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②비수구미 계곡 · 파로호 · 평화의 댐』

鄕香 2020. 7. 1. 06:37

앞서 올린 비수구미 계곡에서 이어지는 파로호(破虜湖)와 평화의 댐 사진을 둘로 나눠 올린 것입니다. 

 

 

파로호로 들어서는 입구이자 비수구미 생태계곡으로 들어서는 입구이겠습니다. 개방 기한이 끝나면 통제하는 문이기도 합니다.

  

 

출렁다리로 오르는 계단 앞에 비소고미금산동표 표시판이 철조망 안쪽 계곡 건너 바위산 방향을 가리키며 50m임을 알리지만 접근도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다리위에서 산자락 밑을 세밀하게 살폈지만 수풀이 우거져 있는 사이로 안내판만 빼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에는 계곡 건너 산자락 밑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던 것을 지금은 철조망을 둘러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좌측 바위 안쪽 산자락 바위 면에 새겨져 있겠습니다.

 

 

출렁다리 우측 도로변의 안내판 모습입니다. 저 길을 따라 파라호를 끼고 갈 수도 있는데 5-6백m 가면 도로일부가 물에 잠겨 있어 갈 수가 없습니다.

 

 

출렁다리 위에서 바라본 계곡과 이장 댁 식당 지금 사진을 보니 이장 댁 우측 철조망 바깥 산자락을 끼고 출렁다리 옆으로 가면 바위 면에 새겨져 있을 비소고미금산동표(非㪽古未禁山東標)를 확인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비소고미금산동표(非㪽古未禁山東標)는 지금의 경고문과 같은 것이기에 사람의 왕래가 잦은 길가 눈에 잘 띠는 곳에 비석에 새겨 세웠거나 이와 같이 바위에 새겨 놓기도 하였습니다. 원주 치악산 자락

또한 동표(東標)라 했으니 사람의 통행이 있었을 서, 남, 북쪽 어디인가에도 이와 같은 금표가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비수구미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파로호로 흘러들어가는 시점입니다.

  

 

출렁다리 위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음각으로 바위에 새긴 비소고미금산동표는 이 바위 밑에 새겨져 있는데 바위 밑은 계곡이며 산자락에도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고 데크를 설치한 시점부터 철조망으로 둘러 접근을 차단하였으며 숲이 무성하여 확인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황장금표/黃腸禁標》강원도 기념물 제30호. 

 

이 금표는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의 치악산 자락 龜龍寺 인근 황장소나무 군락지 길목에 세워져 있는  黃腸禁標입니다. 참고로 올려봅니다.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의 이 황장금표는 궁궐을 지을 때 또는 중수할 때 사용하던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시대 국가정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일반 백성들이 벌목 또는 훼손하는 것을 금지한 표시를 말하며 이 禁標는 대개 돌에 새겨 표시하게 되는데 이로써 표석이 위치한 일대가 황장목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질 좋은 목재의 확보를 위해 황장목 관리에 특별히 관심을 썼는데 각 왕릉이나 관청의 인근 또한 그 주변의 산야에 황장목을 심어 육성 보호하였습니다. 민간이나 절에서도 건물을 짓거나 중수를 대비하여 황장목을 동구나 산사주변에 황장목을 심어 육성하였던 것입니다. 치악산에는 질이 우수한 소나무가 많았을 뿐 아니라 강원감영이 가까워 관리에 유리하고 땟목을 만들어 섬강과 남한강을 거쳐 서울로 운송하기도 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전국 60개소 황장목 封山 가운데서도 이름난 곳의 하나였습니다. 이 표석은 조선시대 설치된 것으로 이 곳으로부터 100여 m 떨어진 도로 아래쪽에 또 하나의 황장금표석이 남아 있습니다

 

 

바위를 지나 데크로 설치된 길 따라 파로호를 내려다 보며 평화의 댐을 향해서 길 갑니다.

 

 

 걸어온 길 돌아본 모습입니다.

 

 

파로호를 끼고 도는 산자락에 데크로 설치한 길 따라가는 경쾌한 호젓함이여 ..

 

 

건너편 길이 일부 호수에 잠긴 모습이 보입니다 구름다리로 들어서기 전 저 길로 갈까 생각했었는데 저 길로 갔더라면 되돌아 이리로 올 뻔...

  

 

 우리나라 산이든 들판이든 어디를 가던 길 하나는 잘 돼 있다.

  

 

이런 원목계단은 친환경적이어서 좋은데 오래가지 못하는 흠이 있다. 

   

 

벼랑의 돌도 데크와 주변의 나무들 모두 조화롭지만 鐵造罔이 거슬린다.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 

 

 

깊은 산골 바위밑에서나 볼 수 있을 조선벌집이겠다. 

  

 

고은 연록의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본 물빛 또한 그러하다.

   

 

 사시사철 허구헌 날 밤낮없이 파로호를 바라보고 있는 전망대야 철 따라 변하는 그림에 행여 라도 싫증은 없겠다. 

