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三聖山의 전통 사찰 삼막사三幕寺는 지하철 1호선 안양역으로부터 5.2km 거리의 봉우리 8부 선상에 위치한다.
역에서부터 삼막사까지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이어져 있다. 3km 정도는 산중으로 제법 가파른 길이다. 주말이어서 그런가! 자전거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제법 눈에 띄는데 짧지 않은 거리에 가파른 오름을 도전의식挑戰意識으로 오르는 것 같다. 그들을 보니 나도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길 옆 계곡에는 맑은 물이 철철 시원스레 노래를 한다.
"냇물이 졸졸 너의 집이 어디냐? 숲속이냐 땅속이냐 바위틈이냐?"
안양유원지 계곡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로 붐볐지만 삼막사로 오르는 길은 토요일임에도 한적하여 호젓은 하다만 아스팔트 길이어서 일까? 이 좋은 숲에서 정감과 운치를 느낄 수 있는 오솔길이 아쉽다.
삼막사로 오르는 길가 바위에 맑은 물이 흰 포말을 일으키며 더위와 오름에 힘겨운 이의 시선을 홀린다.
《삼성산 삼막사/三聖山 三幕寺》
안내문에 의하면 삼막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원효元曉, 의상義箱, 윤필潤馝 등 세 분의 성인聖人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三聖山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로 부르다 사찰이 융성해지며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의 삼막사를 닮아 삼막사三㦝寺로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다. 고려 충목왕 4년(1348) 나옹 대사와 인도 승려 지공 대사가 이곳으로 오니 선풍禪風이 크게 일었고 조선조 무학대사에 의하여 동쪽에 불암사佛巖寺,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북쪽의 승가사僧伽寺와 함께 한양 남쪽의 비보사찰로 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태종太宗 때 대중창이 있었고 임진왜란 시 왜구가 침범하여 불을 질렀으나 법당 건물이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근대에는 종두법을 처음으로 실시한 지석영池錫英의 형 지운영池雲英이 이곳에 백련암白蓮庵을 지어 은거하였다. 현재 조선 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望海樓와 명왕전明王殿이 있으며, 고려 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일명 실례 탑 유형문화재 제112호)와 사적비事蹟碑(경기도 유형문화재 125호), 남녀 근석男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 마애삼존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과 삼귀자三龜字, 감로정甘露井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어 삼막사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너의 푸른 기운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건강이 상승하도다.
삼막사 일주문 안 삼거리
《월암당月菴堂》
큰 스님의 수행처로 알고 있습니다.
《감로정甘露井》
지운영이 바위에 새긴 '三龜字' 주변의 아름다운 소나무들 情景.
감로정 주변의 풍경으로 바위 위 암자는 원효 대사를 모셔놓은 元曉窟
지운영(池雲英1852~1935)은 詩人이요 , 書藝家이자 畵家이며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사진 기술을 익힌 인물로 무예에도 뛰어난 인사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유교, 불교, 도교에도 통달하였으며 모든 분야에서 모자람이 없어 조선 후기에서 근대기에 걸쳐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당대에 삼절三絶로 불리던 인물로 종두법을 처음 시행한 선각자 지석영의 형이다.
