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제8코스(반구정길)》
평화누리길 제8코스 '반구정길'은 종착지 율곡습지공원까지 거리도 적당하고 주변에 펼쳐지는 풍경도 자애로운 선비의 심성을 보는 듯 온화하고 안정감에 젖을 만큼 평화로운 들녘과 적당한 구릉의 야산과 광활하게 펼쳐진 벌판, 황금빛 물결치는 초평도를 싸안고 돌아가는 시리도록 푸른 임진강 물결이 풀어내는 수많은 아린 사연과 바라보면 한걸음에 달려가 볼 수 있을 북녘의 기정동 마을과 개성공단이 눈 안에 들어온다. 또 한 화석정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과 李珥 선생의 선견과 흔적도 빼놓을 수 없는 요점이다. 스스로 돌아볼 것도 없이 걷는 동안 도심에 찌든 심신이 나도 모르게 치유되는 넉넉한 품성을 지닌 여인의 품속 같은 길이다.
반구정-()-임진강역-()-장산마을회관-()-
「청정문/淸政門」(신삼문/神三門)
이곳은 황희 선생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厖村影堂, 慶慕齋, 伴鷗亭, 仰止臺가 있다.
문이 3개 달린 이 문은 神門이라고 한다. 귀신과 사람이 다니는 문을 구분한 것이다. 가운데 큰 문은 神이 다니는 문이고 양 편에 작은 문은 人門 즉 사람이 다니는 문이다. 신문은 평상시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나 봄.가을 祭享이나 朔望 때 열어서 獻官만 출입한다. 좌우 인문은 일반 제관은 東門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西門으로 나온다. 또한 人門은 참배객을 위해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 황희선생 영당/黃喜先生影堂 」
이 영당은 솟을 三門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初翼工樣式의 맞배지붕에 단청을 하였다. 6.25 사변으로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황희 선생 영당지 / 黃喜先生影堂址」
조선 초기의 명재상으로 후세에까지 그 이름을 빛낸 방촌 황희(尨村 黃喜1363-1452)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황희는 고려 우왕 2년(1376년) 蔭職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가 공양왕 1년(138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태조1년(1392년)杜門洞에 은거하였으나, 태조3년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에 의해 조선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종13년(1431년) 영의정이 되어 18년간 세종과 함께 국정을 다스려 각종 문물제도의 정비에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인물로 淸白吏의 귀감이 되었다.
「반구정/伴鷗亭」
청백리 정승 방촌 황희 선생이 정계 은퇴 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라 하여 伴鷗亭이라 했겠다. 기묘한 자태의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기암절벽 아래 푸른 임진강 물이 굽이쳐 흐르고 갈매기 짝을 이루는 반구정의 풍경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오늘 와보니 아쉽게도 소나무 보다 다른 나무들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반구정은 보수 중이었다.
伴鷗亭 우측에 나란히 있는 정자 '仰止臺이다. 원래 이 자리에 반구대가 있었다고 한다. 1915년 반구대를 옆으로 옮겨 지으면서 앙지대를 세웠다. 앙지대 상량문에 '오직 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 이는 청백리 방촌 선생의 인격과 기품을 담은 글이겠지만 仰止臺라는 이름은 詩經의 好仁이라는 뜻에서 취했다.
앙지대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해를 안고 풍경을 담으려니 밝고 맑은 사진을 담지 못했다.
내가 평화누리길을 탐방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인 철책선 철조망에 만감이 엉긴다.
앙지대에서 바라본 반구정은 부분적으로 보수공사 중이다.
「景慕齋」
평상시에는 예절과 규범을 강의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반구정을 돌아보고 제8코스 출발점을 거쳐 임진강역에 이르렀다.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
옆 둑은 통일로 이다 평화누리길은 대체적으로 통일로 가까운 농로나 지방도로를 활용하고 있다.
짙은 녹색, 파란하늘에 물든 눈을 빛깔 고운 코스모스 꽃이 치유의 미소를 보냅니다.
보행도로와 자전거도로가 겹쳐지는 곳이 많고 모두 리본과 푯말로 되어 있어 보행코스를 가는지 자전거코스로 가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호젓하고 멋진 이 길도 리본만 따라가면서도 제대로 가는지 모르겠다.
녹색 들녘은 지금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 중이다.
두개의 이정표 나는 木製 이정표와 리본만 따라가고 있는 중인데 남들이 다 본 적벽을 나는 볼 수가 없다. 어찌 된 것일까? 종착점 율곡습지공원은 7km 앞인데..
