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先史)/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農耕文靑銅器>의 解說

鄕香 2006. 8. 1. 20:05
 

아랫부분이 손실된 <농경문청동기>는 전체적으로 대전 槐亭洞에서 출토된 방패형 청동기와 유사 형태입니다.

그러면서도 좌우가 날카롭게 삐쳐있어 언뜻보면 기와집의 가옥형태를 연상케 하며,

또한 인근 아산 남성리에서 출토된 방패형 청동기와도 유사한데,

남성리의 것은 마치 사람이 사지를 벌리고 있는 뜻한 형상을 본뜬 듯합니다.

<농경문청동기>는 대전 괴정동의 것과 아산 남성리의 것의 중간 형태 쯤으로 보입니다.

<농경문청동기>의 용도는 잘 알 수 없으나 한쪽면에 둥근 고리가 달려있고 윗 부분에 여섯 개의 작은 네모형

구멍이 나있는 점으로 미루어 끈으로 연결해서 목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섯 개의 구멍 가운데 가장자리로 갈 수록 둥굴게 닳은 흔적이 역력하며 고리가 달린 쪽이 앞면이었을 터인데,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음각되고 뒤면에는 농사짓는 모양이 장식문양의 띠와 함께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청동기사회 이후 祭政을 장악한 우두머리,

즉 부족의 首長이나 제사장을 겸한 주요 인물이 착용했던 의례용기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그림은 둥근 고리가 달린 쪽의 뒷면입니다.

화면의 가장자리에는 그물무늬와 톱니무늬의 띠를 둘렀고, 전체 화면은 그물무늬로 양분하였고,

오른쪽에는 농사일 하는 두 사람이 왼편에는 크게 덜어져 나간 부분이 있어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토기 항아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여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오른 편의 농사 장면은 중앙에 횡선이 쳐진 정사각형의 농토가 표현되고

그 위로 따비질 하는 남자와 괭이질 하는 인물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따비질 하는 인물상의 표현은 단순화된 선묘법과

몸체에 등뼈의 선을 넣은 암각화의 x-ray에 투과한 뜻한 線 새김기법을 보여 줍니다.

따비에 발을 얹고 고랑을 파는 힘찬 자세와 팔다리의 동작을 비롯해서

신체구조의 세부 리듬감은 실감나는 표현이며

이 인물상은 두 가닥의 긴 새의 깃털머리 장식을곁들이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사 농부는 아닌 듯싶고, 농경사회를 이끌어가는 마을 혹은 지역의 우두머리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따비질하는 인물상의 경우 양 가랑이 사이로 男根을 뚜렷하게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多産과 豊饒을 동일시한 곧 다산을 통해 풍요을 祈願하는 性 신앙적 풍습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며,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상이 남근을 새우고 있는 모습과도 상통합니다.

또한 근래까지도 관북과 관동지방의 화전민 마을에서는

豊農을 기원하기 위해 神主로 뽑힌 남성이 실제로 발가벗고 쟁기질을 했다는 풍습은 그런 전통의 잔영이겠지요.

특히 남근이 달린 인물상은 시골 어른들이 '좆심이 땅심이다'하는 말을 떠 올리게 하며

오래된 농경풍습에서 형성된 속담일 것입니다.

 

 

<농경문청동기>의 그림을 통해서 주목되는 회화적 특징은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첫째로 정확한 동작과 세부묘사의 사실성이고,

둘째로 '농사를 짓는다'라는 서술적 표현을 분명히 보여 준다는 점이지요.

이는 반구대의 암각화의 집단적인 동물을 통해서 수렵이나 어로 생활상을 드러낸 방식보다

구체적인 서사성을 지닌 것으로 표현방식상 커다란 발전입니다.

셋째, 암각화와 유사한 방식이면서도 두드러지게 달라진 점은 네모꼴의 농토보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크게 표현된 점입니다.

이는 반구대 암각화의 동물들 사이에 숨은 인간의 왜소한 표현과 대조적이지요.

