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옛길 경흥 제 2 (천보산길)」

鄕香 2021. 12. 20. 17:45

11월 22일 부스터 샷을 맞은 후 3일 정도는 편히 쉬라는데 역마살 인생이 집에서 빈둥거리자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23일 화요일은 20일 개통됐다는 경흥길 사패산길을 오후에 다녀온 후 이틀을 쉬고  26일 금요일인 어제는 이맘때면 해마다 열리는 파주장단콩축제에 콩 사러갔던 임진각 광장을 다녀왔다. 오늘은 쉴 생각으로 10시까지 신문을 보다가 동네 공원에 나가 운동을 할 생각으로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멜빵가방을 매고 나섰는데, 공원에서 불쑥 생각이 바뀌어 의정부 제일시장이나 돌아보고 올 심산으로 전철을 탔다. 의정부역에서 광장을 거쳐 중앙시장으로 가는 길에 태조 이성계 동상을 스마트 폰 사진으로 담고 발길을 시장 쪽으로 옮기려는데 경기옛길 리본이 눈에 들어온다. 그냥 '저 리본을 따라가 볼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보니 11시 50분이다. 시간적으로 충분하겠기에 바로 천보산길로 들어섰다. 

 

 

천보산은 '하늘 아래 가장 보배로운 산'이라는 의미가 있답니다. 그러나 지역 토박이는 '빡빡산'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이는 일전에 큰 화재로 나무가 없어서 빡빡머리 같다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천보산에는 조선 선조의 후궁인 정빈 민씨를 비롯해서 인성군, 화릉군, 화창궁, 화춘군, 능창군 등 왕손들의 묘가 곳곳에 있습니다. 특히 의순공주의 한 맺힌 이야기는 우리들을 안타깝게도 하기도 합니다. 천보산길은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산재된 길입니다. 숨겨진 이야기를 찾으며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걸어온 길이 새롭게 보이는 길이기도 합니다. (안내판에서)

 

 

11월27일 구리역에서 출발하여 의정부역에서 내려 제2길 천보산길 안내판 앞에 도착한 시각은 11시34분이었습니다. 바로 천보산길을 따라 발길을 옮깁니다. 

 

 

"神弓 태조 이성계" 11월23일 캐논 카메라로 담은 사진입니다. 

 

 

역동적 기상으로 힘차게 날아 오르는 듯합니다. 삼성 캘럭시 노트21로 담은 사진입니다.

 

 

의정부의 핵심 중앙도로의 풍경

 

 

50년 전 의정부에 연고가 있어 종종 찾았던 곳 그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네.

 

 

행복을 바위같은 굳은 맹세로 약속하는 젊은 남녀의 언약이 변함없이 흐르는 물 같기를 바람으로 담긴 "암맹천 巖盟川" 에 물이 말랐네.

 

 

도심에 시내가 흐르는 이런 조경이 도시마다 유행처럼 번졌다.

 

 

공원이 도심으로 들어서는 쾌적함이 탁한 공기를 정화하리니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 사진까지는 11월23일 제1길 사패산길을 마치고 제 2길 천보산길 들머리를 익히면서 캐논카메라에 담았던 사진입니다.

 

 

이 사진부터는 11월27일 당일 삼성 캘럭시 노트21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중앙로를 나와 길 건너 좌측으로 갑니다.

 

 

경전철고가로가 뻗어 있는 호국로로 들어섭니다.

 

 

이마트 24시 편의점 앞을 지나 경전철고가로 뻗은 방향으로 따라갑니다.

 

 

양주교 전 우측으로 꺾어 들어섭니다. 

 

 

좌측 하천으로 내려갑니다. 

 

 

앞에 보이는 양주교 아래 자전거도로에서 ∩ ↘유턴합니다.

 

 

우측 방향으로 들어섭니다.

 

 

양주교에서 30m 정도 거리에서 다리를 건너갑니다.

 

 

앞에 보이는 부용교 밑을 통과합니다.

 

 

하천 건너편 경전철 동오역

 

 

뒤돌아서서 의정부역을 향해 가는 경전철을 담은 정경입니다.  

 

 

북측 제방에서 하천을 가로질러 동오역으로 연결된 회랑식 통로를 뒤돌아본 모습.

 

 

다시 천보산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좌측 계단을 이용해 둑으로 오릅니다.

 

 

노란색 첨탑을 올린 밀알교회 앞 길로 들어섭니다. 

