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 93

가락국 시조 왕릉 위치를 새긴 판(始祖駕洛國王陵圖板)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릉 위치를 새긴 도판입니다. 구지봉(龜旨峰) 아래 수로왕릉과 안향각(安香閣), 중문(中門), 외문(外門), 누각(樓閣)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고, 한쪽에는 읍기(邑記)가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에 있는 산청왕산릉도(山淸王山陵圖)는 양왕릉도(讓王陵..

소가야 (小加耶)

소가야는 固城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에 자리한 가야입니다.삼한시기의 고성지역에는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이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古自國 도는 古史浦國으로 〈일본서기〉에는 久嗟.古嵯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고자국(古自國)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입니다. 고성은 경상남도의 남부해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東으로는 馬山. 西로는 泗川. 北으로는 咸安,  南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어 海路와 陸路를 이어주는 교역망 확보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고성읍 주위에는 바다와 인접하면서도 비교적 넓은 농경지인 고성평야가 위치합니다. 古自國은 이와 같은 고성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해상교역을 통해 소 가야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三國史記..

대가야(大加耶)

대가야는 지리 고령군조(地理 高靈郡條)에 기록되기를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고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무릇16대, 520년에 이르렀다(大加耶國自始祖伊珍阿鼓王至道設智王凡十六世五百二十年)"고 합니다.삼한 때까지 반로국(半路國)으로 불린 고령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지역과 동일한 문화기반 위에 있었습니다.고령 반운리유적(盤雲里遺蹟)의와질토기가 영남지방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점으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4세기대에 접어들면서 고령의 세력은 야로면(冶爐面)일대의 철광(鐵鑛)을 개발하고 힘을 키워 가야의 하나로 성장하였습니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하류의 가야세력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

아라가야(阿羅加耶)

아라가야는 삼국지에 전하는 변한 안야국(安耶國)을 기반으로 함안지방에서 성장 발전한 가야입니다.아나가야(阿那加耶) · 안나국(安羅國)  · 아시라국(阿尸羅國)으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前期)부터 멸망할 대까지 계속해서 남아있던 세력입니다. 바다와 육지로 나갈 수있는 함안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입니다. 아라가야는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었으며,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 힘을 갖추고 있었던 큰 세력입니다. 아라가야의 유적과 유물들은 함안지역을 비롯해서 인근의 馬山.宜寧.晋州 일대에서도 다수 확인 되고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에서 보입니다. 아라가야의 고분문화는 前期 · 中期 · 後期로 나눌..

금관가야(金官加耶)

금관가야(金官加耶)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始祖 首露王이 서기 42년에 나라를 세운 후 532년 九衡王이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10대 490년 간 존속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역사책에서는 加耶 · 南加耶 · 金官國 · 駕洛國 · 南加羅 등으로도 나타납니다.금관가야는 김해지역에 있던 弁韓의 구야국이 성장.발전하여 서기300년 무렵 성립된 나라로 鐵을 매개로한 대외교역권을 장악하면서 前期加耶를 주도하게 됩니다. 금관가야의 영역은 손잡이가 달린 화로형토기와 아가리가 꺾인 굽다리접시의 분포를 통해 볼 때, 김해를 비롯하여 동쪽으로 부산지역. 서쪽으로는 창원 동읍. 진영일대로 추정됩니다. 특히 대성동 유적은 가야국의 시조(始祖) 수로(首露)가 降臨하였다고 전하는 龜旨峯과 그가 묻혔다는 傳 首露王陵 사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