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보스니아 네움-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를 출발하여 버스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보스니아 헤르고체비나 해안가 네움', 호텔 Orka에서 숙박하고 이튼날 일찍 출발하여 약 1시간을 해안도로를 달려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로 갑니다.
'라구사'(두브로브니크 옛 이름)는 개방적 자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라구사 사람들은 슬라브 족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선진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으며, 모토로 삼았던 해양공화국 베니스와 라이벌이 되어 가끔 충돌은 있었으나 큰 싸움은 하지 않았습니다.
1699년 라구사는 베니스 식민지와 離隔하기 위해 베니스 식민지와 붙어 있는 국경지대 주변 영토 일부를 오스만 터키에게 넘겨줄 만큼 베니스를 경계한 것 같습니다. 이때 넘겨준 영토가 지금은 보스니아의 유일한 항구 네움입니다. 지금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보스니아의 네움으로 인하여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가 있는 국토와 단절되어 크로아티아에 陸續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크로아티아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데 네움을 거쳐야 하므로 보스니아 국경을 넘고 또 넘어야 다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네움에서 1박해야 했던 緣由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드리아해는 길이 약 800km에 13만1,050㎢로 발칸반도와 이탈리아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네움에 소재한 호텔 Orka를 출발하여 아드리아해변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창을 통해 담은 풍경들입니다.
그냥 스쳐 보내기에는 그 아름다움 너무 안타까워 이렇게 담아본다.
지그재그로 들고나는 해안에 매료되네 이곳에 바닷물이 없다면 우리나라만큼이나 산악지대가 많겠다 싶다.
순간적으로 담은 풍경이지만 물빛 고운 바다에 섬들의 구성도 아름답고 포근해~~
유럽의 건물은 어디를 가나 엇비슷하다
이탈리아 해안과는 다르게 아드리아해안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참 많다.
깔끔하고 날렵한 이 배는 무슨 배일까 ?
이 두 배도 규모는 위 사진의 배와 같은데 형태는 3척의 배가 모두 다르다.
섬과 섬 사이의 수평선, 큰 바다로 나가는 관문처럼 느껴진다.
섬이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 육지가 섬으로 떨어지려는 것일까? 어린 시절 예쁜 조약돌 줍던 좁은 여울목을 보듯 정겹다.
스르지 산과 두브로브니크,
우측 옆에 주차장 표시판과 함께 아래에는 Za Kupce STUDENCA(학생 · 고객을 위한)라는 슬로베니아語의 안내판이 보이네요.
두브로브니크 城에 얼추 다왔는가 싶다.
아드리아 해안가의 주택들이 별장처럼 멋지다.
섬 뒤에 항해 중인 저 크루즈도 두브로브니크 앞 바다로 가는가 보다.
항구 안에는 제법 큰 선박이 정박해 있고 좌측 입구에는 같은 형태의 배들이 서넛 정박해 있고 제법 넓은 부두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해군이나 해경기지가 아닐까 싶다.
두브로브니크城 근교 해안도로 옆 주차장에는 스르지山(해발412m)정상 전망대까지 운행하는 7~9인승 승합차가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스르지山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승합차를 타고 스르지山정상까지 올라가볼 생각입니다. 주차장에서 담은 풍경입니다.
스르지山 전망대로 오르기 전 주차장에서 바라본 크루즈 선박, 참 크다! 굴뚝같은 배기통이 5개는 되는가 보다 화보나 지면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다. 크루즈는 두부로브니크 城 관광 중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안을 둘러볼 때 또 다른 크루즈를 바다에서 근접해 보기도 하는데 이곳 두브로브니크는 크루즈관광코스의 명소로 꼽는 곳이 아닌가 싶다.
↓ 아래 사진은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안을 둘러볼 때 동영상으로 촬영한 것에서 잘라 떠온 사진입니다. 크루즈선박의 배경으로 있는 스르지山정상에 TV송신탑과 대리석으로 제작한 십자가가 있는 전망대입니다.↓ 스르지山은 두브로브니크를 감싸고 있는 背山입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아드리아 해변의 풍경.
전망대로 오르는 승합차를 타기 전에 담은 주차장 주변 풍경입니다. 두브로브니크의 면적은 한국의 약55%에다 인구는 400만 명을 간신히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반 정도라고 합니다. 인종적으론 슬라브족, 역사적으론 그리스-로마-이탈리아-베니스 문명권에 속합니다. 40여년 간의 공산주의 지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文明 국가의 분위기가 완연합니다. 요즘은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으며 크로아티아를 찾는 가장 큰 이유라면 두브로브니크 구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항구에는 선착장이 여럿 보이는 큰 항구입니다.
이제 두브로브니크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스르지山 정상으로 승합차를 타고 올라갑니다.
스르지山(Srd) 십자가 전망대 위쪽 정상에도 성벽이 있는데 스르지 요새라고 합니다. 그 안에 세워진 송신탑,
바람에 나부끼는 크로아티아 깃발.
《스르지山(Srd /해발412m)》
스르지산 전망대에 우뚝 세워진 십자가와 祭壇,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는 알프스-히말라야 지진대가 지나가는 곳으로 지진이 잦습니다. 그로인하여 지진 피해를 입은 기록이 숱하게 남아 있는 데요 그 중 1667년 진도 10으로 추정되는 기록적인 대지진으로 도시가 심각하게 파괴 되었고 1979년 몬테네그로에서 발생한 진도7 지진으로 1,071곳의 건물이 손상되는 피해를 받았는데 대부분 문화재에 해당합니다. 1995과 1996년에도 지진이 발생했는데 1996년 지진 때는 도시 북서쪽 20km지점에서 규모 6의 지진이 발생하여 두브로브니크로 통하는 도로가 차단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7세기 후반 라구사를 건설한 사람들은 '아바르'와 '슬라브' 등의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한 도시를 뒤로 하고 새 거주지를 찾던 로마 식민시 거주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라구사 인들은 좁은 해협 건너 스르지(Srd) 산기슭에 살던 슬라브人과 차츰 동화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해협을 메워 大路〈스트라둔(플라차Placa)〉를 건설한 뒤 성벽도 그 너머로 확장하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던 866년에는 한창 세력을 뻗치던 '아글라브 왕조의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15개월 동안 공격을 버티던 라구사는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바실리오 1세는 선단을 보내 라구사를 구원했습니다. '라구사'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과 헝가리 왕국의 지배아래 들어갔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습니다. 도시는 일찍이 중요한 무역거점으로 성장하여 라구사 상인들은 이탈리아와 발칸은 물론 영국까지 돌아다니며 상업행위를 하였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에도 라구사 출신 선원이 끼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1358년 자다르 협약(Treaty of zadar)이후 시작된 헝가리 지배당시 라구사는 금전을 바치는 대신 상당한 자치권을 위임 받아 공화국체제로 전환했습니다. 도시의 책임자는 렉터(rector)라고 불렸습니다. 상인공화국 '라구사'의 富는 날로 늘어나 15세기에는 국고에 7백만 '두카트'를 보유할 정도였습니다. 전성기의 라구사는 4만 인구에 3백 척이 넘는 선단을 보유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라구사는 비교적 자유로운 이념을 가진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을 추방한 다른 도시와 다르게 쫓겨 온 유대인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1389년 오스만 베이국과 기독교연합군이 격돌한 코스보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쳐온 세르비아 왕족도 받아들인 적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분노한 오스만에게 라구사는 "당신네가 도망쳐 왔어도 받아 줬어" 라고 응대했습니다. 라구사는 이러한 이념과 충분한 재원을 바탕으로 각종 사회제도를 정비했습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보건, 교육, 요양 부분에서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건축에도 많은 예산을 투자해 성벽을 보강하고 도로와 급수 시설 등을 정비했습니다. 필레 게이트 바로 안에 있는 '오노포리오 급수대'도 이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세는 라구사에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오스만이 헝가리의 힘을 압도하면서 라구사는 더욱 오스만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라구사는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에 선박을 보내기도 했는데, 아르마다가 영국에게 참패하면서 라구사와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무역에 지장을 받기 시작했으며, 지중해 대신 대서양 항로가 주목 받으면서 라구사는 무역의 중심에서 밀려납니다. 라구사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667년의 대지진이었습니다. 4월 7일 오전 8시경 발생한 지진과 지진해일로 도시와 선단이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공화국 최고위층을 포함한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수천 명의 시민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시민들의 노력으로 도시는 복구되었지만 라구사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는 재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도시는 당시 행해진 대대적인 복원계획의 산물입니다.