 

 

밀알교회 앞 노랑색 병아리버스 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다시 호국로를 만났습니다. 우측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길 건너 2층 적벽돌 건물 앞 샛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골목 안 조금 보이는 산까지 2-300m 정도 곧장 갑니다.

 

 

검정색 승용차 앞 오솔길로 들어섭니다. 

 

 

산책로 들머리이자 경기옛길 천보산길 입구로 들어섭니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긋한 공기를 길고 깊게 들이 마시고 상쾌함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리본 찾아 길 따라 갑니다.

 

 

진한 소나무 향기처럼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살균력도 강하다지요.

 

 

참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을 걷노라니 심신이 저절로 즐겁습니다.

 

 

길은 하나인데, 나는 正道로 너는 반대로 가는 길이 다르구나!

 

 

오후 햇살에 길이 녹아내렸나 구분이 안 되네. 

 

 

저리가면 왠지 달갑지 않은 삐딱한 경찰청, 이리가면 내가 갈 길일세.

 

 

나무도 길도 예쁘네.

 

 

사진을 찍는데 경흥길 길손 한분이 앞질러가네.

 

 

앞서간 저 길손 내 보기에 앞도 옆도 안 보고 쫒기 듯 길만 보고 가는 듯하네.

 

 

곡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휘어 내려간 계단, 그대로 보기에 좋다.

 

 

물고랑 넘어 우측으로

 

 

보이는 아파트가 파스텔 아파트인가?

 

 

아파트에 이르기도 전에 좌측 산자락 길로 접어든다. 

 

 

우측 묘지 옆 소나무 숲길로 들어섭니다. 

 

 

휘어지고 굽어지고 멋진 춤사위를 보여주는 조선 솔은 아니지만, 그 푸르른 자태만으로도 좋다.

 

 

능선에 올라서 둘러보니 저 짝 능선에 제법 법식과 고색을 갖춘 묘가 보인다.

 

 

능선과 능선이 만날 즈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곡장과 신도비 그리고 안내판이 보인다. 

 

 

《인성군 이공 묘 /仁城君 李珙 墓》 

 

아, 여기에도 아픔이 있구나! 능력도 힘도 없는 임금 치하에 흉악하고 간사한 무리들에게 모함을 받아 희생된 왕자가 말없이 永眠하고 있네. 

대간이 무엇이건데 자기 가는 길에 일국의 왕자가 비켜서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탄핵을 하다니 왕권이 바닥을 쳤구나!

 

 

 《유명조선국왕자인성공효민공○비명/有明朝鮮國王子仁城珙孝愍公○碑銘》

 

인성군 이공(仁城君 李珙1588-1628)은 宣祖의 제 7 王子로 어머니는 靜嬪 閔氏이며, 호는 百忍堂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선조가 특히 사랑하였으며 공부를 시작하자 학업이 일취월장하였다.

12세에 인성군으로 책봉되었고 선조 36(1603)39일 형조판서를 지낸 윤승길의 딸과 혼인하였다.

선조 37(1604)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을 책봉할 때 이복 형 순화군, 이복동생 의창군과 함께 호종원종공신 1등의 한 사람으로 책봉되었다. 이복형 광해군 즉위 후 사옹원 도제조와 종친부 有司를 겸직하였다.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관대하면서도 엄격하였으므로 관기를 바로 잡았다. 광해군 4년(1612년) 길에서 조정의 대간을 보고도 예의를 갖추지 않은 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가 탄핵을 받았다.

 

 

자인/子仁

 

광해군의 시기하는 마음이 점점 커가는 것을 이용하여 이이첨李爾瞻 등이 반역죄로 인성군을 사주하여 무고하니 인성군은 이에 대궐 문밖에 자리를 깔고 처분을 기다리기를 며칠씩 하다가 울분한 마음에 병이 들어 3년간이나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광해군 7년(1615년) 윤 8월 2일에는 간악한 무리들에 의해 역모에까지 몰렸으나 모두 광해군의 비호로 아무 일 없었다.

인성군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와 그 아들 영창대군의 폐위 및 사사에 있어서 두 사람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광해군 9년(1617년)부터는 종실들과 인목왕후의 폐출을 간하였다. 

