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제10코스 (고랑포길)」
오늘도 9월22일처럼 자전거를 가지고 10코스 고랑포길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산역에서부터 다시 평화누리길 제7.8.9코스를 거쳐야 했는데 가면서 9월22일 탐방 때 미처 챙기지 못한 자유의 다리와 망향탑을 탐방하고 10코스 들머리 장소인 연천군 장남교 앞까지 국도를 타고 10코스(고랑포길)를 탐방하고 11코스(임진적벽길)를 탐방하다 날이 저물 무렵 코스를 벗어나 전곡을 거쳐 1호선 소요산역으로 향해 귀갓길로 들어섰다.
(문산역에서 출발한 시각은 오전 8시15분이다.)
문산역을 출발하여 45분만에 도착한 망향의 동산 시각은 09시05분이다.
'자유의 다리' 옆 단절된 철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북으로 달리고 싶었던 용맹스러웠던 증기기관차가 총탄에 입은 상처 아물리지도 못하고 온 몸은 피부병(녹)으로 헐은 채 우리는 용감했고 그대들을 위해 온 몸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민족을 위해 초개가 되어 적 공산집단이 빗발치듯 쏘아대는 총탄 속으로 뛰어들었노라고.. 묻노니 지금의 너희는 잘 하고 있는지?
자유의 다리 중간에서 내려다본 평화로운 풍경
북적거리고 오가는 이들 모두 중국 관광객이다 저들은 북한세력을 도아 남침한 중공군들의 후손들이다 저들은 우리의 사무친 이 아픔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그 때 중국만 개입 안 했어도 남북으로 분단되는 일 없이 온전히 하나의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었을 것이다.
《자유의 다리》
임진각 광장 앞 望拜壇 뒷편에 놓인 이 다리는 1953년 6.25동란 때 포로 1만2,773명이 이 다리를건너 귀환하였기에 때문에 '자유의 다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원래 京義線 철교는 상-하행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다리의 기둥만 남아 있었는데 전쟁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이 임시 다리를 설치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는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이 다리는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특히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철재를 혼합하여 만들었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이므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6.25전란의 대표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 다리의 규모는 길이83m, 폭 4.5m, 높이8m, 내외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62호)
《잃어 버린 삼십년》
박건호 작사, 남국인 작곡, 설운도의 노래 "잃어버린 30년"은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KBS에서 방영 되었던 "이산가족찾기"의 배경음악이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기네스에 등재되기도 했던 음악이다. 당시 온 국민을 눈물바다에 빠트렸던 "이산가족찾기"는 무려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특별 생방송 되면서 10,189명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했다. 음악 '잃어버린 30년'은 이때마다 방송 전파를 타면서 대 히트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북한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안내문에서 발췌)
갈길은 멀고 가깝게 다가가서 볼 수 없어 사진만 담았다 '자유의 종'인가?
《 망배단/望拜壇》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평화누리길를 피해서 바로 10코스 들머리로 가기 위해 국도로 갈 생각인데 '자유로'나 통일로 같은 고속도로나 진배없는 자동차전용도로를 자전거로 이용할 수 없어 한 시간을 길 찾아 헤매었다.
겨우 국도를 찾아 이제 장파리로 들어선다. 남북이 대치한 최접경지역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마을은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으로 형성된 1950-60년대 모습이 담긴 마을이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1959년도에 상영된 "장마루村의 이발사"(최무룡,조미령,김지미,추석양)다 중학교 1학년 때 왕십리 광무극장정면에 손으로 그린 간판을 본 생각이 있고, 그 후 1969년에도 신성일,김지미,남정임,이대엽이 출연한 "장마루村의 이발사"가 상영된 것으로 안다. 이때는 육군 병장으로 갈매기 하나 달고 군복무로 한창 혈기왕성하던 시절이었다.
지형이 산마루처럼 긴 모양이라 해서 '장마루'라고도 부르는 장파리 마을은 6.25사변 전에는 임진강변 긴 언덕이 칡넝쿨이 뒤덮일 정도로 많아 칡마을로 잘 알려진 마을이었다고. 당시 여느 마을이나 다름없이 가난하던 시절, 이 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언덕의 칡뿌리를 갈아서 주식 대용으로 먹었다고 한다.
리비사거리에서 우측 전곡방향으로 들어섰다.
리비사거리 근처 길가 나무그늘 옆에 핀 꽃이여, 네가 있어 나 같은 나그네 텅 빈 가슴에도 기쁨의 꽃이 핀다.