19세기 발칸을 둘러싼 강국들의 쟁탈전은 라구사공화국 멸망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라구사는 러시아제국과 몬테네그로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를 받아 들였습니다. 한번 들어온 나폴레옹 군대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고 1808년 나폴레옹은 라구사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왕국에 편입시켰습니다. 나폴레옹 휘하 지휘관 '오귀스트 마르몽'은 라구사 공작에 봉해졌습니다. 도시는 이후 프랑스 일리리아 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이 실각한 다음에는 오스트리아제국으로 넘어 갔습니다.
20세기 초 두브로브니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거쳐 유고슬라비아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 지하에 있었으며 전후 유고연방의 구성국이 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인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몬테네그로 국토방위군이 도시를 포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는 두브로브니크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고 이 지역을 모두 차지해 세르비아人의 지배하에 둘 계획이었습니다. 국제사회는 도시 근교를 약탈하고 세계유산에 포격을 퍼붓는 행위에 비난을 쏟았지만 유고 측은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 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국제 사회는 무엇을 했느냐? 면서 무시했습니다. 포위는 7개월 동안 이어졌지만 크로아티아군은 끝까지 도시를 지켰고 유고 측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내전 종식 후 공격 행위의 책임자들은 전범 재판에서 최대 7년 6개월 징역형 선고 받았으며 당시 유고 연방의 대통령으로 이 사태의 최고 책임자인 '슬로보단 밀로셔비치'는 재판 도중이던 200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두브로브니크 그라즈케 지드네/드브로브니크 城壁/Dubrovnik Gradske Zidne》
스르지山(해발412m)에서 내려다본 두브로브니크 전경.
스르지山 십자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두브로브니크城과 市 그리고 아드리아海 풍경, 하나같이 붉은 지붕들이 인상적입니다.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좁고 긴 해안선에 위치합니다. 육지 쪽으로는 해발 412m의 스르지(Srd) 산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앞바다에는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놓은 로크룸 섬(Island Lokru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스르지山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드리아 해안 풍경입니다. 내려다 보이는 섬은 두브로브니크城 앞 바다에 위치해 있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오랜지 나무가 많은 로크룸 섬(Island Lokrum)입니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남부와 ’보스니아 헤르고체비나‘의 네움을 사이에 둔 아드리아 해에 면한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네움을 사이에 두고 크로아티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는 월경지이지만 여행자에게는 간단한 여권 검사만으로 두 지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도시로 두브로브니크 네레트바 주의 중심 항구도시로서 ’아드리아 海의 진주라 불렀습니다.
스르지山(해발412m)정상에서 바라본 동남쪽 풍경.
두브로브니크를 포함한 달마티아 지방(아드리아해의 동해안=발칸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lps/Dinarsko Gorje)의 장대한 모습입니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 Dinaric Alps(Dinarsko Gorje) 동부 알프스 산맥의 남동쪽 지맥이 웅장하고 엄숙한 기운을 안깁니다.
줌으로 당겨본 디나르알프스 산맥 Dinaric Alps(Dinarsko Gorje) 동부 알프스 산맥의 남동쪽 지맥.
알프스<Alpes(프랑스어), Alpi(이탈리아어), Alpen(독일어), Alpe(슬로베니아어), Alps(영어)>는 이곳 유럽 중부 동쪽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시작되서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독일을 거쳐 서쪽 프랑스에 이르는 알프스산맥은 대다수가 뷘더 결정편암, 플리시, 몰라세 등 유백색 또는 회백색 암석으로 이루어진 습곡산맥입니다. 드러낸 바위표면은 출생의 비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올라온 길과 수평선을 아울러 바라본 풍경입니다.
스르지산 십자가 전망대를 뒤로 산을 내려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았던 두브로브니크 城으로 갑니다.
《두브로브니크》
고딕,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 양식이 어우러진 고풍스럽고 멋스러운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의 경관이 유명한 두브로브니크는 1차 대전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라구사(Ragusa)라고 불렸는데, 이는 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플라차(스프라둔) 대로를 기준으로 바다 쪽을 이르던 말이라고 합니다. 원래 섬에 가까웠던 이곳에는 로마계통 주민이 살았고 슬라브계 주민들이 살았던 육지 방면의 이름은 두브로브니크였습니다. 어원에서도 양측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데 라구사는 돌(石)을 뜻하는 라틴어 Lausa에서, 두브로브니크는 떡갈나무라는 뜻의 크로아티아語 Dubrava에서 유래했다고합니다. 1차 대전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영향으로 외래어 영향을 받은 지명 라구사 대신 크로아티아에서 나온 두브로브니크로 지명을 바꿨습니다.
'성 이반 요새(Fort Sv.Ivan)'의 웅대한 모습입니다. 또는 '물러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드브로브니크 城》 성 이반 요새(Fort Sv. Ivan )
두브로브니크 城壁은 10세기에 건설되어 13~14세기까지 중축하거나 보완하여 현재 성벽의 기초를 이루었고 19세기에는 침략자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더욱 견고하고 두껍게 2중으로 개축하였습니다. 성벽에는 모두 4개의 요새가 있는데 두 개의 탑 민체타(Minceta)탑과 보카르(Bokar)탑이 있습니다. 주 출입구 필레 문(Pile Gate)은 아주 웅장하며 보카르 탑 왼편에 위치합니다. 두브로브니크 城壁은 아드리아 해안과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도시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성벽은 전쟁과 지진을 겪으면서 수차의 증개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총 길이1.949km, 높이 6m, 두께 1.5~3m입니다. 이 성벽은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와 중세시대 성벽을 한눈에 보여주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산책길이기도 합니다.
두브로브니크城 동쪽 출입구입니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로 들어가는 문은 크게 나누어 동쪽의 플로체(Ploce Gate) 문과 서쪽의 필레 문(Pile Gate)이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 성 안 구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서쪽의 필레문이나 동쪽 플로체문을 통해야 하므로 두 문은 각처에서 몰려온 사람으로 늘 붑빕니다.
두브로브니크 城 밖 주택들의 풍경입니다. 스르지(Srd) 산자락의 해안으로 이루어진 바닷가에 자리한 도시로 옛 라구사 때 주로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이 거주하던 위치입니다.
두브로브니크 城과 港口의 풍경. 이 항구는 주로 두브로브니크 외성곽 주변을 관광하는 배를 운행하는 선착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작은 이 항구는 성 이반 요새(Fort Sv.Ivan)와 레베린 요새(Fort Revelin) 중간에 항아리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레베린 요새(Fort Revelin) 외벽을 끼고 플로체 문(Ploce Gate)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브로브니크 城內 물품 운송용 전기차,
두브로브니크 성 첫 번째 출입구입니다.
르네상스식 아치형 문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石橋가 있고 석교를 건너가면 플로체 문(Ploce Gate)입니다.
《플로체 문(Ploce Gate)》
플로체문은 성 이반 요새 아래에 있습니다.
성 불레이세 조각상 아래 1460년 로마네스크 양식 아치형의 문입니다. 문 위에는 두브로브니크城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聖 블레이세 조각상이 감실 안에 새워져 있습니다. 평소 두브로브니크성 입장은 필레문과 플로체문 매표소를 모두 운영하지만 비수기에는 필레 게이트만 운영한다고 합니다.
