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옛길 영남길 제8 (죽주산성길)」

鄕香 2021. 9. 26. 15:36

용인 석천리에서 출발하여 아기자기한 마을길을 지나면 봉황이 비상하는 형세인 아름다운 비봉산 숲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비봉산 정상에서 과거 궁예의 배후지였던 죽산의 멋진 풍광을 지나면 죽주산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죽주산성은 신라 때 내성을 쌓고 고려 때 외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세 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있고 보존상태가 매우 좋습니다. 죽주산성을 내려오면 매산리로 접어드는데 매산리는 과거 죽산 지역으로 다양한 고려시대의 문화자원이 남아 있어 당시의 향기를 진하게 느껴 볼 수 있습니다. (경기옛길 가이드 북)

   

 

구리시에서 출발한 나는 지하철을 이용 용인 '운동장 · 송담대역에서 하차해서 용인버스터미널로 이동해서  09시45분 출발하는 10-4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장평삼거리 정류장에서 나를 내려주고 좌측 길로 떠나고 나는 오른쪽 고갯길을 넘어 약1km 거리에 위치하는 석천리 황새울마을 사천교 앞 제8 죽주산성길 출발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우측에 조비산을 끼고 고개를 오르다가 뒤돌아서서 장평삼거리 버스정류장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나를 내려준 10-4번 버스는 우측 옥산 한택식물원 방향으로 갑니다. 이 삼거리에서 반드시 내려야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황새울마을(석천리)로 이어진 고갯길입니다. 

 

 

고갯길 우측으로 보이는 기암으로 솟아 있는 두 개의 봉우리 조비산의 모습입니다. 

 

 

보이는 다리(사천교) 앞 우측은 제7길 구봉산길 종착점 이정표 푯말이 있고, 다리 건너 바로 좌측에 제8길 죽주산성길 출발점이자 이정표 푯말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천교 앞 우측에 경기옛길 스토리보드가 보이는 곳이 제7길 구봉산길 종착점입니다. 다리 건너 좌측에 제8길 안내판과 이정표 푯말이 보입니다. 

 

 

제8길 죽주산성길이 시작되는 곳의 정경입니다.

 

 

들판을 가로지른 황새울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 둑길이자 농로를 따라 발길을 옮깁니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전전날 재차 찾아가 둘러본 조비산이 정배산 구봉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한 점으로 멀어져 가는 나를 의젓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수풀우거진 산자락을 우측에 끼고 바로 갑니다 ↑

 

 

좌측 산자락을 돌아나와 농로에서 논두렁가운대 전신주에 매달린 영남길 리본을 따라 논두렁길을 거쳐 공사중인 큰 둑길로 나온 후 거쳐온 곳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전신주 붉은 원안에 영남길 리본

 

 

큰 둑길 바로 밑 전신주에 매어논 오래된 영남길 리본 모습

 

 

준설공사 중인 하천과 둑, 여기에서부터 제방공사가 끝나는 곳에서 하천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서40m거리의 전신주에 영남길 리본이 있습니다. 초행자는 여기에서 당황스럽습니다. 물론 우측 둑을 향해 안내 리본이 논두렁을 질러 왔기에 영남길은 우측 방향 둑길이라는 것을 가려낼 수 있었지만 이 둑길을 벗어나기까지 거리는 300m 거리가 족히 되며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전신주가 서너 개나 있음에도 영남길 리본이 없는 까닭입니다. 

 

 

저만치 보이는 전신주에 이정표는 있겠지 희망을 걸고 걸어갑니다.

 

 

이 전신주쯤에 리본이 있을 줄 알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앞에 다리가 있기에 저 다리를 건너 이어지는 마을 길 인지 생각도 들었기에 다리 건너 마을입구에서도 이정표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리본을 찾은 곳은 저 다리를 지나 하천을 건너서 또 다른 마을길로 들어서서였습니다. 

 

 

다리 앞에 이르도록 또한 지나서도 좌측에 전신주가 여럿 있었지만 이정표나 리본이 없기에 다리를 건너 마을길 주변을 찾아봤지만 이정표나 리본이 보이지 않아 다시 다리를 건너 둑길로 걸어갔습니다. 