요즘 국도는 고속도로나 다름없다 자동차 타이어 마찰음이 굉음을 쏟아내며 질주하는 37번국도邊 좁은 가변으로 겨우 도착한 두지삼거리에서 만난 舊 국도에서 좌측으로 들어서 1백여m 거리에 좌측 지하도를 지나면 바로 연천으로 이어진 장남교다.
장남교 - 임진강을 가로 질러 파주와 연천을 잇는 큰 다리이다.
장남대교 중간에서 바라본 황포돛배 뜨는 두지나루 방향의 풍경이다.
장남교를 건너 좌측 100m 앞에 제10코스(고랑포길) 시발점인 아취문이 있다.
장남교 靑銅版 名
평화누리길 제 10코스 시발점 아취문이다. 이 문을 1코스에서 처음 봤을 때 왠지 낯설지 않아 한 참 생각을 한 후에야 지리산 통천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10코스(임진적벽길)로 들어서기 전에 건너온 장남교 방향을 바라본 전경이다. 흰구름은 나그네 오갈 수 없는 남북을 가림(區分)없이 바람의 뜻대로 넘나들고 있구나!
잠시 벤치에 앉아 가져온 빵과 두유로 요기를 하고 길 나선다.
출발점에서 2백여m 지나가니 리본은 운치 좋은 마을길로 이끈다.
조만치 앞에 나처럼 자연과 사색과 풍경을 벗 삼아 평화누리길을 묵묵히 음미하는 이도 있음에 동질감에 정이 돋는다.
마을 건너편 고추밭에서 풋풋한 풋고추 향이 미각을 자극하니 고추장에 썩썩 비벼 먹던 옛 구수한 보리밥이 그립다.
평화누리길 12코스 중 10개 코스를 탐방하면서 동판으로 평화누리길 상징표식 한 것을 길 복판에 새겨 넣은 것은 여기서 처음 본다. 연천지역 군민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염원이 이처럼 깊은가 보다.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마을 완만한 비탈길에 평화누리길 상징적 문양인 비둘기와 월계수 잎을 새긴 동판이 상큼하다.
제1코스에서부터 10코스의 이 마을에 이르기 전 까지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시골마을길을 들어서 걸어가다 보면 개들이 어슬렁거려 맞닥뜨리기 일 수다. 이번에는 한 마리가 짖어대자 곧이어 여러 마리가 몰려들어 위협을 한다. 반드시 스틱을 지니고 다녀야할 까닭이 되겠다.
리본만 볼 수 있던 다른 구간과 달리 '연천누리길'이란 부착 표시물도 보인다.
최전방이건만 넓은 터에 꽃도 예쁘게 가꾼 그림 같은 집들이 많다. 앞날을 바라보고 일찌감치 큰 돈 안 들이고 투자한 것은 아닐까?
산허리를 돌아가다 옆이 트여 바라본 풍경이다.
예전에는 산허리를 돌아가는 이런 길은 대체로 본연의 흙길이어서 운치가 있었다. 지금은 그냥 운치고 풍경이고 따질 일 없는 편리함 콘크리트가 제일이겠다.
길은 길인데 개흙이다 그런데 누군가 트랙터로 갈아 놓았다 왜 그랬을까?
이 개흙 길을 내려가는데 자전거도 나도 개흙이 되었다 그래도 기분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지진 않았다. 이 개흙 길은 바로 위에 있는 호젓한 개인 주택과 농가 주택마당 사이를 관통하는데 낚시나 川獵하려는 사람들이 주말과 상관없이 차를 몰고 하천을 드나들고 야영을 하며 하천과 주변에 온갖 쓰레기를 버리고 오염시켜 생각다 못해 개흙 길을 트랙터로 갈아엎어 놓았으리라 내가 거쳐 갈 때도 하천 모래 자갈밭에 텐트를 치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 맑은 물에 세차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풀숲 개흙 길도 물기가 말라 갈라져 있다.
아, 가을인가 봐! 그러기에 억새꽃 피고 뭉게구름 저리 떠돌겠지..
아래를 보니 개울바닥엔 있어야할 물 없고 그 위 창공엔 파란 물에 멋진 구름이 두둥실 아름답건만, 물 없이 메마른 개울은 그 아름다움을 품지 못하네.
지나온 곳을 바라보니 갈아 놓은 개흙 길만 보이네.
앞을 보니 둑과 그 아래 건너가야할 사미천 징검다리 보인다.