녹색이 금빛으로 탈바꿈 하는 아름다운 조화 속으로 흰 도로가 중앙을 가르며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장산로197번길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지름길인데 평화누리길 이정표는 우측을 가리키고 리본도 우측길에서 나부낀다. 나도 우측으로 접어 들었다.
평화누리길 약도에 나와 있는 장산1리 마을회관이다. 길치가 신통하게 코스대로 잘 가고 있다. 다음은 장산전망대 일 것이다.
흰 길은 白蛇처럼 꾸불꾸불 산자락 밑으로 잘도 기어 올라간다.
억새도 피어오르는 뭉게구름따라 꽃을 피워내고 기러기를 부르고 있다.
임진리와 장산리로 갈리는 ┬형 삼거리다. 푯말의 장산리는 내가 지나온 장산1리마을회관으로 바로 가는 지름길이다.
평화누리길은 지름길은 외면하고 한적하고 돌아가는 길로 흰 뱀처럼 꾸불꾸불 돌아다닌다.
장산1리마을회관을 거쳐 방금 내가 올라온 길이다.
┬형 길에서 봉우리 정상 장산전망대로 가는 호젓하다 못해 적적한 오르막길이다. 능선에 올라와 돌아본 모습니다.
등성이를 향해 가파른 길을 오르다 옆을 보니 陣地가 있고 전방이 확 트였다. 저기서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
나도 陣地에서 앞을 바라보니 임진강 건너 산봉우리만 보인다.
다시 등성이를 향해 발길을 옮기려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본다. 옛날 무학여고 앞에서 금호동고개를 오르던 언덕만큼은 되겠다.
50m 정도 더 올라서서야 등성이에 도착했다 길목에 이정표는 좌측 능선을 가리키고 있다.
좌측 둔덕같은 언덕을 올라서니 갈림길이다 푯말에 우측은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은 장산전망대로 가는 길이란다. 전망대는 100m 앞이다.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발길을 이끈다.
아,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장산전망대는 어떤 시설물도 없는 앞이 탁 트인 자연 그대로의 능선이다 . 삼각형의 섬 풀들섬(草坪島)을 비롯하여 임진강 너머 연천과 그 너머 북한 지역이 파노라마를 이룬다.
좌로부터,1장군봉-2천덕산-3덕물산-4진봉산-5도라산-6통일대교-7개성공단-8개성시외곽-9기정동마을-10송악산-11대성동마을-12극락봉-13덕진산성-14백학산-15마식령산맥줄기-16초평도-17해마루촌 등 줄줄이 엮여 있다.
《위 ↑사진과 대조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장군봉-천덕산-덕물산-진봉산-도라산-통일대교-개성공단-개성시외곽-기정동마을-송악산-대성동마을-극락봉-덕진산성-백학산-마식령산맥줄기-초평도-해마루촌 등 줄줄이 엮여 있다.
벼가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녘 앞 가늘게 보이는 흰 모래밭을 두르고 있는 섬이 비무장지대 초평도입니다.
장군봉-천덕산-덕물산-진봉산-도라산-통일대교-개성공단-개성시외곽-기정동마을-송악산-대성동마을-극락봉-덕진산성-백학산-마식령산맥줄기-초평도-해마루촌
장산전망대로 올라갔던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황토에 잔돌이 섞인 내리막입니다.
500m 정도 내려가니 바로 임진나루마을이다.
마을을 돌아나가니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던 임진강변이다.
《동파나루》
화석정 임진나루에서 강건너 보이는 곳이 동파나루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사나이 가슴속에 恨이 서린다.
임진나루 구름들은 북녘을 넘어가는데 나그네 이 발길은 갈 수가 없네~~
얕은 식견과 허접한 감성으로는 이 아름다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바라만 볼 뿐...
펼쳐놓은 듯한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네.
이런 경관 앞에서야 자전거를 타고 갈 수는 없지, 주책없는 감성을 추스르고 화석정을 향해 걸어간다.
『화석정/花石亭』
임진강가에 세워져 있던 정자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다.