   

 

전망대가 늘 바라볼 풍경이 궁금해서 나도 따라 바라본 풍정의 지금은 고요롭다. 억수가 내리고 비바람치고 눈이 소복소복 내리거나 눈보라 칠 때나 단풍 곱게 물들 땐 어떨가 그 정경 궁금하다.

   

 

 데크를 벗어나 파라호를 끼고 가는 비포장 차도로 들어서는 길목입니다. 앞서 불어난 호수면에 잠겨 끊겼던 길이지요.

  

 

주변 정경을 보노라니 갑갑스런 철조망이 훼방을 합니다.

 

 

 철조망 위 바깥으로 손을 내밀고 담은 파로호(破虜湖)

    

 

 파로호를 끼고 도는 산자락 길은 빗물에 무너져내린 돌더미가 쌓였습니다. 비내리는 날 이 길은 위험 천만입니다. 여기저기 산사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처음 보는 이 곤충은 더듬이로 보아 나방이 아닌가 싶습니다.

 

 

파로호(破虜湖)는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6.25사변이 치열하던 1951년 4~5월에 유엔의 지원을 받은 한국군 제 6사단과 해병대 장병들이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을 이곳 대붕호에 수장시켜 대승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1955년 이승만 대통령께서 몸소 이곳을 찾아와 옛 이름 대붕호를 폐기하고 파로호라는 이름을 지어 친필로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파로호의 내력을 듣고 간 중국인관광객의 진정으로 중국정부가 파로호의 이름을 옛 대붕호로 고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을 수 없는 내정간섭인데 일부 친중 세력들이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어 중국관광객을 늘이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파라호 호숫가 길 옆은 바위벼랑이 주를 이룹니다. 

   

 

 절벽을 이룬 쪼개지고 갈라진 바위 틈새로 물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큰 비가 내리면 이 또한 무너져 내리겠지요.

    

 

 길가 바위절벽 하단부가 크게 갈라져 상단부로부터 분리되어 주저앉아 있습니다. 

   

 

바위 절벽 위를 바라보니 금시라도 위에서 돌덩어리들이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또 다른 곳의 모습입니다. 쪼개져 굴러내린 낙석들이 그 밑 길가에 서낭당 돌탑처럼 쌓여 있습니다. 

 

 

호수와 바위벼랑 사이의 길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거쳐온 길을 돌아본 모습입니다. 

    

 

마지막 바위벼랑 모퉁이의 모습입니다. 

   

 

밑을 지탱했을 바위는 모두 없어져 보이지 않고 그 위 바위만 추녀의 모습으로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모를 형태입니다.

     

 

가로세로 금이 가고 갈라지고 언제 떨어져 내릴 지 모를 험한 형상입니다. 그 밑을 지나가는 아슬함.. 

 

 

파로호(破虜湖)는 화천호로도 불립니다. 북한강 최북단에 위치한 이 호수는 일제 강점기에 대륙 침략의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고자 1939년에 착공하여 1944년 완공된 화천댐으로 인하여 형성된 인공호수입니다. 화천댐은 높이81.5m, 길이435m에 총 저수량 10억 1800만톤의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우리나라 수력발전을 위한 댐 중 최대 규모입니다. 38선 이북으로 8.15광복 직후에는 소련군정 관할에 속하였던 것을 6.25전쟁 이후 한국군이 차지하여 대한민국에 복속된 지역입니다. 댐 건설 당시 이 호수에 붙여진 이름은 화천호 였으나 6.25전쟁 당시 화천 지구 전투 때 조선 인민군 및 중공군 3개 사단 수만 명을 수장시킨 호수라 하여 고 이승만 대통령께서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라 명명하였습니다. 상류에는 평화의 댐이 건설되어 있습니다. 

 

 

파라호를 끼고 아슬한 절벽 밑을 서늘한 마음으로 걸어가는 종착점이 빨간 버스입니다 날 해산령에서 출산하고 어디론가 가더니 저곳에서 산후몸조리를 하고 있습니다. 

   

 

버스에 도착하여 함께 타고온 일행들을 기다리며 주변을 담은 사진 몇 장입니다. 건너편 산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데두리처럼 감고 있습니다.

   

 

암벽을 머금은 호수의 음영

    

 

 꽃은 지고 맺힌 열매 또한 꽃과 같이 곱습니다.

  

 

 비소구미 계곡에서부터 걸어오는 내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곤충들의 역사 장면, 제철인가 봅니다. 

   

 

역사의 형태도 여러 모습, 얘들은 업고 치르네.

  

 

이제 버스로 평화의 댐으로 이동합니다. 

     

 

 평화의 댐, 로고도 기념으로 담고.. 