 

 

우측 둘길에서 하천에 네 개의 수로관을 묻고 임시 길을 낸 곳을 건너 우측에서 좌측 전신주들이 있는 길로 들어서 사거리우측 전신주에서 비로서 이정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큰 둑길에서 산자락마을로 들어서는 들머리입니다. 저만치 가는 자동차 옆 전신주에 이정표와 리본이 보이는 듯합니다. 

 

 

논길에서 큰둑길로 나와 처음으로 찾아 낸 이정표와 리본이 있는 곳에서 논길에서 큰둑길로 나온 곳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 참말로 .. 어렵네요. 

 

 

다시 돌아서서 이정표와 리본 찾아 발길을 옮깁니다. 

 

 

여기서 산길로 들어서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닙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갭니다. 

 

 

우측 모퉁이에 서 있는 푯말의 이정표가 좌측을 가리킵니다.

 

 

백일홍도 곱고 댑싸리도 예쁘네요. 어려서 왕십리 살 적에 울타리에 심었던 댑싸리를 늦가을에 베어서 마당 쓸 빗자루 만드시던 할아버지 생각에 60년 전 추억에 묻혀 영남길을 헤맵니다.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바로 건너갑니다.

 

 

우측에 폐가 지붕만 살짝 보이는데 흉물스러워 담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좌측 길로 들어섭니다.

 

 

도로에 빛깔 고운 알밤이 여기저기 반들거리기에 한 됫박 주워 배낭에 담고 길갑니다. 

 

 

수집한 유리병을 분쇄기로 빻는 건물 옆을 지나 마을로 향합니다.

 

 

좌측 마을길로 들어섭니다. 

 

 

산과 하늘만 바라보는 논이 공존하는 산자락길을 파란하늘 흰 구름 보며 마음이란 도화지에 그림으로 채우며 갑니다.

 

 

친철하신 이정표씨 우측으로 안내하십니다.

 

 

한 길이 두 길로 보입니다.

 

 

어느새 내 앞서간 이정표 님 가로놓인 길 좌측에서 어서 따라오랍니다.

 

 

갓을 올린 지통암 표석 앞 우측 길로 들어섭니다.

 

 

사찰로 가는 길이라 서인가 따갑도록 더운 날에 이만한 자비면 최상이겠습니다.

 

 

몸을 내어줄 준비도 못했는데 해는 사정없이 가시광선을 내리 꽂습니다. 아이고, 내 피부 어찌할꼬!

 

 

잘 정리된 주변에 정갈하고 반듯한 건물이 보입니다.

 

 

《지통사》

부채꼴 모양의 비봉산 능선에서부터 탑 모양을 연상시키는 바위群이 빗선을 이룬 골에 산신각이 정좌하고 그 아래 좁지 않은 터 우측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좌측에 자연암석 前面에 약사여래불을 돋을 새김으로 조각한 바위가 자리한 아름다운 경관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들어선 아담한 지통사의 정경입니다. 

 

 

기존의 바위 면에 근래에 새겨 조성한 藥師如來佛像

 

 

지통사 대웅전

 

 

대웅전 우측 산책로를 따라 영남길은 이어집니다. 

 

 

공동묘지 옆 영남길 이정표에 죽산면 소재지까지 6km임을 알려줍니다.

 

 

잡목이 우거진 숲길로 들어섭니다. 

 

 

비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성길 입구입니다. 정상까지 거리는 500m, 거쳐온 지통암까지도 500m입니다. 

 

 

봉우리로 오르는 길에는 옛 고구려 및 통일신라 때 와당片으로 보이는 것들이 간간이 눈에 띕니다. 추측건대 봉우리에 옛 건물지가 있었지 않았을가 싶습니다. 

 

 

비봉산 정상비가 세워져 있는 평평하고 상당히 넓은 봉우리의 정경으로 미루어볼 때 성터가 아닐 가 추정해봅니다.  

 

 

쌓아놓은 돌무더기에 토기편과 와당조각들이 섞여 있습니다.

 

 

잡석을 쌓아 놓은 돌무더기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토기 또는 와당 片들이 간간이 섞여 있습니다. 

 

 

비봉산 정상 넓은 평지에서 죽주산성을 향해 옆 숲길로 들어섭니다.

 

 

비봉산 정상에서 100m 정도 걸었을 가 등성이에 영남길 이정표 푯말과 우측에 데크 계단이 보입니다. 