 

 

○公愍孝珙城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보위에 오른 원년(1623)에 지난 날 인목왕후의 폐위를 동조했다하여 그 처벌이 논의됐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다. 또한 인조는 인성군을 항상 숙부라고 부르며 예우를 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출근하던 사헌부의 관리들이 길에서 자신(인성군)을 보고도 옆으로 물러서지 않았다하여 이를 문제 삼고 감찰을 추고하도록 청하였는데 이것이 헌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꾸짖고 욕보이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에도 인조의 비호 아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비명/碑銘

 

그러나 이듬해인 인조 2년(1624년) 음력 11월에 폐위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올리고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었다, 당시 이로 인해 수많은 대신들이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였으나 인조는 인성군이 역모를 주도한 무리에 가담한 흔적이 없어 벌을 줄 수 없다 하여 계속 처벌을 미뤘다. 그러나 인성군 유배를 주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음력2월까지 수도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하고 인조3년(1625년) 음력 2월 23일 유배령을 내렸다. 다만 유배지에서도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물자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하도록 명하였다. 이틀 후인 음력 2월25일 인성군은 강원도 간성군에 안치되는데, 이날 인조는 인성군의 아들 해평都正에게 직접 인성군이 유배를 가게 된 사정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다음 날에는 인성군에게 교자와 어의, 호위병 등을 붙여 주었다. 

 

 

한편 그 해 10월 18일, 검열 목성선과 승문원 부정자 유석 등이 인성군에게는 죄가 없으니 방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게다가 전날에는 인성군의 유배지에 다녀온 아들 해평도정이 인성군이 병으로 고통스러워함을 설명하자 인조는 인성군에 대해 석방을 명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대간에서 목성선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연이어 반박을 하는 바람에 인성군은 석방되지 못하고 원주로 이배되었다. 이후 인조는 인성군에게 지속적으로 의원과 약, 옷감 등을 보내주었고 인조4년(1626년)음력11월1일 인성군의 생모 정빈 민씨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인성군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6년(1628년) 음력 1월3일, 당시 세마 허유許逌 등을 비롯한 이들이 일으킨 역모에 인성군도 참여했다는 고변이 또 들어왔다. 이때는 인목대비까지 나서서 인성군의 처벌을 주청하였고 종실들도 매일같이 인조를 찾아와 인성군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인성군은 음력 1월21일 전라도 진도에 안치되었다. 다만 그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대신들은 계속해서 인성군의 사사를 청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인조는 음력 5월14일 인성군에게 자진할 곳을 명하였다. 인성군은 6일 후인 음력 5월 20일 향년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인조15년(1637년)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孝愍이다. 해평 윤씨와 합장되었다.

 

 

인성군 묘에서 다시 경기옛길을 따라 발길을 옮깁니다.

 

 

인성군 묘에서 내려와 골짜기 건너 산길로 들어섭니다.

 

 

이정표를 보니 가는 방향은 금곡마을,

 

 

대각선으로 휘어진 소나무, 매달아 놓은 경기옛길 리본이 무거웠나 보다.

 

 

등성이에 담을 둘렀나 성을 쌓았나! 

 

 

근대에 쌓은 것은 아닐 테고, 엄청 큰 돌을 이 산중에서 어떻게 저리 마구리를 틈새 없이 맞춰 쌓았을가! 

  

 

거참! 볼수록 신바롭다.

 

 

반대편을 보자니 큰 바위가 저절로 금이 가고 갈라진 것처럼 보이네. 

 

 

천보산의 천보산성일까? 궁금한 마음 가슴에 담고 성을 넘어 우측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부드러운 흙길에 무성한 수림이 뿜어내는 향기에 취해 마음도 발길도 상큼하다.

 

 

저만치 아래 보기에 공터 같은 모양새가 보인다.

 

 

작은 공터 좌측 나무에 이정표가 보이고 리본은 따라오라고 살랑살랑 앞서고 있다.

 

 

경기옛길 천보산길은 보이는 묘지 좌측을 지나가고 있다.

 

 

고마운 리본아! 너는 구태여 찾지 않아도 외면할 수도 안 볼 수도 없게 자리 잡고 있구나!

 

 

예쁜 길 위에 쌓여 수북했을 낙엽을 어느 님이 다림질을 했는가 반질반질 하구나! 

 

 

소풍길이 옛길이요 옛길이 내 길이니 한 발길에 두 길을 걷나니 이는 一擧兩得일세. 

 

 

금곡마을 850m지점, 

 

 

어쩔 수 없는 시설이겠지만, 산길에서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송전탑이네.

