장된 말들은 1인당 7-10마리 정도였다. 이 고분에 매장된 피장자들은 아마 부족장들이었을 것이다.
적석고분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모든 작업은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 작업은 매우 어렵다하더라도 조사를 더욱 철저하게 만들었다. 봉분에 쌓인 돌들은 제거되었고 역시 손으로 옮겨졌다. 단지 매장을 준비하기 위해 돌로 둘러 쌓인 지면만이 손대지 않은 채로 남게 되었다. 만약 무덤이 얼어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행운이며 그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므로 작업은 거의 발굴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이것은 원시적 방법 즉 뜨거운 물로 해동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방법은 고안되지 못했다. 물은 얼기 전까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보관되었던 목제품들과 옷감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얼음이 차차 녹음에 따라 모든 부장품들이 꺼내어져서 서서히 말리기 위한 특별한 용액속에 담겨진다. 보존과학자들의 도움으로 이 독특한 물건들은 원래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유지한 채 보관되어졌다. 제사장 뿐만 아니라 부족장들과 그들 아내와 첩들의 시체는 방부처리되었다. 즉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 다음 풀이나 양털을 채우고 말총으로 꿰매어졌다. 두개골에는 구멍을 뚫어 뇌를 꺼낸 다음 흙, 양털, 풀로 채워졌다. 이런 방법으로 그 시체는 오랫동안 보존되어질 수 있었다. 장례식은 죽은 직후에 거행하지 않았다. 시신은 땅에 묻히기 전에 반년이나 그 이상 보냈다. 만약 사람이 가을에 죽으면 이듬해 봄에 그 시신을 매장할 수 있었다. 부족장의 장례식은 송별의 의식과 예도의 시기가 지나고 나서 미이라가 된 시신을 장식한 마차에 태우고 그들의 영토를 지나 엄숙하게 운반되었다.
<발굴 중인 얼음공주 무덤> 산지 알타이 우코크(Ukok) 아크-알라하(Ak-Alakha).
1993년 우코크에서 파지리크 여사제(女司祭)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얼어붙은 무덤에서 그녀의 미이라는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젊은 여자는 흰 피부를 가진 유럽인종이었으나 몇몇 인류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몽골인종의 특징들이 혼혈되어 있다고 한다.
그녀의 머리는 복잡한 구조의 가발로 장식되었는데 그것은 검정색의 특별히제작된 점토 덩어리로 만들었고 그녀 자신의 머리와 까만 말갈기로 덮혀 있었다. 머리는 세갈래로 땋았는데 양 옆으로 2개, 뒤쪽에 1개가 있었다. 그 땋은 머리는 조각되고 금박이 붙은 특별한 나무 대롱으로 덮혀 있었다. 이러한 머리 장식은 나무로 된 사슴 모양의 관(冠)과 청동 머리핀으로 장식되었고 누워있는 사슴의 다른 조상(彫像)들은 그녀의 이마 위에 있었다. 모든 장신구들은 금박이 붙어 있었다. 머리 장식 안쪽에는 작은 막대를 끼워 지탱되는 길고 까만 천으로 된 관이 꿰매어져 있었다. 이 관은 금박으로 덮인 나무로 된 작은 새의 조상들로 장식된 깃털과 유사한 것이다. 새가 장식되어 있는 관은 "생명수"(生命樹)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얼음공주의 복원된 모습>
여사제의 목은 금박의 와형(臥形) 구름표범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귀에는 금귀걸이와 작은 고리들이 있었다. 머리 부근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된 고수풀의 씨앗이 담긴 돌접시가 있었다.
<얼음공주의 미이라 문신>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 주는 제사장으로서의 주된 장식은 문신이었다. 문신은 팔과 손가락을 덮고 있었으며 환상적인 동물들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본질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여성으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켰다. 이러한 지워지지 않는 표시는 모두에게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운 지식과 가능성을 소유한 여사제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우코크 평원에서 발견된 이 젊은 여성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체의 방부처리와 보존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모스크바의 과학조사연구소로 보내졌다. 오랜기간 동안 과학자들의 작업은 그 미이라가 손상되는 것을 막았으며 발견된 순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관되도록 하였다. 한편 파지리크 문화에 대해 조사하던 중 1948년에 딱 한번, 파지리크 2호분에서는 온몸에 문신을 새겨 놓은 몽골인종의 노인 미이라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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