트랙터로 갈아엎은 개흙 길에서 엉망이 된 자전거와 신발을 대충 씻은 사미천 징검다리..
사미천과 제방이 어우러져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제방 위는 길인가 보다.
내 살아온 날에 저리 탐스럽고 큰 솜사탕은 처음이지
수평을 유지하고 찍었는데 풍경이 기운 느낌이다. 개울 바닥의 높낮이 때문이겠다. 하류 쪽은 물살이 거칠게 흐른다.
상류쪽은 물결이 잔잔하다.
이 징검다리가 상 . 하류의 물살에 변화를 주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둑 밑 하천다닥 옆으로 낸 길은 사륜구동이나 가야 할 길인데 이륜구동이(날카로운 잔돌이 깔려 있어 펑크 날까 봐 자전거를 끌고 두 발로) 가자니 발바닥이 버겁다.
터널 같은 숲속을 빠져 나오니 들판처럼 넓은 하천 바닥에 갈대와 잡초들의 천국이다.
이 길을 얼마 쯤 걸어가니 저만치 둑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곳은 두 개의 하천이 합치는 곳이다. 이곳 토질이 진흙이어서 물기만 빠지면 응결되고 갈라진다. 인류가 발자국이나 凹한 곳에 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깨달아 진흙의 특성과 성질을 알게되어 그릇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넓은 하천바닥에 둑 가까이 물이 흐르고 짧은 징검다리와 바로 둑(堤)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주인님 저는 어쩌죠?' 옆에서 자전거가 울상이 되서 걱정을 한다. 허참, 녀석두! 걱정마라 널 버리고 가지는 않을 테니, 내가 둘쳐 메고 오르면 되지 않겠니? 그제서야 생글거린다.
구태여 길 좋은 자전거코스를 외면하고 트레킹 코스를 고집스럽게 때로는 끌고 때로는 들쳐 메고 가느냐고 물으신다면, 길 떠남은 이미 고생길인데 고생 좀 제대로 누려 보자는 생각과 태생이 고생하며 자란 몸이라 고생은 고생에서 고통은 고통에서 기쁨다운 기쁨을 누려보고자 함이다. 그대도 어려움을 이겨냄으로써 느끼는 희열을 아시겠지요. 또한 버스를 몇 번씩 환승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자전거 여행으로 누릴 수 있는 이점(利點)도 즐기자는 의미도 있다.
우뚝 솟아 우측(숭의전)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
숭의전(崇義殿)은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한 4왕과 16공신을 모시고 있는祀堂이다.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 태조는 前朝에 대한 예우와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이곳에 태조 왕건을 모시는 사당을 세운 이래 문종 때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공신 16명을 함께 모시도록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태조를 비롯한 4왕과 16 공신들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고려가 멸망한 후 태조는 전조(前朝)에 대한 예우와 민심을 고려하여 이 곳에 고려 태조 왕건을 모시는 사당(廟殿)을 세운 이래 문종대에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공신 16명을 함께 모시도록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은 방죽에 서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니 때로는 다리 아프고 힘도 들었지만,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길이 고맙고 풀과 나무들이 고맙고 하늘의 구름이 고맙고 이 강산, 온 우주가 고맙고 내 어버이가 고맙다.
푯말이 '비가 올 때는 우회하라'기에 그 길을 바라보니 곧게 뻗은 제방길 너머 어디 쯤 건너가는 다리가 있다.
이런 길은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둑 위에서 가야할 길을 바라보고 길 떠난다.
길을 가다 멈춰서 다시 옆 풍경을 보며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얼굴에 감동을 담는다.
내가 살고 싶은 까닭이 저렇게 온 천지에 열려 있네.
저만치 제방 위에 원두막처럼 생긴 정자 하나 보이네.
좌측 귀가 간지러워 고개를 돌리니 황금빛 물든 이삭이 활짝 웃고 그 앞에 자전거 평화누리길이 파란 줄 치고 비둘기 배지를 보이며 이리오라고 희고 긴 너스레와 웃음을 보낸다.
인위적인 두 평행선이 아름다운 산하에 조화를 이루네. (둑 아래는 자전거 평화누리길, 둑길은 보행자 평화누리길.)
제방 위에 통나무를 사용해 만든 쉼터 창을 틀 삼아 앞에 펼쳐진 사미천과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구름들도 가을엔 세상구경이 즐거운가보다 무리지어 떠돈다.