《聖 블레이세(Sv. Blaise)조각상》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답게 두브로브니크 성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있습니다. 성 블레이세가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신이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습니다. 10세기 베네치아사람들이 두브로브니크를 지배하기 위해 '로부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가 있는 그 자리에 요새를 세우려고 했는데, 때를 같이하여 두브로브니크 성당 신부 스토이코(Stojko)의 꿈에 오래 전에 순교한 '聖 불레이세(Sv. Blaise)'가 나타나 이 사실을 알려줘 베네치아에 앞서 석달만에 이 요새를 세웠습니다. 뒤늦게 배로 이곳에 온 베네치아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뱃머리를 되돌려 갔다고 합니다. 그 후 '聖 블레이세'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며 두브로브니크 성문 위에 이와 같은 조각상을 새겨 두브로브니크를 지켜줄 것이라는 주술적 염원과 믿음으로 세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플로체 문을 들어서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두브로브니크城과 아드리아海의 명소와 생활 풍경 등을 밝고 진한 원색으로 아름답게 그린 그림들은 팔고 있습니다.
플로체 문(Ploce Gate)을 거쳐 폰타문과 스폰자 궁전 시계탑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왼편은 성 이반 요새이고 정면에 보이는 계단과 건물은 로자리자 교회(Rozarija church).
우측은 로자리자 교회(Rozarija church)로 오르는 돌계단의 형태가 마치 수면위에 포물선을 그리듯 아름다운 여운을 남깁니다.
성 내벽에 어떤 용도로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았을까? 알 수는 없지만, 처음에는 출입문이었던 것을 침략으로 인하여 취약했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 봉쇄한 것은 아닐까!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구멍도 특이합니다. 마치 열쇠의 구멍 형태입니다. 바깥에는 골목이며 화장실이 겸해져 있는 또 다른 부속 건물이 있습니다. 소위 생선시장이라는 곳입니다.
로자리자 교회(Rozarija church) 후문인 것 같은데, 고품격의 건물에 펄럭이는 광고가 있네요. 'Alter Your Visit!' Connect with our free wi-fi to findovi more! 방문 변경, 두브로브니크에서 네트워크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겠습니다. 와이파이는 무료 서비스,
《스폰자 궁전(Palača Sponža)시계탑문》
시계탑문을 들어서기 전에 성안쪽을 바라본 情景입니다. 문 앞은 바로 루자 광장(Trg Luža)입니다. 곧바로 보이는 길은 스트라둔(Stradun)-플라차(Placa)입니다. 두브로브니크 城內 舊市街의 중심 大路이며, 오노프리오 급수대(Large onofrio's Fountain)》광장과 필레문(Pile Gate)으로 직결되어 있습니다. 성내의 모든 광장과 길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무수한 세월동안 무수한 발길에 의해 마치 빙판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습니다.
베니스가 게르만 족의 침입을 피해 해안지대로 피신한 사람들이 만든 도시이듯이 두브로브니크도 7세기 무렵 몽골 계통 아바르 족의 공격을 피하여 해안 절벽지대로 피란(避亂) 온 이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도시입니다. 라우스로 불렸는데, 절벽이나 심연(深淵)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라우스가 나중엔 라구사로 바뀌었고 피란민들은 성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르지산 자락에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두브로브니크로 불렸습니다. 두 도시는 나중에 하나로 결합되고 두 도시 사이에 있던 해협을 메꾼 곳이 두브로브니크의 중심大路 플라차(Placa)↔스트라둔(Stradun)입니다. 지금은 베니스의 聖 마르코 광장처럼 붐비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루자 광장(Trg Luža) 좌측에 펜스로 임시 울타리를 쳐놓은 곳은 성 블레이세 성당(Church of Sv, Blaise)입니다. 14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워졌으나 1667년 대지진과1706년 화재를 당해 9년(1706~1715)에 걸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한 것입니다. 무슨 공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성당 앞 광장에 임시로 울타리를 쳐놓았습니다. 그 안에 올란도 조각상이 새겨진 방형기둥이 있는데 검을 든 올란도 석상 모습을 그려 놓은 보호막이 둘려져 있습니다. 아래 올란도 석상은 사이트에서 떠온 것입니다.
《올란도(ORLANDO)》
2019년 올해가 라구사가 商武국가로 발돋음한 지 6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따라서 자유의 표상 올란도가 두브로브니크의 守護騎士가 된 해이기도 합니다. "ORLANDO" 600, Simbol Slobode(Symbol of Preebom).
보호막 안 올란도 석상 스폰자 궁전
▼ 시계탑문에서 바라본 스트라둔 거리 풍경 ↓
루자 광장(Trg Luža)에서 남쪽 도로를 바라본 풍경입니다.
공사관계로 임시로 담을 두른 '성 블레이세성당(Crkva Sv. Blaise)'과 마주하고 있는 스폰자 궁전(라구사 세관이 있던 곳), 그리고 정면으로 보이는 돔은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입니다.
《스폰자 궁전(Sponza Palače)》
루자 광장(Trg Luža) 우측에 있는 스폰자 궁전(Sponza Palače)입니다. 1516년 르네상스 양식에 1522년 고딕 양식이 더해진 건물로 1667년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보존된 몇 안되는 건물 중 하나입니다. 이 건물은 조패, 은행, 세관 등이 들어섰던 건물로 지금은 역사 기록, 고문서 등을 전시하며 국립기록보관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크로아티아 내전 당시 참상을 알리는 영사실과 희생자들을 기리는 전시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블레이세 성당 앞 광장 공사로 임시 담을 설치해 놓아 공간이 좁아 건물을 온전히 담을 수가 없어 스폰자 궁전의 아치형 입구의 아름다운 기둥 하단부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폰자궁전시계탑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루자 광장입니다. 광장 앞 시계탑과 붙어 있는 문 위에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고 그 위 공간에 여러 개의 鐘이 걸려 있습니다 이 종이 시계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듭니다. 자동시보 같은 장치로 매시간 마다 울리는 건 아닌지..
스폰자궁전시계탑 문위에 알케스티스(Alcestis/Alkestda) 오페라 포스터가 걸려 있습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알케스티스 공주는 아올코스의 왕 펠리아스의 딸로 많은 남자들이 알케스티스에게 청혼했으나 펠리아스 왕은 사자와 멧돼지에게 멍에를 씌워 전차를 끌고 오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드메토스 왕이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내고 알케스티스와 결혼했습니다. 아드메토스가 죽음을 맞게 될 때 알케스티스는 대신 죽음을 자처해 아드메토스를 구하고, 알케스티스는 은혜를 입은 헤라클레스가 구출한다는 이야기겠습니다.
《시계탑 》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이 개항한지 올해(2019년)로 6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시계탑 위쪽에 '올란도' 조각상이 그려진 큰 현수막이 내걸려 있습니다. 올란도는 두브로브니크의 守護騎士像입니다.
시침이 눈에 들어오기에 보니 09시40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019년 9월20일 09시40분, 두브로브니크에서..) 그럼 한국 시간은 몇 시일까! 사진원본을 확인해보니 오전 04시 40분입니다.
시계탑 옆 큰 철문에 새겨진 문장 아래 돌출 된 點字式으로 각자된 'DOGANA'(세관)글자가 있습니다. 이 문의 건물은 '라구사공화국'이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되어 멸망되어 이탈리아왕국에 편입되기 전까지 라구사의 모든 세무를 관장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문 옆에 '772' 숫자가 보이는데 이는 이 건물의 연대를 가르키는 것 같습니다. 성벽길에서도 비슷한 숫자를 보았습니다.
CULTURAL INFO CENTRE(문화정보센터)라는 글자 아래에 큰 글씨의 상점 이름,
'LUžA"
루자 광장(Trg Luža) 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겠지요. 입장권과 선물, 그리고 여러 음료도 파는 곳인가 봅니다. 들어가 보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표를 파는 것으로 볼 때 극장이나 무대도 있겠습니다. 옆에 걸린 광고를 얼핏 보니 2019/8/26~9/24 두브로브니크 늦여름국제음악축제를 열고 있답니다. 우리 같은 뜨내기를 상대로 말이지요.
