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옛길 경흥 제 1길 (사패산길) 」

鄕香 2021. 12. 18. 20:21

아침 컴퓨터로 경기옛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기다리던 경흥길이 개통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마트 폰에서 경기옛길을 홈페이지에 들어가 경흥길을 클릭하면 늘 준비 중이란 창이 떴는데, 이틀 전에 개통이 된 것이다. 내 폰으로는 영흥길 여정을 볼 수 없고 도무지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11시가 다되어 망월사역으로 달려갔다. 제1코스는 8Km 3시간 30분 여정이라기에 바로 1코스 사패산길로 들어섰다.

나에게 사패산길은 만추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의 낙엽과 사색에 젖어 살아온 여정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40년 전 수유리 419탑 인근에서 5년을 살았던 연유로 당시 내 평생 잊지못할 예쁨과 행복으로 내 안에 자리한 내 아이의 모습과 이야기를 되새임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구리시에서 중앙선을 타고 회기역에서 의정부 방면 1호선으로 환승 후 망월사역에서 내려서 경흥길 제1코스 사패산 길로 들어섰다. 출발시각은 2021년 11월23일 11시20분이었다. 

 

 

망월사역을 나서보니 경기옛길 안내판과 인증함이 나란히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신한대학교 건물이 말끔하다. 

 

 

《경흥대로/慶興大路》

경흥대로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6대로 중 주요 간선도로의 하나로 서울에서 관북으로 가는 큰 길이라는 뜻에서 關北大路라고 불렀습니다. 關은 철령 고개에 위치한 '철령관'을 말하는데, 고려시대 함경도 지역이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을 때 국경의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경흔대로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군사적으로 이용된 것입니다. 조선의 가장 중요한 영토 개척 지역이자 국경분쟁 지역은 한경도 지역이었는데 경흥대로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이용했던 경로이기도 하지만, 외적이 주로 침입한 경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경흥대로는 누원점과 송우장에서 활동하는 北商들이 건어물과 삼베, 미곡, 약재, 견과, 면포 등을 한양으로 들여오는 상품 교역로였습니다. 특히 동해에서 잡히는 한류성 어종인 명태가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는데 유통과 보존을 위해 가공된 형태로 거래되었습니다.명태를 건조한 북어, 황태, 코다리, 동태 등을 비롯해 명태알을 염장한 명란도 주요 거래 품목들이었습니다. 

경흥대로는 전통적으로 동북아 물산 유통의 중심 노선이자 한반도의 방어를 담당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경기옛길 가이드 북에서)

 

〈경흥길/慶興路〉

경기도는 의정부시, 포천시,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경흥대로의 옛 노선을 연구하여 고증하고 원형노선을 바탕으로 경흥길을 조성하였습니다. 다만 옛길이 없어지고 각종 도로로 노선이 끊기거ㄴ나 도보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간 등이 있으면 대체하는 길을 개척하여 경흥대로를 따르는 역사문화 도보탐방로 경흥길 89.2km를 새롭게 개통하였습니다. (경기옛길 가이드 북에서)

 

 

〈사패산길/賜牌山路〉

사패산 길은 서울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첫 관문입니다. 사패산은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으며 조선 선조 임금의 여섯째 따님이신 정휘옹주가 유정량(柳廷亮1591-1663)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한동안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일반인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의정부는 숲이 울창하고 물이 깨끗하여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을 경흥길에서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경기옛길 가이드 북 글 )

 

망월사역 3번 출입구 - 회룡탐방지원센터 - 의정부 시청 - 의정부역. 총8km, 소요시간 3시간30분.

 

망월사역 앞 길 건너 좌측에서 첫 로터리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도봉산 멋진 봉우리가 보입니다. 

 

 

첫 갈림길 좌측 길의 순댓국 간판을 지나갑니다. 지나가면서 슬쩍 들여다보니 왠지 먹을 만 하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좁아진 길로 바로 갑니다.