암각화의 인물상들에 비하여 농경문청동기에서 네모꼴의 농토 표현보다 사람을 크게 묘사한 것은

그만큼 인간의 존재가 중요해진 까닭입니다.

수렵과 어로, 채집생활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사람들은

삶을 유지시켜 주는 식량으로서 동물이 더욱 중요 했기에 그렇게 동물을 크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본격적으로 농경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조해야 되었고

토지의 개간 외에도 씨뿌리기부터 수확하는 과정은 모두 사람의 손길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인간이 스스로 식량을 만들어 내야 하는 농사의 풍요에 대한 소망과 사람이 삶을 낳는 일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고 노동력의 절실한 필요성이 생식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져 땅보다 인간을 비중있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농경문청동기>

출토지역과 기원전 3~4세기로 추정되는 연대로 보아 馬韓과 관련이 깊은 유물로 상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흔히 이 청동기는 중국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 마한조의 기록과 연계해서 거론되기도 합니다.

 

"항상 오월에 파종을 한 다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노래하고 춤 추며 밤낮없이 음주를 즐긴다,

그 춤은 수 십명이 일어나 서로 따르면서 땅 밟고 몸을 굽혔다 폈다하고 손발을 서로 맞추는데 그 연주가 鐸舞曲과 같다.

시월의 농사가 끝난 뒤에도 역시 그와 같은 행사가 이루어진다.

귀신을 믿고 國 邑에서 각각 한 사람을 내세워 천신제사를 주제하게 했고 이름은 天君이라 한다.

또 모든 나라에 각각 별읍이 있고 이름을 蘇塗(소도)라 한다.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걸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곳에 이르면 불러내지 못하여 도둑들이 좋아했다.

그렇게 소도를 세운 뜻은 浮屠(불교의부도)와 유사한데 선과 악의 행동에는 차이가 있다."

 

이기록은 <농경문청동기>에 적용해 보면 따비질과 괭이질이 새겨진 부분은 바로 5월의 파종을 위한

농사 장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의 왼쪽 공간에 표현된 토기의 인물상 부분은 

10월 농사를 끝내고 추수감사제 형태의 행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봄과 가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무와 음주로 축제를 벌였던 馬韓의 계절제를 묘사한 그림으로

맞아 떨어지는데 그렇게 볼 때

<농경문청동기>의 용도는 남근을 드러내고 따비질하는 인물상이 목에 걸었던 의식 행사용으로

呪述的 儀器였을 것이며 아울러서 마을 혹은 부족의 수장이 인물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신구의 역활을 함께 하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또한 그처럼 권위를 표상하는 그림은 농경문의 반대면의 나뭇가지의 새입니다.

한쪽이 유실되었으나 좌우에 둥근고리를 장식했을 앞면인데 가장자리에는 농경문쪽의 톱니 무늬 와 달리

평행선 문양이 둘러져 있고 좌우를 가른 가운데 띠 문양은 

농경문이 새겨진 면과 같고 화 면 좌우에는 두 가지에 각각 새가 앉은 모양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새는 영혼을 하늘로 옮겨주는 영물이거나 神을 부르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날짐승이지요

이는 동물숭배의 애니미즘적 표현으로 유목생활의 전통을 유지한 스키타이문화에서 그 연원을 찾습니다.

실제 내몽고나 남 시베리아지방에서 나뭇가지에 새를 얹은 청동기 장식물의 사례가 있으며

지금도 우리나라의 솟대와 같은 것들이 그곳에 많이 있습니다.

새를 하늘과 교감하는 영물로 여긴점은 천신을 부르는 역활을 했다고 생각한 결과 일 것입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 <농경문청동기>의 나뭇가지의 새가 있는 표현은 

'소도'의 천신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특히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큰 북을 달았다"는

소도와 관련된 기사와 연계해 보면<농경문청동기>는 馬韓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천신제와

봄.가을에 지낸 계절제를 형상화한 의기로 당대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貴物이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