지운영은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 역관의 장자로 태어났다 초명은 池運英이었으나 성인이 되면서부터 池雲英으로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취미도 특출하여 모래주머니를 차고 나무를 걷어차고 솟구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심어놓은 수수가 자라는 대로 뛰어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사람의 키보다 높게 자라도 뛰어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무술을 익혔던 것이겠다. 그는 북촌 지역과 광교 지역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때 청계천 광교 부근에 살던 ‘육교 시사六橋詩社’라고 하는 醫師. 譯官 등 기술관료 중인들의 시화 모임을 이끌던 고환당古懽堂 강위(姜瑋1820~1884)를 만나 開化를 배우고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강위는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귀양 시절 제자로 입문하였다가 훗날 김정희의 북청 귀양이 끝난 후 그의 문하를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며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극단적으로 배격한 참신한 시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지운영은 1870년쯤부터 강위와 함께 한다. 지운영이 훗날 방랑 생활을 하며 詩書畵를 즐기며 산 것도 스승 강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강위의 지도로 현실 참여 의식을 갖게 된 지운영은 1882년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선진적인 문화 발전에 충격을 받았고 특히 사진술을 접하고 매력을 느껴 일행이 귀국하였으나 혼자 남아 사진 기술을 배웠다
이듬해(1883) 당대의 세도가 민영목과 연줄이 닿아 개화를 관장하는 통리 군국 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말단 주사 직위에 임명되어 귀국한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사진술을 바탕으로 이듬해 1884년 종로통 마동(麻洞)에 사진관을 설립한다. 마침 민 씨 일가와 친했던 지운영은 고종의 어진을 찍는 행운을 맞는다. 그는 고종을 찍은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그 소문으로 사진관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하자, 화가 난 폭도들에 의해 사진관은 파괴되고 전 재산을 잃고 만다. 이때 일로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을 한다. 고종은 삼일천하의 반역 주모자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무술로 단련된 지운영에게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을 처단할 자객으로 밀명을 내린다. 1886년 '바다 건너가 적을 잡아 오는 관리'라는 역사에 유례없는 '특차도 해포 적사(特差渡海捕賊使)'라는 이상한 임무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도쿄나 요코하마 등을 오가던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가까이한 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쫓기는 그들은 지운영을 의심하여 그의 심중을 떠보려고 진실로 가장하여 그로 하여금 그의 목적을 알아낸 유혁로 등 개화파들에게 잡혀 비밀문서, 비수 등을 압수당하고 일본 경찰에 넘겨져 결국 본국에 압송되고,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되고 만다. 1889년 유배에서 풀려나온 후 지운영은 세상일에서 손을 떼고 서화에만 전념하는 계기가 된다.
호를 '설봉(雪峰)'에서 '백련(白蓮)', 이름을 '운영(運永)'에서 '운영(雲英)'으로 바꾸고 철저히 은둔 서화가로서 삶을 살다가 1935년 가회동 집에서 임종했다.
《三龜字石刻施主》
삼귀자 옆 바위 면에 새겨진 이 글자는 삼귀자를 새기는데 드는 비용을 시주한 사람들이다.
「三龜字石刻施主 光明眼 李貞淑 丙辰生朴氏光明相 大覺心 金東淑 戊辰生李氏光明功」
《三龜字》
바위 벽면을 직사각형으로 파서 다듬어 그 면 안에 각기 다른 거북귀(龜) 字 석 자를 새겼다. 삼귀자 옆에는 부처님의 제자 지운영이 꿈에 관음에게서 오래 살게 해 준다는 뜻이 담긴 '龜'자를 받아서 쓴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글자 모양과 획의 굵기 등으로 보아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글자를 도안한 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지운영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 초기에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나 三絶이라고 불린 인물로, 종두법을 처음 시행한 선각자 지석영의 형이다. 이 글자들은 지운영이 삼막사에서 머문 1920년 무렵에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池雲英과 黃鐵》
근대의 많은 후배 서화가들이 지운영의 영향을 받았다. 제자로는 황철 · 김용진 등 그리고 평안도 지역 화가 반돈식, 송기근, 여성화가 김석범 등이 있으며 그의 아들 지성채는 아버지와 거의 같은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대부분 지운영 특유의 습윤한 산수화를 본받아 그렸다.
제자들 중 특히 황철과 가까웠는데 이들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나이 차이도 많지 않은 데다 배포가 맞아 친구처럼 지냈다 황철은 지운영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본래 이름은 ‘준성濬性’이었으나 지운영이 ‘철鐵‘로 바꾸어주고 자를 ’ 야조冶祖‘라 지어주었다.