 

 

등산로 출입 길목이어서 음식점들이 제법 있습니다. 

 

 

똑바로 갑니다.

 

 

《경흥로의 원형노선과 그 가치》

경흥로는 한성과 동북지역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 였습니다. 1770년 여암 신경준은 '道路考'에서 조선의 간선도로를 6개 大路로 분류하였는데 경흥로는 그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정식 명칭은, "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로 되어 있으며 주요 경유지를 살펴보면, '한성-수유리점-누원(다락원)-축석령-송우점-만세교-김화-금성-창도역-회양-철령-고산역-안변-함흥-북청-길주-명천-회령-온성-경원-경흥-서수라'입니다. 이중 경기도 구간은 누원(다락원)-축석령-송우점-만세교-김화(자일리)까지이며, 의정부와 포천을 지나게 됩니다. 

경흥로는 과거 동북방의 물산이 서울로 들어오는 유통로였습니다. 특히 명태, 삼베 유통의 주요 경로 였습니다. 경흥로를 통해 유통되는 물산은 함경도 원산에서 강원도 철원을 거쳐 포천과 양주로 모였고, 물산이 모이는 곳에 場市가 들어섰습니다. 경흥로는 명태 유통에 기여한 사상도고, 송우도고, 원산도고, 통천상인 등 경흥로를 무대로 수많은 물류가 이동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경흥로는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길이 었습니다. 고모리산성, 성동리산성, 반월산성 등은 경흥로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군사시설로 이 산성을 축조하고 활용했던 이들이 경흥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경흥로는 한성과 동북지방을 연결하는 길이기에 태봉을 세우고 일어난 궁예가 지나간 길이며, 고려 시기 여진족의 침입과 이에 대응한 윤관 장군의 출정도 경흥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세종 시기 이뤄진 6진의 개척도 경흥로가 무대였으며, 현대로 넘어오면서 경흥로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했습니다. 경흥길은 이러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경흥로 주변에 남아있는 역사문화자원을 경흥길을 걸으며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게시판 글을 옮김)

 

 

대원사 담이 낮설지 않습니다 도봉산 산행을 끝내고 이 길로 하산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잠시 담 너머로 들여다본 대원사 경내 모습입니다.

 

 

대원사 협문

 

 

대원사 협문에 그려놓은 이 그림은 사천왕은 아니겠고 사천왕이 부리는 악귀의 모습일세.

 

 

대원사 맞은편 북한산둘레길로 들어섭니다.

 

 

여기서 담을 끼고 주욱 갑니다.

 

 

반가운 리본

 

 

바람 찬 날에 청솔을 보니 마음이 더욱 시립니다.

 

 

이정표가 우측 샛길을 가리키며 사패산길로 의정부역까지 6.61km 임을 알려줍니다. 

 

 

가을 향기 상큼하고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품어내는 피톤치드에 자연 치유 받으며 발길 사뿐합니다.

 

 

많은 가지능선 중 내 발길을 허락해준 예쁜 능선길 따라갑니다.

 

 

이 능선길의 종착점이자 다른 길의 시발점이네요.

 

 

북한산둘레 보루길의 안말교랍니다.

 

 

이 아치형 문은 입출구일까 이정표인가? 문밖 연두색 철조담에 이정표가 우측을 가리킵니다. 

 

 

육교 밑을 지나서 ..

 

 

두상을 닮은 바위가 길목을 지킵니다.

 

 

바위를 지나 돌아보니 돌을 쌓아올린 성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좌측 화장실 쪽 길로 꺾어집니다.

 

 

멋진 화장실은 동파방지책으로 임시 폐쇄되었습니다.

 

 

사패산 자락으로 들어서는 길도 보루길이랍니다. 가까운 능선에 堡壘城이라도 있나보다. 

