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先史)/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靑銅器時代. (청동기)理解

鄕香 2006. 4. 23. 13:15

 

靑銅은 구리를 기본으로 하는 구리합금의 한 종류로서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합금입니다.

일반적으로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드나 주조할 때 熔融點을 내리고 주조 후 표면처리와 마감처리를

편하게 아연.납 등을 섞기도 합니다.

특히 아연을 섞은 것은 우리나라 특유의 합금술로서 주조시 유동성에 도움을 주며 잘 부식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주석이나 아연을 많이 섞을수록 단단한 청동이 되는데 만들고자 하는 청동기의 용도와 기능에 따라

합금의 성분비율을 조절하여 주조하였습니다.

청동기의 성분 분석 결과 한국식동검은 대체로 평균 구리 79.2%, 주석 13.4%. 납 6.8% 이며,

儀器 등은 구리가 평균 59.65% 납은 7.35%로 비슷하고 아연은 미량에서 24%까지 보입니다. 

대체로 그비율은 구리에 주석이 5% 이내면 延伸性이 20% 정도면 가장 좋으며

 25% 이상이면 연신성은 거의 없어집니다.

또한 硬度는 주석이 10% 이상이면 좋아지기 시작하여 30% 정도가 되면 가장 좋아집니다.

따라서 구리의 전연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경도도 좋은 청동은 13~18% 정도의 비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리의 鎔融點은 1083도 이며 주석의 녹는 온도는 232도입니다.

구리에 주석을 13%를 섞으면 녹는 온도가 830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청동은 구리에 비해 녹는 온도가 낮고 경도가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주석이 섞인 양에 따라 청동의 색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즉 구리 빛깔은 주석이 섞이게 됨에 따라 점차 황색을 띠며 30%이상 섞이면 은백색을 띱니다.

이러한 청동 합금의 경도.녹는점.색깔 등의 성질을 이용하여 나름대로의 사용하기에 적합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즉 무기에는 경도를 중요시하고

거울이나 방울같은 儀器에는 빛의 반사를 고려하여 색깔을 중시하였습니다.

청동은 낮은 온도로 거푸집을 통해 다량 생산이나 크기나 규모에 자유로왔으며 날이 무뎌지거나

부러지면 연마하거나 녹여 재활용할 수 있음에 자연적 재료인 뼈나 석기처럼 크기와 형태에서

제한을 받지 않기에 신석기시대에 비해 청동기의 큰 배경은 야금술(冶金術)의 출현이라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청동기는 다른 유물에 비해 수량이 적고 집터나 고인돌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으며

돌널무덤이나 초기철기시대의 널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들 청동기는 일반 주민들의 실용품이라기 보다는 유력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던 특수품,

또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는 크게

前期의 요령식동검 문화와 後期의 한국식동검 문화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기의 청동기 문화는 그 내용으로 보아 요령성을 중심으로한 요령식동검 문화에 기원을 두며

크게는 기원전 1,000년 무렵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 걸쳐 형성된 요령식동검 문화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령식동검 문화는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기원전 4세기경에 북에서 새로운

문화 요소가 더해지면서 한국화된 한국식청동기 문화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이후 한국식동검 문화는 중국의 청동기 문화 요소를 받아 들이면서 발전하다가

중국에서 철기가 유입되는 기원전 3세기 후반 또는 기원전 2세기 전반경부터 철기시대로 들어서게 되며

 청동기 문화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전기는 요령지방에서 청동기가 유입되기 시작한 때부터 철기가 등장하는 때까지 -

 

후기는 비록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한국적 청동기가 제작되면서 한반도 청동기의 특징이 확립되고

나아가 일본에 그 문화를 전해준 시기를 말합니다.

 

전기의 청동제품은 집터에서의 출토는 거의 없고, 고인돌을 비롯한 무덤에서 대부분 출토되고 있습니다.

종류로는 요령식동검.요령식투겁창.부채도끼.화살촉.손칼.끌.밀개.거친무늬거울.당추 등이 있습니다.

요령식동검은 후기에 나타나는 한국식동검의 祖型으로 초기에는 요령지방에서 유입되었으며

중국 遙寧.길림.장춘 지역을 비롯하여 동북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 동검은 날 부분이활모양으로 휘어져 있어 비파형 또는 곡인(曲刃)청동단검으로 불리우며 분포지역에

따라 요령식 또는 만주식동검으로 불립니다.

