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逍遙山은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1호선 동두천 전철역 대로건너편 좁지 않은 길로 들어서면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고 100여m정도 지나면 바로 주차장과 소요산 입구가 보인다. 소요산 들머리를 들어서면 완만한 언덕길과 그 옆 계곡 맑은 물이 청량한 소리로 반긴다. 주차장 입구로부터 약1.5km정도 걸어가면 정면에 ‘逍遙山自在庵’ 내면에 ‘京畿小金剛’ 이라는 현판을 올린 일주문에 이른다. 다시 백여m정도 오르면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 원효대사가 세운 자재암 아래에 있는 원효굴과 원효폭포에 도달하며 여기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소요산(逍遙山)은, 매월당(梅月堂 金時習1435-1493), 화담(花潭 徐敬德,1489-1546), 봉래(蓬萊 楊士彦,1517-1584), 등이 자주 유람(逍遙)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봉(의상대)의 높이는 587m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들이 험하고 滑石도 많다. 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봉-나한대-의상대-공주봉 등 7봉이 펴놓은 부채끝 선처럼 이어져 있고 요소마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주절이 걸려 있다 칼바위봉 오르고 내리는 등성이에는 능선 따라 칼날처럼 날카롭고 얇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공룡의 등처럼 솟아있어 위험이 따른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로 이어지겠다. 일찍이 소금강이라고 불린 소요산은 山勢가 웅장하지는 않지만 기암괴석들이 완만한 구릉을 장식하여 무료하거나 지루감이 없다. 또한 계곡에는 아담한 폭포도 여럿 있어 한여름의 더위를 잊게 한다. 특히 선녀탕 계곡은 협소하고 비좁고 경관이 신비롭지만 낙석의 위험이 따르는 곳이기도 하다. 소요산은 가파른 지대에 기암괴석과 활석이 많은 만큼 따라서 안전산행을 위한 계단 또한 많다.
원효폭포, 청량폭포, 옥류폭포, 자연석굴 나한전, 산중턱의 금송굴이 있고 자재암에는 세조 10년(西紀1464)에 간행된 ‘반야바라밀다심경 약소 언해본’(보물1211호)이 보관되어 있다.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조 이성계가 한때 이곳에 머물었던 행궁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태조는 상백운대에 자주 올라 운치를 구경했다고 한다. 이 사진들은 3코스의 정경이다.
주차장 입구 , 소요산전철역으로부터 500m 거리이다.
주차장 끝머리이자 소요산 입구이며 옆에 화장실이 있다.
《史蹟 瑤石公主別宮址(요석궁지)》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신라 제29대 太宗武烈王〈 金春秋 602-661(재위654-661)〉와 妃 文明夫人(角飡, 角干 金舒玄의 딸, 金庾信의 누이동생 文姬이다.) 사이에서 낳은 세 공주 중의 한 사람으로써 원효(元曉 617-686)와 만나기 전에 김흠운(金歆運)에게 시집갔으나 김흠운이 655년 백제의 조천성(助川城 지금의 옥천)을 공략하다 전사하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딸 둘 둔 과부가 되었다.
원효는 40세 전후에 요석공주를 만났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종이 원효가 길거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는 사실에 의해 요석공주의 남편 김흠운이 전사한 이후 태종무열왕의 집권기인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있었던 일로 추측된다. 이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요석공주는 일찌기 홀몸이 되어 요석궁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 30대 후반의 원효라는 스님이 전국 방방곡곡 떠돌아 다니면서 " 그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당시 임금이었던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하면서 요석궁에 홀로 있던 요석공주와 짝을 이루게 하여 후에 대유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원효는 파계승이 되어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큰 표주박을 두드리며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며 춤추면서 교화를 하던 중 이곳 소요산 원효대에 머물면서 다시 수행을 전념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조그만 별궁을 짓고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공주봉에 올라가 원효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서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봉우리가 공주봉이며 공주가 살던 別宮터는 요석궁터라고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요석공주별궁 터(瑤石宮址)에 마련된 포토존, 원효대사나 요석공주가 되어 보세요. ^^
옆 요석궁지 전방 100m에 보이는 문은 매표소이다.