 

 

맑은 물이 졸졸 이렇게 맑은 물을 보면 정신도 맑아지고 마음도 즐거워진다. 나만 그런가!

 

 

낙엽이 소복히 쌓인 오솔길을 걷노라니 심신이 즐거워 자지러진다. 

 

 

지나온 바위를 돌아서 바라보니 동해에 침투했던 북괴의 잠수정을 보는 듯하네.

 

 

자락길을 걷노라면 아기자기한 능선을 심심찮게 넘는다.

 

 

등성이길을 가로질러 다시 골짜기로 들어선다.

 

 

북한산둘레길 원심교

 

 

경흥길이 북한산의 수많은 가지능선을 넘고 넘어가는 북한산둘레길을 걷고 있네.

 

 

능성이를 돌아가는 길목에 버티고 있는 움푹움푹 패인 기이한 바위 모습. 

   

 

화강암 바위를 누가 저리 파먹었을가?. 비바람과 눈보라가 파 먹었지! 참! 奇怪한 모습이네.

북한산의 화강암은 중생대 쥬라기 (1억 8천만 년 ~1억 3천만 년 전)에 대보조산운동의 산물인 대보 화강암大寶花崗岩에 속하며

이와 같은 파임(구멍)을 타포니(tafoni) 또는 풍화혈이라고 부릅니다. 

 

 

〈다락원〉

조선 시대에 국가적인 일이나 개인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 또는 보부을 위해 숙식하던 院을 전국 각지에 두었는데, 다락원도 德海院이라는 이름으로 그 중 하나였다. 관리들이 출장길에 유숙하거나 원정길의 상인들이 머물 수 있던 집이었습니다. 그 원집에 다락, 즉 누각이 있어서 다락이 있는 집이라 하여 다락원이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강원도 철원,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가려면 대개 동대문을 나와 普濟院을 거쳐 수유리를 지나 다락원에 이르게 됩니다. 大東地誌에 보면 서울에서 다락원까지 32리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 초기 문신 徐居正은 이 다락원에서 도봉산 경치를 보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고.  

 

 

좌측으로 오릅니다. 

 

 

북한산은 오를 줄만 알았지 이리 둘레길을 걷기는 처음인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호젓한 사색의 길입니다.

 

 

어느새 동파방지를 위해 화장실은 모두 폐쇄시켜 놓았습니다.

 

 

든실한 나무계단이 돋보입니다.

 

 

낭만이 굴러내릴 것만 같은 낙엽 쌓인 멋진 길도 걸어 봅니다.

 

 

잠시 생각이 길을 찾아 숨바꼭질도 합니다.

 

 

또 한 등성이를 향해 오릅니다.

 

 

낙엽이 수북한 고갯길에 나무로 놓은 계단이 이리 운치가 있을 줄이야.. 벌어진 입 다물 수가 없어라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 보리라 -" 

 

계단 하나 둘 풍금 치듯 밟으며 노래 부르며 오르는 길은 제법 길 건만 힘든 줄 모르겠네.

 

 

노래부르며 오른 등성이마루는 고구려 때 보루성입니다. 

 

 

의정부시 호원동 산35-2 / 산36-2 / 산82-3

이 제3보루는 한강을 두고 삼국이 대치하던 때 고구려가 처음 쌓은 성으로 해발 234m 위치에 둘레 250m, 면적 2,901㎡ 규모입니다. 북서쪽의 사패산 1보루에서 800m, 2보루에서는 94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동쪽의 수락산 보루와 대응하며 중랑천을 따라 남북으로 연결되는 고대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을 했던 보루로 추정됩니다. 