정든 둑길은 물길 따라 가고 나는 아쉬운 마음 안고 평화누리길 따라 마을로 들어선다.
훈훈한 온기 뿜어내던 초가집이 없는 시골마을은 이제는 더 이상 내 어린 시절의 아늑한 온기도 젖어들 추억도 그리움도 찾아볼 수 없다.
옛 신당동 신작로처럼 큰 길로 나왔다 잠시 리본을 찾다가 파란 안내판에서 방향을 확인했다.
큰 길 따라 200m정도 왔을까 큰 길은 그대로 보내고 다시 제방으로 오르는 길이다.
길모퉁이에서 이정표가 알려준다. 종착점 숭의전까지는 7.9km 거리라고 시발점 장평교에서 이 지점까지는 8.1km이다. 고로 이 지점이 평화누리길 제10코스 고랑포길(16km)의 절반이겠다.
둑에 올라서니 아, 불쑥 적벽이 나타난다. 너무 멀어 자세히 볼 수가 없어 강가로 내려갔다.
줌으로 당겨본다. 그래도 주상절리의 표면은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적벽의 주상절리와 임진강 푸른 물과 파란 하늘의 흰 구름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풍경을 눈에 담고 돌아서기 아쉬운 마음으로 자전거와 보행자 겸용 평화누리길로 들어섰다.
서로 상이하게 다른 하얀 모래사장과 거무죽죽한 절벽주상절리가 마주 평행을 이루며 임진강 푸른 물을 보듬고 있다.
하늘은 한없이 파랗고 구름은 더없이 희고 감미로운데 거무죽죽한 주상절리를 밝게 하여 그 진면목을 보고자 조리개를 활짝 열었더니 구름 뒤에 숨었던 해가 쏘옥 고개를 들어내고 마주보고 생긋 웃네. 주상절리는 도로 검고 하늘은 푸름을 잃었네.
주상절리에 내준 마음을 걷어 담고 이제는 길이나 가자
몇 백m 쯤 인위적 길다운 길을 가는데 노곡리 푯말이 강둑 아래 길을 가리킨다. 마침 모래밭을 걷고 싶었는데 이참에 아예 한탄강 강물에 손도 담가보자 싶어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물가로 갔다.
혹시나 적벽의 주상절리의 표면을 자세히 볼 수 있을까 싶어 바라보니 해를 등진 절벽은 칠흑같이 검다. 본래 현무암玄武巖은 검은 것이 아니더냐만 바위절벽 면면의 입자를 보고자 한 것이다.
시원스런 파란하늘이야 하얗게 질리거나 말거나 조리게를 활짝열고 줌으로 당겼으나 거리와 잡초에 덮여 답이 없다.
그런데다 풀이 덮고 있어 절벽 얼굴보기는 틀렸다.
주변 풍경이나 담자고 사진기를 들이 대니 서로 찍어 달라고 구름이 하우성이다.
다시 리본 따라가는데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이정표가 이번에도 강가를 가리킨다. 연천학곡리적석총이 100m거리에 있다며 그냥 가면 후회할 거란다. 積石塚! 돌무지 무덤이 있는 곳일세 그럼 안 가볼 수 없지..
《연천 학곡리 적석총(涎川郡 鶴谷里 積石塚)》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 20-1번지.
임진강변의 자연제방 위에 위치한 돌무지무덤으로 매장시설인 묘곽은 모두 4기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강쪽의 구릉 말단부에 일정한 크기의 강돌을 보강하여 적석부의 붕괴와 流水로 인한 침식을 막고 자연구릉에 기대어 돌을 쌓은 후 구릉 정상부를 삭토하여 무덤방을 위치시키고 다시 강돌을 쌓아 마무리하였다.
무덤의 원래 크기는 25x10m 정도로 추정되나 잦은 강물의 침범과 주변 개발로 파괴되면서 무덤의 상당부분이 유실되었다.
2003년 발굴 당시 硬質無紋土器를 비롯해 낙랑계 토기와 다수의 유리제 구슬들이 발견되었다. 이 적석총은 고구려계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곡리적석총이 위치한 돌마돌 마을에는 마귀할멈이 치마폭에 돌을 날라 와 이 적석총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주민들은 이 적석총을 '활짝각담'으로 부르며 신성 시 해왔다.
길은 넷, 하늘 길은 구름이 다니고 물길은 강물이 흘러가네. 행길엔 자동차가 달리고 내 앞 길은 내가간다 모두 앞으로 만 내달린다.