 

 

푯말과 이정표를 보니 비봉산 정상으로부터 100m 지점, 죽주산성까지는1.1km, 죽산면 소재지까지는 5.1km 지점입니다. 

 

 

데크 계단을 내려갑니다. 

 

 

계단이 끝나자 걷기 좋은 좀 경사진 오솔길인데 도토리가 길을 덮고 있어 로프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갑니다.

 

 

길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

 

 

상당히 큰 참나무 줄기가 기묘해 담았습니다. 

 

 

새끼거북이들이 나무에 오른다? 

 

 

바위에 걸쳐 있는 흔들바위 같기도 하고 밀면 굴러 내려갈 듯 한 바위의 모습.

 

 

능선에 성벽이 보이는데, 죽주산성에 이르른 것 같습니다. 

 

 

허물어진 성벽 위에서 이정표 푯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긴 세월의 애환을 뿜어 내는 성벽 위를 걷습니다.

 

 

상벽을 따라가다보니 높은 지대를 향해 복원된 성벽이 둘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죽주산성에서 제일 높은 위치로 죽주산성의 북문과 남문 방향으로 갈리는 성채 귀퉁이입니다.

또한 죽주산성내 영남길 이정표가 시작되는 곳으로 좌측 북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정표를 보니 내가 비봉산에서 거쳐온 방향 1.4km위치에 서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걸어온 길에서 곧바로 가면 남문지 방향인데 영남길 이정표는 북문지와 포루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선 이정표에 충실하여 북문지와 포루를 거쳐 동문지까지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와서 남문지를 거쳐 동문지로 가서 영남길을 만날 생각입니다.  

 

 

영남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북문을 향해 복쪽 성벽을 따라갑니다.

 

 

근대에 수축한 흔적이 없는 온전한 옛 성벽입니다. 

 

 

성벽은 골이 깊은 골짜기에서 ┌ 방향을 꺾어집니다. 

 

 

꺾어진 성벽의 모서리 모습.

 

 

능선을 타고 골을 따라가는 성벽의 모습

 

 

다시 능선을 따라 꺾어지는 성벽. 

 

 

꺾어지는 곳을 지키고 있는 이정표 푯말과 꺾여진 방향으로 뻗어 있는 성벽의 모습. 

 

 

일부 성벽이 무너진 곳을 지나서 살짝 보이는 북문

 

 

《죽주산성 북문》 북문지 상판석, 

 

 

죽주산성의 북문은 그 크기가 남한산성의 암문暗門(적의 눈을 피해 드나드는 비밀문) 정도의 규모이다.

 

 

두 여인 너머로 포루가 보입니다.

 

 

포대진지 (砲壘)

 

 

조선시대에 구축한 것으로 보여지는 포루의 모습

 

 

전면에 3개의 포구가 일정한 간격으로 뚫여 있고 우측에 2개가 있고 좌측에는 포구가 없다. 

 

 

포루에서 우측으로 꺾인 동측 성벽을 따라 비스듬히 약간 경사진 성벽을 따라갑니다.

 

 

성 안 건물지로 내려가는 계단 끝 좌측에 동문이 있습니다. 

 

 

동문과 이정표를 확인하고 남문지 방향 성벽을 돌아보기 위해 내려온 성벽길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서문(비봉산 방향), 북문, 남문으로 갈라지는 성곽 귀퉁이 삼거리에서 남문이정표 푯말을 담고 죽주산성 남문 방향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竹州山城은 비봉산(飛鳳山391m)정상을 거쳐 동쪽으로 뻗은 250m 봉우리에 위치합니다. 內城과 中城, 外城 등3개의 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삼국시대 쌓은 성벽 일부가 살아 있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까지 계속 수축되어 왔습니다. 처음 쌓은 성벽은 산 정상部에서 능선을 따라 계곡 사이(谷間部)를 감싸도록 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벽의 둘레는 1,322m로 삼국시대 성곽 중 큰 규모입니다. 성벽은 기단을 계단식으로 고루고(整地) 내벽과 외벽 및 속 채움까지 모두 돌로 쌓았습니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바른 층 쌓기 방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습니다.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붙여 쌓았는데 죽주산성의 이러한 축성법은 신라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쌓은 것임을 알려줍니다.