아스팔트도로는 계곡을 옆에 끼고 약1.5km정도 일주문까지 이어진다.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
일주문 추녀와 단청 그리고 현판 (逍遙山自在庵) /(京畿小金剛)
원효폭포와 원효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곳곳에 깃든 소요산의 산행 들머리이다. 시작부터 계단이다.
계단 위 산행약도게시판에서 좌측 계단으로 오르면 자재암 방향이고 우측으로 오르면 舊절터와 공주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다. 오늘 나의 산행코스는 "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선녀탕-나한대-의상봉-공주봉-구절터-일주문. 3코스에 선녀탕을 포함했다.
"관광지원센터-(1.5km)-일주문-(1.45km)자재암-(0.65km)-하백운대-(0.4km)-중백운대-(0.6km)-상백운대-(0.35km)-칼바위-(0.9km)-나한대-(02km)-의상봉-(1.2km)-선녀탕입구갈림길-(0.6km)-선녀탕입구-(0.6km)-선녀탕왕복-(0.6km)-선녀탕입구-(0.35km)-자재암-(0.55km)일주문-(1.5km)-관광지원센터. 총 12km. "
자재암 방향과 공주봉 방향 갈림길, 우측 방향은 자재암을 거쳐 하백운대로 오르는 길, 좌측 방향은 옛 절터를 거쳐 공주봉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산행을 하던 이 자리에 도착합니다. 산행코스는 부채꼴 같습니다.
(자재암 금강문) 단조롭고 단청이 곱다. 나는 좌측 자재암으로 들어섰습니다.
금강문 옆 원효대사 참선址
잔도 같은 계단 길로 자재암까지 갑니다.
자재암(自在庵)
자재암은 신라 중엽 원효대사가 개산하였으며, 고려 광종 25년(974년)에 각규대사가 왕명을 받아 정사를 세웠으나 고려 익종 7년(1153년)에 소실된 것을 1961년에 재건하였다.
대웅전(大雄殿)
암굴의 나한전 옆 약수가 나오는 암벽 꼭대기 정경.
나한전 옆 청량폭포.
청량폭포 옆 암굴을 이용하여 나한을 모신 羅漢殿.
나한전 옆 약수 등산객이 목을 축이고 있다.
나한전 내부.
나한전 좌측 하백운대로 오르는 돌계단 끝머리에 데크로 이어지는 계단을 중년 부부가 오르고 있다. 보기에 좋구나..
소요산 등산로는 능선의 일부를 除하고 계단으로 시작해서 계단으로 끝난다 하겠습니다.
가파른 오름에 바위가 날카롭게 갈라지고 쪼개져 활석으로 널려 있고 남아 있는 바위는 더욱 각지고 창끝처럼 날카로워 안전산행을 위해 이렇게 계단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위가 갈라지고 쪼개져 활석으로 떨어져 산비탈에 널려 있고 남은 바위들의 표면 모습입니다.
자재암으로부터 150m 지점, 여기서 '하백운대' 까지 480m, 계단 없는 곳은 덜 위험하다는 곳인데, 그래도 오르기가 쉽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지요.
다시 계단입니다. 이 계단 지역들은 보통 200~300계단입니다. 계단 밑은 날카로운 활석과 바위들이 가파른 지면을 덮고 있습니다.
백바위(白岩)에서 가야할 능선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10월30일 다시 와서본 백바위 정경.
백바위에서 바라본 중백운대-상백운대와 능선 모습.(10월30일)
백바위에서 바라본 의상대와 원효대. (10월30일).
