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慶南) 김해시(金海市) 주촌면(酒村面) 양동리(良洞里) 산 3번지 일대에 위치하는 대규모 고분군으로, 대개 유적은 B.C. 2세기에서 A.D. 5세기대까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나지막한 구릉의
사면과 정상부 및 하단부 일대가 모두 유적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유적의 위치는 김해평야에서 진례평야로 넘어가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정 시기동안에는
이 지역일대의 지배자 집단의 공동묘역으로 판단됩니다.
이 유적에 대해서는 이미 1969년에 수습 조사되어 학계에 보고된 이래 주목받게 되었으며,
이후 이양선박사 수집유물 중에 양동리 고분군 일괄 출토품이라고 전하는 동경(銅鏡), 청동병부철검
(靑銅柄附鐵劍)이 도록에 소개되어 삼한 시기의 중요한 고분군임이 다시 한 번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유적의 성격파악을 위하여 정식 발굴조사가 1984년에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구체적인 유적의 성격파악을 위해 이루어진 학술조사였지만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해 발굴구간은
소규모에 한정되었습니다. 조사결과 널무덤(木棺墓) 11기, 덧널무덤(木槨墓) 17기, 독널(甕棺) 3기 등
2-3세기대의 분묘가 좁은 면적에 밀집 분포하여 중복상태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후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계기는 당시 김해군의 도정공장부지로 이 유적의
일부가 포함되어 구제발굴이 계획되면서부터입니다. 이 구제발굴을 시작으로 1990년부터 1996년까지
동의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연차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발굴범위도 상당한 면적에 이르렀습니다.
이 발굴을 통하여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독널무덤(甕棺墓),
유사돌무지덧널무덤(類似積石木槨墓) 등 총 548기의 분묘(墳墓)가 노출되었고,
토기(土器) 2,000여 점, 토제품(土製品) 12점, 철기(鐵器) 3,059점, 청동기(靑銅器) 44점,
장신구(裝身具) 74점, 석제품(石製品) 1점, 기타 2점 등 5,192점에 이르는 유물이 수습되었습니다.
이 유적에서 조사된 분묘유구들은 유적 자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성된 만큼 묘제의 변화 양상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데 가야지역 묘제의 기본 변화의 과정,
즉 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돌덧널무덤의 순이 다시 입증되었습니다.
널무덤으로서 대표적인 유구는 55·70·427호묘인데,
이 중 70호는 이 유적의 형성 개시기와 관련되는 무덤으로 일종의 돌돌린움무덤과 유사한 구조로
발굴자는 B.C. 2세기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유구는 55호 널무덤인데 발굴조사지역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 대부분의 덧널무덤보다는 훨씬 깊게 조성되어 있어 후축묘(後築墓)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합니다. 무덤구덩이(墓壙)의 평면형태는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이고
장축방향은 동-서향으로 이 무덤의 중앙에서 요갱(腰坑) 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무덤구덩이(墓壙)의 크기는 길이, 너비, 깊이가 2.93×1.23×1.12m이며 충전토(充塡土) 내부에서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환형청동기(環形靑銅器), 와질토기 주머니항아리, 쇠화살촉(鐵鏃)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대개 나무널(木棺)은 2.43×0.66×0.35m로 추정되는데,
널 내부에서 유리구슬(琉璃小玉), 방제경(倣製鏡), 환형청동기, 철검 등이 출토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의 중앙에 설치된 요갱은 0.6×0.5m의 부정형으로 얕게 판 구덩이인데 그 내부에서
쇠투겁창(鐵矛), 청동제검파두식부철검(靑銅製劍把頭飾附鐵劍)이 출토되었습니다.
양동리 유적의 발굴 최대의 성과는 162호 덧널무덤의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162호묘는 현재 발굴조사된 덧널무덤 중 연대가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최고(最高)의 덧널무으로
진·변한(辰·弁韓)지역에서 덧널무덤의 등장시기를 적어도 2세기 후반경까지 앞당겨준 유구가 되었습니다.
무덤구덩이의 평면형을 보면 길이, 너비, 깊이가 4.94×3.44×1.23m로서 방형(方形)에 가까운
장방형의 평면형을 보여줍니다. 이 덧널무덤에서는 토기는 물론이고 용기류 자체의 부장이 극소한 편인데
와질토기(瓦質土器) 굽다리입큰항아리(臺附廣口壺) 1점과 서남쪽 귀퉁이 보강토 위에서
철복(鐵복)이 1점 출토되었을 뿐이다.
덧널의 규모는 길이 3.88m, 너비 2.8m가량 되는데 덧널의 동쪽 단벽으로는 쇠투겁창(鐵矛)과
쇠화살촉(鐵鏃)이 무더기로 나오고 널의 네 모서리 쯤으로 추정되는 위치에는
판상쇠도끼(板狀鐵斧)로 된 철소재가 각각 10매씩 놓여 있었다.