 

 

길손이 잠시 쉬어갈 벤치에 앉아 바라볼 전경을 담았다오.

 

 

벤치에 앉아서 뒤돌아본 송전탑

 

 

제법 행색을 갖춘 길이 가로질러 가고 있네 

 

 

내 걸어온 길은 인성군 묘, 이정표는 우측으로 가랍니다.

 

 

낙엽이 우수수 덮인 길을 감상할 여지도 없을 만큼만 걸어갑니다.

 

 

바로 큰 길입니다. 

 

 

굴다리로 들어섭니다.

 

 

굴다리에 경기옛길 이정표

 

 

굴다리를 나서니 고가도로 이리저리 어지럽습니다,

 

 

횡단보도 건너 우측으로 옛길 이정표가 보입니다.

 

 

조만치 보이는 버스정류장에서 좌측 마을길로 들어섭니다. 

 

 

마을길로 이어진 다리 모습,

 

 

다리 건너 우측 산자락 길로 들어섭니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이정표가 보입니다. 오른쪽 철망은 칼국수 음식점입니다. 

 

 

칼국수집 주차장은 만차였습니다.

 

 

능선길에 들어서니 오후 햇살이 따사롭고 포금함을 줍니다.

 

 

이정표를 보니 알게 모르게 금곡마을을 지났습니다. 국수집 건너 안쪽 마을이 금곡마을인 것 같습니다. 

 

 

활엽수는 찾아볼 수 없는 소나무 울창한 길에 웬 가랑잎이 저리 덮여 있을까? 

 

 

이정표를 보니 축석고개밑마을까지 1.3km입니다. 

 

 

낙엽이 소복하게 깔린 길을 보기만 해도 포근하고 마음이 아늑해집니다. 

 

 

다시 평지로 나갑니다. 

 

 

데크로 만든 다리 건너 이정표가 우측으로 손짓합니다.

 

 

한길 안에 두 줄이 평행으로 뻗어 있는 정경이 눈길을 이끕니다.

 

 

마을인가? 건물을 보면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군요. 마을이란 정겨움이 없네요.

 

 

그래서 지나쳐온 뒤를 돌아봤습니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집을 찾아 보려구요.

 

 

또다시 만난 호국로 좌측 건널목으로 건너서 좌측 축석고갯마루 쪽으로 갑니다.

 

 

본자일입구 버스정류장입니다. 앞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오늘의 종착점 축석고개삼거리는 2.3km 거리입니다. 

 

 

축석고개 GS주유소를 향해 80m 정도 갑니다.

 

 

축석고갯길 GS주유소 전 우측 충혼탑으로 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충혼탑으로 가는 길

충혼탑으로 가는 길

 

우측 충혼탑 광장으로 오르는 길로 들어섭니다.

 

 

충혼탑 주차장으로 오르는 입구에 세워진 의정부 소풍길 안내판입니다.

 

 

천보산 등산로(소풍길) 설명안내판입니다.

 

《충혼탑/忠魂塔》

 

 

일제에 맞서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신 선열과 조선공산당의 북괴뢰군 남침으로 인한 6.25 전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위 대한민국을 수호하고자 진정코 소중한 목숨을 초개같이 불사르신 호국 영령을 기리고자 세운 충혼탑입니다. 마땅히 호국영령께 묵념을 올리고 다시 호국로 기념비를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의정부지구전투기념비〉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

포병의 軍神 김풍익 중령과 6.25 전몰 포병용사들의 숭고한 살신보국정신을 높이 받들고 젊음을 조국에 바친 그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육군 전 포병 장병과 고인의 고향 친구,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선배 동료들과 후배들의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세운다. 

 

 

측면에서 바라본 기념탑.

 

 

다시 축석삼거리 '호국로' 기념비를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길가에 약수터 목을 축이고..

 

 

조만치 호국로가 보입니다.

 

 

저만치 고갯마루가 보이는 호국로로 들어섭니다.

 

 

큰 제빵소 카페 앞을 지납니다.

 

 

축석고갯마루 풍경

 

 

축석고개 삼거리 갈림길

 

 

횡단보도 건너 호국로 비석이 보입니다. 

 

 

경기옛길 제2 '천보산길' 종착점이자 제3길 축석고갯길 시발점입니다.

 

 

제3길 축석고갯길 시발점 입니다.

 

고맙습니다. 

2021년 11월 27일 토요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