'LUžA" 입구 옆에 세워진 급수대(Voda za piče)의 모습입니다. 이 급수시설은 필레광장에 있는 오노프리오 大급수대(集水井)를 설계한 나폴리 건축가 오노프리오( onofrio's Fountain)가 1438년 설계한 것으로 돌고래 밑 사람 얼굴의 입을 보면 수도꼭지를 물고 있는데 그 꼭지에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두 급수대의 형태를 비교해 봐도 한 사람의 설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聖 블레이세 성당(Crkva Sv. Blaise)》
루자 광장에 있는 성 블레이세 성당 상층부입니다. 루자 광장과 올란도 석상은 보수공사로 임시 설치한 울타리 안에 보호막으로 가려져 있어 아쉽게도 보호막에 그려 놓은 그림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성당은 14분의 성인 중 한 분으로 두브로브니크 수호성인 블레이세 성인을 기리는 성당입니다. 14세기에 로마 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대지진과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성당 돔 위에 금으로 된 관을 쓰고 오른 손에 두브로브니크城 모형을 들고 있는 블레이세 수호성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흰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도시의 건축미술을 관광하고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 개항과 해군 창설 600년을 맞아 기념하고자 찾은 크로아티아 해군 또는 해경일 수도 있겠습니다.
후리후리하고 큰 키에 멋진 크로아티아의 여성 해군장교(?), 디나르 산맥 주변 사람들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축에 듭니다. 최장신국(最長身國)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와 맞먹거나 더 크게 보입니다. 남자의 경우 평균 185cm 전후이며 男女 身長 차이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스폰자궁전시계탑문을 다시 나와 바라본 정경입니다. 스마트 폰을 보고 있는 자매의 옆 밝은 햇빛이 나오는 곳은 폰타문으로 나가는 길이자 폰타문 밖 항구 앞 광장과 상점(수산시장) 및 화장실이 있는 곳이며 상점가(조선소 자리)를 거쳐 레스토랑으로 갑니다.
《폰타문(Ponta gate)》
이 문은 두브로브니크 성내에서 항구로 드나드는 문입니다. 아치형 문 위에는 필레문과 플레체 문과 똑같은 모양의 감실 안에 두브로브니크城을 받쳐 든 聖 블레이세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는 두브로브니크를 지켜 준다는 염원이 담긴 수호성인 블레이세의 조각상입니다. 문 옆 돌판에 'RIBARNICA'(생선시장)글자가 새겨져 있고 바로 옆 골목으로 화장실이 있으며 정면으로 항구가 있습니다.
상점가(수산시장?)를 지나다 옆 바닷가를 내려다보니 라구사 시대에 조선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도 작은 배를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는듯한 情況입니다.
레스토랑 들어서기 전에 담은 항구의 풍경입니다.
항구를 사이에 두고 우측은 '聖 이반 요새( Fort Sv. Ivan)', 좌측은 "레베린 요새(Fort Revelin)" 입니다.
식사를 한 후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항구의 풍경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폰타문(Ponta gate)으로 가는 도중 상점가에서 바라본 나무숲속 레스토랑의 정경입니다. 이곳에서 식사를 했는데 수프가 맛있고 양도 많은 편입니다.
배를 타기 위해 다시 항구로 돌아와 선착장에서 바다를 바라본 풍경입니다. 역광으로 인해 사진이 어둡습니다. 배 한 척이 항구를 빠져나가는 그 앞에 멋진 구름과 크루즈 1척이 보입니다.
12세기에 라구사 사람들은 렉터(Rector)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을 채택하였습니다. 라구사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다가, 1205년 베니스가 라구사를 공격, 점령했습니다. 1358년 라구사 사람들은 베니스를 배격하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지배를 선택했습니다. 베니스와는 달리 새로운 지배자들은 內政엔 간섭하려 들지 않았으며 왕에 직속한 자유도시의 자격을 주었습니다.
달마티아 지방을 둘러싼 각축전으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종주권은 자주 바뀌다가 나중엔 오스만 터키에 넘어갔지만 터키도 자율권을 보장하였습니다. 물론 매년 라구사의 지도층들이 보물들을 싣고 이스탄불로 가서 오스만 터키에 朝貢(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이는 일종의 보험료였습니다. 라구사는 달마티아(지금의 크로아티아 동쪽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영향력이 큰 베니스, 헝가리, 오스만 터키 가운데 터키 제국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 보호를 받았지만 한 번도 독립성을 빼앗긴 적이 없었고 터키도 라구사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의 외교가에선 라구사를 ‘일곱 국기(國旗)를 가진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變化無常(변화무상)한 외교술을 펼쳤으며 무역을 통해 富를 쌓았습니다.
스르지山(해발412m) 아래 두브로브니크城 동편 레베린 요새(Fort Revelin)와 그 앞 항구의 모습입니다.
라구사(Lagusa)는 개방적 자주에 성공한 이들입니다. 라구사 사람들은 슬라브 족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선진(先進)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으며, 늘 베니스와 라이벌이었고 가끔 충돌도 있었지만 전쟁은 벌이지 않았습니다. 1699년 라구사는 주위에 있는 베니스 식민지와 離隔(이격)하기 위하여 주변 영토 일부를 오스만 터키에게 넘겨주는 편법까지 썼습니다. 이때 넘겨준 영토는 지금 보스니아의 유일한 항구 네움으로 변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에 단절되어 크로아티아와는 陸續(육속)되지 않습니다.
성외벽을 둘러보기 위해 두브로브니크城 옆 항구에서 유람선을 탔습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항구의 풍경입니다. 3개의 아치형 문이 있는 안쪽은 조선소였으나 생선시장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기념품 가게 등 여러 종류의 상점이 들어서 있고 그곳을 지나면 제법 큰 야외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항구 뒤로 스르지 산(Mount Srd)입니다. 정상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전망대가 확인됩니다. 우리를 태운 배는 뱃머리를 돌려 두브로브니크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향합니다. 바다에서 성벽을 살펴보는 것이지요.
성 이반 요새(Sv. Ivan Fort) 그야말로 철옹성입니다. 남동쪽 바다를 지키는 이 요새는 가장 먼저 세워진 요새입니다. 반원형 성벽 창 사이 감실에 두브로브니크 守護聖人 聖 블레이세 조각상이 보입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9세기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 16세기엔 180척의 배와 5,000명이 넘는 선원을 보유하였다고합니다. 인구 대비로는 세계 최강의 해양국이겠습니다. 최성기(最盛期)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시민 중 여덟 명에 한 명꼴로 해외무역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1670년대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고 있을 때 두브로브니크는 70만 금화(金貨)의 가치가 있는 3만6,000개의 마차 분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180척의 배를 움직이며 지중해, 영국, 아프리카, 인도까지 왕래하였습니다. 이 나라는 간단한 디자인의 튼튼한 배를 만드는 조선(造船) 기술이 뛰어나 여러 가지 배를 만들었습니다. 18세기 두브로브니크는 세계 80개 도시에 영사관을 두었습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에 적을 둔 선박은 어선을 포함, 650척, 그중 200척은 대양 항해용이었습니다. 당시 해양무역공화국 베니스에 버금가는 海洋商武國이었습니다.
이 철옹성으로 인하여 침략한 적으로부터 성내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지만 17세기(1667년 4월6일)때 대지진으로부터는 이 철옹성도 어쩌지 못하고 성내 건축물은 모두 무너지고 전체 국민의 절반이 넘는 5,000명의 국민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바르드 카페 (Cafe Bar Bard )》
성 이반 요새를 돌아서자 바로 성벽 밑 암벽 위에 '비르드 카페 (Cafe Bar Bard )'가 있습니다. 카페 앞 절벽에서 사람들이 다이빙을 즐기고 있습니다. 초가을에 접어들어 수온이 따뜻하진 않을 텐데..