백바위에서 바라본 중백운대-상백운대-의상대-원효대, 그리고 백바위 정수리.(10월30일)
백바위에서 내려다본 소요산 계곡, (10월30일)
이게, 길이냐고요? 예, 길 맞습니다. '하백운대'로 오르는 길입니다. 갈 길은 더욱 험한지 조만치 앞에 계단이 보입니다.
도끼날 같은 돌조각이 금시라고 머리에 떨어져 내릴 것 같습니다.
안전모를 떠올리게 하는 소요산입니다.
(첫 봉우리 하백운대, 해발440m. ) (하백운대) 자재암으로부터 650m 거리에 위치합니다. 다음은 중백운대(400m)입니다. 오르는 과정과 다르게 정작 봉우리는 밋밋하네요. 이제까지 긴장했던 몸이 맥 빠지는 기분입니다.
하백운대는 소요산 백운대 능선의 제일 아래 봉우리입니다. 위로 중백운대와 상백운대를 거쳐 의상대 공주봉으로 이어지는 말굽모양의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일찍이 절묘한 山勢, 수려한 계곡 그리고 절경으로 알려진 단풍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양사헌, 이율곡, 성혼, 허목 등 당대의 문객들이 이 산을 찾으며 그 절경을 노래하였답니다. 이 산에 머물며 수행하던 매월당 김시습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길 따라 계곡에 드니 봉우리 마다 노을이 곱다. 험준한 산봉우리 둘러섰는데 한줄기 계곡물이 맑고 시리다."
하백운대에서 중백운대로 이어진 능선 서쪽은 낭떠러지기 절벽으로 이어집니다. 드물게 등산객이 쉬며 주변경관을 즐기고 있습니다.
하백운대와 중백운대에서 사이 능선에서 바라본 의상대와 원효봉.
중백운대로 가는 능선에서 소나무 가지 사이로 가야할 능선과 의상대와 원효대를 바라본 풍경입니다. (10월30일)
척박한 바위에 뿌리내린 나무들 덮였던 부식토 그 마저 비바람에 쓸려 나가도 푸르고 싱싱함 하늘을 찌르네.
(중백운대) 이 또한 봉우리라 하기에는 그 모습 개울가 밭둔덕 같은 느낌이 든다.
중백운대 350m, 상백운대 250m 지점. 선녀탕 1km, 갈림길.
1번째 선녀탕 갈림길.
(상백운대로 가는 길) 길은 험하고 봉우리는 펑퍼짐하네.
(상백운대정상) ↓선녀탕갈림길170m, ↑칼바위 130m,
소요산 일주문에서 오르는 왼편 등산로를 백운대로 부르며 이를 다시 그 위치에 따라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로 나눈다. 산세의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단풍과 청량한 하늘 전체에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이 어우러져 문자 그대로 작은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이곳을 상백운대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왕자의 난으로 보위를 물린 이후 이곳 소요산 아래 행궁을 짓고 머물며 불교 수행을 하며 자주 이곳 백운대에 올라 경치를 즐기며 동시에 자신의 회한을 달랬다고 한다. 태조가 이곳 백운대에 올라 지은 시가 전해진다.
"넝쿨을 휘어잡으며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흰 구름 가운데 암자 하나 놓였네. 내 나라 산천이 눈 아래 펼쳐지고 동북면, 강남조차 보일 듯 하이"
상백운대를 지나서니 더욱 바위들이 험상궂다. 석질도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붉은 빛에 반질반질 潤이 난다. 작은 것을 들어보니 강하고 무거운 광물질이 함유된 바위인데 유난히 푸른 이끼가 덮고 있다.
전망 좋은 바위봉우리 정수리에 측량점이 보인다. 보기에 바위 표면이 푸르지만 이끼를 벗겨보면 붉은 자줏빛이다.
←상백운대130m, →칼바위정상300m 지점이다.
바위들은 그 모습이 칼날처럼 얇고 날카롭게 생겼다.
칼바위란 이름이 실감나는 바위들의 모습이다.