원래 고려 말의 문신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유지가 있던 곳이었는데 세종 25년(1443년) 율곡의 5代祖인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건립하였다. 성종 9년(1478년)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한 것으로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지금은 고즈넉한 화석정에 先見之明과 불길로 타오르던 충심이 있었으니
율곡 이이 나이 29세에 병조판서로 지낼 때 그는 10년 안에 倭가 침범할 것이라고 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나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 화석정에 隱居하며 틈틈이 화석정 기둥과 마루바닥에 기름칠을 하였다. 그러다 세상을 떠나기 전 율곡은 제자들에게 화석정에 수시로 기름칠을 잘 해 두면 8년 후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봉투하나를 백사 이항복에게 전하며 위급할 시 뜯어 보라고 당부도 한다. 그 후 정확히 8년 후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났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길에 오른다. 4월 그믐밤 선조가 임진나루에 이르렀을 때 장맛비와 칠흑 같은 어둠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어 강을 건너가는 일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 때 선조를 護從하던 도승지 이항복과 그의 제자들은 율곡이 8년 전에 유언했던 말이 생각 났고 이항복은 봉투를 열고 율곡의 글을 보았다.
"화석정에 불을 질러라" 수년동안 기름을 먹인 화석정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관솔처럼 불타오르며 임진나루 일대를 대낮처럼 훤히 밝혀 선조와 일행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593년 선조는 환도하면서 이 강에 당도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순국한 병사들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 강변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놓고 위령제를 지내며 의주파천 당시 달빛조차 희미한 4월 그뭄밤 폭풍우 속에서 노심초사 고생 끝에 임진나루를 건너게 된 쓰라린 아픔을 기억하고, 이 강을 지키고자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용감한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가운데 선조가 통곡하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하였다고 해서 神智江을 臨津江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화석정에서 내려다본 서편 풍경
화석정에서 내려다본 동편 풍경
「율곡 이이의 팔세부시/栗谷 李珥 八歲賦詩」
임정추이만 소객의무궁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箱楓向日紅
숲속 정자엔 가을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 다함이 없도다. 저 멀리 강물은 하늘 맞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타는 듯 붉도다.
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 색홍하처거 성단모운중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寒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먼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아,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에 묻히네. (이 詩는 栗谷 李珥 先生이 八歲 때 지은 詩라고 한다.)
『來蘇亭에서 바라본 임진강 팔경』
第1景 '花石亭春'(화석정의 봄)
"화석정전화사신 독래음상유한인 유방거세무상식 가석선생거후춘"
"花石亭前花事新 獨來吟賞有閒人 幽旁擧世無相識 可惜先生去後春"
"화석정에 새로 핀 꽃을 홀로 감상하는 나그네, 두루 그윽함을 온 세상이 알지 못하니 탄식한들 선생이 가신 뒤라네."
(나그네가 화석정에 만발한 꽃을 보며 율곡선생의 큰 뜻을 되새기는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第2景, 場岩垂釣 (장암의 낚시)
"수조춘만백척대 득어장욕고심배 방인불해오심사 만도동강물색래"
"垂釣春灣百尺臺 得魚將欲沽深盃 傍人不解吾心事 慢道桐江物色來"
"백 척 난간에서 봄 강에 낚시 드리고 고기를 낚는다면 크게 술 한번 사려 했는데, 곁에 있는 사람 내 마음 몰라주고 도를 떠난 동강에 물색만 오네."
(場岩은 '마당바위'로 지금의 문산읍 장산리 임진강변 절벽위에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그 넓이가 매우 넓어 장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경원선 철로를 가설하면서 마당바위를 모두 쪼개갔다고 하며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第3景, 松巖淸雲 (송암에 맑은 구름)
"하처염운점점부 원산여화흡영두 횡차망안지다의 원야소인조고수"
"何處㷋雲點點浮 遠山如畵恰盈頭 橫遮望眼知多意 怨惹騷人弔古愁"
"정처 없는 뭉게구름 점점 떠오르는 그림 같은 먼산이 숱 없는 머리 같네. 비스듬히 바라보니 생각도 많은 듯 옛 시름에 이르는 것을 소란하게 할까 두렵네."
(송암은 특정 地名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며 래소정 인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려져 있던 곳을 말한 것으로 추측된다.)
第4景,
長浦細雨 (장포의 가량비)
"장주세우청비비 백로횡분초색비 어자불수풍랑기 의선요환녹사의"
"長州細雨晴霏霏 白鷺橫分草色飛 漁子不愁風浪起 倚船遙喚綠蓑衣"
"장개의 더운 비 맑았다 흐렸다 백로가 가로 날으니 풀빛이 나는 듯 어부는 풍랑을 근심치 않고 배에 기대어 녹사의를 부르네."