유적의 평면 형태는 북동 - 남서방향에 장축을 둔 긴 타원형에 장축 길이는 약100m에 달하며 사패산 보루군 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성벽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 할석을 사용하였으며 면석의 경우 30~5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여 옆줄을 맞추어 가며 쌓아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잔존 상태가 양호하며, 성내부에서는 원형에 가까운 석축 시설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지표조사시 주로 동북쪽의 진입로 주변에서 삼국 - 통일신라시대 토기편이 주로 수습되었습니다. 보루 내부는 유적의 훼손이 심하며, 정상부 외곽을 돌아가며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건물지를 비롯한 내부시설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경계 목책 안쪽에 군 참호시설 및 소규모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측 등성이로 갑니다. 

 

 

등성이와 건너 산봉우리 사이 골짜기의 사찰을 나뭇가지 사이로 줌으로 들여다본 모습입니다. 저 사찰이 회룡사?

 

 

사찰 뒤 바위봉우리 모습입니다.

 

 

등성이를 타고 내려가는 길도 나무로 견실하게 놓은 계단이네요.

 

 

능선 길가에 건너 암봉을 조망하기 좋은 너럭바위가 있네요.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봉우리 모습들,

 

 

끝머리 바위봉우리를 줌으로 담은 정경입니다. 암벽에 먹물이 흘러내려 배인 듯이 거무죽죽한 줄이 인상적이다. 겸재 정선이 창안해 그린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를 보는 듯하다. 

 

 

너럭바위를 내려와 다시 폭신한 오솔길을 걷는다.

 

 

조만치 전망대가 있네.

 

 

작은 렌즈로 넓은 의정부시 전체를 모조리 담을 수는 없고..

 

의정부시와 그 너머 산들을 설명한 안내판을 담아 설명으로 갈음하고..

 

 

굽어지고 틀어진 계단을 통통 내려간다. 

 

 

이제 사패산은 끝인가 큰 길가에 아취문이 크게 입을 벌렸네. 날 토해 내려고..

 

 

이제 시내로 나가려나 보다

 

 

하- 이게 아닌데.. 이정표가 하천 건너 편 산길을 가리키고 있잖은가! 

 

 

화장실 앞에서 마치 V자 모양으로 오던 방향으로 앞서 가네.

 

 

사패산 제3 보루성에서 내려다본 사찰이 회룡사인가 보다. 그 길목에 경기옛길센터에서 해설판을 세워놓았습니다. 이에 옮겨 봅니다.

" 의정부에는 태조 이성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 용이 돌아온 절이 있습니다. 상상의 동물, 용이 아닙니다. 바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말합니다. 조선을 개국한 후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 모습들이 보기 싫어 멀리 함흥으로 떠나지요. 아들 태종 이방원이 많은 차사를 보냈음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함흥차사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지요. 그러나 끊임없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들의 바람에 결국 태조는 마음을 돌려 한양으로 향합니다.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 궁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왕사인 무학을 방문합니다. 무학대사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미움과 시기로 인해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지요. 이런 어려운 시기에 태조가 방문한 것입니다. 태조는 무학과 함께 며칠을 머물렀고, 훗날 이곳에 절을 짓고 임금이 궁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절의 이름을 '회룡'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편 회룡사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백일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의 어떠한 어려움도 구제해 준다는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는 설은 태조 이성계가 관세음보살처럼 모든 백성을 살피고 싶었다는 의지를 전한 것이 겠습니다. 사실 회룡사의 역사에 관해서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학대사 이전의 사실은 전하는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회룡사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됩니다. 지금은 새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렇지만 아들을 잃고도 또 다른 아들을 위해 한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마음, 관세음보살처럼 조선을 다스리고 싶어 했던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다.

 

 

V자에서 우측으로 들어서자 바로 우측 산자락에 안골길이 시작됩니다. 계단을 몸통으로 하고 머리를 아취문으로 꾸민 듯한 마치 용 같은 형상으로 나를 삼키려고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네요.

 

 

우측에 도로를 끼고 있는 산길로 오릅니다. 

 

 

코스가 망월사에서 의정부역으로 되어 있어 그 노선이 궁금했는데 이리 신선한 오솔길일 줄이야 미처 몰랐지요.