덧널의 거의 한 가운데와 널의 상단쯤 되는 곳에서는
후한경(後漢鏡) 2매와 내행화문계(內行花文系), 방제경(倣製鏡) 8매가 유리구슬과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양동리 162호묘 발견이 중요한 것은 이들 후한경과 방제경의 조합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덧널무덤의 상한연대로서 연구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보이지만
2세기 후엽이라는 발굴조사자의 연대추정이 타당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양동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유구들 중 중요한 묘제는 단연 덧널무덤라 할 수 있는데,
162호묘 외에 중요한 덧널무덤으로서는
다량의 와질토기(瓦質土器)와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동복(銅복)과 경질도기(硬質陶器)의 발견과
함께 전소된 나무덧널(木槨)이라는 특이한 장법이 확인된 235호 덧널무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322호 덧널무덤이 중요한데 이 무덤에서는 명문(銘文)이 있는 동정(銅鼎)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동정이 발견되기는 지금까지 남부지방의 경우 경주 천마총(天馬塚), 황오리(皇吾里) 4호분,
노서동(路西洞) 138호분 등 신라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만 출토되다가
울산 하대(下垈) 23호분에서 1점이 확인되어 원삼국시대 덧널무덤에서도,
수입된 청동기로서 처음 출토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명문(銘文)이 있는 정(鼎)은 중국 외의 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된 예로서 짧은 다리나 이두(耳頭)의
형태로 보아 B.C. 100-A.D. 100년 사이에 중국 황하 중·하류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그동안 전세되어 3세기대의 322호묘에 매납된 것으로 보이는데,
명문의 내용은 직접 가야와 관계된 것은 아니며,
동정의 내원(來源)과 성질(性質) 등에 관한 내용으로서 읽기 어려운 글자도 있지만
대체로 “西�宮鼎 容一斗 幷重十七斤七兩 七”로 해독됩니다.
양동리 고분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가야지역의 대표적인 묘제라 할 수 있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의 기원과 그 발생시기에 대한 것입니다.
양동리 유적에서 찾아진 발생기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덧널무덤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덧널무덤으로부터 변형·발전된 것임이 확인되며, 그 등장시기는 4세기 중엽경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초기 돌덧널무덤(石槨墓)의 구조적 특징 중에서 덧널무덤과의 관련성을 뚜렷이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은
돌덧널과 무덤구덩이벽 사이에 보강토를 채우면서 축조하지 않고
무덤구덩이(墓壙) 내부에 나무덧널(木槨)을 설치하고 이에 의지하여 벽석(壁石)을 짜올린 안 나무덧널,
바깥 돌덧널의 이중곽(二重槨)의 성격을 띄고 있는 점입니다.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한마디로 가야 고분문화의 시기적 변천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양한 철제무기(鐵製武器),
갑옷과 투구(甲胄), 마구(馬具), 공구(工具) 등에 소용돌이장식문양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특수하게 제작된 이 유물에 대해 발굴조사자는 그것을 소유한 피장자(被葬者)의 특수한 사회적 신분이나
역할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는데, 주술적 성격이 강한 제사장(祭司長)이나 권력자(權力者)임을
나타내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합니다.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청동기에 있어서도 한경(漢鏡) 및 방제경(倣製鏡) 등의 동경(銅鏡), 명문동정
(銘文銅鼎), 동복(銅복), 광형동모(廣形銅矛), 통형동기(筒形銅器) 등 매우 다양한 종류가 출토됩니다.
특히 이들 청동기 중 상당수가 낙랑(樂浪)이나 왜(倭) 지역에서 수입된 물품이란 점은 당시 양동리
고분군 축조집단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입니다.
특히 김해의 지리적인 위치가 낙동강 하류역이고, 일본의 북부 구주(九州)와는 최단거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양동리 고분군의 집단은 당시 낙랑과 왜, 그리고 내륙의 진한과 변한의 여러 나라들을 연결하는
교역망의 중심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유적에서 출토된 수 많은 외래유물(外來遺物)은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양동리 고분군은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이 지역 지배자 집단의 공동묘지로서 낙동강(洛東江)
하류 가야사회의 기원과 성장과정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참고문헌 >
金海良洞里古墳文化(林孝澤·郭東哲, 東義大學校 博物館, 2000), 金海良洞里 遺蹟의 諸問題(林孝澤, 東北아시아에 있어서 伽倻와 倭, 慶尙南道, 1993), 金海 良洞里 古墳 發掘調査報告書(國立文化財硏究所, 1989), 金海地方出土靑銅遺物(朴敬源, 考古美術 106·107,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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