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성지순례길은 천주교탄압이 극심했던 시기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길입니다. 죽산면소재지를 출발하여 죽산성지에 이르면 넓고 아름답게 조성되었지만 슬픈 순교성지를 통과하게 됩니다. 죽산성지를 지나면 일죽면의 넓은 들을 지나게 되는데 멀리 보이는 성당 건축물과 함께 이국적인 풍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장암리, 화봉리, 금산리까지 이어지는 들길은 영남대로 주변에 있던 여러 재미 있는 전설과 민담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경기옛길 가이드 북)
(죽산버스터미널)
2021년 9월18일(토) 눈이 시리도록 쾌청한 파란하늘 흰 구름 몇 점 한가로운 아침, 동서울시외버스터미널에서 6시40분 출발하는 진천행 버스를 타고 죽산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8시20분, 터미널 좌측 로터리에서 다시 좌측 농협대형마트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죽산 농협 앞에서 바라보이는 죽산교..
죽산교를 건너 좌측 하천둑길로 들어선다.
안성, 이천에는 축산농장이 많습니다. 그 동안 보아온 축사 중 제일 청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배뇨를 그대로 하천으로 배출하고 있으니 옆 하천이 바로 오염되고 생명의 물이 폐수가 되겠지요. 마땅히 정화시설이 있어야 할 일을 왜 방치하는지, 관계법령이 분명있을 텐데, 모두의 안일한 의식이 안타깝습니다.
우측 농로길로 들어섭니다.
보름 전에 갔던 제천 의림지 앞 평야에는 이미 벼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거둬들인 곳도 적지 않았는데 이곳은 이삭이 이제야 물들어갑니다.
갈레길 앞에서 이정표가 우측을 가리킵니다. 이런 경우 길이 갈라지는 중앙에 세워진 전신주 정면에 이정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이는 이정표는 마치 우측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좌측으로는 어떤 이정표나 리본도 보이지 않고 우측을 보니 조만치 앞 전신주에 리본이 팔랑입니다.
리본 앞에 와서 보니 논둔덕길만 셋으로 뻗어 있고 길은 없습니다. 고지식하고 미련한 길치가 그 세 논둔덕 길을 반시간이나 모두 헤집고 다니다가 다시 이정표가 있는 원점으로 왔습니다.
이정표 진행 방향을 꺾어진 길 쪽으로 붙이거나 좀 더 뒤쪽에 붙이는 건 어떤지요?
좌측 길을 들어서서 좌측 두 번째 전신주에서 리본을 봅니다.
좌측에 이정표와 리본, 우측은 거리푯말이 풀섬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굴다리를 지나 첫 삼거리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길목낚시슈퍼 간판 방향으로 들어섭니다.
길게 들판을 질러가는 농로 길 따라 익어가는 벼이삭을 보니 절로 흥얼거리는 노래도 흥이 겹다.
'끝없는 벌판 멀리 지평선에 황금빛 물들어 가면 외로운 나그네의 가슴속에 아련한 그리움 솟네~~'
꺾어진 길모퉁이 지나 길가 숲에 이정표푯말이 반갑습니다.
울타리를 뚫고 들어간 타이어 깔린 길, 저 안이 수상하네. 그러나 영남길 이정표 가는 길을 어디인들 마다하랴...
울타리를 들어서니 고요만 흐르는 낙원이 펼쳐 있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느낌을 찾아봐도 정적만 스며드네.
이정표를 찾아보니 그 옆에 영남길 이야기와 인증함이 기다리고 있네.
「영남길 이야기」 48-6 《죽산성지》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된 순교터, 죽산성지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인 丙寅迫害(1866)때 많는 천주교인들은 현재 죽산면사무소 자리에 위치해 있던 죽산관아에서 참혹한 고문을 받다가 이곳에 끌려와 순교하였습니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순교자 '김도미니꼬'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딸을 내주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며 딸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렇게 밝혀진 순교자 외에도 수많은 무명의 신도들이 끌려와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원래 이 부근은 고려시대 몽고의 3차 침입 때 송문주 장군이 이끄는 죽주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몽고군이 진을 친 곳으로, 오랭캐들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하여 이진(夷陳)터라고 하였답니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터'는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 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터' 가 되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이진터'란 이름으로 비뀌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 순조1년(1801) , 기해박해 헌종5년(1839), 병오박해 헌종15년(1846), 병인박해 고종3년(186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 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죽산성지를 나와 영남길로 들어섭니다.
200m 거리 어딘가에 흔들바위가 있네요.
완만한 고개마루턱 우측에 영남길 이정표푯말이 풀 섶에서 머리만 살짝 내밀고 있어요.
금산리 버스정류장까지 6.5km 거리의 지점입니다.