《바르드 카페 바(Cafe Bar Bard )》
아드리아 해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정남쪽 방향의 성벽의 모습입니다. 암반위에 견고하고 장중하게 성을 쌓았습니다. 성벽 밑 바위지대에 있는 것은 성벽측면에 보이는 작은 暗門을 통해 드나들 수 있는 카페입니다.
《바르드 카페 바(Cafe Bar Bard )》성벽 밑 바위위에 자리한 이 음유시인 카페는 항구에서부터 성 이반 요새 옆 첫 번째 카페입니다. 카페 앞 바다에는 다이빙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안전 띠가 둘려져 있습니다.
《부자 카페 바(Cafe Bar Buža)》
남쪽 성벽 바깥 바위지대에 카페가 두 곳에 있습니다. 이 카페는 성 이반 요새에서부터 '바르드 카페 (Cafe Bar Bard )에 이어 두 번째 부자 카페(Cafe Bar Buža)입니다.
두브로브니크城 서쪽 끝과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로부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가 작게 보입니다.
이제 우리가 탄 배는 지중해 수평선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얼마쯤 나아가다가 뱃머리를 동쪽 스르지 산자락으로 돌립니다.
산에는 메아리가 있는데 수평선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이자 둘입니다.
스르지 산 전망대로 오르는 승합차 정류장이 있는 위치입니다. 스르지 정상에서 내려다 보던 크루즈가 자만치 보입니다.
스르지 산의 일부 모습입니다.
스르지산 남쪽 끝자락 근처 크루즈 앞에서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려 스르지 산을 끼고 산자락 해안을 따라 두브로브니크 성 항구로 귀항합니다.
크루즈를 이렇게 근접해 보기는 처음인데 엄청 크다는 생각이든다. 이런 배가 침몰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1500명의 귀중한 생명과 함께 침몰한 '타이타닉'호도 있지 않은가! 수영을 못하는 나는 바다를 물을 엄청 좋아하지만 고마운 물이 더없이 두렵고 무섭다.
스르지 산자락과 해변의 반예 비치(Banje Beach)풍경입니다.
다시 크루즈를 돌아본 풍경입니다.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반예 비치(Banje Beach)'입니다.
다시 두브로브니크성의 항구로 들어서는 중입니다. 파란하늘, 거무죽한 스르지 산자락, 고동색 지붕에 하얀집, 그리고 푸른 바다가 사중추를 울리는데 船艙에 해묵은 선착장이 고즈넉합니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배와 같은 배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지만, 라구사공화국시절 조선소가 있던 곳은 세 개의 아치문만 남아있습니다.
舊市街 동쪽의 이 항구는 라구사공화국시절에 각국의 상선들이 왕래하여 활기 넘치던 곳이었다고, 지금은 개인용 보트와 앞 로크룸 섬으로 가는 배나 두브로브니크 바깥성벽과 주변 해안을 한 바퀴 돌아보는 관광선의 선착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왠지, 내 모습을 보는듯한 뭉클함에 당신들을 담습니다. 나이 들면 조그만 일에도 서럽고 외로움을 타지요. 그래도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보이기에 보는 이의 마음도 편해집니다. 그마저 없다면 서글프겠지요. 부디 외롭지 마시고 건강하십시오.
배에서 내려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폰타문으로 가는 도중의 선착장의 풍경입니다. 양 옆에는 관광객이 유람선을 승선하고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성벽 길을 걷기 위해 라자 광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성벽 길로 올라가는 곳은 몇 군데 있지만 가장 바람직한 곳은 스트라둔(플라차(Placa)중심거리 끝머리 필레 문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플라차 거리를 거쳐 오노프리오 급수대(Large onofrio's Fountain)광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해묵은 기와들이 무늬처럼 아름다운 스폰자 궁전 상부 모습입니다. 문 위에는 두브로브니크 성을 왼손에 바쳐든 聖 블레이세 조각상이 보입니다.
주로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선 스트라둔(Stradun)또는 플라차(Placa)로 불리는 이 중심대로는 동쪽 성 이반 요새(Fort Sv.Ivan)와 레베린 요새(Fort Revelin)사이에 있는 항구에서 서쪽 '보카르 요새(탑Tower Bokar)와 로부리예나츠 要塞/Fort Lovrijenac)사이로 이어진 해협으로 바닷물이 흐르던 곳을 메꾸어 길을 낸 곳입니다.
플라차(Placa) 중심도로 우측(스르지산 방향)골목길의 정경입니다.
플라차(Placa) 중심도로 우측(스르지산 방향)골목길의 정경입니다.
플라차(Placa) 중심도로 좌측 구시가의 정경입니다.
《스트라둔(Stradun) 또는 플라차(Placa)》
플라차는 서쪽 필레 문과 동쪽 플로체 문을 잇는 길이 300m의 중앙대로 입니다. 13세기에 만들었고 1468년에 포장이 완공되었다고합니다, 1667년 대지진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리석으로 포장된 이 대로는 주변은 레스토랑, 카페, 상점들이 줄지어 있어 수많은 인파의 발길로 반질반질해져 윤기가 흐르고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스트라둔(Stradun)또는 플라차(Placa)로 불리는 대로 남쪽 구시가 골목길 정경입니다.
《성 사비오르 교회 (St Saviour's Church)》
1520년 5월17일 지진이 발생하여 약 20명의 사망자와 많은 건물이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에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을 통치하던 상원은 더 심한 파괴로부터 도시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새교회를 의뢰했고. 코르출라의 건축가 페타르 안드리치(Petar Andrijich)에 의해 설계되어 1528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1667년 대지진을 견뎌 낸 몇 안되는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세부적 조각상을 보면 아름답고 정교한 조각예술을 갖춘 건축입니다. 원형의 창은 달마티아 로제트 장식의 전통적인 창문이 이채롭고 매력적입니다. 그 창문 아래 직사각형 액자를 구성하고 마을 사람들의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라틴어 비문이 있고 그 아래 로마-네크 양식의 기둥을 갖춘 삼각형 지붕 가운데 작게 조각된 인물상이 있습니다.
《오노프리오 급수대(Large onofrio's Fountain)》
이 급수시설은 1438년 나폴리 건축가 오노프리오에 의해 12km 떨어진 샘에서 물을 끌어오는 급수 시스템(集水井)의 일부로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장식되어 만들어졌으나 1667년 대지진 때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16개의 조각상만 남았습니다. 조각상 가운데에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로 들어가는 문은 크게 나누어 두 개입니다. 동쪽의 플로체(Ploce Gate) 문과 서쪽의 필레 문(Pile Gate)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폰타문이 있습니다. 1537년에 건축되었다는 필레문은 跳開橋 건너 웅장한 성채에 붙어 있는 반원형의 성체에 르네상스 양식의 홍예문입니다.
성벽위에서 바라본 필레문 안쪽 오노프리오 급수대 광장 일부와 지붕의 모습입니다.
좌측 보카르 요새에서 바라본 필레 문밖 주택과 북적이는 관광인파와 로브리예나츠 요새가 보입니다.
필레문 바깥 스르지 산자락에 모여 있는 황톳빛의 지붕에 하얀 집들의 단조로운 풍경입니다.
성 프란체스코 會 수도원 겸 박물관입니다.
성벽 위 길(경계순찰로)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프란체스코會 수도원 첨탑에서 루사 광장(Trg Luža)의 시계탑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스프라둔(플라차Placa) 중심 大路에는 수많은 관광인파가 북적거립니다.
지붕들 위로 돌출된 탑과 건물은 좌측에서부터 시계탑(스폰자 궁전) → 성 블레이세 성당 →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돔 →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
직선으로 마주한 두 개의 탑, 프란체스코 수도원 첨탑과 스프라둔 거리와 루자 광장(Trg Luža)의 스폰자시계탑 그리고 대성당 돔과 성 이그나우스 성당 등이 구시가지의 지극히 연하고 부드로운 色感의 아름다운 지붕과 어우러져 봄볕 따사로운 고향의 둔덕처럼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성벽위에서 필레 게이트 바로 안에 있는 1438년에 건축된 '오노포리오 大 급수대(集水井)'를 내려다본 모습입니다.