고려 고종 23년(1236년)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공격하자 죽주방호 별감 송문주 장군이 15일 동안을 싸워 적을 물리쳤는데 이 때에 삼국시대에 初築된 성벽을 수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변이중 · 황진 장군의 부대가 죽주산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워 승리했습니다. 임진왜란 후에도 수축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 때 왜성의 축성법이 성벽에 한해서만 일부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죽주산성은 이와 같이 여러 시기의 축성법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보고라 하겠습니다. 

 

 

서쪽 성벽 중간에서 서쪽성벽 끝과 남쪽 성벽 끝이 만나는 모퉁이를 담은 정경.

 

 

서측 성벽과 남측 성벽이 만나는 모퉁이에서 남측 성벽 따라 남문으로 가기 前 성곽 귀퉁이에서 바라본 죽산면 소재지 풍경.

 

 

남쪽성곽 모퉁이에서 서쪽 성벽 끝 이정표 푯말이 세워진 곳(걸어온 방향)을 바라본 정경. (죽주산성 서쪽성벽 끝과 북쪽 성벽 끝이 만나는 모퉁이)

 

 

남쪽성벽 모퉁이에서 동쪽성벽의 성치城雉를 바라본 정경으로 바로 아래에 남문이 보입니다. 

 

 

《죽주산성 남문》

성 안에서 바라본 모습

 

 

남문 바깥 문 앞에서 바라본 좌측 남쪽 성벽 

 

 

남문 문밖에서 앞에서 바라본 전경, 휘어 뻗어진 저 길이 17번 국도로 전북 남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닌가싶고, 좌측 산자락 앞 논들은 옛 봉업사址로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이 있는 지점입니다. 

 

 

남문 문밖에서 바라본 동쪽으로 뻗은 남쪽 성벽의 정경으로 하얀 성벽은 복원된 것임. 

 

 

남문 바깥에서 성안쪽을 바라본 정경. 천정 양 옆에 성문을 고정 시키는 '문지공석'이 보인다.

 

 

성문을 고정시키는 '문지공석'의 모습

 

 

다시 성 안쪽으로 들어서서 동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만나는 귀퉁이에 위치한 城雉를 향해 갑니다. 

 

 

복원된 성벽 끝에 성 바깥쪽으로 방형으로 돌출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치가 보입니다. 

 

 

방형의 城雉의 윗면의 모습입니다. 남한산성이나 아차산성 또는 북한산성에서 봤던 성치보다 월등하게 큰 자태입니다. 성치의 크기를 붉은 선으로 구분해 본 것입니다. 

 

 

正方形의 성치의 상면 모습

 

 

성치에서 동쪽 성벽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동문으로 내려가는 성벽길 모습 입니다. 좌측은 동문 안쪽 건물지, 우측은 동문 바깥. 

 

 

동문 앞에서 바라본 성 안 건물址 정경입니다. 

 

 

 

북문에서 포루를 거쳐 내려와 동문으로 이어주는 계단

 

 

《죽주산성 동문》

죽주는 고려시대 죽산지역의 지명으로 이곳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길 교통의 요지이다. 이 성는 죽주성 또는 애성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인데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여 몽고침략 때와 임진왜란 때 다시 쌓았다. 성벽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외성만이 원래의 성벽이 남아 있고 내성과 중성은 많은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중성 역시 하부구조는 아직도 삼국시대 모습이 상당부분 남아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 성을 모방하여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쪽 성벽의 동쪽과 서쪽 끝의 치성雉城부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바깥에는 도랑(마른 해자, 외함)의 흔적이 있으며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23년(1236년) 몽고군이 이곳 줒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강요하면서 공격하였으나 이때 성을 지키 죽주방호별감 宋文胄 將軍은 일찍이 龜州城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대비하였기에 이길 수 있었는데, 이에 백성들은 그를 神明이라 불렀다. 성안에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있다. 