학곡다리 끝머리에서 리본이 산으로 가자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에 몇 번을 속아 넘어갔는지 모른다. 이제 안속아 이대로 넘어갈 거야!
산을 외면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주상절리가 또 나타나 나를 유혹한다. ' 그래서 못마땅한 투로 '이번에도 검은 가면으로 얼굴 가릴 거면서..' 아니야! 믿어 봐!' 그래?
오호! 여기는 줌으로 당겨보니 주상절리가 자줏빛 얼굴로 내밀어 보여준다.
임진강적벽은 화산활동이 이루어낸 내륙 유일의 주상절리로 옛 사람들이 임진강에 형성된 주상절리가 붉은 빛으로 보이므로 赤壁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임진강 적벽 주상절리/臨津江 赤壁 柱狀節理 細部》
다시 목적지 숭의전을 향해 차도를 끼고 좁은 데크로 설치한 평화누리길로 들어섰다.
잡초가 무성해서 걸어가기도 어려운 테크로 설치된 좁은 길과 긴 고개를 넘어 도착한 숭의전, 시각은 오후 3시30분이다. 문산역(08시15분)을 출발하여 7시간15분만에 숭의전 입구에 도착하였다.
《어수정/御水井》
왕건(王健 877-943/재위918-943)이 아직 궁예의 신하로 있을 당시 송악(개성)과 태봉(철원)을 오갈 때 중간지점이었던 이곳에서 이 샘을 마시면서 쉬어 갔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곳 숭의전 자리에 왕건의 옛집 또는 왕건이 세운 仰巖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물맛을 보니 달다 한바가지 가득 떠서 정신없이 마셨다. 왕건도 개성이나 철원에서 여기까지 왔을 때면 나 만큼 마시지 않았을까
고려 태조 왕건이 1120여년 전 목을 축이던 물을 지금의 후대들이 천백여년을 이어서 목을 축이고 있다.
숭의전 전경이다. 작은 관리소에 중년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을 뿐 대체로 한적하다.
〈仰巖齋〉
우측 작은 돌계단 위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숭의전 오른쪽으로 두 번째에 위치해 있는 건물로 仰巖齋이다.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으로 제례 때 사용하는 향,축,폐 등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典祀廳과 앙암재 사이 담에 작은 문이 있다 전사청으로 가기 위해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典祀廳은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전사청과 숭의전 사이에도 담을 두어 구분되어 있으며 담에는 작은 출입문이 있다.
약간 측면으로 본 숭의전이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仰巖寺가 있던 곳으로 조선 태조6년(1397년)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숭의전 안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와 영정이 정면에 모셔져 있다.
숭의전 좌측에는 移安廳과 陪臣廳이┌ 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안청은 숭의전 청소 및 공사시에 위패를 잠시 묘셔두는 곳이다. 위패를 옮겨 모실 때는 移安祭와 還安祭를올려 告由禮를 행함.
《배신청/陪臣廳》
배신청에 배향된 고려조의 충신은, 이름 자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當代를 이끈 인물로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黑今)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충趙沖,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 16위가 배향되었다.
《이안청/移安廳》
《숭의전/崇義殿》
고려 4임금(태조,현종,문종,원종)의 위패를 모신 正殿이다.
《느티나무》
550여 년을 살아온 이 느티나무는 조선시대 문종 2년에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숭의전은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가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사적 제223호 숭의전」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던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전 왕조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이 개국하자 후대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대사헌 민개의 주청으로 개경 내에 주거하던 모든 고려의 왕족들은 개경에서 쫓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 두 번째 항목에 전 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며 공양왕의 아우 왕우와 두 아들 조와 관에게 경기도의 마전을 주고 귀의군에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개경에서 고려 태조의 위패와 동상을 마전으로 옮긴 후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함으로써 고려조 8대 왕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전 왕조에 대한 예우를 중시했던 태조 이성계가 운명하자 前朝에 대한 신하들의 예우는 점점 소홀해져 갔다. 심지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五室을 제사드리는데 전조의 사당에는 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 임금만 모시게 하고 봄, 가을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52년 문종대에 이르러 허물어 가는 사당을 고쳐 짓고 고려 4임금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함께 사당내에 배향하도록 하니 비로소 역대시조제의 하나인 숭의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숭의전의 자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자주 들려 기도를 드리던 원찰이었던 곳이다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개경에서 철원 궁성으로 가는 길은 180리이다.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마전에 이르면 날이 저물어 하루를 쉬어가야 했다. 임진강변의 잠두봉 중턱에 자리 잡은 앙암사는 개경에서 딱 90리 지경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한적하여 기도처로서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조 왕건은 하루를 쉬어가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종묘를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마전군의 앙암사에 두게 함으로써 전조를 예우한다는 명분과 개경 밖으로 전조의 흔적을 유폐시킴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예방하는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었다.