수림에 숨었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칼바위능선 그 이름이 참 어울린다.
이 등성이는 전하는 말대로 작은 금강산일세.
소나무가지와 아늑한 산세, 파란하늘의 흰 구름 두둥실 떠가는 모습을 보는 내가 바로 신선일세.
소요산에서는 걸어보기 드문 호젓한 길일세.
《칼바위 정상》
이 지대의 바위들은 크고 작은 편마암들이 칼날처럼 날카롭고 뾰족하게 생겨 칼바위로 부르는 곳입니다. 상백운대에서 시작하여 선녀탕입구 하산로까지 약 500m 가량 연속으로 이어진 보신바와 같이 조심스런 구간입니다. 수려한 소요산의 절경을 한 차원 더 높여주는 칼바위는 그 기세나 산세가 노송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습니다. 뒷면으로는 소백산 지맥과 국사봉, 왕방산, 해룡산, 칠봉산이 연결되어 마치 용의 등처럼 동두천의 동북쪽을 휘감고 있습니다.
기괴한 모습의 바위 정수리에 춤을 추듯 기묘한 자태를 뽐내는 잘 생긴 소나무의 어우러진 아름다움이여..
위의 소나무를 측면에서 찍은 자태입니다.
이런 위용으로 500m 정도 이어지는 칼바위 능선입니다.
발길에 닳은 바위 표면이 붉고 반질거리는데, 작은 돌멩이를 들어보니 일반적인 화강석보다 훨씬 무겁다. 구리철광석은 아닌지..
(선녀탕입구로 내려가는 첫 갈림길)
칼바위에서 150m에 위치한 삼거리이며, 상백운대에서 700m 지점이다. 바로가면 600m거리에 나한대, 우측으로 800m 내려가면 선녀탕입구이다.
여기서 칼바위 지대는 끝나고 나한대로 오르는 봉우리로 이어지는 고갯마루이다.
(선녀탕으로 내려가는 두 번째 갈림길),
여기는 칼바위 지대는 끝나고 나한대로 오르는 봉우리로 이어지는 고갯마루이자 선녀탕입구로 내려가는 삼거리입니다. 羅漢臺 (300m) 오르는 계단 앞입니다. 나한대로 가기 전에 선녀탕을 답사하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나한대를 거쳐 의상대와 공주봉으로 갈 생각입니다. 이 갈림길에서 선녀탕까지는 1km, 다시 이 자리로 오자면 2km가 되겠습니다.
선녀탕입구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소요산은 등성이나 계곡이나 각 진 바위와 활석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녀탕입구입니다. 산행객이 가는 길은 자재암을 거쳐 일주문으로 하산길이고 선녀탕은 우측으로 갑니다.
선녀탕 입구는 칼바위에서 나한대로 오르기 전에 선녀탕을 보기위해 우측으로 900m 내려온 삼거리입니다. 바로 내려가면 자재암이 되고 우측 계곡으로 300m 거슬러 오르면 선녀탕입니다. 나는 선녀탕을 답사하고 다시 내려온 길로 되올라가 나한대로 갈 생각입니다.
선녀탕 폭포 위쪽으로 오르는 계단입니다. 선녀탕은 계단 난간 밖 계곡 안쪽 옥류폭포 위에 있습니다.
선녀탕계곡의 벼랑과 벼랑 사이 좁은 계곡으로 들어서면 선녀탕계곡인데 근접이 어려워 계단으로 옥류폭포 상단 쪽으로 올라가면 폭포 위에 있는 선녀탕(沼)과 안내판이 있습니다.
선녀탕 안내도 의 글을 옮겨 봅니다.
"상백운대에서 발현하는 계곡을 따라 물이 흘러 이곳 오목한 바위 구덩이에서 모이는데, 그 물이 맑고 깨끗하며 그 위치가 소요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있어 신비함과 은밀함으로 세간의 상상력이 더해져 마치 선녀들이 달밤이면 목욕하러 내려올 정도로 아름답다하여 선녀탕으로 불린다."