 

 

평화의 댐이 세워져 있는 좌측 전경

 

 

좌측 전망대와 호수처럼 고요한 하류 모습,

   

 

평화의 댐 좌측 전경   

 

평화의 댐 상면, 

   

 

 『 평화의 댐 』

북한은 북한강 상류에 임남댐(금간산댐) 건설계획을 1986년10월21일 발표하였고 이에 우리나라(제5공화국)는 이 댐이 水攻용으로 쓰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임남댐에 대응하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 계획을 1986년 11월26일 발표 국민들의 성원과 뜨거운 성원 속에 1단계 공사를 1987년 2월28일 착공하여 1988년 5월27일 완료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과 기대를 안고 태어났던 평화의 댐은 정치변화를 겪으면서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버린 댐이 되었다.

평화의 댐은 여느 댐과 달리 물을 채우는 설비나 발전소가 없다. 임남댐을 비롯한 북한측에서 내려온 물은 배수터널을 지나 화천댐으로 조용히 흘러갈 뿐이다. 임남댐 붕괴를 대비했기에 저수기능이나 발전기능을 만들 수 없었다. 평화의 댐은 탄생 배경뿐만 아니라 그 모습에서도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평화의 댐은 1999년 8월 태풍 올가의 위험으로부터 홀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었으나 국민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한편 임남댐은 2000년부터 담수를 시작하였고 이로인해 한강으로 유입되는 물의 9.5%인 17억톤이 줄어들어 서울지역의 물부족현상과 환경문제가 발생되고 하류 5개 댐의 전력량이 감소하는 등 커다란 경제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던 2002년 1월초, 한 겨울에 평소보다 50배나 많은 물이 평화의 댐으로 유입되는 일이 발생하여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확인한 결과 원인은 공사중인 임남댐의 훼손부위를 보수하기 위해 댐에 가둬둔 물을 대량으로 방류한 것으로 밝혀져 임남댐의 안전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북한당국과 임남댐 안전문제에 대해 수차례협의를 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이에 국민의 정부는 평화의 댐 2단계 공사계획을 2002년 7월19일 발표하고, 2002년9월30일 착공하여 2005년 10월19일에 마침내 평화의 댐 2단계공사를 준공(참여정부)하였다. 5공화국에서 착공된 평화의 댐이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서 준공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할 수 있지만, 평화의 댐은 임남댐 붕괴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또한 저수량의 조율 등으로 인한 실질적인 댐의 역할과 함께 DMZ 평화 · 안보 · 생태 보존을 위한 지대한 가치도 지니고 있다. 

평화의 댐은 물의 흐름을 바꾸는 것도 막는 것도 아니라 단지 성난 물을 잠시 다독여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다. 훗날 남북에 평화가 찾아오고 통일이 되면 평화의 댐은 진정한 댐의 모습을 찾게 되리라 우리 국민들은 확신한다. - 평화의 댐 안내문에서 -

 

 

평화의 댐 우측 전경, 

  

 

 

 

 

우측으로 비목공원이 보입니다.

   

 

 세계평화의 종 도안 

 

 

신라 범종의 형태를 본으로 삼아 만든 세계평화의 종은 세계 각국의 분쟁지역에서 수집된 탄피들은 모아 만든 종으로 평화, 생명,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만관(37.5)으로 만들어진 세계 평화의 종은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고자 1만관 중 1관을 분리한 9,999관으로 주조되었다가 통일의 날, 떼어진 1관을 추가하여 세계 평화의 종을 완성할 것입니다. 무게 10,000(37.5), 크기 지름2.76m, 높이 4.67m 입니다.

 

 

세계평화의 종에 기여한 분들 중 일부 

  

 

평화의 댐 좌측 광장 앞 비목공원으로 내려가는 입구

   

 

비목공원으로 내려가는 침목계단,

   

 

 비목 시 비 앞 정면에 서면 詩碑 뒤로 돌무덤에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운 비목 위에 총탄에 구멍나고 녹이 쓴 철모가 씌어져 있는 무덤과 그 뒤로 비목탑이 한 눈 안에 들어옵니다. 영령이시여 고맙습니다 평안히 쉬십시요 ♡

    

 

 《무명 영웅의 돌무덤과 비목》의 정경 

    

 

아, 가슴 저리고 눈물이 난다.

지난 날의 참상이 이러 한데 그 침략자 공산당 괴수 김씨 들을 받들고 추종하는 이들 누구뇨! 

  

 

비목탑 정면

   

 

 《비목탑/碑木塔/Bimok memorial》 

이곳은 한국 전쟁당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세계의 젊은이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산화한 곳으로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배경으로 탄생한 가곡 "비목"의 발상지이다. 

이곳에 세계 평화를 위해 산화한 젊은이들의 넋을 기리고 평화를 갈망하는 인류의 소망을 담아 우리 후손들에게 세계평화 안보와 인류 공동 번영의 이상을 전승하고자 군민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게 되었다. (안내판 전문)

 

 

평화의 댐 길 위에서 바라본 주차광장

   

 

 

  2020년 6월28일 - 鄕村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