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전.중기의 토기는 전통적인 무문토기와 새로운 제도술(製陶術)로 만든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대별됩니다.
무문토기는 아가리에 점토띠를 덧댄 것이 특징인데, 점토띠의 형태에 따라 원형과, 삼각형으로 구분하지요.
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는 전기의 대표적인 토기로 소형옹(小形甕)이 주류이고,
검은 간토기(黑陶長頸壺), 고배(高杯) 등과 공반됩니다.
중기에는 점토띠의 형태가 삼각형으로 변화하고 와질토기가 등장하며 이 시기는 철기가 보편화되는 시기로
점토대토기는 옹(甕), 발(鉢), 시루 등에 나타나며, 壺, 高杯, 시루 등도 공반됩니다.
와질토기는 무문토기와는 달리 밀폐된 室窯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조성한 것이 특징인데,
태토는 정선된 니질점토(泥質粘土)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器種은 組合牛角形把手附壺, 주머니甕, 壺 등이 대표적이지요.
그런데 원형점토대토기는 중국 동북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한국식동검문화의 원류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삼각형점토대토기는 한강 이남지역에서 한국식동검문화와 함께 분포하고 있습니다.
삼한시대의 주거생활.
삼한시대 주거생활에 대한 기록은 < 三國志魏書東夷傳 >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 땅을 파고 지은 초가 움집인데 문이 위에 나 있고 온 가족이 한 집에서 산다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塚 其戶在上 擧家共在中>."는 내용이지요.
이러한 실상은 고고학적 조사에서도 입증됩니다.
현재까지 삼한시대의 집자리 조사 例는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영남지역에서는 삼천포 늑도, 동래 내성, 경주 황성동과 거창 대야리, 김해 봉황동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대야리와 봉황대유적은 후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前. 中期에 속합니다.
집자리는 전부 땅을 파고 만든 움집이지만 평면형태는 원형, 타원형, 방형,(말각방형 포함) 등 다양하고,
내부에 爐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집자리 규모는 길이가 4~7m내외입니다.
이러한 집자리의 다양성은 지역, 계층,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대체로 가족이 함께 거주하고, 약간의 부속 시설과 함께 공동 시설도 있엇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3세기대에 속하는 봉황대 46호 집자리에서는
바닥에 적색, 황색, 갈색의 점토와 분말 흙을 치밀하게 판축하여 습기를 방지한 시설이 있어 주목됩니다.
이러한 시설은 소형 집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와 시설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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