선녀탕 위쪽 계곡에서 바라본 모습, 계곡의 물이 2m정도의 낮은 폭포로 떨어집니다. 그 아래 선녀탕으로 불리는 암반의 물웅덩이(沼)가 있습니다. 웅덩이의 물은 다시 높이10m 정도의 폭포 아래 좁은 峽谷으로 떨어져 흐릅니다. 이 물의 여정의 계곡을 선녀탕계곡이라고 합니다.
낮은 폭포와 물웅덩이 일부 모습. 유구한 세월에 많은 물이 모래와 함깨 쏟아져 내려 바위 면을 갈고 깎아내어 물웅덩이를 만들었겠습니다.
낮은 폭포와 높은 폭포 사이 암반에 生成된 물웅덩이(선녀탕) 모습. 낮은 폭포에서 물을 받아 긴 폭포로 흘려 보내는 모습입니다.
옥류폭포 상단 끝머리입니다. 웅덩이의 물이 좁고 깊은 계곡으로 낙차하는 모습입니다.
옥류폭포 위 선녀탕 앞에서 계곡 사이로 바라본 풍경입니다.
다시 계단으로 내려와 선녀탕계곡입구를 바라본 모습입니다. 선녀탕계곡입구는 마치 협문처럼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습니다. 마치 여성을 보는 느낌도 듭니다. 그 안쪽은 좀 넓지만 바로 10m 정도 높이의 옥류폭포가 앞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선녀탕입구 삼거리)
여기서 바로 내려가면 자재암으로 가는 길이지만, 나한대를 거쳐 의상대로 가기 위해 내려온 능선 쪽으로 되올라갑니다.
선녀탕입구에서 나한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숨이 턱에 차도록 가파른 길입니다. 이제 300m 올랐으니 700m 더 올라가야 나한대 前 계단 앞 능선에 이르릅니다.
드디어 선녀탕입구에서 나한대로 오르는 능선의 계단에 이르렀습니다. 유난스럽게 계단이 많은 소요산입니다.
《나한대/羅漢臺(571m)》
소요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입니다. 오른쪽에는 의상대와 공주봉이 위치해 있고 왼편에는 이미 거쳐온 선녀탕 하산로, 칼바위와 상백운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羅漢이란 의미는 불교를 수행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이르는 명칭입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에 의해 창건되고, 고려 말 나옹선사(懶翁禪師1320 - 1376)등 여러 고승들이 수행하였던 자재암, 특히 조선 태조가 이 절에 머물며 절의 면모를 일신한 이후 자재암이 크게 번성하자 절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봉우리들을 불교와 관련된 명칭으로 부르는 중에 이곳을 나한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한대에서 바라본 앞 봉우리.
나한대를 지나 의상대로 가는 곱지 않은 길입니다. ㅎㅎ
이곳 바위는 보기에 석회암처럼 보이지만 石質은 泥質편마암으로 생각됩니다.
험한 만큼 조심 또 조심 ㅎㅎ
머리 또한 조심합시다.
이제까지의 산행 중 세 번째로 사람을 봅니다.
의상대로 오르는 계단 앞입니다.
《의상대/義湘臺(587m)》
드디어 소요산의 최고봉 의상대에 올랐습니다. 이곳에서 앞 마차산을 바라보았을 때 동두천시 상,하봉암동이 바라보이고 그 건너편으로는 파주 감악산이 보입니다. '의상대' 이름의 유래는 조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 소요산에 머물며 자재암을 크게 일으킨 후 자재암을 둘러싼 소요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으로 불렸는데, 자재암을 창건한 원효와 수행 동반자인 의상을 기려 소요산의 최고봉을 의상대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의상대 뒤에 붙어 있는 봉우리
의상대 뒤 봉우리에서 바라본 서북방향입니다.