두 사람은 늘 가까이 지냈는데 황철이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 갔을 때도 황철이 기숙하는 ‘스나가 하지메(須永元, 1868-1942)’저택에 지운영이 자주 들려 함께 했다. 일본人 스나가 하지메는 매우 부유한 사람으로 많은 한국인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는 당시 서구 문명 도입을 주장한 유명한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영향을 받은 개화된 인물로서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류를 하며 한국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한국에 자주 드나들기도 하였는데 한국에 왔을 때는 주로 박영효의 집에 머물렀다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갈 경우 스나가 하지메의 집에 머물며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시작으로 많은 한국인과 교분을 나누며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황철, 우범선뿐만 아니라 오세창, 김응원, 이한복 등도 스나가 하지메의 도움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황철은 말년까지 스나가 하지메의 집에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기 전에 스나가 하지메 집안의 선영이 있는 곳에 자신을 안치해 달라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만큼 황철과 스나가 하지메의 우정은 남달랐다. 이들의 남다른 우정은 황철이 죽고 난 이후까지도 이어지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비장한 이야기가 전한다. ‘스나가 하지메‘는 황철이 망명하자 경제적 후원을 하고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런데 마침 황철이 大作 산수화를 그리던 중 완성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를 안타까워한 스나가 하지메는 서울을 방문할 때 미완성의 이 작품을 가지고 와 지운영을 찾아가 작품을 마무리해 주기를 부탁한다. 지운영은 흔쾌히 받아들여 황철이 타계한 지 두 돌 되는 날에 맞추어 작품을 완성하고, 1248자에 이르는 장문의 화제를 써넣었다.
이 작품은 황철이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은 지운영이 하였다. 그러나 어느 부분이 누가 그렸는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겠다. 그만치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까지 헤아릴 만큼 한 몸이었다. 지운영이 쓴 화제 속에서 두 사람 간의 인간 관계가 눈물 날 정도로 절절하게 적혀 있다. 이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한 지운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다.
지운영의 소나무 그림이다. 두 마리의 용이 운우의 정을 나누는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미술사에서는 ‘지운영’이란 서화가에 대해 그리 큰 비중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저 옛 그림들을 임모 하면서 기량을 길렀으며, 산수 인물을 잘 그렸다는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중국풍이 짙은 화풍은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완성도 면에선 다른 전문 화가들에 못지않았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단지 서화에만 충실했던 다른 화가와 달리 시에 뛰어났으며 사진술과 도교 무술 등 다른 방계 활동에도 뛰어난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이런 면에서 지운영은 새롭게 관심을 가져볼 만한 뛰어난 인물이다.
삼귀자 바위 우측 마애삼존불과 남녀 근석이 있는 곳으로 500m 이동 중 바라본 풍경
《삼막사 칠보전과 남녀 근석/ 三幕寺 七寶殿 · 男女根石》
《칠보전/七寶殿》
《三幕寺 磨崖三尊佛》)
바위 벽면을 다듬은 후 가운데에 치성광 여래熾盛光如來를 그 좌우에 일광 보살日光菩薩과 월광 보살月光菩薩을 돋을새김 한 마애삼존불이다. 치성광 여래는 지구 자전의 중심이 되는 북극성北極星을 부처님으로 바꾸어 형상화한 것으로, 무병장수와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안내문에 의하면 삼존불 아래쪽에는 영조 39년(1763) 8월에 오심悟心이 발원하고 서세준徐世俊이 시주했다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칠보전七寶殿 오른쪽 바위벽에는 영조 40년(1764)에 칠성전七星殿을 새로 지었다는 명문이, 왼쪽에는 고종 18년(1881)에 칠성각七星閣을 고쳐지었다는 명문이 있다고 한다.
이로써 칠보전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바꾸어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문은 전각과 불단 등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사찰에 칠성각을 별도로 지어 치성광 여래와 칠성신 등을 모시는 것은 불교가 민간신앙을 수용하여 그것과 융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것이다. 특히 치성광삼존熾盛光三尊은 불화佛畵로 그려서 칠성각에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이를 마애불로 새긴 것은 그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삼막사 마애삼존불은 문화재로서 가치가 크다.