    

 

 

《송문주 장군 사당(宋文胄 將軍 祠堂)》

 

 

이 사당이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 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조 때 문신이자 수원화성의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쓴 번안집(樊巖集:1791)의 송장군묘비명宋將軍廟碑銘으로 추측컨대 송장군 사후(1200년대 후반)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송장군묘비명에는 사당을 만든 지 5~6백년이 지나서 대들보가 부러지고 계단이 무너져 있는 것을 1767년 죽산부사 유언지가 옛적과 같이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1933년 8월 25일 동아일보에는 '후대 사람들이 송장군 충열을 사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수 백 마지기의 위토(位土: 제사와 관련된 일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장만한 토지)까지 장만하였으며 30년 전까지만 해도 제향날이면 죽산의 군인들이 취타대를 앞세우고 성대히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도 죽산면에서는 매년 9월9일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제향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채제공이 쓴 송장군 묘비명에는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고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한다. 성의 평탄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 집수시설 6기와 조선시대 집수시설2기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예로부터 죽주산성이 물이 풍부한 산이었으며, 이러한 기록이 진실임을 밝혀주는 증거가 된다.

 

 

《죽주산성 동문 (竹州山城 東門)》

성 밖에서 바라본 동문.

 

 

죽주산성을 뒤로하고 산성길을 나섭니다.

 

 

언제 어디서나 만나고 보는 길은 아름다운 스승입니다.

 

 

죽주산성 들머리 전경입니다. 우측에 영남길  제8 죽주산성길 인증함(스탬프 함)이 있습니다.

 

 

옛 원님들의 불망비나 공덕비가  나란히 세워진 앞을 지나 육교가 아닌 길로 갑니다. 

 

 

미륵당마을 경로당 마당 앞 영남길 이정표 푯말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죽산면 소재지는 2.2km 입니다. 

여기서 영남길은 두 길 중 우측 곧게 뻗은 길로 들어섭니다. 

 

 

길 바보가 길이 좋아 길을 사랑하고 길 따라 나서지만, 내 가는 길이 어디인지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오. 어쩌다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기에 담아봤다오. 

 

미륵당 노인정

 

 

《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노인정에서 50m 정도 걸어오면 이곳 석불입상을 만납니다. 

 

 

《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간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미륵불상이다.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菩薩像과 佛像 두 가지 형태로 만들어 지는데 이 立像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미륵불은 높은 머리 위에 사각형의 寶蓋를 쓰고 있다. 높은 보개는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를 통해서 이 불상이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목구비는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두 귀는 볼에 밀착되어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고, 굵은 목에는 번뇌, 嶪, 고난을 상징하는 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法衣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아래에서 내려오면서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 모양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얼굴에 보이는 평면적인 조각수법과 부조화, 신체의 크기에 비해 좁은 어깨 등은 충남 논산에 소재하는 보물 제219호 '개태사지석불입상'과 비슷하여 고려 초기 석불양식을 잘 보여준다. 

 

 

 

 

미륵부처 : 미륵보살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3번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상의 도솔천이라는 곳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우측면의 미륵불 모습

 

 

보개(寶蓋) : 불상을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머리 위에 설치하는 것이다. 

오른손 모양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불상 뒤 상체모습 조선시대 도석화道釋畵에 나오는 壽老人처럼 긴 머리를 보는 듯하고, 포탄알처럼 생겼다는 생각도 든다.

 

 

《미륵당 오층석탑(彌勒堂 五層石塔)》 향토유적 제20호

미륵당내 석불입상 앞에 건립되어 있는 화강암으로 제작된 석탑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 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각 부재가 화강암으로 정연하고 짜임새 있게 결구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다. 

 

 

미륵당 오층석탑(彌勒堂 五層石塔)의 구성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가 표현되어 기단을 떠받들고 있다. 단층기단은 네 귀퉁이에 隅柱를 새겼으며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또한 1石으로 조성된 갑석은 아랫면에 반전부분이 있고 윗면에는 불룩한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를돋아 새겼다. 탑신과 옥개는 각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현재의 1층 탑신에는 양 우주의 선각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2~4층의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옥개석은 4층의 것이 결실되었고, 5층은 옥신 옥개석이 1석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은 낙수홈이 있고 그 밑에 원호경사가 있으며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옥신괴임은 낮은 1단이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토되었고 현재 탑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탑지에 의하면 탑의 건립연대는 993년이고 석탑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미륵당을 나와 봉업사지 석불입상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봉업사 (奉業寺址)》

 