의상대 북쪽 봉우리
하백운대 , 중백운대, 상백운대 능선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앞 봉끗한 봉우리는 앞서 거쳐온 나한대 봉우리입니다.
공주봉과 그 너머 동두천시 모습입니다.
초성리 시가지를 봅니다.
뒤따라 올라온 미군 2사람에게 정상을 내주고 내려와 바라본 의상대 정상 모습입니다.
의상대를 내려오다 바라본 의상대 쉼터.
의상대정상봉 아래 의상대 능선은 바위지대로 약12m 정도 길이이며 좌우 모두 계단이 설치되어 있을 만큼 험한 곳입니다. 의상대봉우리의 이정표를 옮겨 봅니다.
일주문(3.6km), 자재암 (3.15km), 중백운대(2.1km), 상백운대(1.5km), 칼바위(950m), 나한대(200m) ← 의상대 → 샘터갈림길(750m), 공주봉 (1.2km) , 구절터(2.2km), 일주문(2.6km).
공주봉으로 가는 의상대 우측 계단입니다.
의상대 바위봉우리 우측 끝머리에서 긴 데크계단이 위험지대를 안전하게 모십니다.
의상대에서 공주봉으로 가는 길에 첫 계단,
긴 계단을 내려오니 쉼터에 벤취 몇 개 客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잡목이며 바위며 요모조모 살펴 보는 재미가 있는 길입니다.
의상대로부터 200m 지점입니다.
능선의 험상궃은 바위들이 남쪽으로 솟아 있습니다.
갈라져 떨어져 나간 돌멩이나 남은 바위 몸체나 모나고 날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갈라진 바위 벼랑길은 지나가노라면 저절로 자라목이 됩니다. 금시라도 칼날 같은 바위가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서...
《샘터갈림길》 의상대로부터 750m, 공주봉450m 前 지점에서 왠 다부져 보이는 여인이 작대기를 들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 지나쳐 가야 하는데 공연히 겁이 난다. 하도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기에..
아늑한 느낌을 주는 길에 어울리는 부부산행..
내 머리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지나가려니 오금이 저린다.
공주봉 오르는 길 저만치 긴 계단이 지네처럼 기어오르고 있다.
《공주봉/公主峰(526m)》
일주문을 들어서서 원효폭포와 원효굴 옆 계단을 오르면 등산로는 좌측 자재암 방향과 우측 옛절터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자재암 방향으로 오르면 첫 봉우리가 하백운대이고 옛절터 방향으로 오르면 첫 봉우리가 공주봉입니다. 따라서 산행로는 부채꼴로 이어져 어느 방향으로 가든 원점 산행이 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소요산에 자재암을 창건하고 수행하던 원효 스님을 찾아온 요석공주가 산 아래 머물면서 그 남편 원효를 사모했다고 하는데 이 공주봉의 이름은 요석 공주의 남편을 향한 애끓는 사모를 기려 붙여진 명칭이겠습니다. 공주봉을 오르는 길목에 옛 절터가 남아 있어 이들의 고귀한 사랑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동두천 6산 산행 인증도장함. 동두천의 6개 산이 어느 산이지? 물론 소요산도 그 중 하나겠지만 -
소요산 6봉에서 공주봉을 마지막으로 하산길에 들어섭니다.
옛 절터로 가는 도중에 암벽지대에 나한봉과 원효봉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수도처 앞 돌탑.
옛 절터.
옛 절터 지킴이 검은 염소.
자재암 전의 산행을 시작하던 갈림길로 내려가는 계곡입니다.
요석공주가 원효대에서 수도하는 원효를 위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공주봉으로 오르내렸던 삼거리 전의 계곡 풍경입니다.
원효폭포와 원효굴 앞에서 시작한 산행이 '삼거리-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능선-선녀탕-원효대-공주봉-옛절터-자재암-삼거리. 총12km에 2.372계단이었습니다.
2020년 10월 1일 추석날, -鄕村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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