자루를 따로 만들어 劍몸에 끼울 수 있도록 짧은 슴베가 달려 있어

중국식동검(桃氏劍)이나 북방계의 오르도스식동검과는 다른 특징을 보입니다.

요령식동검을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문화가 요동반도에서 서해안을 통해 서북과 중서부지역에 먼저

들어와 각지로 확산되면서 한반도도 본격적인 청동기문화에 접어들게 됩니다.

동검이 생활 유적에서는 출토된 예는 없으나 부여 송국리 집터에서 요령식동검과 공반되는 부채도끼의

 거푸집(鎔范)이 출토되어 일상생활 속에서도 청동기의 주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지요.

거울은 뒷면에 동물이나 형상이 그려져 있는 중국거울과는 달리 처음부터 기하학적무늬로 출발하는 

특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지도 중앙에서 한 쪽으로 약간 치우쳐 2개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뒷면의 무늬를 기준으로 거친무늬와 잔무늬로 구분하는데 빠른 시기에는 거친무늬의 거울이

사용되었습니다.

기하학적 줄무늬를 기본으로 하면서 번개무늬.별모양무늬 등 특색있는 변화를 보여 줍니다.

도끼는 자루에 끼우는 부분이 좁고 날쪽이 부채꼴처럼 넓어진 형태로서 무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속초 조양동과 의주 미송리유적에서는 실물이, 부여 송국리와영흥읍에서는 거푸집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후기는 순수한 한국식 청동기가 제작 사용된 시기로서

청동기의 제작이 증가하여 한국식동검, 꺾창, 투겁창 등의 무기류와 잔무늬거울(精文鏡)을 비롯한

방울달린 청동기 및 검파형(劍把形).방패형(防牌形).원개형(圓蓋形) 등의 청동의기(靑銅儀器)류가

대부분이며 도끼.끌.밀개 등의 공구류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무기류가 숫적으로 가장 많은데

동검은 한국 청동기문화의 대표적인 유물로서 한반도 청동기문화를 동검문화라고도 합니다. 

기원전 4세기이후에 제작되어 형태가 세부적으로 변화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거울. 곱은옥과 세트(set)를 이루어 출토되는 예가 많고,

투겁창.꺾창과 더불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창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으나 형태는 한국식동검의 요소가 많이 보여 한국화된 유물입니다.

거울은 동검과 함께 한국 청동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전기의 거친무늬에서 발전된 극히 섬세하고 정교한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방울류에는 장대투겁과 가지방울이 있으며 그 안에는 구슬이 들어 있습니다.

이밖에 방패형.검파형.나팔형.견갑형 등의 청동기가 보이는데 대부분 고리가 달려 있고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에 사슴이나 손 등이 새겨져 있어 주술적(呪述的)인 성격이 띠고 특수한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도끼나 끌 등은 영암에서 출토된 거푸집에서 볼 수 있듯이 전기의 형태에

주머니 모양의 둥근 것도 함께 보입니다.

또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는 한국식동검과 함께 대롱옥. 곱은옥. 둥근옥과 작은구슬 등이

출토되는데 목걸이.귀걸이로 사용되었습니다.

대롱옥은 벽옥(碧玉)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원통형에 실을 꿸 수 있도록 장축을 따라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곱은옥과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곱은옥은 천하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나 고남리 조개더미에서는 경옥(硬玉)으로 만든 것도 

출토되었답니다. 형태는 반달형과 콤마형이 있는데 머리부분에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러한 대롱옥과 곱은옥은 청동거울이 출토되지 않는 영남지역에서는

널무덤이 만들어지는 시기인 초기철기시대 말기가 되면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조각품으로는

신석기시대부터 개. 새. 돼지. 사람. 여신상.神像 등의 흙으로 만든 조각품이 나오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도 보입니다. 이러한 인물상들은 부족의 번창을 도와주는 조상신을 듯하고 동물조각도

번식을 비는 주술적 존재를 표현한 듯 합니다.

이외에도 악기로는 뼈로 만든 피리가 발견된 바 있으며

청동기에서 보이는 의기와 함께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훨씬 폭넓은 예술활동의 흔적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