봉업사에는 석불입상 좌측에 새로 건립된 대웅전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건립연대를 알 수 없는 단아하고 아름다운 오층석탑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면에는 각형의 괴임대가 도출되어 기단을 떠받들고 있다. 단층기단은 네 귀퉁이에 隅柱를 새겼으며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또한 1石으로 조성된 갑석은 상면에 돋을새김의 연화문이 있고 낮은 각형의 1단 괴임대를 표출했다. 옥신과 옥개는 1~5층까지 모두 각각 귀퉁이에 우주가 표현된 탑신과 4개의 옥개받침이 표현된 옥개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원만한 경사를 이룬 낙수면에 隅棟은 전각에 이르러 은근한 반등의 멋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연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있다.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 安城 竹山里 石佛立像)》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97호

 

이 불상은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놓여 있는 높이 3.36m의 석불입상이다. 죽주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현 장소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온화한 얼굴에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다. 민머리 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肉髻가 있으며 양 어깨부터 배 부분까지 타원형의 옷 주름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몸매에 비해 머리와 손이 크게 표현되어 있고 육계, 타원형의 옷 주름의 표현 등으로 고려 초기 불상 양식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좌측면 모습.

 

 

불상 뒷모습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安城 竹山里 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

 

탑이 위치한 이곳은 고려시대 큰 절인 봉업사가 있던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탑 위에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다시 세운 것으로 전해온다고 한다. 

탑 기단부의 일부가 땅에 묻혀 탑의 완전한 모습을 알 수 없었으나 2005년도 발굴 조사 결과 단층 기단의 구조가 아니고 2층 기단의 구조임이 밝혀졌고 기초 지층부위에서 발견된 '太和' 銘 기와를 통해 9세기 전반에 탑이 건립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탑 높이는 3.2m이다. 기단은4장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각 면과 탑신의 각 몸돌에 모서리 기둥(우주隅柱)이 조각되어 있으며, 기단 덮개석(갑석甲石)에 연꽃을 엎어 놓은 무늬(복련覆蓮)가 장식되어 있다. 두꺼운 지붕돌(옥개석屋蓋石), 4단의 옥개석받침 등의 조형양식을 볼 때 고려시대의 탑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 (安城 竹山里 幢竿支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89호.

 

 

당간지주는 당간(깃대)을 고정해 주는 두 개의 지주대를 말하며 절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당幢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나타내는 깃발이고, 간竿은 당을 거는 장대를 말하며 주로 대나무나 철재로 만든다. 예전에는 목재로 당간지주를 많이 만든 것으로 보이나 남아 있는 목재 당간지주는 많지 않다. 

죽산리 당간지주는 현재 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바로 세워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높이 4.7m, 폭 0.76m, 두깨 0.5m로 약 1m정도 거리를 두고 한 쌍이 서 있는데 돌기둥의 표면이 거칠고 아무 장식이 없는 소박한 형태이다. 윗부분은 바깥쪽으로 둥굴게 다듬었고 앞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직사각형의 홈이 만들어져 있다. 남쪽의 기둥은 윗부분이 1/4 정도 깨어져 나간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로 보아 당간지주를 세운 시기는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제435호) 과 같은 고려 전기로 보아진다.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 (安城 奉業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 435호.

 

봉업사터에 있는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고려 전기 석탑이다. 이곳 봉업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신 국가에서 관할하는 사찰이었는데 조선 초기에 폐사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화차사華次寺란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 봉업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탑은 그 높이가 6m로 여러 장의 크고 널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단층 기단을 두고 구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우주隅柱)이 잘 남아 있다. 1층 탑 몸돌의 남쪽 면에는 작은 龕室을 만들었는데 그 감실을 막기 위한 문을 달은 듯한 흔적이 보인다. 지붕돌은 얊으면서 각 층마다 5단의 지붕받침이 표현되어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여 편평한 느낌을 준다. 현재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기단부가 둔중한 점, 1층 탑신이 다른 층에 비하여 유난히 높은 점 등에서 고려 시대 석탑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서 측면 모습

 

 

동북쪽 모서리 모습

 

 

오층탑을 마지막으로 옛 봉업사지를 떠나 죽산터미널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끝없이 가는구나 임 없는 타향길을 오늘도 해는 지고 주막집은 멀고 멀어 노을 빛만 울긋불긋 나그네 외로운 길 정든 고향 왜 떠났나 죽산의 길손~~,

 

 

어느덧 해는 늬엿늬엿 저물어 가고 노을빛 곱게 물이 듭니다.

 

 

죽주로 사거리에서 좌측 죽산버스터미널로 직행합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9월15일수요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