60년대 서울 신촌, 수유리, 청량리 인근의 농로를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죽림15교라면 죽림교가 15개 이상 있겠습니다. 아무튼 다리 건너 우측으로 휘돌아서 굴다리를 향해 갑니다.
어둠에서 광명천지를 보는 느낌은 어떨가 하는 마음으로 봤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안성은 축산농가가 많습니다. 지금 상당한 규모의 축산농장을 지나갑니다.
향기로운 길 아닙니다.
갈림 길목을 지키고 있는 이정표푯말입니다. 제9길 종착점 '금산리 정류장은 5.01km 거리에 있답니다. 현재 시각은 오전10시08분입니다. 제10길 종착점 어재연 장군 생가까지 앞으로 15km를 갈 예정인데 시간상 충분하겠습니다.
수풀자락 끝 건물 옆 갓바위
'며느리의 소원을 이뤄준 갓바위" (영남길 이야기 47-5)
바위가 많았던 장암리에는 바위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답니다.
과거 장암리에 금망아지골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금망아지골에는 큰 부자가 살았는데 그 집 며느리는 손님을 대접하느라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시주를 하러 이 집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스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하루 묵을 방을 내주었습니다. 다음날 스님은 고마움에 소원을 하나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며느리는 '제 손에 물이 마르게 좀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스님이 가만히 보니 집 앞에 세워진 커다란 바위 위에 갓 모양이 이집 富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여 주인에게 '저 바위의 갓이 재앙의 씨앗이니 갓을 떼어 땅에 묻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갓모양의 바위가 사라지고 나니 집이 망해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 며느리의 손에 물이 말랐다고 합니다" 허 참! 벼룩을 잡으려고 초가 삼칸을 태웠네.
갓바위와 지나온 길 정경
두 전신주 사이에 숨어 있는 이정표푯말을 보고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시골향기 폴폴 나던 토담에 박 넝쿨도 볼 수 없고 마당에 뛰어 놀던 순덕이도 영희도 없는 고적한 마을을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길가에 보랏빛 율무꽃 방긋 웃는 그 모습 순희 얼굴 보이네.
길 건너편 하천방죽길로 갑니다.
안전을 위한 철조망이겠지만 보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네요.
여기는 훨씬 보기 좋은데 웬 까닭인 심겨진 나무들이 시들시들 합니다. 콘크리트 포장 때문일까 아님 옮겨 올 때 뿌리를 칭칭 감싸 맨 타이어 튜브 때문일까 구덩이에 뿌리를 넣고 그 고무줄을 모두 끊어 줘야 잔뿌리가 날 텐데..
둑길에서 좌측 다리를 건너갑니다.
길 가운데 큰 나무 길을 갈랐습니다.
《삼대를 이어져 내려온 효자가문 현풍 곽씨》 (영남길이야기 45-3)
15세기 중반부터 일죽면 장암리와 화봉리 송산마을과 광천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현풍 곽씨 가문에는 삼대를 이어 효자 효부가 있었습니다. 현종 6년(1665)에 태어난 곽천재(郭天宰)는 천성이 정직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 전주 이씨의 병환이 깊어지자 그 변을 맛보아 약의 효력을 살피었고 부모가 돌아가심에 여막살이 삼년을 죽으로 연명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궁궐에 알려져 정4품 문관에게 주던 奉烈大夫의 품계를 받았습니다. 관천재의 며느리인 利川 徐氏 또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마을에 이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들은 肅宗은 며느리에게 정려를 내렸습니다. 곽천재의 손자인 곽재두 또한 효자였습니다. 어느 날 노친을 모시고 가다 산적을 만나자 몸으로 호위하다가 세 번이나 칼에 찔리면서도 몸을 피하지 않자 적이 놀라 감탄하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자 戶曹左郞에 제수되었습니다. 곽씨 가문에는 효자 외에도 많은 충신들이 있었습니다. 효자 곽천재의 할아버지 였던 장단도호부사 郭邦鍵과 아들 郭宗文이 그들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 피난길에 오릅니다. 이에 곽방건은 아들 곽문종과 함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곽방건은 扈聖一等功臣에 곽종문은 호성삼등공신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 영남길이야기판을 읽고 실제 비문을 보니, 비석(碑石)에는 奉烈大夫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야기판은 봉열대부 한자표기에는 奉列大夫로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석과 이야기판은 '세'자가 서로 다릅니다. 비석에 새겨진 세찰'烈'字로 볼 때 이야기판이 틀리고, 사전적 또는 기록으로 보면 이야기판의 벌릴(반열)'列'字가 옳습니다. ※
忠孝閣이란 현판이 달린 비각 안에는 烏石으로 만든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碑에 새겨져 있는 글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효자봉열대부현풍곽공휘천재 (孝子奉烈大夫玄風郭公諱天宰)
효부호군곽시성처숙부인이천서씨사적비 (孝婦護軍郭時成妻淑夫人利川徐氏事蹟碑)
효자증이조좌랑현풍곽공휘재두 孝子贈吏曹左郞玄風郭公齊斗)
호능참봉현풍곽공휘천추 (扈陵叅奉玄風郭公諱千秋)
호성일등공신현풍곽공휘방건사적비 (扈聖一等功臣玄風郭公諱邦鍵事蹟碑)
호성삼등공신현풍곽공휘종문 (扈聖三等功臣玄風郭公諱宗文)
충효각을 나와 다시 영남길로 들어섭니다.