"보카르 요새(Fort Bokar)"는 반원형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는 필레문(Pile Gate)을 적으로부터 보호 방어하는 요새입니다. 성밖의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와 마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보카르 요새(Fort Bokar) 성벽 안쪽 모습입니다.
보카르 탑 요새(Tower Fort Bokar)방향으로 성벽길을 가다가 뒤돌아본 정경입니다.
민체타 탑 요새(Tower Fort Minceta) 너머로 보이는 스르지(Srd)산 정상의 전망대가 보입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에는 필레문에서 시계침 방향으로 '보카르 탑 요새(Tower Fort Bokar)-성 이반 요새(Fort Sv.Ivan)-레베린 요새(Fort Revelin)-민체타 탑 요새(Tower Fort Minceta)' 2개의 탑과 2개의 요새가 있으며, 보카르 요새와 마주하고 있는 성 밖에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가 있습니다.
필레문((Pile Gate) 바깥 풍경입니다.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
본성 드브로브니크의 '보카르 요새'와 마주하고 있는 '로브리예나츠 요새'는 , 남한산성을 엄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쌓은 蜂巖城이나 甕城과 같은 성격을 가진 요새입니다. 두 요새 사이 낮은 지대는 매립지대인 스트라둔 중심도로를 거쳐 동쪽 항구로 이어져 바닷물이 흐르던 海峽이었습니다.
보카르 요새의 경계병 초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로부리예나츠 要塞/Fort Lovrijenac》
이 요새는 삼각형 모양으로 두브로브니크 성곽 서쪽에 있으며 '두브로브니크 지브롤터'라고 불리는데 바다와 육지로부터 두브로브니크로 접근하는 것을 감시하기 좋은 위치입니다. 요새의 바다쪽 성벽의 두께는 12m이지만 육지쪽 성벽의 두께는 약60cm에 불과한데 이는 적에게 요새가 점령되었을 때 역으로 적군의 용이한 진지(Ginji)가 될 것이므로 도시쪽 대포로 벽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로부리예나츠 要塞/Fort Lovrijenac》
이 요새에 전설이 있는데 10세기 베네치아사람들이 두브로브니크를 지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요새를 세우려고 했는데, 때를 같이하여 오래 전에 순교한 聖 불레이세(Sv. Blaise)가 두브로브니크 성당 신부 스토이코(Stojko)의 꿈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알려줘 베네치아에 앞서 석달만에 이 요새를 세웠습니다. 뒤늦게 배로 이곳에 온 베네치아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뱃머리를 되돌려 갔다고 합니다. 그 후 聖 불레이세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성 블레이세 성당(Church of Sv, Blaise)과 중요한 성문과 교회 등 문위에 두브로브니크城을 왼손에 받혀든 聖 불레이세(Sv. Blaise)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의 이 건물들은 1667년 4월7일 대지진으로 거의 모두 무너진 것을 대부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한 건물들입니다.
"보카르 요새(타워)〈Fort(Tower) Bokar〉"
보카르 요새(타워)〈Fort(Tower) Bokar〉에서 '성 이반 요새(Fort Sv. Ivan)' 방향으로 바라본 구시가지 풍경.
보카르 요새(타워)〈Fort(Tower) Bokar〉에서 필레문(Pile Gate)과 민체타 요새(타워)〈Fort(Tower) Minceta〉를 아우러 바라본 풍경입니다. 정면으로 스르지山(Srd 해발412m)이 우뚝 솟아 있고 성밖 산자락에 많다 할 수 없을 정도의 주택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성벽 중간에 전면에 跳開橋를 두고 있는 건물은 두브로브니크 성 서쪽 출입구가 있는 필레문입니다.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
이 요새는 구시가지 서쪽 성벽의 보카르 타워 바깥 옆에 위치한 외부에 자리한 요새로 서쪽 해상과 육지를 지키는 요새입니다.
밝은 햇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편린처럼 반짝이는 파란 바닷가 하얀 바위산봉우리 언덕에 빨간 지붕의 하얀집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정갈하고 아름다운 감동으로 波浪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13세기부터 약 600년 간 아드리아 海의 무역과 제해권을 누린 것에 베니스와 쌍벽을 이룬 상업에 밝고 해군력도 강한 商武국가로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바다로 돌출된 두브로브니크는 해안 절벽을 따라 성벽(길이 약2km, 너비 600m 정도)으로 둘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나라 라구사(두브로브니크의 옛 이름)가 16세기 말 경에는 보유 선박 규모가 유럽의 유수한 해양강국 베니스와 견줄만 했습니다. 라구사의 선원과 무역상 그리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명문대학에서 유학한 유능한 외교관들은 세계 도처를 商船을 몰고 다니며 돈을 벌고 국익을 도모하여 부강한 나라로 일궈냈습니다.
베니스처럼 관광객으로 밤낮 없이 붐비는 두브로브니크의 관광에서 성벽 위 산책은 단연코 으뜸이라 하겠습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 기분인데, 높은 데서 내려다 보는 빨간 지붕의 석조(石造) 건물과 짙푸른 바다는 그림 같습니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보면 이것을 가능하게 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尙武, 실용정신을 놓치게 됩니다. 반세기를 넘게 自主를 유지하였기에 자유를 누린 도시입니다.
1장의 사진에 다 들어오는 도시국가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공화국 라구사(두브로브니크)가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서 부를 이루고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운 공화정치를 펼쳤으며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도의 처세술을 펼쳤으며 건물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성벽길을 걸으며 좌우를 보고 뒤를 보니 바닷가 절벽위에 우뚝 솟아있는 요새는 보기에도 범접하기 어려운 철옹성의 면모입니다.
아름다운 건물과 무너져 내린 상처가 공존하며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적 興亡盛衰를 말해줍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흔적이 지금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이 도시가 겪었을 참상과 고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는 알프스-히말라야 지진대가 지나가는 곳으로 지진이 잦습니다. 그로인하여 지진 피해를 입은 기록이 숱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중 1667년 규모 10으로 추정되는 기록적인 대지진으로 도시가 심각하게 파괴 되었고 1979년 몬테네그로에서 발생한 진도7 지진으로 1,071곳의 건물이 손상되는 피해를 받았는데 대부분 문화재에 해당합니다. 1995과 1996년에도 지진이 발생했는데 1996년 지진 때는 도시 북서쪽 20km지점에서 규모 6의 지진이 발생하여 두브로브니크로 통하는 도로가 차단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두브로브니크 역사와 지리적으로 볼 때 동쪽의 성 이반 요새와 블레어 요새 사이의 항구에서 스트라둔 거리와 필레문을 거쳐 이곳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와 보카르 요새(Fort Bokar)사이의 이 항구까지 해협이었을 것입니다. 두브로브니크 성내의 해협을 매립하여 스트라둔 대로를 내고 섬이었던 라구사(로마제국 난민)와 내륙인 스르지산자락에 모여 살던 두브로브니크와 하나로 합쳐 지금의 두브로브니크가 되었던 것이겠습니다.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蒼茫大海는 언제 어디에서 봐도 희망이 솟아나는 기쁨이자 두려움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로 유명한 두브로브니크城壁을 순찰중인 경계병인양 주변을 살펴보며 걷고 있습니다.
창가에 줄을 매고 널어 놓은 빨래에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정감을 느낍니다.