《남녀 근석/ 男女根石》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 남녀 근석 두 개의 바위는 칠보전 앞마당 끝에 4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나란히 있다.
남녀의 성기를 각각 남근 여근이라 하고 이를 닮은 바위를 남근석 여근석이라 부른다.
바위와 나무가 자연적으로 남근 · 여근의 모습을 띄기도 하고 일부러 그런 모양이 되게 만들기도 한다.
삼막사 남녀 근석은 낮은 지대의 땅속에서부터 높이 솟아오른 것이다.
이 남녀 근석을 만지면 순조롭게 출산하게 되고,
여기에 가문의 번성과 무병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 사월초파일이나 칠석 칠월 칠일이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
종종 남근에 동전이 붙여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렇게 하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에 따른 것이다.
남근과 여근은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신비로운 것으로,
사람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어 숭배해 왔다.
이 남녀 근석은 신라 원효대사가 이 절을 창건하기 전부터 숭배 대상이 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삼막사 남녀 근석 숭배는 바로 옆에는 삼막사 마애삼존불을 대하는 칠성신앙과 함께 불교가 다산과 아들 출산을 기원하는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공존해 왔음을 보여준다.
《여근석女根石》
우리의 고향이요 산실이니, 그리워지는 곳이 아닌가!
남쪽 바깥쪽 남근석 모습.
칠보각 안마당 쪽의 남근 모습.
칠보각과 남근석, 칠보각 안 북벽은 바위 절벽으로 그 바위 절벽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어 磨崖三尊佛이다.
칠보전과 남녀 근석을 답사하고 다시 감로정에 이르러 저 높은 암자 형태의 원효굴로 발길을 옮깁니다.
암자가 있는 바위 중턱에 구름문양을 새겼으니 저 암자는 구름 위에 있는 신선의 세계일까?
바위와 바위 틈새 위에 平石을 올려 굴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식으로 지붕을 올린 곳의 현판은 "元曉窟" 안에 연꽃좌(仰蓮座)에 원효 대사의 형상을 안치하였다.
원효굴 바위 아래에는 바윗면을 파내고 그 안을 다듬어서 소나무와 달, 호랑이와 동자 그리고 神仙象을 돋을새김 하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산신각이 아니다.
삼신각에서 삼막사 기적비가 있는 곳으로 내려온 길의 정경이다.
《三幕寺 事蹟碑》
삼막사 창건과 그 이후 연혁을 기록한 비석이다.
사적비는 사찰이나, 서원, 사당, 성곽 등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기적비紀蹟碑라고도 한다.
비석은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깎아 만든 바침 돌臺石에 비문을 새긴 몸돌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蓋石을 올렸다.
비석 앞면에는 삼막사의 역사가, 뒷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관악 산맥 삼성산 아래 있는 절로, 이름이 삼막사다. 절 왼편에 향로봉香爐峰이 있다.
숙종 33년(1707)에 이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편 이 사적비에는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터를 잡고 띠집을 지어 수도하는 곳으로 창건한 후
통일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寺가 고쳐지어 관음사觀音寺라고 불렀고,
고려 말기에는 지공 선사指空禪師와 나옹선사懶翁禪師 등이 머물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다만 비문이 상당히 마멸되어 있어서 지금으로서는 명확하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캐논 카메라 사진)
(캘럭시 노트20으로 찍은 사진)
나무! 우리에게 엄청 소중한 나무들 아끼고 사랑하자.
나무를 살포시 안아보세요 기운이 활력이 솟아남을 느낍니다.
관악산의 한줄기 삼성산 기암괴석에 회양목이 자생하고 건강한 숲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곳, 준 것 없이 많은 건강을 기쁨을 담아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2020년 8월30일 벗과 함께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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