평화누리길 제11코스 (임진적벽길) 들머리 잠두봉이다. 11코스는 다음 며칠 후 도보로 탐방 할 것을 기약하며 전철1호선 소요산역을 향해 귀가길에 나섰다.
마동로 196번길, 37번 국도로 들어선다.
다시 우측 전곡방향으로 ..
동이교차로이다. 우측은 문산, 좌측은 전곡방향이다. 그럼 좌측으로..
하늘은 푸를 대로 푸르고 날개를 활짝 편 구름은 마음대로 휘젓는데, 들녘에 곡식 여물어가는 소리 아름답다.
아, 그런데 큰 다리가 나타나네. 이름하여 '동이대교'
「동이대교 /東梨大橋」
이제 전곡은 5km거리이다. 시각은 4시40분, 해가 짧아지긴 했지만 땅거미 내리기 전에 소요산역까지 가야겠다. 국도는 자전거길이 따로 없으니 조심 또 조심 ..
의정부까지 49km, 해저물지만 않는다면 의정부 지나 구리까지 가보련만..
황지가 어디 쯤인지 모르지만 황지교차로란다. 또 우측이다 북쪽에서 계속 남쪽으로 가야하니까..
작은 다리를 지나면서 옆을 보니 적벽이 보인다. 酉生이 방아간를 그냥 지나가면 이상한 일이지!
중생대 백악기 9천만년~1억만년 전에 한반도에서도 화산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단다. 당시 철원분지를 형성시킨 지각변동으로 한탄강이 영평천과 만난 뒤 바로 크게 휘도는 강가에 화산분출로 우뚝 솟아 오른 좌상바위(일명 자살바위)가 형성되었다. 또한 하천과 강물은 강변을 깎고 깎아 적벽이란 작품을 만들어냈겠지
판박이 같은 두 사진 중 하나는 좀 밝고, 하나는 좀 어둡고, 어느 사진이 더 보기 좋을까 ..
옛적의 성벽을 연상시킨다.
다리에서 사진을 찍다가 잠시 가야할 길도 담았다. 저 차들은 갈 길을 가겠지만, 난 구름따라 간다네.
건너편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궁금한 건 못 참지, 차가 안 올 때 건너 편 쪽으로 뛰어가 그 모습을 담았는데 적벽은 볼 일 없고 유려한 물길과 풍경은 쓸 만 하네.
당포성에서 4시23분에 출발하여 달리고 달려 전곡 구석기사거리에 이르렀다. 시각은 오후 5시07분, 소요시간은 44분이다. 소요산역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겠지..
누군가 이 게시물을 보고 초행에 나처럼 이 코스를 돌 생각이 들면 참고가 될까 싶어 사거리마다 담았다. 나는 동두천 방향 3번 국도로 직진이다.
이제 한탄강을 건너가려는 참이다. 漢灘江은 한자 풀이로 물발이 빠르게 흐르는 여울이다. 이곳은 견지질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우측 저 아래 물길이 낮은 여울은 1971년 제대하고 몇 번 찾아 왔던 추억이 있다.
공평하게 좌측 철길도 사진으로 담았다.
한 미군병사 때문에 발견된 구석기유적, 그 병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지낼까? 그도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는데..
충분한 감사의 표시는 전했을까? 고마움에 이런 생각도 가진다.
초성리 학담, 40년 전에 기차를 타고 이곳에 지나갈 때 보면 달랑 집 두어 채 있던 곳인데.. 40년 세월이 이 거리에 묻혔네.
주절거리며 오다보니 소요산역일세.
시각은 오후5시50분, 문산역에서 오전 8시15분에 출발하여 소요산까지 9시간35분 총거리 83.58km.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음을 이 세상 모든 것에 고마움을 가집니다. 고맙습니다.
평화누리길 제10코스(고랑포길) 장남교-사미천징검다리-숭의전 16km. 탐방을 마칩니다. (문산역에서 자전거를 이용하여 소요산역까지 총 83.58km.)
2018년 9월 26일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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