문설주 위 하얀 석판에 'ANNO λ 834.' 刻字가 있습니다. 이는 anno(年), λ(30), 834. 연대표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AD/ANNO DOMINI). 람다는 그리스 문자에서 11번째 모음이므로, 여기서 11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겠습니다. (서기 834년 11월)
두브로브니크공화국은 같은 형태의 공화국 베니스처럼 해외에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고 자신들의 영토와 국력에 맞추어 분수를 지키면서 확장을 꺼렸습니다. 두브로브니크를 둘러싼 성벽 위를 걸어보면, 외부 세계와 자유롭게 통상하지만, 우리 것은 단단히 지키겠다는 의지(意志)를 느끼게 합니다. 아름답지만 육중하기도 한 도시를 갖춘 두브로브니크는 문화와 군사가 공존하며 번영과 규율이 균형을 이룬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600년에 걸친 평화와 자유와 번영을 보장해준 것은 善意가 아니라 화합의 공화정책과 성벽과 군함들이였습니다.
《부자 카페 바(Cafe Bar Buza)》
성벽위에 있는 부자 카페입니다. 바깥 바위절벽위로 내려 갈 수 있는 암문이 있고 절벽위에는 다이빙을 할 수 있고 탈의소와 간이 카페도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성을 마주보고 있는 '로크룸 섬'.은 정원이 잘 꾸며져 있고 오랜지나무 숲이 아름다운 섬이라고 합니다.
성벽 아래 바위지대에 '간이 부자 카페 바(Cafe Bar Buza)' 가 있고 사람들이 다이빙을 즐기기도 하는 곳입니다.
성벽 안쪽 모습입니다. 빨랫줄을 끼운 도르래를 성벽 축대에 고정시켜 놓고 세탁된 젖은 옷가지를 줄에 널어 집게로 고정하고 줄을 당겨 늘어지지 않게 창 옆에 고정되어 있는 쇠막대에 줄을 묶어 매는 방식의 빨랫줄입니다. 지붕 밑 추녀를 보니 우리나라 한옥의 지붕을 받치는 서까래를 연상시키는 돌로 된 구조물이 보입니다.
약 2km의 성벽 둘레 길은 푸른 바다와 하나같이 짙은 고동색 지붕에 돌로 건축한 하얀 건물들의 풍경이 마치 서양동화책속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부자 카페가 있는 절벽으로 나가는 암문이 있는 곳입니다.
성벽(Gradske Zidne)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서양화입니다.
《부자 카페 바(Cafe Bar Buza)》
성벽에서 정면 바로 아래 쪽을 내려다 본 정경입니다. 간이 탈의실과 카페가 있는 성벽 바깥 바위위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물에서 바위로 오르는 계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성벽에서 아래 바위절벽위에서 다이빙과 수영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부자 카페 바 (Cafe Bar Buza)》
부자 카페 바를 동쪽편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절벽 앞 바닷물이 포말이 하얗게 솟고 있는 것은 방금 한사람이 바다로 뛰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쪽 항구 앞 바다의 모습입니다.
《바르드 카페 바 (Cafe Bar Bard)》
城壁길 서편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정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을 즐기고 있습니다. 성밖 암벽으로 통하는 작은 암문이 보입니다.
앞서 본 크루즈가 아닌 보다 좀 작은 다른 크루즈입니다.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Crkva Sv. Ignacija)입니다.
스르지산의 요새와 전망대 십자가 송신탑 등이 보입니다.
《로크룸 섬》 두브로브니크성 앞에 위치해 있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오랜지 나무가 자생한다는 "로크룸" 섬입니다.
성벽에는 이렇게 넓은 공간도 있습니다.
성 이반 요새로 가는 성벽길 풍경입니다.
지나온 넓은 공간의 외벽이 궁금해서 돌아보니 남한산성이나 아차산성에서 보던 치(雉)처럼 성벽을 내어쌓아 돌출시켜 좌우 성벽을 살펴 보기 용이하고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쉽게 치(雉)의 역할을 준 곳이었다. 원기둥 모양을 한 초소도 보입니다.
다시 돌아서보니 성 이반 요새와 그 아래 항구의 빨간 등대가 보입니다. 성벽길의 절반을 걸었습니다,
"성 이반 요새(Fort Sv.Ivan)"로 들어서기 전입니다.
성벽 안쪽을 통해 항구와 조선소자리 그리고 플로체 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앞에는고풍스런 지붕과 투과형의 특이한 종탑에 3개의 종이 모습을 보입니다.
오랜 풍상으로 벋어지고 빛바랜 기와를 통해 느낄 수 있을 세월을 헤아리고 있는데 눈에 들어오는 녀석이 있습니다. 장지뱀인지 도마뱀인지 어려서 왕십리의 나무 한그루 없는 돌산이었던 무학봉이나 응봉산에서 자주 보던 모습에 무척 반갑네요. 지금 자세히 보니 장지뱀은 아니고 도마뱀 종류 같습니다.
스폰자궁전시계종탑 너머 저만치 민체타 탑요새(Tower Fort Minceta)가 보입니다.
"성 이반 요새(Fort Sv.Ivan)"의 대포가 항구 앞바다를 겨누고 있습니다.
화보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는데, 아름답습니다. 특히 편린처럼 반짝이는 해수면이 환상적입니다.
성 이반 요새 지붕광장입니다.
높은 요새 지붕에서 특이한 종탑을 가까이서 보면서 낮은 성벽으로 내려가며 바라본 풍경입니다.
성벽위로 걸어가는 길이 골목길만큼이나 아늑합니다. 좌우로 보이는 흔치않은 아름다움은 덤으로 돌리기에는 억지겠지요.
항구는 언제나 마음 설렙니다. 이 배를 탈까 저 배를 탈까 어디로 갈까..
"레베린 요새(Fort Revelin)" 로 가는 성벽길입니다.
견고한 두브로브니크성벽은, 스스로 자립하고 스스로 지킨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스르지 산자락에 옹기종기 붉은 지붕에 하얀 집들 예쁜 모습을 보는데 옛 서울 산자락에 닥지닥지 붙은 판자집들 왜 눈에 밟히지..
포구(砲口)가 포구(浦口)를 향해 겨누고 있습니다. ^^
성벽길에서 바라본 스르지山(해발412m)정상에 위치한 전망대가 보입니다.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좁고 긴 해안선에 위치합니다. 육지 쪽으로는 해발 412m의 스르지(Srd) 산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앞바다에는 로크룸 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쪽에서 바라본 시계탑은 종과 인물상만 보입니다.
루자 광장에서 시계탑을 보았을 때 시계만 보였지 시계 위에 이렇게 큰 종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성벽 길에서 시계탑 뒤 탑 창을 보니 큰 종이 걸렸고 그 양옆에 두 인물상이 종을 치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초행이고 처음에는 그저 다른 종탑인가 보다 여겼는데 이 종탑건물은 뭐지? 싶어 위치를 가늠해 보니 바로 스폰자 궁전에 딸린 시계탑입니다. 그래서 물건을 요리조리 돌려봐야 하고 풍경은 계절마다 다 봐야 진면목을 논할 수 있다지 아마..
휘돌아가는 성벽 안의 저 종탑은 도미니크 수도원 종탑입니다.
뒤돌아보니 성 이반 요새와 舊항구에 내가 탔던 Glass Boat(유람선)도 보입니다.
항구와 스르지산 그리고 좌측에 레베린 요새(Fort Revelin).
라구사(지금의 두브로브니크) 상인들은 발칸 반도를 휩쓸었습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다뉴브 유역,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거점을 만든 데 이어 영국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자유를 누렸습니다. 1347년에는 양로원을 세웠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여 가톨릭, 그리스 정교, 신교도, 유태교의 예배당까지 있었고 지금도 存續하고 있습니다.
"레베린 요새(Fort Revelin)" 북동쪽 해상과 육지와 플로체 문을 지키는 요새입니다.
"레베린 요새(Fort Revelin)" 아래에 플로체 문으로 가기 전에 거치는 아치문과 밖으로 통하는 길이 보입니다.
도미니크 수도원 종탑
도미니크 수도원
민체타 탑요새(Tower Fort Minceta)로 이어지는 성벽길의 견고한 모습.
크로아티아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자유의 상징 민체타 탑요새(Tower Fort Minceta)는 유명한 건축가들의 합작품이라고 합니다.