(長浦 긴 포구를 말하는데 파평면 두포리 구간의 임진강 개펄로 여겨지며 지명유래를 보면 두포리 앞 임진강을 '장개' 또는 장깨라 하여 긴 개펄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성담수 선생이 몽구정을 세웠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녹사의는 도롱이라고도 부르는 짚이나 풀로 만든 옛 雨衣이다. )
第5景 東坡觀月(동파역의 달)
"동파고역월당루 처처인가염상구 일점규성간불원 영소응인광한유"
"東坡古驛月當樓 處處人家簾上鉤 一點奎星看不遠 令宵應人廣漢遊"
"동파역루에 달이 비치니 집집마다 처마 위 낚시대로다 한 점 奎星은 멀리 뵈지 않거늘 오늘밤엔 들려 넓은 강을 노닐리"
(동파는 현재 임진강 북안의 진동면 동파리를 말한다. 동파리는 조선시대 임진강 南岸의 임진나루 건너 北岸의 동파나루에 닿는 곳인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갈 때에도 임진나루를 건너 동파나루에 당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詩에서 동파역이란 동파나루인근에 위치해 있던 驛院을 말한다.)
第6景, 赤壁泛舟 (적벽의 뱃놀이)
"적벽기두갱범주 소선거후상풍류 파잔월백개량야 불필황강임술추"
"赤壁磯頭更泛舟 蘇仙去後尙風流 波殘月白皆良夜 不必黃岡壬戌秋"
"적벽 머리에 다시 배 띄웠나니 蘇仙 가신 후 풍류는 남았도다. 부서지는 파도 밝은 달 모두 좋은 밤, 황강이 필요 없는 임술년 가을일세."
(黃岡-중국 호북성 황강현, 蘇軾이 號를 동파거사라 하고 황강에 居室을 마련하였다고 함. 赤壁은 임진강 전 구간에 걸쳐 현무암 절벽을 말하며 여기에서 말하는 적벽은 아마도 화석정 아래 펼쳐진 율곡리 적벽구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第7景, 桐園暮雪 (동원의 저녁눈)
"동원모설백애애 망이평파제색개 입야강비종불엄 섬계의유자유래"
"桐園暮雪白皚皚 望裏平坡齊色開 入夜江扉終不掩 剡溪疑有子猷來"
"동원의 저물녘 눈이 희디흰데 언덕위 바라보니 날씨 개어가네. 밤이 되어도 강가 사릿문 열렸나니 섬계에서 자유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리."
(剡溪-중국 절강성 曺娥江의 상류, 진나라 왕자 猷가 눈 오는 밤에 載逵를 방문한 고사에서 유래.)
이 詩에서 말하는 桐園은 '오동나무 정원'. 현재 장산리 마을에 느티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곳을 동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詩에서 말하는 동원은 임진나루를 건너 동파리에 주막거리가 있었는데 주막거리 주변에 오동나무가 많았다 하며 이 곳의 자연마을 名이 桐子院洞이라 유래되고 있어 래소정에서 강 건너 보이는 이 곳의 풍광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第8景. 津寺曉鐘(진사의 새벽종)
"진두사격백설층 반야오종유노승 불시고소성외박 한천낙월우어등"
"津頭寺隔白雪層 半夜嗚鍾有老僧 不是姑蘇城外泊 寒天落月又漁燈"
"나루머리에 절이 서니 흰 구름이 층이 되고, 밤중에 종 올리매 노승이 있음이라. 내 고서성 밖에 머문 것 아닌데, 한천에 지는 달과 어등을 보누나."
(姑蘇城-중국 강소현 고소산에 있는 城, 津寺는 임진나루 인근에 있던 사찰로 보여지는데 문헌 기록에 임진나루 인근인 율곡리 산중턱에 寺址 기록이 있어 이 사찰이 아닌가 싶다.)
栗谷 李珥와 가깝게 지내던 松江 鄭澈이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산이 서로 등졌지만, 맥은 본래 한가지요. 물이 따로 흐르지만, 근원은 하나일세.
화석이라 옛 정자에 사람은 아니 뵈니 석양이라 돌아가는 길 혼이 거듭 녹아나네."
이제 화석정을 뒤로 하고 떠나려는데 일단의 미시즈들께서 들어 닥친다 앞 매점은 신사임당 친정 후손이 운영하고 있다.