충효각이 있는 마을길을 나서니 지방도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좌측 안성방향 길 건너편 노랑표시판 옆에 영남길 이정표푯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을길 입구로 들어섭니다.
좌우로 축산농장 철재휀스 장막 사이로 지독한 가스를 맡으며 갑니다. 방귀 量이 많은 牛公들 온난화의 작은 공신이 아니지요. 축산업과 육식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해 봐야할 때가 아닐가 싶습니다. 거쳐온 곳을 돌아본 정경입니다.
제 9 죽산성지순례길 종착점 금산리버스정류장까지는 3.2km가 남았습니다.
종로학원이라면, 60년대 종로 YWCA 건물 골목 안에 있던 유명했던 학원인데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가? 기숙학원 같은데..
'판교'라는 두 자의 의미를 알 수 없네. 판교동의 마을회관인가? 내 아는 판교는 성남시 대왕면 판교 뿐이기에.. 아무튼 안골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종로학원 정문에서 좌측 길로 들어섭니다.
종로학원 담장과 청포도 밭 사이로 '도미'의 노래 '청포도 사랑'을 부르며 갑니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어여쁜 아가씨여 손잡고 가잔다
그윽이 풍겨주는 포도향기 달콤한 첫사랑의 향기 그대와 단둘이서 속삭이면 바람은 산들바람 불어준다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그대와 단둘이서 오늘도 맺어보는 청포도 사랑"
산다는 게 별건가요. 제2 인생을 사는 나이 이리 사는 거죠! 아무튼 요즘 경기옛길 덕분에 살맛납니다.
학원 울타리를 끼고 돌아 우측 위골마을로 향합니다.
다음 전폿대에서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컨테이너박스 뒤쪽길로 들어섭니다.
경기옛길 님의 당부대로 손은 얌전히, 포도원 안 길을 통과합니다.
포도원을 벗어나니 조만치 검은 차도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안성에서 충북 생극으로 이어지는 도로입니다.
우측 언덕길로 들어섭니다. 충북 음성군 생극으로 가는 방향입니다.
보행자도로가 없는 차도입니다. 잘 살피고 조심해서 150m정도 가야합니다.
금산산업단지를 지나 갑니다.
고개마루턱에서 30m 정도 내려가면 안전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좌측 하얀 길로 들어섭니다. 갈림길 사이 하얀길 들머리에 이정표푯말이 보입니다.
제9길 종착점 금산리 정류장까지 1.33km 남았습니다.
또 갈림길이네요. 금산리 정류장까지 1.16km임을 알려주는 이정표푯말이 좌측으로 들어서랍니다.
대추나무 터널을 통과합니다.
확 트인 벌판 파란하늘에 흰구름 두둥실 한가롭고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벼이삭 황홀한데 향기로운 들깨 향에 잡다한 길에 찌든 가슴과 눈, 한순간에 치유를 받습니다.
우측 농작길로 들어섭니다.
농로는 옛 모습이건만 풀냄새 흙냄새 향긋한 옛 농로가 아니로다. 길은 옛길인데 옛 모습을 볼 수가 없구나. 흙길은 사라지고 모두 콘크리트가 들어섰네.
우측에 이정표, 좌측으로 갑니다.
다시 갈림길 우측으로 들어섭니다.
우측에는 기름진 문전옥답에 태양광 패널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100m 전에서부터 풍겨오던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가까이 갈 수록 폐를 요동치게 합니다.
소들의 환경은 어떤지 들여다 본 정경입니다. 땅덩어리 큰 호주, 캐나다, 미국의 소들은 그래도 초원의 싱싱한 풀을 뜯을 수 있겠지 이에 생각이 미치니 왠지 안타깝고 내가 미안해..
마을길을 벗어나 우측 차도로 들어섭니다.
제9길 끝머리 마을길 옆 영남길 이야기 43-1
길 건너 조만치 제10길 이천옛길 안내판이 보입니다.
제9길 죽산성지순례길의 종착점이자 제10 이천옛길의 출발점 이정표푯말입니다.
제10길 이천옛길이 시작되는 출발점 현재 시각은 11시27분입니다. 이어서 이천옛길로 들어섭니다.
좋은 길 열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21년9월19일 오전11시27분.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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