도미니크 수도원 종탑.
성벽 바깥쪽의 지붕 밑 처마처럼 생긴 이채로운 모습,
"민체타 탑요새(Tower Fort Minceta)"는 북서쪽 스르지산 방향을 지키는 요새로 5개의 요새 중 가장 아름답고 구시가지는 물론 남쪽 해상과 스르지산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요새입니다.
인구 1만에 상선 180척으로 구라파 일대를 누비고 다니며 부를 일궈낸 작은 공화국 라구사의 도시건물들이 아름답고 기묘하고 하나같이 예술입니다. 지붕의 빛깔까지도 천박스럽거나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하고 검소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이 감싸옵니다.
붉은 색깔이지만 정열적이라기보다는 소박함을 느끼는데 지붕 너머 저 바다는 어찌 저리 푸른가.
앞뒤를 살펴봐도 찾을 수 없는 짝지.. 휴우, 그런데 앗! 저기 보인다.
,"민체타 요새(Fort Minceta)", 민체타 탑(Tower Minceta)으로도 불리는 이 요새는 북서쪽 스르지산 방향을 지키는 요새로 5개의 요새 중 가장 아름답고 구시가지는 물론 남쪽 해상과 스르지산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요새입니다.
북서쪽 민체타 요새에서 남서쪽을 바라본 풍경, 처음 성벽 길에 올라섰을 때 보았던 '로브레나츠 요새(Fort Lovrijenac)'가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성벽아래 넝쿨에 덮인 집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습니다. 아마도 카페인 듯..
남쪽 아드리아海를 바라본 풍경, 붉은 지붕에 하나같이 굴뚝이 있건만 대기가 이리 좋을 수가 없다.
《민체타 탑(Tower Minceta)》
1319년 니치포르 라니나'에 의해 건축된 후 여러 번에 걸쳐 이름 있는 건축가들의 작품이 덧붙여 졌으며 미켈 로조 미켈 로지 형제 건축가에 의해 마무리 된 르네상스 양식의 걸작품으로 유명한 요새입니다.
민체타 요새(Fort Minceta)에서 동남쪽을 바라본 풍경, 구시가지와 聖 이그나티우스 성당과 '섬 로크룸(Island Lokrum)'
민체타 탑 위에서 값진 인증 샷
민체타 탑(Tower Minceta)에서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 Lovrijenac)가 보이는 위치.
민체타 탑(Tower Minceta)에서 도미니크 수도원 종탑과 항구가 목격되는 위치.
성벽과 물증이라도 하듯 지진이 남기고 간 무너진 건물터와 빨래 걸어 논 두브로브니크아파트먼트 그리고 지중해 먼 바다 수평선.
건물옥상에 농구장. 이제 성벽으로 올라왔던 그 자리에 다시 섰습니다. 성벽을 내려가기 전에 담은 사진 몇 장.
성 프란체스코會 수도원 종탑과 로크룸 섬.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에서 유일하게 붉은 지붕 대신 슬래브 지붕에 차양을 한 카페건물과 스르지산(Srd)과 바다 그리고 '섬 로크룸(Island Lokrum) .
성벽 길로 오르던 계단을 다시 이용해 오노프리오 급수대(Large onofrio's Fountain)광장으로 내려갑니다.
스트라둔 중심거리 뒷골목의 풍정입니다. 상점 앞에는 등이 있는데 그 등이 바로 상점의 이름이고 무엇을 취급하는지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름다운 세계유산도시에 걸맞는 아이디어입니다.
RUBIN(루빈), 금은 보석류, 악세사리점인 것 같습니다.
이 상점에 전시된 어린아이들 옷이며 인형이 아주 귀엽고 예쁩니다.
점포마다 등간판 예쁘고 인상적입니다.
"LA CAPELLA" 골목 위 건물과 건물을 잇은 테라스, 그 정면에 붙여 놓은 레스토랑 간판이 보인다. 테라스 입구는 우측으로 →
군둘리체바 폴야나 광장(Gunduliceva Poljanna)
자유의 표상 '올란도' 600년 기념 'ORLANDO' 600, Simbol Slobode(Symbol of Preebom)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은 세 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잘 공존하였으며 세습 귀족들에 의하여 통치되었습니다.
18세가 된 지도층에 속하는 남자들은 공화국 총회 회원이 되고 이 회의에서 의회, 소위원회 그리고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선출된 지도자들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는 이 렉터궁전에서 달마다 번갈아 위임되는 통치자(렉터/Rector)의 직책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라구사 사람들은 해외 유학을 많이 했는데, 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 출신들이 출세의 雙璧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학문과 교양을 갖춘 좋은 인재들이 지배층을 이루어 노예무역이나 拷問을 철패시켰으며 좋은 제도를 세워 법치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을 이끌어 경제가 발전했습니다 인재라면 외국인이라 해도 관료로 채용하였을 정도로 인재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많은 영웅이 아니라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였고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는 영웅적 지도자가 없어도 법치(法治)에 의한 통치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합니다. 베니스도 그런 경우였으며 라구사는 베니스를 모토로 삼았던 것입니다.
《'미호 프라차트(Miho Pracat)' 청동 흉상》
전면에는 화려한 조각이 장식된 7개의 기둥을 세워 6개의 아치형의 문설주를 두어 회랑식으로 건축한 안뜰에는 평민의 신분으로 엄청난 부를 이룬 선장이자 자선사업가 '미호 프라차트'의 청동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全재산을 국가에 기증하였으며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28년 P.Giacometti)이 제작한 동상을 세웠습니다.
《렉터 궁전(Rector's Palace)/크네베브 궁전(Knežev dvor)》
1272년 처음으로 건축되었으나 1435년 화재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 되었으나 1667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다시 바로크 양식이 재추가되어 다양한 건축 양식을 지닌 건물이 되었습니다. 렉터는 최고 통치자라는 뜻이 있으며 라구사공화국의 렉터의 집무실과 평의회와 재판소 등 중추적인 행정기관이있던 궁전입니다. 현재는 라구사 공화국의 문화와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합니다.
스르지 산 아래 스폰자궁전이 있고 우측은 렉타 궁전입니다.
남쪽 성벽으로 이어진 계단입니다.
도미노 스테이크 하우스 골목길.
골목 자체가 레스토랑입니다. 건물외벽에 그림액자들이 걸려있고 메뉴판을 넣어 놓는 함도 걸려있습니다.
골목마다 레스토랑이나 카페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참 이쁜 골목에 사람사는 향기가 납니다. 시골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6~70년대 아파트가 없던 서울에서도 동네마당 가운데 빨랫줄에 빨래가 바람에 나풀나풀 춤을 추었고 지금도 가끔 아파트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를 볼 수 있지만, 이렇게 웅장한 석조 건물사이 좁은 골목에서 보는 빨래가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이 골목 건물들은 Apartment 같습니다.
맞은 편 정면에 스르지산 전망대와 루자 광장(Trg Luža)의 스폰자 궁전(Sponza Palače)과 시계탑이보입니다 시계탑 상층 창안에 무언가 보이는데 바로 큰 종과 종을 중심으로 양편에 종치기의 모습을 한 靑銅像이 망치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줌으로 당겨보니 스폰자궁전종탑 안에 커다란 종과 양 옆에 두 인물상이 각각 망치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종탑 앞 루자광장에서는 보이지 않더니..
어물쩍 두브로브니크를 둘러보고 '자다르'로 가기 위해 플로체 문으로 향합니다.
두브로브니크 城에서 자다르 까지 약 4시간에 걸쳐 버스로 이동 중 담은 풍경들입니다.
드브로브니크城-자다르(Zadar) 버스로 약4시간 이동. 크로아티아 서쪽 달마티아 자다르 브드바에 위치한 호텔 아드리아 (Hotel Adria) 도착. 부드바(Budva)는 2,5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써 아드리아 海 연안에 위치한 몬테네그로(Montenegro)의 도시입니다.
2019년 9월21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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