이곳 화석정의 나무들은 족히 500년이 넘는 보호수들이다. 奇奇妙妙한 모습에서 괴석을 연상시킨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 사이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농어촌공사 장산양수장 앞은 정화시설과 수생식물이 밀집해 있는 습지와 못이 있다.
길은 두 길 하나는 철책선으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는 코스모스축제 마당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행사장 쪽으로 가라는 우회표시판이 있다. 나는 현물을 확인하고 물건을 구입하는 아날로그 세대이다. 더구나 철조망을 다 제거한다는 세상 아닌가? 철조망길을 갈 수 없는지 확인하고 우회를 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철조망에 다가서보니 자물쇠가 제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포에는 1코스에서 3코스까지 있는데 그 쪽은 탐방 내내 철책선을 옆에 달고 다니다 시피 했는데 이쪽은 철책선 개방을 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북쪽은 아무런 변화도 조치도 없는데, 개방하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율곡습지공원에는 파평면 주최로 코스모스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늪지 가운데 제법 큰 묘봉같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설마 묘는 아니겠지..
코스모스는 꽃보다는 꽃망울이 더 많이 보인다. 그래서 일까 꽃밭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설픈 공룡 두 마리만 우두커니 서 있다.
그래도 무대에는 연예인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밤나무 아래 그늘진 객석에는 시골행사 치고는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객석 뒤 임시천막식당에는 메뉴가 화려하다. 이곳 부녀회원들이 직접 이 고장 한우를 홍보차원에서 한우로 장만한 음식을 팔고 있다. 시각을 보니 오후 1시34분 아침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으니 망서리고 말고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한우육회, 한우육개장, 한우갈비탕 모두 1만원이다. 갈비탕을 주문했다. 찬으로는 김치, 총각김치, 청포묵무침 그리고 고춧잎나물과 온전한 생수 한 병이다.
비록 천막이지만, 시골 주부들의 토속적 솜씨로 담근 깍뚜기와 총각김치는 보기만 했는데 깔끔하고 맛깔스러워 군침이 돈다. 갈비탕이 나오기도 전에 맛을 봤다가 그만 다 먹어 치웠네. 그야말로 견줄 대 없이 신선하고 짜지 않고 입에 침이 돌만큼 새콤하고 먹기 좋게 숙성되었고 씹히는 촉감이 그야말로 신혼 초야 새색시의 착 감기는 달콤한 맛이다. 드디어 한우갈비탕을 들고 온 곱게 차린 젊고 예쁜 여인이 텅 빈 찬그릇을 보고는 '어머! 시장하셨나 봐요? 얼른 가져다 드릴게요.'다. 갈비탕 향기를 맡았을 뿐인데 오장이 아우성에 춤을 추고 한숨과 함께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아,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우라는 것이여! 다. 이어 국물 한 수저를 떠 입에 넣었더니 한우 특유의 고소함이랄까 아무튼 그 어떤 수사로도 표현 못할 맛에 혀가 자지러진다. 갈비 한대를 손으로 들고 돌려가며 뜯어서 씹는데 어찌 또 이리 살은 부드럽단 말인가! 뼈에 붙어 있던 육질은 적당히 씹히는 그 맛 또한 쇠고기의 으뜸인 역시 한우다. 한 그릇을 먹고 더 먹고 싶은데 배가 만삭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거리길 반 시각이 흘러서야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참 이만한 福도 드믈 것이다. 어찌 그 뿐인가! 간들거리는 코스모스 곱게 핀 들판을 바라보며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귀 즐겁고 꽃밭에 젊은 여인들 꽃인지 꽃이 여인인지 아롱지니 눈 황홀하고 입이 행복했나니...
꽃보다 한우갈비탕에 넋을 놓았던 코스모스 축제장을 지나 즐거운 기분으로 반구정 코스 종착점으로 간다.
태극허수아비야 반갑다! 이곳 들녘뿐만 아니라 북녘에서도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너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꼭 그리 되겠지?
돌아서 나오는 길에는 축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허수아비들이 도열해서 정중히 맞이하고 있었다.
철거라니! 이 철책은 자유민주주의적으로 통일이 되어도 이대로 존치해야할 가치가 있다.
이제 평화누리길 제8코스 반구정길을 나서서 다시 9코스 율곡길로 발길을 옮긴다. 고맙습니다.
"평화누리길 제9코스 (율곡길)
2018년9월22일(토요일) 오후1시53분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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