 

 

한 작은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언뜻 볼 때, 아, 저 통로로 들어가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이정표가 좌측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ㅎㅎ

 

 

좌측은 산자락, 우측은 도로인데 작은 수로를 낀 새소리 즐거운 숲길을 갑니다. 

 

 

에고, 또 아치문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큰길로 나서나봅니다.

 

 

우측에 대로를 끼고 좌측에 사패산자락길을 걸어갑니다.

 

 

사패산자락 언덕길가에 이정표와 사패산 이름에 얽힌 이야기판이 보입니다.

 

 

〈사패산 유래〉

도봉산 옆 賜牌山은 선조의 여섯 째 따님 정휘옹주가 유정량에게 시집갈 때 하사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유정량은 一人之下萬人之上의 領議政으로 권력을 휘두른 세도가 유영경의 손자입니다. 14세에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에 봉해졌습니다. 그의 성품이 활달하고 무인 기질이 있어 장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이 때문에 정휘옹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이무렵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 남녀 구분 없이 장죽으로 담배 피우ㄱ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옹주도 장죽을 물고 다녀 남편인 유정량이 보기에 지나치게 눈에 거슬려 몹시 나무랐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부부싸움으로 번졌습니다. 화가 난 옹주는 대궐로 들어가 분함을 실토하자 선조가 부마를 불렀습니다. 유정량은 괴나리봇짐을 메고 짚신 두 죽을 양 허리에 찬 채 궁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차림새가 버릇없는 것 같으면서도 奇人다운 데가 있어 선조가 손(客) 행색으로 궁중에 들어선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정량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상감의 노여움을 산 죄인으로서 유배를 면키 어렵게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선조가 "귀양길을 떠날 자라면 짚신 한 죽이면 족하지 두 죽은 다 무엇에 쓸 것인고?라고 묻자 이에 유정량은 "여필종부"라 하였으니 옹주와 함께 떠나려 하옵니다." 대답했습니다. 이에 선조는 더 이상 나무라지 아니했다고 전합니다. 

 

 

안골공원으로 통하는 굴다리로 들어섭니다.

 

 

굴다리가 고난의 길이라면 공원은 무릉도원입니다. 

  

 

공원으로 들어서자 바로 좌측 길로 들어섰습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고 올 일도 없을 나무들이 울창한 이 공원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건 오로지 경기옛길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사패산의 한 자락을 자연 그대로 훼손없이 꾸민 공원이라 자연스런 야생의 풍미를 보여줍니다.

   

 

공원 내 큰 길을 가로 질러 갑니다. 

 

우측 다리를 건너갑니다. 

 

 

둔덕 위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릅니다. 

 

 

언덕을 넘어 내려오는 길에 우측 시청방향으로 들어섭니다.

 

 

우측 들어설 길을 정방향으로 바라본 정경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측 시청 쪽으로 갑니다.

 

 

좌측 길은 큰 길로 나가는 길이며, 우측은 시청으로 이러지는 길입니다.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보이는 정자에서 좌측 시청별관 옆으로 내려갑니다.

 

 

의정부시청을 측면으로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의정부시청사〉

 

 

정자 앞에서 내려가는 데크계단 길

 

 

별관 앞에서 우측으로 갑니다.

 

 

시청 정문 전 첫 횡단보도에서 건너갑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경전철고가로를 따라 경기옛길 리본은 의정부역으로 이어집니다.

 

 

직선으로 뻗은 경전철고가로를 따라갑니다.

 

 

잎사귀 큰 활엽수의 낙엽이 운치가 있습니다.

 

 

의정부경전철고가로는 우측 도로 위로 뻗어 가고 1호선 전철 의정부역은 직진합니다. 저만치 의정부역사와 신세계백화점이 바라보입니다. 

 

 

경흥길 제1 사패산길을 마무리 짓는 의정부역 입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11월23일 화요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